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편] 다윗의 시련과 영광

[시편 13:1-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이 시편 13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오랫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정말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읊은 것 같습니다.





왕이 되기 위한 고난의 길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겪고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이나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면 사탄은 예수님에게 자기를 향하여 절을 하면 이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넘어뜨림으로 말미암아 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그렇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본래 루시퍼라는 천사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자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 쫓겨난 사탄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준 것을 알고 그 권세를 빼앗기 위해서 아담을 유혹하고 타락시켰습니다. 그 이후로 이 세상은 사탄의 세상이 되었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을 이기고 왕권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8-13]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고, 바울도 그러했으며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통치권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은 쉽게 왕이 되었기 때문에 왕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이나 희생은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고 강하게 단련시켜 주며, 겸손하게 낮추어주어서 신앙적인 인격자로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4:7-13]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과 다 같이 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왕 노릇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생애를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본받기 원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해보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라고 말하면서 분쟁을 일으키고, 누구를 앞세워가지고 그 사람을 치켜올리면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왕 노릇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왕이 하나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왕은 바로 사탄입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의 마음속에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높이 되고 싶은 마음, 육신적으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잘 되고 싶은 마음 등은 다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아무리 비천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은 왕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하고 투쟁하며 생존 경쟁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고린도가 특별히 아덴과 함께 철학의 도시니까 철학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지식을 자랑한다든지 아니면 그들이 가진 바 어떤 것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사람처럼 처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재질이나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지만 사람의 심리는 그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왕 노릇 하고 싶어하는 심리입니다. 얼굴이 잘난 사람은 얼굴을 자랑하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왕의 보좌가 자기 마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그 왕권을 빼앗아 취하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몇 번이나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자기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고 하여 피했습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재촉하면서 당장 한 칼에 죽일 수 있다고 할 때에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힘으로 왕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왕권을 주신 때에 가서 왕이 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오랜 시련과 고난을 겪는 중에 육신의 생각이 부서지고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차츰차츰 정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오시면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면서 고난이나 시련을 겪지 않고 왕이 되고 싶어 한다면 그건 안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살고, 고난을 참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우리들은 왕이 되는 자질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열 고을 차지하라, 다섯 고을 차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열 므나를 남겼다, 다섯 므나를 남겼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결국 므나를 남긴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인데 성령의 열매가 고난이나 시련 없이 아무렇게나 맺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3편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도 다윗의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 속에는 너무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렵다는 감정의 표시가 들어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반드시 때가 온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심한 고통을 당할 때 언젠가 때가 오리라는 믿음은 없고 절망 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는 식으로 완전히 절망하고 함부로 살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이 있고, '때'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는 말씀도 있습니다. 또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시편 1:3)라고 되어있습니다. 가을철이 오기 전에는 추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여름이라는 더운 날의 과정을 지나고 가을이 와야만 열매를 맺고,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때가 있습니다. 고난의 때가 있고, 죽는 때가 있고, 사는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도서 3:1)고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오기 전에 우리는 못 견디고 포기해버린다든지 절망에 빠진다든지 해서 그 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손해를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할 때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26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있는 말씀대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때 함부로 아무 때나 막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때를 따라서 돕는 은혜입니다.





영광을 위한 고난의 때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오려고 할 때는 그 앞에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구원받은 이후 오늘까지 살면서 여러 모양의 유혹과 굉장히 억울한 일과 핍박과 물질적인 가난으로 시달리는 어떤 어려움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이 오는 경험이 있었습니까? 무사태평하게 잘 지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무슨 어려운 일이 지나갑니다. 그것이 시절이고 때입니다. 그 시절이 지나가지 않으면 때가 올 수 없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그 때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달프고 큰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믿는 구약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 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후에 감람산에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회복시켜서 이상 국가를 건설해 주는 때가 바로 그 때인가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바로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는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동문서답격으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는 말은 '아직 그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복음이 전파되어 이 세상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시면 그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는 그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재림의 첫째 목적은 이스라엘 국가의 구출입니다. 이스라엘이 영광스러운 나라로 복구됩니다. 이제 머지 않아서 이 복음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니 별 문제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천 년이라는 먼 미래사는 모를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그 권세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 그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어려움을 당해도, 큰 난관에 부딪쳐 괴로움이 있어도,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 속에서 그 순간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알게 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시절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시절을 거치지 않으면 내 앞에 준비된 은혜의 때가 오질 않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이므로 다윗은 엄청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기다리면서 때가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이 시를 읊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답답하면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의 상태,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사무엘상, 사무엘하를 읽어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응답이 없이 마음이 암담하고 답답한 시절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뵈옵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도 역시 현재 마음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췄다'(고린도후서 4:6)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나는 신성, 즉 예수라는 그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신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에 주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어쩔 줄 몰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속에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다윗도 역시 주님을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시편을 읽어보면 우리의 구원받은 감정과 같은 것을 경험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쫓겨다닐 때에는 캄캄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과 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암울하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때로는 마음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한 그 순간은 마치 주님이 얼굴을 돌이키고 외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어두움이 찾아옵니다. 즉 마음이 어두운 거기에는 항상 사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듯이 우리에게도 시험의 때가 있는데 시험에는 틀림없이 그 주위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 어두움의 그림자 속에서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 고 했고, 시편 104편에는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편 104:28 —29)라고 했습니다.


