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1-5]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이 시편 15편은 사무엘하 6장에 있는 말씀과 연관이 있고,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때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다윗 왕이 법궤를 자기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후 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장차 솔로몬 왕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지어지고 그 성전 안에 법궤를 안치하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소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금은 회교 사원이 들어서있는데 그 안에 있는 큰 바위는 이삭을 바친 자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자리는 장차 솔로몬 성전이 지어질 자리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그 가나안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부스 족속이라는 아주 강한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갈렙이라는 사람이 그 지경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법궤가 완전히 안치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된 이후로 전쟁을 많이 하여 가나안을 다 정복했던 것입니다.
법궤의 진정한 의미一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그 뒤에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는데 그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던 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민수기 7장을 보면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고 또 같은 레위 지파 자손이라도 아론의 자손 외에는 제사장 직분을 할 수 없습니다. 고핫 자손 사람들이 법궤를 메고 운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소에 실어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라는 사람이 그것을 붙들다가 죽었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 붙들었다고 해서 당장 죽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 뜻의 내용을 확실히 잘 모르고 또 그림자적인 의미를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레에 실린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그걸 붙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 법궤는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법궤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십계명을 써놓은 두 돌비가 보관된 궤입니다. 그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려고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마태복음 16:21)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이를 제지하려는 베드로의 말이 나옵니다. "주여 그리 마읍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복음 16:23)하신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법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그 육신으로서 실천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십계명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그 십계명을 완성시키려고 육신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산 돌이 아닌 생명이 없는 돌에 새겨진 율법입니다. 그 돌에 새겨진 율법은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의 마음 속에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 로마서 6장, 7장을 읽어 보면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알게 해서 죽도록 만드는 것이 옛 계명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완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계명의 뜻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39)하는 것이 그 근본 뜻이니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계명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그 말씀대로 우리들을 당신 자신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었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산 돌이신 예수님과 법궤는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편 법궤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짓고 제일 중심인 지성소 안에 법궤를 안치시키면 거기가 시은소가 됩니다. 즉, 바로 그 법궤의 덮개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시은소가 되는 것입니다. 시은소 끝에는 두 그룹이 나래를 펴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5:20). 곧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 말씀이 성전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로 말하면 말씀이신 주님, 산 돌이신 주님, 즉 교회 안, 지성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머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몰랐던 '웃사'
사무엘상 4장 이하에 엘리 제사장이 잘못하여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갔는데, 그 법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블레셋 사람에게 저주가 내려지자 그들은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도 없고 레위 지파도 없으니까 수레를 만들어 소로 끌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로 법궤를 돌려 보냈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갈 때에 새끼를 뒤에 떼어놓고 앞으로 가게 합니다. 그 어미 소가 새끼를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죽 가면 이 법궤가 이스라엘의 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린 큰 재앙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울면서 앞으로만 자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는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법궤와 암소에 대한 얘기는 현재 우리들이 자기 인정에 끌리면 교회를 메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정이나 세상에서 끌어당기는 유혹이 마음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꾸준히 주님을 향해서 참고 견디며 나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붙들다가 즉사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무시하고 마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도와줄 수 없고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그 법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약시대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실패를 하거나 예수님이 넘어지거나 예수님이 패배를 하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파심에서인지 순간적인 생각이었는지 법궤가 넘어질까 해서 붙들었기 때문에 즉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그 영광을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법궤가 사람이 붙들지 않으면 넘어지고 깨져 버린다면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우상적인 대상에 불과한 것 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손에 붙들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잡혀야 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지극하고 또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교회를 내 힘으로 이끈다든지 내가 아니면 무엇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며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소위 교회가 성령과는 전혀 관계 없이 인간의 힘으로 경영되고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이 다 되어갑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이나 의견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성령의 인도라는 확실한 근거 아래서 한다면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염려한 나머지 충고를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제안을 했다가 그 제안이 통과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망을 합니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삐뚤어지고 속이 상해 믿음의 생활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경영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법궤를 그 안에 모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수없이 많은 번제를 드린 내용이 열왕기상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이 성을 짓지는 않았지만 법궤를 모신 것은 성전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지표, 민족의 장래가 장차 하나님의 법궤가 형성되어서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것이 목적임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는 예루살렘입니다. 가나안 땅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고 그곳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겨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일은 단순히 다윗의 마음속에서 원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의 일환으로 다윗의 마음속에 그 동기가 불어넣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재림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법궤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도시가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재림하셔서 온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때 법궤를 거기에 모시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전부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원대한 경영으로서 역사의 한 그림자이고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법궤는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지만 그 법궤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 40년을 살았고, 그 법궤가 갈 때에 요단강 물이 갈라졌고, 법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기 시작했고,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에는 언제나 승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은 하나님의 경영이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다윗이 감동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편 15편을 시로 읊고 찬송한 것입니다.
