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1-8]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다윗의 시로서, 영장으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입니다. 시편 12편은 거짓말과 바른 말을 구별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교회의 그림자
[시편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본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역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편 그것은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거역했듯이 역사가 흐르는 동안 복음을 잘못 전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끝나고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사람들이 허탄한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과 아첨하는 입술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과 아첨하는 입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 역시 그랬고, 또 다윗 당시에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무엘하 15:1-6]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명을 세우니라
압살롬이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압살롬이 자기의 형 암논을 죽인 다음에 몇 년 동안 다윗을 피해 있다가 나중에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에 모반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옳고 그름의 판결을 왕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에도 보면 두 여자가 아이 때문에 시비가 생겨서 솔로몬 왕 앞에 재판 받으러 간 사건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인구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재판소가 있지만 옛날에는 왕이 직접 판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다윗 당시에도 다윗이 직접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다른 사람을 세워서 문제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윗 왕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며 친절히 대하고, 자기 아버지인 왕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편을 들어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샀습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듣기에 좋고 귀를 즐겁게 해서 마음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거짓말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현재 터키의 수도가 있는 앙카라라는 곳입니다. 본래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는데 그곳을 지나다가 병이 들어 잠시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이 병들어서 잠시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저희가 아는 바라"고 한 말씀은 그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떠난 갈라디아 교회
바울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든지 아주 좋지 않은 병이 있어서 갈라디아 사람에게 배척을 받을 만한 입장이었지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은 천사같이 그를 대접하고 눈이라도 빼어 줄 만큼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말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천사같이 대접했던 그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바울 이 떠난 다음에 어떤 사람들의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 때문에 바울을 싫어하게 되고 그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 날 우리 주변에도 꽤 있음을 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러한 현상은 언제나 같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처음 깨달을 때에 굉장히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그 복음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나면 기쁜 마음은 사라지고 작은 문제에도 마음이 상하고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저희"는 갈라디아 신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고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고, 율법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유대인들은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 당시만 해도 이방 세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회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날 모여서 행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경건해 보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보면 굉장히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처음에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좋아했다가 율법주의자들에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구약성경만 있을 때니까 구약성경을 펴 놓고 율법을 얘기하면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넘어가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거짓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거짓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거짓말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사탄이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먹은 결과 마음속에 거짓말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세상을 가까이 하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거짓말이 있나 없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나를 추켜주고 칭찬하면 내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짓말은 사람 속에 있습니다. 날 보고 나쁘다고 하면 화가 나고 칭찬하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전부가 내 속에 거짓말이 들어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삽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거짓을 바로잡고, 물리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귀를 어디엔가에 기울이게 됩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나 과학자, 문학가, 철학가, 세상 종교 따위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습니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첨단 과학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과학 자체는 진실된 것 같고 참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철학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속에는 근본적으로 거짓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진리의 말씀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에 참된 말이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는 말씀대로 진리가 깨달아질 때에 거듭납니다.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사탄의 거짓말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하나님의 참된 말이 들어왔을 때에 구원을 받고 그 진리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그 자체만이 참된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알고 구원을 받았더라도,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내 안에 있는 다른 거짓말이 그 진리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정직한 말씀, 참된 진리가 내 생명의 토대가 됐지만 조금 있으면 세상에 섞여 육신의 소욕대로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재어 봐야 됩니다. 가령 구원받은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그 친구하고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그 때에는 반드시 시비가 생깁니다. 이러쿵저러쿵해서 시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다툼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벌써 내 입에서는 거짓말이 나옵니다. 잘잘못을 계속 문제 삼기만 하면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우리 인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많고 죄가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남의 잘잘못만 따지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것이 거짓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타당성이 있고 올바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마음속에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을 진리에서 떠나 있는 것으로 보십니다.
