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7]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똑똑하고 지식이 많고 나름대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수완이나 지식, 재력 등을 더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 음성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지적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미신인 것 같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에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혼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 영혼을 기초로 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로마서 1:19-20).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사람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이성적으로 발달하면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이나 영성이 둔해지고 하나님을 오히려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사람, 즉 비교적 이성적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신을 찾는 경향이 많습니다.


 달이나 태양을 보고 절을 한다든지, 뒤뜰 나무 아래에서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절을 한다든지, 삼신을 섬긴다든지, 조상을 섬기는 우리나라의 토속종교도 역시 신을 찾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은 신을 찾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문을 쌓고 지적으로 발달하면 신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하나님을 찾는 마음보다는 '그것은 완전히 미신이다,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부인하는 힘이 사람의 이성 속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발달한 것이 이성의 힘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사탄의 말에 넘어감으로써 사람에게도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도전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가운데는 종교적 열정이 없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혼의 실체가 부정되고 이성적으로만 모든 것을 해석하고 찾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우리 마음의 눈이 밝혀져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만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상당히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공산주의 이론이 마음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자비한 투쟁을 해야 하고, 반대자들을 죽여야 하고, 혁명을 해야 하는 유물사관과 계급투쟁의 이념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이 되는 유물사관, 즉 유물론은 하나님 없는 물질의 법칙 운행을 주장하고, 인간의 역사는 물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라고 정의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 논리를 전개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무신론, 신은 없다는 이론이 토대가 됩니다. 공산주의자로서 신을 믿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마취시켜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민주주의 세계에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도 '신이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것을 그냥 믿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만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과 행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이 조금이라도 나타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2:7-10]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가끔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잘못할 때는 징계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항상은 아니더라도 조금씩은 나타나야 됩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예수님께서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온전이 있고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온전이 있습니다. 형제에게만 문안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 누구든지 다 하는 것입니다. 내게 잘 해주는 사람은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자기 욕심이며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아무 상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그같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 딸은 사랑하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며느리는 눈에 가시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확실히 뉘우치지 않으면 다른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내리고 햇빛도 골고루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노인분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자기와 친한 사람끼리만 어울려서 사랑을 베풀고 가까이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공평하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


그런데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마음과 말, 태도와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이 내 육신을 점령해야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으로, 죄의 성품을 가졌고,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 날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내 육신의 생각을 다 점령해야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다 성령이 계시지만 육신의 생각을 다 점령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의 음성대로 살지 못한 결과입니다.



[베드로후서 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우리 육신은 썩어질 것입니다. 썩어질 것 속에는 썩어질 것만 나옵니다. 썩어질 것 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다 썩어질 것입니다. 욕심, 정욕, 쾌락 모든 것이 다 썩어질 것입니다. 썩어질 것들을 피해서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것에 목표를 두고 우리는 구원받은 그날부터 꾸준히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조그마한 일에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육신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화도 잘 안내고, 누구를 미워하던 성품도 바뀌어 가는 일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정욕이 많습니다. 남녀가 서로 결혼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요, 썩어질 것입니다. 세상 영광이나 쾌락만을 찾아다니는 것도 썩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이 차츰차츰 변화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영광을 즐기고 감사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은 이 자연계 속에도 나타나서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은택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무한한 생명,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차츰차츰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전체적으로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고 개별적으로는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을 통해서 나타나야만 참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소행이 가중한 자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못 믿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원수가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사람 속에 사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 사탄으로 인해 빚어지는 일의 결과가 죄로 나타납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속에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가령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돈을 벌어 서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내 주는데 부인이 이 돈을 가지고 처음에는 무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너무 적적하고 답답해서 춤추는 곳에 가서 춤도 추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면 자기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불의한 일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로 남편이 보내준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 여자는 죄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 돌아오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내는 남편이 수고하면서 보내준 돈을 잘 모으고 간수하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정조를 지켜 오매불망 남편이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 아내 같으면, 자기 남편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겠습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빨리 오실까 걱정되는 사람은 속에 죄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부패한 자요, 소행이 가중한 자입니다. 지식이 많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썩었고 악이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천만다행으로 그런 사람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은 다 아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형무소에서 나온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취직이 되었으나 한 사람은 취직이 안되었습니다. 취직 안된 친구가 취직 된 친구보고 월급을 타면 절반 나누자고 합니다. 못하겠다고 대답하자 다른 친구가 말하기를, 주인을 만나서 과거에 도둑질하다가 형무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취직한 친구는, "그래, 저 안에 주인이 계시니 지금 당장에 말해. 주인은 옛날에 세상을 떠난 우리 아버지의 친구이신데 내가 도둑질하다가 형무소 갔다 온 것을 다 알고 계셔 그렇지만 그 분이 나를 채용해 주셨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다 아셨지만 아들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아시고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아들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이미 아시고 용서한 하나님이십니다. 똑같은 죄인이지만 이것이 다른 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에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있다 생각하면 마음에서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죄를 지어서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 있으면 그 문제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가 455장)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아가서 짐을 풀고 주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아직도 죄가 안에 있고 회개치 않는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더럽고 악한 인간의 마음


