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시편 16편 1절을 읽어 보면 다윗이 심각한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편 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적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공격을 받았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주님께 피했습니다. 그의 육신이 피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이 믿음 안에서 주님께 피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죽을 뻔했던 일을 많이 당했지만, 그 마음이 언제나 주님께 있었기 때문에 전혀 요동치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주님께 피해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고 넘어지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 16편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표현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예수님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지만, 언제나 하나님 안에 계심으로써 모든 시험과 고난을 이기고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의 근원


[시편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이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며 살기 때문에 현실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또 유혹도 받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을 알지만 실질적으로 생활에 부딪치면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보이는 현실에서 복 받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상급이다"고 말씀을 하셨듯이 세상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신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포로가 되어 사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중에 큰 복을 상실하고 마는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견딜 수 있는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고통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또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믿음이 자라고 성령께 맡길 수 있는 기회가 더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


[시편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이십니다. 이미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세상을 떠났고 사도 바울도, 존 번연 같은 사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는 이 지상에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일이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땅에 있지 않는 성도는 누구를 말합니까? 이미 하나님 앞으로 간 성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앞서간 성도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성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땅이 존재하는 동안에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사탄으로부터 도전과 핍박을 받고 여러가지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주님의 일이 잘 되어가겠지' 하면서 나태해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주님의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이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여러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이겨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워진 의미입니다. 시편 6편 5절에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삶은 너무도 중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일단 죽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이 끝납니다. 그 다음은 쉬는 생활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까지는 주님의 일을 나타낼 어떤 일이 있습니다.





택하신 적은 무리


[신명기 7:6-9]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씀인데 사실은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지상 만민 중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아 주셨고 택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칠십 인이 들어가서 장정 육십만에 이백만쯤 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수효가 많다고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수가 적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숫자가 많아야 교회가 왕성하고 하나님의 일이 더 잘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누가복음 12:32)는 말씀이 있습니다. 적은 숫자가 하나님 앞에 택해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다윗이 이 16편 시를 읊을 때 다윗을 따르는 사람은 육백 명이었고 사울 왕을 따르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 시에서 말하는 "땅에 있는 성도"는 환난 속을 피해다니면서 다윗과 함께했던 성도를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적은 수의 성도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활동하고 신앙생활하는 이 삶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시편 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평소에는 성소에 불을 밝히고 떡을 가져다놓고 향불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휘장이 찢어지면서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우리가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 제사장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는 것은 곧 제사장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성도가 존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깁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제사를 잘 지내면 복 받는다 생각하여 조상을 섬기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섬기는 등 여러 가지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쓸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신이나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다윗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시기 위한 그림자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피 흘려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사는 백성


[출애굽기 3:13-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4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 노릇을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종 노릇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목적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섬기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사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살 때는 사탄의 이름 아래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이름 아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쓸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라고 한 것은 그 하나님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속되어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업


[시편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여호수아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제사장 일을 하는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습니다. 제사장 지파는 성전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잘못 인식되어 꼭 교역자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먹고 사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도였지만 장막을 만들어 팔아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득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사는 신앙생활에서 즐거움이 있는지, 아니면 육신적인 활동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사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에베소서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1절부터 14절까지 읽어 보면 "영광을 찬송한다"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이 마음에 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소득입니다. 슬픔이 있어도 마음에 감사가 있고 어떤 때는 비참하고,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평안이 있고 찬송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 입니다.



[빌립보서 3:17-20]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부끄러운 땅의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더러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삶에 전체 소득이라는 것을 알고 산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기업은 하나님 앞에서 얻는 기업뿐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받는 주님의 아름다운 기업


[시편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여기에 "줄로 재어 준 구역"은 복음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복음 전하는 것이 사실은 측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마태복음 5: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땅을 확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귀다툼하고 욕심부림으로써 많은 것을 차지하는 줄 알지만 하나님의 일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마음이 너그럽고 온유하여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육신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린도후서 5:16)는 바울처럼 마음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예수님 무덤으로 찾아간 마리아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더니 마음의 눈이 열렸을 때에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결함만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은 잊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지 말고 장점을 보아야 됩니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육신적인 것은 전부 단점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쓰이는 면을 볼 때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사람들의 지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십니다.





믿음 안에 사는 생활과 생활의 구원


[시편 16:7-8]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심장이 나를 교훈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양심이 활동하는 곳은 심장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요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주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환난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편 16: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또 주님의 말씀에 교훈을 받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합니다. 단번에 받은 구원은 영의 구원이고, 현재 생활 속에서의 구원은 혼의 구원입니다. 혼의 구원은 결국 마음과 생각의 구원이며 그것이 바로 생활의 구원입니다. 내 생활은 내 마음이 결정한 대로 움직이므로 결국은 마음이 구원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영은 구별해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영도 즐거워하며 육체도 안전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생활의 구원입니다.





부활의 소망


[시편 16:10-11]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예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구원은 육체의 구원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아무리 심하고 이 세상이 아무리 살벌하고 고통스러워도 마지막에는 승리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시련과 심각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없이 이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다윗의 이 찬송처럼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여 주님이 나의 기업이요 상급이고 영원한 복임을 확실히 알고 행할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