성경의 진리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의로움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누구를 비판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내 속에 거짓이 있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나, 내 안에 한 다른 법이 있습니다. 다른 법이 있어서 옳은 것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 지은 심령, 죄 가운데 있는 심령,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영혼을 건지시려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는 진리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 말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말씀 안에 거처를 정하고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말 속에서 살아갑니다. 평소 살아가는 생활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생활이 잘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루터를 필두로 해서 요한 칼빈, 쯔빙글리, 멜란히톤과 같은 이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결국 루터와 칼빈이 갈라졌습니다. 자기 주장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칼빈은 절대예정론을 주장했고 루터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다고 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의 이같은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루터는 아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고 거기에 행위가 뒤따라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칼빈의 절대예정론도 성경과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교회를 예정하셨지 개개인을 하나하나 예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아야 되는데 제멋대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원어를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하는 것도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인데 어떤 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는 엉터리 발표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들에게 죄를 알게 해서 죄에 빠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참 제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33)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한복음 8:34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남의 종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자유를 얻으라고 하느냐, 우리는 지금 자유한데 무슨 자유가 필요하느냐며 예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이 나온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육신의 소리
현재 이 시대는 경건한 자가 거의 없어져가고 충실한 자가 끊어져가는 시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에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어떻습니까? 바른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적습니다. 즉 거짓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해가 안되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다음에 자신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꺾어지는 경험이 있으면 신앙생활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내 육신의 이익이나 편리함만을 따라갈 것이냐 하는 마음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꺾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을 따라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적인 생각은 반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과 내 소리가 양심에서 싸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그때 자신의 소리를 따라서 살면 신앙생활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굉장히 손해 보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항복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아주 쉽게 됩니다.
아첨하는 입술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 수만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내 편을 만들어 나를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아첨하게 됩니다. 그것은 귀에 즐겁고 좋은 소리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을 내 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람들을 잘못 이끌어갑니다. 나는 물러가고 사람들을 주님 편으로 이끌어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안식하는 것과 직분을 맡는 일의 차이점
안식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말한답니다. 우리 모임에 안식이라는 문제는 모임 초기부터 있어왔습니다. 이 모임 안에서 안식을 얻고 아는 사람이 많은 줄 압니다. 제게 와서 직접 얘기하는 사람만 해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모임에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늦게야 안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완전히 혼자만 아는 것처럼 떠들면 곤란합니다.
약 3, 4년 전쯤 히브리서 4장을 설교했을 때 마음에 평안을 얻은 사람들 몇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지방에서 그 테이프를 듣고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 연락해왔었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안다고 해서 떠들고 자랑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교회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라는 성경 말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현재는 사도와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있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 전하는 자와 다음에 목사와 교사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는 말씀처럼 봉사의 일이 있어야 됩니다.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을 얻는다는 문제와 직분을 맡는 문제는 다릅니다. 직분을 맡은 것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아서 봉사의 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임은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과 활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서 안식을 얻으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의 안식이 있을수록 육신은 더 바빠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수고해서 자기 동행들의 쓸 것을 담당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상 받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생활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완전히 붙잡아놓고 봉사 생활을 없애버리면 주님 앞에 가서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그것은 사탄의 가르침입니다. 쉽사리 영적인 교만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거짓말에 넘어가 버립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서는 안되고 주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내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장로교인은 요한 칼빈의 제자로, 루터교인은 루터의 제자로, 감리교인은 요한 웨슬레의 제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거짓말과 인간의 욕심을 따라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이끌어 자기의 제자로 만들고 본의 아니게,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임 안에서도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을 내 편을 만들려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내 편을 만들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틀림없이 거짓말이 나옵니다. 아첨하는 말이 나오고 인위적인 친절이 나옵니다.
입에 재갈을 먹이라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할 때에 성경을 빙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덮어놓고 성경을 말하면 다 진리인 줄 압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사탄도 성경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를 옹호하려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에 주의해야 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항상 바른 말을 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서 그 말이 좀 더 주님 말씀에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하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도 성경하고 안 맞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서 3:3-6]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말을 타고 갈 때에는 반드시 말의 입에다 재갈을 먹이는 것같이 우리도 입에다 재갈을 먹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그 말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조종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 살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기능을 붙들어 매지 않으면 한정없이 내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해 버립니다.
교회는 특별히 말씀에 의해서 운영되어 가는 곳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더라도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누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면 금세 마음에 병이 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지 않은 말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말하면 안 됩니다. 말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모임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죽이는 것입니다. 내 속에 혹 불만이 있더라도 마음속에 꼭 묻어두어야 합니다.
