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 시편 22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위급한 상황에서 한 기도인데 장차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이 기록되기 위한 실제적인 체험
[사무엘상 23:1-6]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탈취하자 블레셋과 싸워 자기 민족인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는 것을 알고 다윗을 잡으려고 왔고 다윗에게 구원을 받은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오히려 사울에게 붙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다윗이 이 시편 22편을 지은 것입니다. 이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것을 천 년 전에 예언한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대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현실 속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그림자적인 고난과 역경에 처하는 경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왼쪽으로 눕기도 하였고, 호세아는 음탕한 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았습니다. 여자가 결혼한 뒤에도 거리에 나가서 음란한 짓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서 음란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애 속에서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자기가 구출해 준 그일라 사람이 자기를 사울 왕에게 넘겨주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체험하면서 시편 22편을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이스라엘에게 선한 일을 베푸셨던 예수님을 오히려 그들이 미워하고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음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처지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죄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육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활하시기 전까지 잠깐의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 자신이 죄짐을 지고 지옥에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옥 갈 때는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돈도 벌고 지위도 있으면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은 우리 죄를 지셨기 때문이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
[욥기 14:18-22]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건만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은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계를 믿습니다. 자기 운명을 거기에다 걸고 살면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과학 문명을 발전시켜 인공위성이나 컴퓨터 등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지하여 삽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물질만 믿고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망을 끊어 버립니다. 이제 이 세상은 물도 오염되고 공기도 더러워져 누더기 같은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이 환경 오염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들에 의해 이 모든 자연계가 파괴되어 점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갑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영영히 이기십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마지막 힘입니다. 원래 사탄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대적하다가 쫓겨난 자입니다. 이 사탄의 생각이 사람의 육신의 생각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결국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저는 죽은 사람을 한 번 봤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 사탄의 얼굴처럼 됩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며 쫓아 보내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누구나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러셀과 같은 유명한 무신론자도 죽는 순간에는 죽음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고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죽는 사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욥기 14장 22절 말씀처럼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지고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지는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육 시부터 구 시까지 낮이 밤처럼 어두워졌습니다(마가복음 15:33).
[시편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피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는 마음이 즐겁고, 기쁘고 평안할 때에 찬송을 부릅니다. 영혼이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저도 목사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만 참된 찬송은 구원받은 날 비로소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찬송가 210장)라는 찬송을 전에도 불렀지만 그날은 이 찬송을 6시간쯤 계속 불렀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구원받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도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으면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멍에를 메고 채찍을 맞는 노예의 생활 속에서는 찬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죄의 노예가 되어 양심이 괴롭고 마음속에 진정한 해방이 없다면 무슨 찬송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을 때 비로소 찬송이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장면이 나오고 15장에 굉장한 노래가 나옵니다. 춤을 추면서 미리암이 선창을 하면서 찬송을 부르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9:45-46]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신 것은 구원을 받고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는 그들 속에 거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찬송을 부릅니다. 처음 구원받을 때에는 마음이 기뻐서 찬송을 잘 부르다가 조금 있으면 점차 찬송이 없어져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5: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가 한동안은 찬송이 넘쳤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육신은 살아 있어도 죽은 믿음일 때에는 마음의 찬송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찬송의 근원
[신명기 10: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여기 '하나님은 너의 찬송이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본래 하나님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요 사랑이요 영광이신 하나님 안에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말씀대로 찬송을 부르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찬송을 부르게 하셔서 그 안에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찬송이라는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광, 사랑 안에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마음이 기쁘지 않더라도 찬송을 부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찬송 부르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병폐는 오로지 뒷전에서 설교만 듣고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입을 모아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함께 찬송 부르는 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신다고 했는데 이러한 문제를 너무 등한히 여기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찬송을 부르고 안 부르고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 앞에 영광과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편 9:13-14]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또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찬송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고통스럽고 마음에 즐거움이 없던 사람이 복음을 깨달으면 기뻐하면서 찬송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저절로 마음속에 찬송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찬송 부르는 문제를 좀 깊이 생각하면 시편 133편에 나타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봉사하고 교제하는 것도 찬송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제 속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찬송이 절로 나는 것입니다.
