[시편 11:1-7]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편도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다윗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 이 시를 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전쟁 중에나 또는 사울이나 대적의 공격을 피해서 다닐 때에 지은 시가 대부분입니다. 평안한 상황에서 읊은 시가 극히 적습니다.
피난처 되시는 주님
[시편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여기서도 보면 "내가"는 다윗 자신을 말하고 "너희"는 다윗의 주변에서 다윗을 협조한다고 하면서도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는 무리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과 곤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분명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장로들에게 잡히고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그 말은 바로 사탄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복음 16:23)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고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을 때에, 피할 곳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새는 공격을 받거나 쫓길 때 숲속으로 도망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했습니까?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는 찬송을 가끔 부릅니다만 하나님께 피해야 하는데 왜 새처럼 숲속으로 피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산과 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산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큰 성들은 전부 산 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해발 800m쯤 되는 산 위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이란 동네도 고원지대에 건설되었습니다. 갈멜산 위에도 도시가 건설되어 있고, 많은 도시들이 산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예루살렘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산
왜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는가 생각해 봅시다.
[역대하 21:11-15]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케 하였으므로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와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기에 나오는 여호람 왕은 유다 왕인데 여러 산에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으로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시온산이라는 특별한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시온산은一다윗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지만一바로 하나님의 성소가 들어설 장소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산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그 산 말고 다른 산으로 영혼을 피하라는 말은 바로 우상을 섬기며 그 방향으로 도망을 치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새는 대체적으로 사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 "길가에 뿌리운 씨는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고 한 말씀에서 "새"는 사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어려움을 겪고, 곤란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에 육신의 생각에 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어려움을 피하고 핍박이나 곤경을 피해서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네 산"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산을 의미합니다.
[시편 68:14-16]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의 북쪽에 헐몬산을 기점으로 해서 시리아와 국경을 형성하고 있는 골란 고원 지대를 내려오는 산을 바산의 산이라 부릅니다. 이방의 세력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고 삼키려는 것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시편 68편 내용 전체는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앞의 11절에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시편 68:11)는 말씀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 복음의 소식을 이 세상에 공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0]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여기에서의 산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는 어떤 난관을 뜻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겨날 때에 그것이 큰 산처럼 앞을 가로막아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이사야 14:13-1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인 천사장 루시퍼를 향해서 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난, 시련,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 육신은 언제나 사람이 생각하는 산으로 도망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 그 산은 언제나 사탄의 세력이 있는 곳이며 사람이 항상 높이 바라보는 곳입니다.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다하고, 최고의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 항상 사탄이 제시하는 높은 산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게 아니고, 자기 방법대로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힘을 써서 연구하면서 피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 피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수단과 방법으로 닥쳐오는 어려움을 피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이 아니고 내가 만든 산, 사탄이 주는 산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은 높은 곳을 향해서 가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옆에서 권면하는 육신적인 생각, 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항상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에서 권장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 바른 자를 쏘는 사탄의 화살
[시편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품 안으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육신의 좋은 방법대로 새처럼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삶의 방법을 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탄에게 잡혀 먹힙니다. 사탄은 화살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바른 자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물론 현재 육신적으로는 죄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성경의 표준은 영혼을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마음이 바른 자, 정직한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보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은 언제나 죄를 향해서 화살을 겨냥하느냐 하면 죄를 향해서 겨냥을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때에 마음이 주님 앞에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 될 텐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일을 당하면 당황하고 어떻게 할까 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연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너의 방패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막아 주신다는 것, 즉 하나님이 막아 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도와 주시는 말씀인데 , 이 믿음의 생활은 인간의 노력과는 반대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주셨음을 믿었다는 것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애쓰고 선하게 살려고 하던 것이 중단되면서 믿어져버렸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고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믿어진 결과 생명이 왔으면 자연히 믿음이 앞서가고 행위는 뒤에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행위를 앞세우고 믿음이 뒤에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행위를 앞세우고 믿음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도 믿음이 앞서가면 생활 역시 그 뒤를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즉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환난이나 곤경에 처했을 때, 과연 믿음이 앞서느냐, 아니면 그 믿음보다 머리로 연구하고 수완을 쓰고 하는 방법이 앞서느냐를 생각해 보면 대다수가 자기 방법이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방법이 앞서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나중에 안되면 실망을 하고 그 후에 믿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안 될 때에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실패해버립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주님께 피하지 못하고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산은 자기 힘으로 가장 좋은 위대한 방법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탄의 화살을 맞습니다. 