혀가 곧 불이라고 했습니다. 혀를 함부로 놀리면 지옥에서 나오는 불의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임의 흉이나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사탄의 소리로서 지옥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지금 온 세상이 말장난에 의해서, 즉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해서 마지막 시대의 심판 받을 곳을 향해 끌려가고 있습니다.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시편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어느 날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는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5-37]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읽고도 우리가 함부로 입을 놀려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을 한번 하면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물론 말의 실수가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면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세상
[시편 12:4]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이 말씀은 지금 세상에 꼭 들어맞습니다. 언론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말합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는 말씀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신문이나 방송같은 언론에 의해서 사회 분위기와 대세가 이끌려 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방송과 신문에서 자꾸 떠들어 대면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로 끌려갑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갑니다. 참된 진리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교회도 다분히 그런 경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의 여론을 일으켜 목사 배척 운동을 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의 힘이 강해져 결과적으로 말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방향으로 이 세상은 지금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운동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말씀으로 오신 주님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이라는 말은 남에게 압박 받고 부자에게 착취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탄에게 눌린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빈곤의 상처라는 것은 마음이 이렇게 해도 평안이 없고, 저렇게 해도 평안이 없는,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굶주린 상태에 있는 영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해서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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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을 이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사탄에게 눌리고 심령이 피곤한 자들을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고 도전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말씀으로 단련하는 신앙생활
[시편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우리는 말씀으로 단련되어 흠이 없는 자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어떻게 단련이 됩니까?
[시편 105:16-19]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자 죄를 뒤집어쓰고 옥중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 주고 총리 대신이 되어 자기의 가족 70인을 데려다가 먹여 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온 세상에 흉년이 들고 기근이 들어서 크게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요셉이라는 사람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는데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옥에, 착고에 채이게 하여 그를 단련하신 것입니다. 그 단련 과정은 말씀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애굽 사람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온 가정을 구원합니다.
구원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꾸미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형들에게 팔려가고 옥중 생활을 하고 오해를 받고 하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요셉의 마음을 지켜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한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그 꿈,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구원자가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요셉으로 하여금 어려움과 고난을 헤치는 단련을 받게 한 것입니다. 마침내 구원자가 된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육신으로 보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그냥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에 단련되지 않고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니까 예수님이 단련 받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안이하고 평탄한 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아주 많은 어려움을 거치고,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단련 받는 과정이 없이는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의한 단련으로 제거되는 육신의 소욕
[히브리서 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풀무에 금이나 은을 단련하면 할수록 순금이 생기고, 순은이 생깁니다. 단련하면 할수록 불순물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과정에서 시련이 없이는 육신의 찌꺼기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단련의 과정이 없으면 내 육신 속에 있는 더럽고 찌꺼기 같은 거짓과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시련과 어려움을 거쳐야만 하나님 말씀이 참되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사실 굉장한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고달픈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큰 고통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신 그 일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겠습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까 그냥 말로만 사람을 구원시키면 될 터인데 왜 구태여 그렇게 했습니까? 더러운 것과 찌꺼기를 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체에 더러운 것과 찌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찌꺼기를 주님이 대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며 깨끗하고 순결한데 문제는 내 육신 속에 찌끼와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더러운 것과 찌끼가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련을 받고 시련을 겪어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조금씩 조금씩 제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에 거해 살고 순종할 수 있고 입을 열어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
[시편 12:7]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잠언 6:16-23]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 육신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탕하고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는 말씀에서 어미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단련된 말씀이므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육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고 악한 마음이 있어도 말씀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8]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비루라는 말은 악하고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가장 악하고 더럽고 인간적인 것, 현재의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학문, 지식, 문명이 모두 극에 달해 있습니다. 악도 완전히 한계에 달해있습니다. 온 세상은 음란한 생각과 폭력적이고 악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가장 높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입니다.