 비가 오거나, 곡식이 자란다거나, 바람이 부는 모든 자연의 순환도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산천에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들이 자라나고 새들이 나뭇가지에 둥지를 틉니다. 그러한 모든 것도 하나님이 얼굴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마태복음에도 보면 하나님이 해나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주신다고 했는데 이 모든 자연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반영되어서 그렇게 되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구원받는 그 날부터 우리는 어린애로 태어나서 어머니가 항상 어린 애를 지켜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지켜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연단시키는 과정에서 마음이 답답하고 캄캄하게 되는데 그러한 때에 사탄이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고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캄캄하고 괴로워도 그 과정이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낮추시는 주님의 방법이고 우리를 단련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단련되어 가는 것이며 믿음이 더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러한 과정에서 믿음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믿음이 식어지면 감사가 사라진다


[시편 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빛이 없고 주님과 나 사이에 교제가 없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과 교제가 없다면 마음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구원받은 사람을 원망하고 몹시 싫어하고 있다면 마음에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러면서도 마음에 감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건 거짓 감사입니다. 죄를 마음에 묻어놓고 주님 앞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일서에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마음에 묻어놓았던 죄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 죄를 빛 가운데 털어놓아야만 그 순간 마음에 감사가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주님의 빛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얼굴을 돌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멀리 떠나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스스로가 돌아 앉아있는 것입니다. 어떤 죄 때문에, 누구와의 이해 관계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가 없어집니다. 너무 심한 고통이나 환난, 괴로움 속에서 심지어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가 왜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믿음이 식어진 결과로 옵니다. 이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고,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을 향해서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도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속에 거머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아무리 가져도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말하기를 먹고 마시는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함에 처할 줄도 알아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도 바울과 실라는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범사에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아서 채워지지 않거나, 누구하고 마음에 문제가 있거나, 또 어떤 숨겨놓은 죄가 있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그 감사가 없는 상태가 바로 주님이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 상태입니다. 주님과 교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어려움에 시달려 믿음이 약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은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상태입니다. 다만 그럴 때에 자신을 살펴서 묻어둔 죄가 있으면 죄를 털어놓아야 됩니다. 남과 시비가 있어 불쾌한 감정이 있으면 그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교회와 관련된 생활인데 교회 안에 연결된 생활을 하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일이 마음에 꺼림직하지만 우선 내 눈 앞에 육신적으로 좋은 것이 있으면 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남녀 청년들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희희덕거리고 농담을 하면 손해를 봅니다. 서로 사랑하고 결혼할 대상이 아니면 단 둘이 만나거나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행동할 때는 그렇지 않다가도 단 둘이 있을 때는 마음에 꺼리기는 하지만 육신적인 쾌락이나 감정에 의해서 편한대로 행동해 버립니다. 담배와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자기 꾀로 풀어서 얘기하는 사람이 말을 들어주면 신이 나서 마치 자기가 신령하고 거룩하게 된 것처럼 떠드는데 그것은 전부 자기 영혼을 자기 멋대로 경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넘어가버립니다. 후에 문제가 생기면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하면서 걱정합니다. 다윗도 혼자서 경영하고 종일 걱정하고 근심했습니다.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 때문에 걱정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내 스스로가 주님을 떠나있는 상태에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도 은 30에 예수님을 팔 때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탄이 사로잡았던 마음을 놓아주니까 예수님의 정죄되는 것을 보는 순간에 그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목을 매고 곤두박질하였습니다. 사탄은 옆에서 박수를 치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원수가 희롱하며 '잘 되었구나' 하면서 비웃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성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방심하여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도둑질한 것은 나중에 물질로 갚아주고 싸움을 하면 나중에 화해하면 회복이 되지만 성적 문제는 회복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주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자를 보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는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번 딱 지나고 나면 무너진 마음이 다시 복구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인 죄만은 몸 안에 있는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젊은이들은 이 문제만은 아주 특별히 주의해야 됩니다. 사람 속에는 정욕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동을 주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외에 개인적으로는 될 수 있으면 멀리 해야 됩니다. 사무적으로 부득이한 일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담을 한다든지 접근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한 번만 실수하면 평생 마음에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평생 근심하며 원수에게 희롱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자학하며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원수 사탄은 조롱하고 박수갈채하면서 비웃습니다.