그것은 피난처 안에 있지 않고 위험한 지경에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민수기 13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갔을 때에 열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열 사람의 보고는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고 참 아름다운 땅임에 틀림없는데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얼마나 센지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와 마찬가지라고 떨면서 보고를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들고 일어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타나서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가보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땅은 무척 아름답고 비옥하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그 땅을 점령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땅이니까 넉넉히 차지할 수 있으니 그곳으로 올라가자라고 했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똑같이 그 땅을 탐지하고 왔는데 왜 의견이 다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고 다른 열 사람은 믿음이 없이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사람과 믿음이 없이 본 사람의 견해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믿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사도 바울의 마음의 눈에는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은 환난과 시련과 여러가지 어려움이지만 거기에 반비례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광스럽고 굉장히 큰 축복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무슨 약속에 근거해서 삽니까? 무슨 약속이 있습니까? 천당 가는 약속이다 라고 할지 모르지만 천당가는 약속은 구원받은 순간에 이미 성립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당에 갑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고 한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무작정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갔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가야 할 목적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 가나안 땅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고 갔던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고 또 이스라엘 전체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하셨는데 메뚜기같이 그들에게 잡아먹히고 망하는 일을 당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 앞에 자기가 메뚜기같이 보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약속에 근거해서 믿을 때에 그 믿음 자체가 주님 앞에 피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주님께 피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믿음 없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시편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마태복음 7:22-27]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기에서 반석은 주님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것이 왜 불법이냐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통일로 하는 신비주의적인 현상으로서 성경대로 나타나는 이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터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이 터입니다. 시편 11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터가 무너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어려움과 시련과 핍박이 있을 때 마음에 주님을 의지하는 확실한 믿음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자체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의롭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그러니까 '터가 무너지면'이라는 말과 '의인이 없다'라는 말 뜻이 같습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의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편에서는 심각한 환난을 당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극한 시련에 봉착했을 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 앞으로 피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은 화살에 맞는 사람입니다. 위험에 빠지는 사람, 잡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 실의에 차고 낙망하는 사람을 말하고, 그 상태에 들어가면 의인으로서는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어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보좌
[시편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성전 안에는 첫째 대문이 있고 제단을 거쳐서 그 다음 성소로 들어가는 성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소의 휘장을 거쳐서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 안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히브리서 9:24)라는 말씀에서 하늘이라는 곳은 어디를 가리킵니까?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했는데 그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이고 예수님이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는 곳입니다.
양의 피를 가지고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이해 못합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보면 지구와 상대해서 천체를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별들의 세계, 태양계도 하늘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하늘을 물리적으로 우주보다 더 높은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하늘은 영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몸이 감람산에서 틀림없이 올라가신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다만 우리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니까 그런 세계가 가리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금방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할 수 있는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도 역시 나중에 변화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법궤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말씀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 육신으로 다시 살아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이 살아나셨습니다. 여기 "살리셨고"라는 말은 우리 안의 영혼이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우리의 육신도 부활시킬 것은 약속이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 영혼이 부활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에 앉아있습니다. 함께 하늘에 앉혔다라는 것은 우리의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문제는 육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육신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앉혔다고 했지만 분명히 육신은 이 땅 위에 앉아 있고, 또 현재는 여기 있습니다. 내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영의 상태, 바로 거듭난 영은 주님의 영이고 주님의 영과 내 영이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늘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우리 안에 있고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데가 성전입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면 교회가 성전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 교회가 무엇인지 자기가 과연 성전 안에 속해있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라는 말씀에서 "너희가"에 해당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되고 현재의 나는 당연히 '너희 '라는 말 속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지금 없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전체 교회 앞에 대표로 나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이 세상 교회가 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갑니다.