[신명기 4:32-35]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 천둥이 치고 불이 활활 타고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두려워 떨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소리를 듣고 죽을까 두려우니 당신이 듣고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티끌 가운데 살고 낮고 천한 죄 가운데 살면서 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민족이 역사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하고 낮고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이 거짓말이 아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성정의 사람이 감히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 말씀 외에는 거짓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죽여버린 사탄의 거짓말에 의해서 이 세상이 지배받고 그 거짓말이 극에 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시로서, 영장으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입니다. 시편 12편은 거짓말과 바른 말을 구별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교회의 그림자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본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역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편 그것은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거역했듯이 역사가 흐르는 동안 복음을 잘못 전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끝나고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사람들이 허탄한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과 아첨하는 입술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과 아첨하는 입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 역시 그랬고, 또 다윗 당시에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렇게 했습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형 암논을 죽인 다음에 몇 년 동안 다윗을 피해 있다가 나중에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에 모반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옳고 그름의 판결을 왕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에도 보면 두 여자가 아이 때문에 시비가 생겨서 솔로몬 왕 앞에 재판 받으러 간 사건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인구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재판소가 있지만 옛날에는 왕이 직접 판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다윗 당시에도 다윗이 직접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다른 사람을 세워서 문제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윗 왕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며 친절히 대하고, 자기 아버지인 왕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편을 들어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샀습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듣기에 좋고 귀를 즐겁게 해서 마음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거짓말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현재 터키의 수도가 있는 앙카라라는 곳입니다. 본래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는데 그곳을 지나다가 병이 들어 잠시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이 병들어서 잠시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저희가 아는 바라"고 한 말씀은 그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떠난 갈라디아 교회
바울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든지 아주 좋지 않은 병이 있어서 갈라디아 사람에게 배척을 받을 만한 입장이었지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은 천사같이 그를 대접하고 눈이라도 빼어 줄 만큼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말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천사같이 대접했던 그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바울 이 떠난 다음에 어떤 사람들의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 때문에 바울을 싫어하게 되고 그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 날 우리 주변에도 꽤 있음을 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러한 현상은 언제나 같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처음 깨달을 때에 굉장히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그 복음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나면 기쁜 마음은 사라지고 작은 문제에도 마음이 상하고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저희"는 갈라디아 신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고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고, 율법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유대인들은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 당시만 해도 이방 세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회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날 모여서 행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경건해 보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보면 굉장히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처음에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좋아했다가 율법주의자들에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구약성경만 있을 때니까 구약성경을 펴 놓고 율법을 얘기하면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넘어가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거짓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거짓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거짓말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사탄이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먹은 결과 마음속에 거짓말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세상을 가까이 하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거짓말이 있나 없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나를 추켜주고 칭찬하면 내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짓말은 사람 속에 있습니다. 날 보고 나쁘다고 하면 화가 나고 칭찬하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전부가 내 속에 거짓말이 들어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삽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거짓을 바로잡고, 물리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귀를 어디엔가에 기울이게 됩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나 과학자, 문학가, 철학가, 세상 종교 따위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습니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첨단 과학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과학 자체는 진실된 것 같고 참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철학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속에는 근본적으로 거짓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진리의 말씀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에 참된 말이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는 말씀대로 진리가 깨달아질 때에 거듭납니다.
사탄의 거짓말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하나님의 참된 말이 들어왔을 때에 구원을 받고 그 진리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그 자체만이 참된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알고 구원을 받았더라도,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내 안에 있는 다른 거짓말이 그 진리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정직한 말씀, 참된 진리가 내 생명의 토대가 됐지만 조금 있으면 세상에 섞여 육신의 소욕대로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재어 봐야 됩니다. 가령 구원받은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그 친구하고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그 때에는 반드시 시비가 생깁니다. 이러쿵저러쿵해서 시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다툼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벌써 내 입에서는 거짓말이 나옵니다. 잘잘못을 계속 문제 삼기만 하면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우리 인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많고 죄가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남의 잘잘못만 따지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것이 거짓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타당성이 있고 올바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마음속에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을 진리에서 떠나 있는 것으로 보십니다.