[시편 22:4-5]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원수들이 침범할 때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고난의 길
[시편 22:6-1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4-5절과는 달리 이 말씀은 예수님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38-44]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이 마태복음의 내용은 위 시편 말씀에 나타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천 년 전에 자기 자신의 경험 속에 되어진 일을 시로 표현했지만, 그 말씀은 예언이 되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여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무리를 형성하여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역시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이루는 것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고난과 시험을 당하나 그런 일을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갑니다. 결코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 굉장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낙담하지만, 욥처럼 고난을 이기는 생활이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의 핍박
[시편 22:12-13]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황소는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2: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바산은 이스라엘 북쪽의 헐몬 산부터 시작해서 갈릴리 바다에 인접한 들로, 많은 목장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이방 세계와의 경계로 이방 사람들이 가끔 침범해 와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당했던 곳입니다. 힘센 원수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위협하는 모습을 바산의 소들에 비유한 것입니다.
[시편 22:14-15]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기 얼마 전에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목이 마르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가 다 쏟아지고 물이 다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서 땀을 약간만 흘려도 곧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목마르신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몸에서 수분이 다 빠지고 몸이 완전히 힘이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심한 육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인 갈등을 여기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편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사자, 황소와 마찬가지로 개도 이성 없는 짐승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분명히 이들에 의해 수족이 못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습니다.
꺾이지 않는 뼈
[시편 22: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내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로마의 형법에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일 때에 목숨이 질겨 여전히 살아있는 죄수는 망치로 다리를 쳐서 숨지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셔서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와 관련된 영적인 뜻도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1-33]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이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모진 핍박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참교회는 항상 원수들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수의 공격이 없이 편안하게만 산다면 생명력을 잃기 쉽습니다. 사탄은 자기 세력권 내에 있는 세상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있는 교회는 사탄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하는 것처럼 언제든지 핍박합니다.
2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어떤 때에는 교회가 거의 없어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황권이 세상의 정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할 때에는 진정한 교회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가느다란 목숨을 유지해 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가령 루터가 구원을 받은 것도 그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계통은 가느다랗게 이어져 왔습니다. 외적으로 세력이 왕성한 교회를 진정한 교회인 줄 알지만 참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력 있는 말씀에 따라서 역사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회를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거의 실패하는 것 같아도 살아남아 이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18절에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히는 일을 다윗이 실제로 당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 수족이 못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린 경험은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예언했듯이 이 대목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드린 통곡과 눈물의 기도
[시편 22:19-21]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이방 사람들과 싸우고 어떤 때에는 피하기도 하는 역정을 겪었습니다. 다윗의 생명을 노략하는 세력들이 바로 사자요 들소 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5:7-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다윗이 이러한 심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외의 부분도 히브리서에 언급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내용도 있습니다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는 자신을 구원하실 이에게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심각한 고통이 있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현실에 부딪혀서 육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혹 너무도 육신의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도 없으시지만, 그 육신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는 무서운 고통의 과정 속에서 통곡하셨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송하라
[시편 22:22-23]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우리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죄를 지을 때가 많고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십니다.
[히브리서 2:10-12]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우리 속에 있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 생명 때문에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십니다.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입니다. 다른 이들이 듣는 데서는 형제 자매라고 큰소리치며 부를 필요는 없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는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떳떳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사장님, 부장님, 교수님 등등의 높은 직함이나 호칭을 불러 주지 않고 형제라 부르면 속에 은근히 불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이름이 훨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실 주님은 우리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형이 되십니다. 이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들이 생겨나 교회가 이루어지고 여기서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서원
[시편 22:24-25]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서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마음에 어떤 감동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이런저런 서원을 하게 됩니다.