성전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
"너희"라고 할 때에는 분명히 인칭대명사로서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라는 말은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냥 읽지 말고 억양을 붙여서 읽어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왜 모르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구원받은 사람, 구원받고 교제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깨닫는다 안 깨닫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우리 안에 지성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성소가 없으면 성전이 아닙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를 법궤라고 하는데 그 법궤가 지성소의 중심입니다. 법궤 위에 시은좌가 있는데 그 시은좌는 은혜를 베푸는 곳입니다. 그 시은좌 위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내려다보는 광경이 있는데 거기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보좌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보좌는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는데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 뜻이 사랑입니다. 십계명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5-40)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2년이 걸려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시내산 밑에 왔을 때에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를 간수하는 곳이 법궤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그 성전은 회막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회막성전이 바로 법궤를 가장 중심에 모시는 성전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다 구원받은 사람의 표준으로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간에 서로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의미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다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성전이고, 법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몸으로 완성시켰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그림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동시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계명이 완성된 예수님은 산 돌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완성시키신 산 돌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머릿돌이 되시고 예수님이 성전의 가장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연결이 되고 계속 연결이 되면서 집이 지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구원을 받을 때에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주님의 보좌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했습니다. 신약의 계명은 참 사랑하는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네 것 내 것 없이 살 수 있는 참 사랑의 시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견본입니다.
교회는 그 사랑의 계명이 있는 지성소로서 그 법궤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교제를 가지는 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는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확실히 구원받았으면 지어져 있는 이 성전에 산 돌로서 하나하나 쌓여져 있습니다. "너희가 성전인 것을 왜 모르느냐?"라는 말씀처럼 여기에 대해서 확실히 믿고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또 교회가 이루어지도록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참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실수를 해서 죄를 짓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서로 마음이 틀어져서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네 파가 생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 문제에 대해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켜서 분쟁을 일으킨다든지 갈라선다든지 하면 그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죄 가운데 제일 큰 죄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잠언 18:1)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 피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은 교회를 알고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앉아계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은 성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일 안전한 곳은 머리 되신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8-19]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고 했습니다.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자라는데, 머리 안에 있는 뇌가 중심입니다. 뇌에 연결되어 있는 척추 안에 말초신경까지 모든 신경조직이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 마디, 마디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해서 자랍니다. 이것이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지체들이 서로 연결해서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리에게서 벗어나 특별히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머리를 붙들지 않는 죄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주신 안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피하는 길은 교회 안에 와서 주님 앞에 피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벗어나면 사망의 화살을 맞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 우리가 영적으로는 하늘에 있고 교회가 바로 주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제 안에서 말씀이 열려 나오는 것이고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 성령이 형성된 곳이 아니면 말씀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가 함께 교제하고 서로 봉사하고 살고 있는 여기가 하늘이고 주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에 생명을 걸고 이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의인을 끝까지 지켜보시는 하나님
[시편 11:5-6]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보십니다. 하나는 의인이고 하나는 악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 안 받은 사람보다 더 비천하고 어려움이 많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세계에도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보시는 것 같지만 다 보시는데, 둘을 보시는 관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의인인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의인은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도 그 괴로움 속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서 계속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계속 지켜보시고 주목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즉각적으로 그것을 피하게 한다든지 그것을 면하게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육신은 부서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니까 자녀를 다루는 식으로 지켜보시면서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모르시거나 묵묵히 보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난관에 부딪쳐도 육신이 부서지는 그 훈련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시면서 기다리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서 훈련하시는 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9]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의인을 핍박하고 환난에 빠뜨리는 자들은 결국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의인과 악인을 유심히 관찰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시편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무엇이 의로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과 시련과 곤란 속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실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가는 것, 그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의인의 일은 믿음으로 사는 일인데 어려움을 당해도, 어떤 핍박을 당해도, 아무리 무서운 시험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꾸준히 살아가는 것이 의인으로서 사는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주님께 피해서 살아가는 말씀이 적힌 이 시편 11편을 믿음장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1편도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다윗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 이 시를 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전쟁 중에나 또는 사울이나 대적의 공격을 피해서 다닐 때에 지은 시가 대부분입니다. 평안한 상황에서 읊은 시가 극히 적습니다.