성경의 진리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의로움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누구를 비판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내 속에 거짓이 있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나, 내 안에 한 다른 법이 있습니다. 다른 법이 있어서 옳은 것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 지은 심령, 죄 가운데 있는 심령,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영혼을 건지시려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는 진리
'내 말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말씀 안에 거처를 정하고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말 속에서 살아갑니다. 평소 살아가는 생활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생활이 잘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루터를 필두로 해서 요한 칼빈, 쯔빙글리, 멜란히톤과 같은 이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결국 루터와 칼빈이 갈라졌습니다. 자기 주장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칼빈은 절대예정론을 주장했고 루터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다고 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의 이같은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루터는 아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고 거기에 행위가 뒤따라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칼빈의 절대예정론도 성경과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교회를 예정하셨지 개개인을 하나하나 예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아야 되는데 제멋대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원어를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하는 것도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인데 어떤 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는 엉터리 발표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들에게 죄를 알게 해서 죄에 빠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참 제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33)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한복음 8:34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남의 종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자유를 얻으라고 하느냐, 우리는 지금 자유한데 무슨 자유가 필요하느냐며 예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이 나온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육신의 소리
현재 이 시대는 경건한 자가 거의 없어져가고 충실한 자가 끊어져가는 시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에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어떻습니까? 바른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적습니다. 즉 거짓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해가 안되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다음에 자신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꺾어지는 경험이 있으면 신앙생활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내 육신의 이익이나 편리함만을 따라갈 것이냐 하는 마음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꺾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을 따라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적인 생각은 반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과 내 소리가 양심에서 싸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그때 자신의 소리를 따라서 살면 신앙생활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굉장히 손해 보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항복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아주 쉽게 됩니다.
아첨하는 입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 수만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내 편을 만들어 나를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아첨하게 됩니다. 그것은 귀에 즐겁고 좋은 소리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을 내 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람들을 잘못 이끌어갑니다. 나는 물러가고 사람들을 주님 편으로 이끌어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안식하는 것과 직분을 맡는 일의 차이점
안식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말한답니다. 우리 모임에 안식이라는 문제는 모임 초기부터 있어왔습니다. 이 모임 안에서 안식을 얻고 아는 사람이 많은 줄 압니다. 제게 와서 직접 얘기하는 사람만 해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모임에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늦게야 안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완전히 혼자만 아는 것처럼 떠들면 곤란합니다.
약 3, 4년 전쯤 히브리서 4장을 설교했을 때 마음에 평안을 얻은 사람들 몇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지방에서 그 테이프를 듣고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 연락해왔었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안다고 해서 떠들고 자랑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교회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라는 성경 말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사도와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있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 전하는 자와 다음에 목사와 교사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는 말씀처럼 봉사의 일이 있어야 됩니다.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을 얻는다는 문제와 직분을 맡는 문제는 다릅니다. 직분을 맡은 것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아서 봉사의 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임은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과 활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서 안식을 얻으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의 안식이 있을수록 육신은 더 바빠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수고해서 자기 동행들의 쓸 것을 담당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상 받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생활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완전히 붙잡아놓고 봉사 생활을 없애버리면 주님 앞에 가서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그것은 사탄의 가르침입니다. 쉽사리 영적인 교만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거짓말에 넘어가 버립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서는 안되고 주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내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장로교인은 요한 칼빈의 제자로, 루터교인은 루터의 제자로, 감리교인은 요한 웨슬레의 제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거짓말과 인간의 욕심을 따라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이끌어 자기의 제자로 만들고 본의 아니게,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임 안에서도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을 내 편을 만들려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내 편을 만들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틀림없이 거짓말이 나옵니다. 아첨하는 말이 나오고 인위적인 친절이 나옵니다.
입에 재갈을 먹이라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할 때에 성경을 빙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덮어놓고 성경을 말하면 다 진리인 줄 압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사탄도 성경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를 옹호하려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에 주의해야 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항상 바른 말을 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서 그 말이 좀 더 주님 말씀에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하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도 성경하고 안 맞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말을 타고 갈 때에는 반드시 말의 입에다 재갈을 먹이는 것같이 우리도 입에다 재갈을 먹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그 말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조종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 살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기능을 붙들어 매지 않으면 한정없이 내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해 버립니다.
교회는 특별히 말씀에 의해서 운영되어 가는 곳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더라도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누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면 금세 마음에 병이 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지 않은 말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말하면 안 됩니다. 말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모임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죽이는 것입니다. 내 속에 혹 불만이 있더라도 마음속에 꼭 묻어두어야 합니다.