[시편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다윗이 이 시를 읊은 역사적인 배경을 알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나 주의 장막에 살 수 없고, 아무나 주님이 계시는 성산에 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고 교회에 잠깐 다녀간 사람들은 많지만 참으로 신앙 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열 문둥이가 깨끗해졌는데 주님께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주의 성산, 주의 장막은 이스라엘의 이상이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산이고 주의 장막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그 안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진리를 말함
[시편 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이 말씀을 그대로 읽으면 도덕적인 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정직이라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말하는 것,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정직입니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요한복음 8:43-44]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에 이 근본적인 거짓말은 사탄의 말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거짓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짜 이단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시편 15편 2절부터 나오는 여러가지 행위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읽을 말씀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도받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는 것은 전부가 오늘 날 구원받은 사람 간에 되어지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면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되게 하는 법이 형성되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새 계명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고 그 분이 사랑의 계명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새 계명을 성령으로 지켜가는 삶입니다. 서로가 성령의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야 하며 서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혀를 주의하라
[시편 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가 더 깊이 읽어야 됩니다. 이 말씀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 피차 간에 헐뜯는 것이나 누구 흉을 보는 것들은 주의할 뿐만 아니라 하지 않아야 됩니다. 누구를 참소한다는 말은 누구를 헐뜯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누구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성경 말씀대로 한 사람이 권면하고 다음에 두 사람이 권면하고 그래도 그 죄가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면, 마태복음 18장에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7)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교제를 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어떤 일이 생기면 말이 얼마나 빠른지 어디서 무슨 소문이 났다 하면 그냥 한꺼번에 확 퍼져 버집니다. 우리 모임에도 조금 그런 경향이 있는데 주의하셔야 합니다. 물론 좋은 얘기는 많이 퍼지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얘기는 어떤 말을 내가 들었으면 내게 와서 정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소식은 그냥 묻어 두자는 뜻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소문으로 퍼지는 것은 결코 덕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염려하는 의미에서 책임있는 사람들과 의논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훼방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 간에 거짓말을 해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히 주의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장막인 교회 안에서의 삶이 형성되는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와 망령된 자에 대한 태도
[시편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망령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명기 5:11)하는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은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를 마음으로 멸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학식이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지위가 있건 없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가 간절하면 마음속에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말없이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귀하게 여겨집니다. 무엇인가 조금 알면 자기를 드러내려고 애쓰고, 자기 신앙을 과시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숨은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변치 아니하며
[시편 15:4]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너무 쉽게 서원을 해도 안 됩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 나면 주님 앞에 조용히 어떤 결심을 합니다. 제 경우에는 주님을 위해서 굶어 죽을지라도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종종 헌금을 너무 과하게 작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한테 문의해 오는 사람 가운데 자기 남편 모르게 어떤 서원을 했는데 나중에 그 남편이 알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서원은 무효입니다. 민수기를 자세히 읽어 보면 거기에 나옵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어떤 약속을 했다가 나중에 부모가 나와서 반대하면 그것도 무효가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권이 있을 때 주님께 약속하면 그것은 서원입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에서 "해로울지라도"라는 말은 그 서원한 것을 내가 갚으려고 하면 내 육신상의 해로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변치 않아야 된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기분으로 서원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약속을 실행할 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을 했으면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신의를 저버린다든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무엇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주님 앞에 약속하고서도 그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은 특별히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입으로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내 생활이 그것을 실증해야 됩니다. 이걸 지금부터 꼭 지켜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모임 안에서는 누구든지 믿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부터 확실히 실행이 될 수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이 서원은 주님 앞에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교회가 형성되는데 말에 신용이 없고 약속한 것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됩니다. 주님 앞에 결정한 서원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함부로 너무 쉽게 아무 생각 없이 듣기 좋으라고 어떤 약속을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한다는 말씀을 꼭 잊지 말고 생활합시다.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생활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여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한다'는 말은 어떤 형제나 자매가 너무너무 어려운 사정에서 돈을 빌리는데 이자를 받고 빌린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꼭 생각해서 실행해야 합니다. 실행할 수 있으면 마음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감사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이 마음에 감사가 없고 자유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집 안에서, 참 교제 안에서 허물 없이 자유롭게 교제하며 살 수 있는 마음의 축복이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뿌리를 깊이 박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마음에 거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8:31)는 말씀처럼.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고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법궤입니다. 그 말씀에 뿌리를 박을 때 아무리 어려움이 있고 풍랑이 일고 세상이 어렵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형성되고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 주님의 집 안에, 그 성산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큰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이 시편 15편은 사무엘하 6장에 있는 말씀과 연관이 있고,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때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다윗 왕이 법궤를 자기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후 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장차 솔로몬 왕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지어지고 그 성전 안에 법궤를 안치하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소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금은 회교 사원이 들어서있는데 그 안에 있는 큰 바위는 이삭을 바친 자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자리는 장차 솔로몬 성전이 지어질 자리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그 가나안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부스 족속이라는 아주 강한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갈렙이라는 사람이 그 지경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법궤가 완전히 안치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된 이후로 전쟁을 많이 하여 가나안을 다 정복했던 것입니다.