[에스겔 36:1-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온 세계로 흩어졌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이스라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이방인이 그 땅에 들어와서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대적 원수들이 비웃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 민족 대신에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탄의 침범에 의해서 타락하고 황무지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약속 아래 머물러 살면서 그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는 터전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땅이 없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짓고, 어떤 때는 실망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기업을 잃은 상태이며 그 마음의 땅이 황무지가 된 것을 나타냅 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주님의 기업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마음이 황무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럴 때 사탄이 비웃습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구원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무엇을 할까요?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신앙생활 못하도록 마음의 즐거움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사탄은 비웃고 박수갈채를 하는데 그것이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 속에 반복되어 왔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답게 주님 앞에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승리의 생활인데, 마음에 감사가 없는 것은 패배하는 생활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면 눈이 어두워진다


[시편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엘리사를 따라나섰던 게하시가 아람 군대들이 와서 둘러싸는 것을 보고 탄식했을 때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시므로 천군 천사가 둘러싼 것을 보았습니다.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무덤 안에 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시지만 눈이 어두워서 못 보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욥기 23장에 보면 욥이 뒤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이 안 계시고, 옆을 보아도 안 계신다며 캄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뵈올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할 때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줄로 생각합니다. 욥도 역시 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하고 같이 계시는데 우리 눈이 어두운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눈이 어두워져버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는데 무슨 감사입니까?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남편이십니다. 어떤 아내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면서 자기 남편에게 감사하고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아내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면 틀림없이 자기 남편 앞에서 자유함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신부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신부의 반열에 설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야고보서 4:4)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이루신 성령이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신다고 하였고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에베소서 4:30)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거나 돈을 사랑하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감사가 없어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물질 문제는 아니지만 너무도 오랜 어려움 속에서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잠깐 그 마음이 약화되었을 때에 눈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사망의 잠에서 눈을 뜨게 하소서


야곱이 피난갈 때에 돌베개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줄 몰랐다가 밤에 사닥다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때 눈이 뜨여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에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말씀은 죽으면 장차 부활케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것이 사망의 잠입니다. 즉 육신이 살아있지만 신앙이 죽어서 잠드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살아나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러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한 대로 몸의 행실이 죽어야 됩니다. 영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망의 잠이 들지 않고 살아납니다.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 살아나버립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로마서 8:5-6)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인데 마음에 이미 감사가 떠난 지 오래고,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너무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주님의 얼굴이 가리워진 것 같아 '눈을 밝게 해 주십시오.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 눈을 뜨게 해달라고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마음으로 어두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성적인 죄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와도 어느 날 말씀에서 풀리면 해결됩니다. 





주님의 영광과 이름을 귀히 여기라


[시편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자기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군이고, 기름부음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에게 조롱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곧 그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이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의 영광이나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행동 여하에 따라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내 자존심이 꺾이는 문제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언제나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님께 드려진 삶이 무엇이며 내가 이렇게 사는 생활이 주님 앞에 어떻게 되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의 몸이 교회니 우리에게 보이는 주님은 곧 교회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니까 교회에서 누를 끼치는 것은 주님께 누를 끼치는 것이고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주님이 불명예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실상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저 구만리 장천에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주님의 몸을 통해서 주님이 나타나시니 주님의 교회가 나 때문에 이름이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주님의 이름 때문에 힘차고 용기있게 살아갔습니다. 



[시편 13:5-6]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드디어 고통의 시절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니이까' 하던 그 고통의 시절, 캄캄한 시절이 지나서 주님의 구원을 맛보았고, 주님이 자기를 후하게 대접하는 시절을 만났습니다.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의 본을 받아 아무리 어려운 고통과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