피난처 되시는 주님
여기서도 보면 "내가"는 다윗 자신을 말하고 "너희"는 다윗의 주변에서 다윗을 협조한다고 하면서도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는 무리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과 곤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분명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장로들에게 잡히고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그 말은 바로 사탄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복음 16:23)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고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을 때에, 피할 곳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새는 공격을 받거나 쫓길 때 숲속으로 도망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했습니까?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는 찬송을 가끔 부릅니다만 하나님께 피해야 하는데 왜 새처럼 숲속으로 피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산과 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산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큰 성들은 전부 산 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해발 800m쯤 되는 산 위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이란 동네도 고원지대에 건설되었습니다. 갈멜산 위에도 도시가 건설되어 있고, 많은 도시들이 산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예루살렘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산
왜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는가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람 왕은 유다 왕인데 여러 산에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으로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시온산이라는 특별한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시온산은一다윗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지만一바로 하나님의 성소가 들어설 장소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산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그 산 말고 다른 산으로 영혼을 피하라는 말은 바로 우상을 섬기며 그 방향으로 도망을 치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새는 대체적으로 사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 "길가에 뿌리운 씨는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고 한 말씀에서 "새"는 사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어려움을 겪고, 곤란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에 육신의 생각에 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어려움을 피하고 핍박이나 곤경을 피해서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네 산"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산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 헐몬산을 기점으로 해서 시리아와 국경을 형성하고 있는 골란 고원 지대를 내려오는 산을 바산의 산이라 부릅니다. 이방의 세력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고 삼키려는 것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시편 68편 내용 전체는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앞의 11절에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시편 68:11)는 말씀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 복음의 소식을 이 세상에 공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산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는 어떤 난관을 뜻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겨날 때에 그것이 큰 산처럼 앞을 가로막아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이사야 14:13-1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인 천사장 루시퍼를 향해서 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난, 시련,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 육신은 언제나 사람이 생각하는 산으로 도망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 그 산은 언제나 사탄의 세력이 있는 곳이며 사람이 항상 높이 바라보는 곳입니다.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다하고, 최고의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 항상 사탄이 제시하는 높은 산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게 아니고, 자기 방법대로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힘을 써서 연구하면서 피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 피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수단과 방법으로 닥쳐오는 어려움을 피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이 아니고 내가 만든 산, 사탄이 주는 산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은 높은 곳을 향해서 가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옆에서 권면하는 육신적인 생각, 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항상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에서 권장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 바른 자를 쏘는 사탄의 화살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품 안으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육신의 좋은 방법대로 새처럼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삶의 방법을 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탄에게 잡혀 먹힙니다. 사탄은 화살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바른 자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물론 현재 육신적으로는 죄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성경의 표준은 영혼을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마음이 바른 자, 정직한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보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은 언제나 죄를 향해서 화살을 겨냥하느냐 하면 죄를 향해서 겨냥을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때에 마음이 주님 앞에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 될 텐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일을 당하면 당황하고 어떻게 할까 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연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너의 방패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막아 주신다는 것, 즉 하나님이 막아 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도와 주시는 말씀인데 , 이 믿음의 생활은 인간의 노력과는 반대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주셨음을 믿었다는 것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애쓰고 선하게 살려고 하던 것이 중단되면서 믿어져버렸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고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믿어진 결과 생명이 왔으면 자연히 믿음이 앞서가고 행위는 뒤에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행위를 앞세우고 믿음이 뒤에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행위를 앞세우고 믿음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도 믿음이 앞서가면 생활 역시 그 뒤를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즉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환난이나 곤경에 처했을 때, 과연 믿음이 앞서느냐, 아니면 그 믿음보다 머리로 연구하고 수완을 쓰고 하는 방법이 앞서느냐를 생각해 보면 대다수가 자기 방법이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방법이 앞서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나중에 안되면 실망을 하고 그 후에 믿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안 될 때에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실패해버립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주님께 피하지 못하고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산은 자기 힘으로 가장 좋은 위대한 방법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탄의 화살을 맞습니다. 