법궤의 진정한 의미一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그 뒤에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는데 그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던 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민수기 7장을 보면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고 또 같은 레위 지파 자손이라도 아론의 자손 외에는 제사장 직분을 할 수 없습니다. 고핫 자손 사람들이 법궤를 메고 운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소에 실어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라는 사람이 그것을 붙들다가 죽었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 붙들었다고 해서 당장 죽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 뜻의 내용을 확실히 잘 모르고 또 그림자적인 의미를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레에 실린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그걸 붙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 법궤는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법궤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십계명을 써놓은 두 돌비가 보관된 궤입니다. 그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려고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마태복음 16:21)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이를 제지하려는 베드로의 말이 나옵니다. "주여 그리 마읍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복음 16:23)하신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법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그 육신으로서 실천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십계명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그 십계명을 완성시키려고 육신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산 돌이 아닌 생명이 없는 돌에 새겨진 율법입니다. 그 돌에 새겨진 율법은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의 마음 속에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 로마서 6장, 7장을 읽어 보면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알게 해서 죽도록 만드는 것이 옛 계명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완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계명의 뜻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39)하는 것이 그 근본 뜻이니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계명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그 말씀대로 우리들을 당신 자신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었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산 돌이신 예수님과 법궤는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편 법궤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짓고 제일 중심인 지성소 안에 법궤를 안치시키면 거기가 시은소가 됩니다. 즉, 바로 그 법궤의 덮개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시은소가 되는 것입니다. 시은소 끝에는 두 그룹이 나래를 펴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5:20). 곧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 말씀이 성전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로 말하면 말씀이신 주님, 산 돌이신 주님, 즉 교회 안, 지성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머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몰랐던 '웃사'
사무엘상 4장 이하에 엘리 제사장이 잘못하여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갔는데, 그 법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블레셋 사람에게 저주가 내려지자 그들은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도 없고 레위 지파도 없으니까 수레를 만들어 소로 끌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로 법궤를 돌려 보냈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갈 때에 새끼를 뒤에 떼어놓고 앞으로 가게 합니다. 그 어미 소가 새끼를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죽 가면 이 법궤가 이스라엘의 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린 큰 재앙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울면서 앞으로만 자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는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법궤와 암소에 대한 얘기는 현재 우리들이 자기 인정에 끌리면 교회를 메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정이나 세상에서 끌어당기는 유혹이 마음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꾸준히 주님을 향해서 참고 견디며 나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붙들다가 즉사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무시하고 마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도와줄 수 없고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그 법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약시대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실패를 하거나 예수님이 넘어지거나 예수님이 패배를 하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파심에서인지 순간적인 생각이었는지 법궤가 넘어질까 해서 붙들었기 때문에 즉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그 영광을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법궤가 사람이 붙들지 않으면 넘어지고 깨져 버린다면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우상적인 대상에 불과한 것 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손에 붙들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잡혀야 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지극하고 또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교회를 내 힘으로 이끈다든지 내가 아니면 무엇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며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소위 교회가 성령과는 전혀 관계 없이 인간의 힘으로 경영되고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이 다 되어갑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이나 의견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성령의 인도라는 확실한 근거 아래서 한다면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염려한 나머지 충고를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제안을 했다가 그 제안이 통과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망을 합니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삐뚤어지고 속이 상해 믿음의 생활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경영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법궤를 그 안에 모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수없이 많은 번제를 드린 내용이 열왕기상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이 성을 짓지는 않았지만 법궤를 모신 것은 성전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지표, 민족의 장래가 장차 하나님의 법궤가 형성되어서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것이 목적임을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는 예루살렘입니다. 가나안 땅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고 그곳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겨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일은 단순히 다윗의 마음속에서 원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의 일환으로 다윗의 마음속에 그 동기가 불어넣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재림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법궤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도시가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재림하셔서 온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때 법궤를 거기에 모시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전부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원대한 경영으로서 역사의 한 그림자이고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법궤는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지만 그 법궤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 40년을 살았고, 그 법궤가 갈 때에 요단강 물이 갈라졌고, 법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기 시작했고,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에는 언제나 승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은 하나님의 경영이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다윗이 감동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편 15편을 시로 읊고 찬송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읊은 역사적인 배경을 알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나 주의 장막에 살 수 없고, 아무나 주님이 계시는 성산에 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고 교회에 잠깐 다녀간 사람들은 많지만 참으로 신앙 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열 문둥이가 깨끗해졌는데 주님께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주의 성산, 주의 장막은 이스라엘의 이상이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산이고 주의 장막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그 안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진리를 말함
이 말씀을 그대로 읽으면 도덕적인 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정직이라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말하는 것,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정직입니다.