[시편 14: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높이 계신다는 말은 물리적인 하늘 위에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 세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인간들이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보십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는 것이 지각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마음에 오시면 지각이 살아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깨끗하고 거룩한 성품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 사람들이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까? 사탄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전부가 사탄의 사주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탄의 행위가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거짓말한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하는 모든 것이 다 죄요, 더러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4-3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욕을 해야 신명이 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더럽고 악하고 욕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더럽고 악한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내 마음에 비취면서 그 빛 앞에서 구원받았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더럽고, 악하다는 것을 알 때가 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었습니다(로마서 7:24).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혼의 생각은 더럽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속에서 그런 것이 나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믿음의 단계


 어느 날 나 자신의 속성을 확실히 알게 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선할 수 없고, 인정 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부인됩니다.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게 됩니다. 그때 믿음이 하나 생깁니다. 그 믿음은 '나는 그런 인간이니까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새로운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구원받은 믿음에서 또다시 자기의 더럽고 악한 것을 알게 되고, 자신를 부인하게 되고 믿을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럽고 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주님을 다시 한번 믿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믿음이 자라는 단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사탄의 생각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매우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인격적인 사람의 생각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입니다. 사탄의 생각이 반드시 욕하고 싸움하고 미워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본래 사탄은 천사였기 때문에 매우 얌전하고 점잖고 인격적인 면도 있습니다. 정직하고 점잖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예의와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변장술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앞에 가서 한번 자존심을 건드려보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를 냅니다. 그런 사람은 매우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아주 인격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더러운 것이지요.


 참된 신앙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 무질서한 것같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는 수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안목에는 사회 정의라든지 인간의 도덕적인 기준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 안에서의 질서와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


 이 선은 도덕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생명체이십니다. 그래서 이 선이 샘물이 흐르듯 흘러나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선이 없습니다. 전부 다 만들어 낸 선입니다. 아무리 점잖고 인격적이라도 속에는 악이 있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좀 더 인격적이고 정직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를 과시하는데 그것도 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생명의 본질인 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사람들이 꾸며낸 선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이 흘러나올 수 있는 샘이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육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이 좋건 나쁘건 믿음이 자랐건 자라지 못했건 간에 기본적인 생명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똑같이 있기 때문에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생명을 가로막고 있는 육신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이 약화된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는 통로가 조금 더 열리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1:23-30]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은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육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할대로 약해져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입니다. 바울은 엄청난 어려움 이외에도 육신의 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 라고 했습니다. 그 병이 낫도록 세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 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게 머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받은 구원과 생명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바울이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바울은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육신의 생각이 완전히 약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어려움을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만큼 하나님의 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시련을 통과하면 할수록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시련과 고난을 이겨가는 가운데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시련을 통해서 얼마만큼 육신의 생각이 약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시련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만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실 바탕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 선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선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사탄의 세력


[시편 14:4-5]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침범하여 집어 삼키려고 했고 영적으로는 사탄이 이스라엘 민족을 삼키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도 핍박을 받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습니다. 특히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데, 그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핍박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사탄은 그 생명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의인의 세대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는 말씀은 예언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2천 년 동안 온 세계에 흩어졌고 여러 가지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 38:16]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2천 년 동안이나 온 세계에 흩어지도록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구름이 땅에 덮임같이 많은 수의 곡이란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옵니다.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 땅"은 이스라엘 땅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어 알게 하려 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2천 년 동안 온 세계에 흩어져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처럼 온 세계 사람들이 또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곡이 이스라엘을 치다가 망하게 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계신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예수님을 배척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문에 그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뜻에서 의인이며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음으로써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령이 함께하신 교회가 의인의 세대입니다. 핍박과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하셨어도 떡 먹듯이 먹혀지는 핍박과 억울함을 당했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물 끓듯이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큰일났습니다.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게하시의 눈이 열리면서 천군 천사들이 옹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아람 군대가 다 물러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세대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일 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 하는 말씀이 현재는 바로 우리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가난한 자에게는 주님이 피난처가 되십니다. 가난한 자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하는 찬송가(79장)도 있지 않습니까.




[시편 14: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 민족이 1년에 수십만 명씩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소련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라크에서 아랍 회의가 열렸는데, 그 회의 주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련에서 대거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으니 그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안에서는 아랍 진영과 이스라엘이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이 강해 당시에는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온 세계로부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주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으나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 와 같이 우리도 역시 적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는 말씀은 어느 날 예수님이 시온에 재림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감람산에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가까이 왔습니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부르짖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우리에게도 세상 속에서 많은 어려움과 핍박과 환난이 앞으로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가운데 언제나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