그것은 피난처 안에 있지 않고 위험한 지경에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민수기 13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갔을 때에 열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열 사람의 보고는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고 참 아름다운 땅임에 틀림없는데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얼마나 센지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와 마찬가지라고 떨면서 보고를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들고 일어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타나서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가보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땅은 무척 아름답고 비옥하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그 땅을 점령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땅이니까 넉넉히 차지할 수 있으니 그곳으로 올라가자라고 했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똑같이 그 땅을 탐지하고 왔는데 왜 의견이 다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고 다른 열 사람은 믿음이 없이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사람과 믿음이 없이 본 사람의 견해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믿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사도 바울의 마음의 눈에는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은 환난과 시련과 여러가지 어려움이지만 거기에 반비례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광스럽고 굉장히 큰 축복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무슨 약속에 근거해서 삽니까? 무슨 약속이 있습니까? 천당 가는 약속이다 라고 할지 모르지만 천당가는 약속은 구원받은 순간에 이미 성립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당에 갑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고 한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무작정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갔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가야 할 목적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 가나안 땅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고 갔던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고 또 이스라엘 전체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하셨는데 메뚜기같이 그들에게 잡아먹히고 망하는 일을 당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 앞에 자기가 메뚜기같이 보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약속에 근거해서 믿을 때에 그 믿음 자체가 주님 앞에 피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주님께 피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믿음 없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서 반석은 주님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것이 왜 불법이냐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통일로 하는 신비주의적인 현상으로서 성경대로 나타나는 이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터입니다. 시편 11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터가 무너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어려움과 시련과 핍박이 있을 때 마음에 주님을 의지하는 확실한 믿음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자체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의롭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그러니까 '터가 무너지면'이라는 말과 '의인이 없다'라는 말 뜻이 같습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의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편에서는 심각한 환난을 당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극한 시련에 봉착했을 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 앞으로 피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은 화살에 맞는 사람입니다. 위험에 빠지는 사람, 잡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 실의에 차고 낙망하는 사람을 말하고, 그 상태에 들어가면 의인으로서는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어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보좌
성전 안에는 첫째 대문이 있고 제단을 거쳐서 그 다음 성소로 들어가는 성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소의 휘장을 거쳐서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 안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히브리서 9:24)라는 말씀에서 하늘이라는 곳은 어디를 가리킵니까?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했는데 그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이고 예수님이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는 곳입니다.
양의 피를 가지고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이해 못합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보면 지구와 상대해서 천체를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별들의 세계, 태양계도 하늘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하늘을 물리적으로 우주보다 더 높은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하늘은 영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몸이 감람산에서 틀림없이 올라가신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다만 우리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니까 그런 세계가 가리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금방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할 수 있는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도 역시 나중에 변화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법궤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 육신으로 다시 살아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이 살아나셨습니다. 여기 "살리셨고"라는 말은 우리 안의 영혼이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우리의 육신도 부활시킬 것은 약속이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 영혼이 부활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에 앉아있습니다. 함께 하늘에 앉혔다라는 것은 우리의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문제는 육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육신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앉혔다고 했지만 분명히 육신은 이 땅 위에 앉아 있고, 또 현재는 여기 있습니다. 내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영의 상태, 바로 거듭난 영은 주님의 영이고 주님의 영과 내 영이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늘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우리 안에 있고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데가 성전입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면 교회가 성전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 교회가 무엇인지 자기가 과연 성전 안에 속해있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라는 말씀에서 "너희가"에 해당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되고 현재의 나는 당연히 '너희 '라는 말 속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지금 없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전체 교회 앞에 대표로 나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이 세상 교회가 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갑니다.