여기에 이 근본적인 거짓말은 사탄의 말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거짓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짜 이단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시편 15편 2절부터 나오는 여러가지 행위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읽을 말씀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도받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는 것은 전부가 오늘 날 구원받은 사람 간에 되어지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면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되게 하는 법이 형성되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새 계명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고 그 분이 사랑의 계명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새 계명을 성령으로 지켜가는 삶입니다. 서로가 성령의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야 하며 서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혀를 주의하라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가 더 깊이 읽어야 됩니다. 이 말씀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 피차 간에 헐뜯는 것이나 누구 흉을 보는 것들은 주의할 뿐만 아니라 하지 않아야 됩니다. 누구를 참소한다는 말은 누구를 헐뜯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누구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성경 말씀대로 한 사람이 권면하고 다음에 두 사람이 권면하고 그래도 그 죄가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면, 마태복음 18장에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7)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교제를 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어떤 일이 생기면 말이 얼마나 빠른지 어디서 무슨 소문이 났다 하면 그냥 한꺼번에 확 퍼져 버집니다. 우리 모임에도 조금 그런 경향이 있는데 주의하셔야 합니다. 물론 좋은 얘기는 많이 퍼지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얘기는 어떤 말을 내가 들었으면 내게 와서 정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소식은 그냥 묻어 두자는 뜻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소문으로 퍼지는 것은 결코 덕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염려하는 의미에서 책임있는 사람들과 의논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훼방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 간에 거짓말을 해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히 주의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장막인 교회 안에서의 삶이 형성되는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와 망령된 자에 대한 태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망령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명기 5:11)하는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은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를 마음으로 멸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학식이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지위가 있건 없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가 간절하면 마음속에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말없이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귀하게 여겨집니다. 무엇인가 조금 알면 자기를 드러내려고 애쓰고, 자기 신앙을 과시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숨은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변치 아니하며
너무 쉽게 서원을 해도 안 됩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 나면 주님 앞에 조용히 어떤 결심을 합니다. 제 경우에는 주님을 위해서 굶어 죽을지라도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종종 헌금을 너무 과하게 작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한테 문의해 오는 사람 가운데 자기 남편 모르게 어떤 서원을 했는데 나중에 그 남편이 알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서원은 무효입니다. 민수기를 자세히 읽어 보면 거기에 나옵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어떤 약속을 했다가 나중에 부모가 나와서 반대하면 그것도 무효가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권이 있을 때 주님께 약속하면 그것은 서원입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에서 "해로울지라도"라는 말은 그 서원한 것을 내가 갚으려고 하면 내 육신상의 해로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변치 않아야 된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기분으로 서원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약속을 실행할 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을 했으면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신의를 저버린다든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무엇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주님 앞에 약속하고서도 그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은 특별히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입으로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내 생활이 그것을 실증해야 됩니다. 이걸 지금부터 꼭 지켜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모임 안에서는 누구든지 믿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부터 확실히 실행이 될 수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이 서원은 주님 앞에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교회가 형성되는데 말에 신용이 없고 약속한 것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됩니다. 주님 앞에 결정한 서원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함부로 너무 쉽게 아무 생각 없이 듣기 좋으라고 어떤 약속을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한다는 말씀을 꼭 잊지 말고 생활합시다.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생활
여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한다'는 말은 어떤 형제나 자매가 너무너무 어려운 사정에서 돈을 빌리는데 이자를 받고 빌린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꼭 생각해서 실행해야 합니다. 실행할 수 있으면 마음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감사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이 마음에 감사가 없고 자유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집 안에서, 참 교제 안에서 허물 없이 자유롭게 교제하며 살 수 있는 마음의 축복이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뿌리를 깊이 박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마음에 거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8:31)는 말씀처럼.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고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법궤입니다. 그 말씀에 뿌리를 박을 때 아무리 어려움이 있고 풍랑이 일고 세상이 어렵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형성되고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 주님의 집 안에, 그 성산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큰 특권이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