혀가 곧 불이라고 했습니다. 혀를 함부로 놀리면 지옥에서 나오는 불의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임의 흉이나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사탄의 소리로서 지옥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지금 온 세상이 말장난에 의해서, 즉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해서 마지막 시대의 심판 받을 곳을 향해 끌려가고 있습니다.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어느 날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도 우리가 함부로 입을 놀려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을 한번 하면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물론 말의 실수가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면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세상
이 말씀은 지금 세상에 꼭 들어맞습니다. 언론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말합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는 말씀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신문이나 방송같은 언론에 의해서 사회 분위기와 대세가 이끌려 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방송과 신문에서 자꾸 떠들어 대면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로 끌려갑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갑니다. 참된 진리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교회도 다분히 그런 경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의 여론을 일으켜 목사 배척 운동을 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의 힘이 강해져 결과적으로 말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방향으로 이 세상은 지금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운동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말씀으로 오신 주님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이라는 말은 남에게 압박 받고 부자에게 착취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탄에게 눌린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빈곤의 상처라는 것은 마음이 이렇게 해도 평안이 없고, 저렇게 해도 평안이 없는,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굶주린 상태에 있는 영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해서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말씀을 이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사탄에게 눌리고 심령이 피곤한 자들을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고 도전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말씀으로 단련하는 신앙생활
우리는 말씀으로 단련되어 흠이 없는 자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어떻게 단련이 됩니까?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자 죄를 뒤집어쓰고 옥중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 주고 총리 대신이 되어 자기의 가족 70인을 데려다가 먹여 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온 세상에 흉년이 들고 기근이 들어서 크게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요셉이라는 사람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는데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옥에, 착고에 채이게 하여 그를 단련하신 것입니다. 그 단련 과정은 말씀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애굽 사람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온 가정을 구원합니다.
구원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꾸미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형들에게 팔려가고 옥중 생활을 하고 오해를 받고 하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요셉의 마음을 지켜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한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그 꿈,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구원자가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요셉으로 하여금 어려움과 고난을 헤치는 단련을 받게 한 것입니다. 마침내 구원자가 된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육신으로 보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그냥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에 단련되지 않고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니까 예수님이 단련 받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안이하고 평탄한 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아주 많은 어려움을 거치고,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단련 받는 과정이 없이는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의한 단련으로 제거되는 육신의 소욕
풀무에 금이나 은을 단련하면 할수록 순금이 생기고, 순은이 생깁니다. 단련하면 할수록 불순물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과정에서 시련이 없이는 육신의 찌꺼기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단련의 과정이 없으면 내 육신 속에 있는 더럽고 찌꺼기 같은 거짓과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시련과 어려움을 거쳐야만 하나님 말씀이 참되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사실 굉장한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고달픈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큰 고통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신 그 일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겠습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까 그냥 말로만 사람을 구원시키면 될 터인데 왜 구태여 그렇게 했습니까? 더러운 것과 찌꺼기를 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체에 더러운 것과 찌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찌꺼기를 주님이 대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며 깨끗하고 순결한데 문제는 내 육신 속에 찌끼와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더러운 것과 찌끼가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련을 받고 시련을 겪어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조금씩 조금씩 제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에 거해 살고 순종할 수 있고 입을 열어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 육신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탕하고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는 말씀에서 어미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단련된 말씀이므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육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고 악한 마음이 있어도 말씀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비루라는 말은 악하고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가장 악하고 더럽고 인간적인 것, 현재의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학문, 지식, 문명이 모두 극에 달해 있습니다. 악도 완전히 한계에 달해있습니다. 온 세상은 음란한 생각과 폭력적이고 악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가장 높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 천둥이 치고 불이 활활 타고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두려워 떨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소리를 듣고 죽을까 두려우니 당신이 듣고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티끌 가운데 살고 낮고 천한 죄 가운데 살면서 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민족이 역사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하고 낮고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이 거짓말이 아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성정의 사람이 감히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 말씀 외에는 거짓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죽여버린 사탄의 거짓말에 의해서 이 세상이 지배받고 그 거짓말이 극에 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