성전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
"너희"라고 할 때에는 분명히 인칭대명사로서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라는 말은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냥 읽지 말고 억양을 붙여서 읽어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왜 모르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구원받은 사람, 구원받고 교제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깨닫는다 안 깨닫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우리 안에 지성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성소가 없으면 성전이 아닙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를 법궤라고 하는데 그 법궤가 지성소의 중심입니다. 법궤 위에 시은좌가 있는데 그 시은좌는 은혜를 베푸는 곳입니다. 그 시은좌 위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내려다보는 광경이 있는데 거기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보좌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보좌는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는데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 뜻이 사랑입니다. 십계명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5-40)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2년이 걸려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시내산 밑에 왔을 때에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를 간수하는 곳이 법궤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그 성전은 회막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회막성전이 바로 법궤를 가장 중심에 모시는 성전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다 구원받은 사람의 표준으로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간에 서로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의미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다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성전이고, 법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몸으로 완성시켰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그림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동시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계명이 완성된 예수님은 산 돌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완성시키신 산 돌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머릿돌이 되시고 예수님이 성전의 가장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연결이 되고 계속 연결이 되면서 집이 지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구원을 받을 때에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주님의 보좌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했습니다. 신약의 계명은 참 사랑하는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네 것 내 것 없이 살 수 있는 참 사랑의 시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견본입니다.
교회는 그 사랑의 계명이 있는 지성소로서 그 법궤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교제를 가지는 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는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확실히 구원받았으면 지어져 있는 이 성전에 산 돌로서 하나하나 쌓여져 있습니다. "너희가 성전인 것을 왜 모르느냐?"라는 말씀처럼 여기에 대해서 확실히 믿고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또 교회가 이루어지도록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참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실수를 해서 죄를 짓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서로 마음이 틀어져서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네 파가 생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 문제에 대해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켜서 분쟁을 일으킨다든지 갈라선다든지 하면 그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죄 가운데 제일 큰 죄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잠언 18:1)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 피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은 교회를 알고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앉아계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은 성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일 안전한 곳은 머리 되신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고 했습니다.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자라는데, 머리 안에 있는 뇌가 중심입니다. 뇌에 연결되어 있는 척추 안에 말초신경까지 모든 신경조직이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 마디, 마디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해서 자랍니다. 이것이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지체들이 서로 연결해서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리에게서 벗어나 특별히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머리를 붙들지 않는 죄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주신 안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피하는 길은 교회 안에 와서 주님 앞에 피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벗어나면 사망의 화살을 맞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 우리가 영적으로는 하늘에 있고 교회가 바로 주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제 안에서 말씀이 열려 나오는 것이고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 성령이 형성된 곳이 아니면 말씀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가 함께 교제하고 서로 봉사하고 살고 있는 여기가 하늘이고 주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에 생명을 걸고 이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의인을 끝까지 지켜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보십니다. 하나는 의인이고 하나는 악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 안 받은 사람보다 더 비천하고 어려움이 많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세계에도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보시는 것 같지만 다 보시는데, 둘을 보시는 관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의인인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의인은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도 그 괴로움 속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서 계속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계속 지켜보시고 주목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즉각적으로 그것을 피하게 한다든지 그것을 면하게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육신은 부서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니까 자녀를 다루는 식으로 지켜보시면서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모르시거나 묵묵히 보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난관에 부딪쳐도 육신이 부서지는 그 훈련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서 훈련하시는 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을 핍박하고 환난에 빠뜨리는 자들은 결국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의인과 악인을 유심히 관찰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이처럼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무엇이 의로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과 시련과 곤란 속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실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가는 것, 그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의인의 일은 믿음으로 사는 일인데 어려움을 당해도, 어떤 핍박을 당해도, 아무리 무서운 시험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꾸준히 살아가는 것이 의인으로서 사는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주님께 피해서 살아가는 말씀이 적힌 이 시편 11편을 믿음장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