저도 구원받은 이후에 '제가 만일 침례를 받고 교파에서 쫓겨나면 굶어 죽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고 나서 굶어 죽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서원을 해놓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면 큰 어려움과 시험이 부딪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더욱 반드시 갚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약속한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약속한 것을 함부로 어기는 일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말 것이며 일단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
[시편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여기서 겸손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하였습니다(마태복음 5:6). 이것은 단지 육신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풍성한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찬송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땅 끝까지 전해지는 복음
[시편 22: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열방의 모든 족속 중에는 우리들도 들어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한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 한국도 땅끝입니다. 해남에 가도 땅끝이 있지만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땅끝이 우리나라이므로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사 부활 승천하신 후로 오늘날에 이르러 구원의 복음이 이 땅끝까지 전해져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22:28-30]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선포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의 백성을 불러 경배케 하십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살릴 수 없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이 믿음의 후손들로서 주님께 봉사하며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2: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장차 날 백성은 오순절이 되어 성령이 오심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생겨날 천국 백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장차 날 백성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구가 수십억에 달하고 우리 한국에도 4천여 만 명이나 되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맡겨진 축복스런 일이 이미 3천 년 전에 읊어진 다윗의 시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놀랍고 감사합니다.
이 시편 22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위급한 상황에서 한 기도인데 장차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이 기록되기 위한 실제적인 체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탈취하자 블레셋과 싸워 자기 민족인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는 것을 알고 다윗을 잡으려고 왔고 다윗에게 구원을 받은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오히려 사울에게 붙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다윗이 이 시편 22편을 지은 것입니다. 이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것을 천 년 전에 예언한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대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현실 속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그림자적인 고난과 역경에 처하는 경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왼쪽으로 눕기도 하였고, 호세아는 음탕한 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았습니다. 여자가 결혼한 뒤에도 거리에 나가서 음란한 짓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서 음란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애 속에서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자기가 구출해 준 그일라 사람이 자기를 사울 왕에게 넘겨주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체험하면서 시편 22편을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이스라엘에게 선한 일을 베푸셨던 예수님을 오히려 그들이 미워하고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음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처지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죄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육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활하시기 전까지 잠깐의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 자신이 죄짐을 지고 지옥에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옥 갈 때는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돈도 벌고 지위도 있으면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은 우리 죄를 지셨기 때문이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건만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은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계를 믿습니다. 자기 운명을 거기에다 걸고 살면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과학 문명을 발전시켜 인공위성이나 컴퓨터 등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지하여 삽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물질만 믿고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망을 끊어 버립니다. 이제 이 세상은 물도 오염되고 공기도 더러워져 누더기 같은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이 환경 오염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들에 의해 이 모든 자연계가 파괴되어 점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갑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영영히 이기십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마지막 힘입니다. 원래 사탄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대적하다가 쫓겨난 자입니다. 이 사탄의 생각이 사람의 육신의 생각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결국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저는 죽은 사람을 한 번 봤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 사탄의 얼굴처럼 됩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며 쫓아 보내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누구나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러셀과 같은 유명한 무신론자도 죽는 순간에는 죽음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고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죽는 사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욥기 14장 22절 말씀처럼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지고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지는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육 시부터 구 시까지 낮이 밤처럼 어두워졌습니다(마가복음 15:3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피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마음이 즐겁고, 기쁘고 평안할 때에 찬송을 부릅니다. 영혼이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저도 목사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만 참된 찬송은 구원받은 날 비로소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찬송가 210장)라는 찬송을 전에도 불렀지만 그날은 이 찬송을 6시간쯤 계속 불렀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구원받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도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으면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멍에를 메고 채찍을 맞는 노예의 생활 속에서는 찬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죄의 노예가 되어 양심이 괴롭고 마음속에 진정한 해방이 없다면 무슨 찬송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을 때 비로소 찬송이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장면이 나오고 15장에 굉장한 노래가 나옵니다. 춤을 추면서 미리암이 선창을 하면서 찬송을 부르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신 것은 구원을 받고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는 그들 속에 거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찬송을 부릅니다. 처음 구원받을 때에는 마음이 기뻐서 찬송을 잘 부르다가 조금 있으면 점차 찬송이 없어져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동안은 찬송이 넘쳤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육신은 살아 있어도 죽은 믿음일 때에는 마음의 찬송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찬송의 근원
여기 '하나님은 너의 찬송이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본래 하나님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요 사랑이요 영광이신 하나님 안에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말씀대로 찬송을 부르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찬송을 부르게 하셔서 그 안에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찬송이라는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광, 사랑 안에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마음이 기쁘지 않더라도 찬송을 부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찬송 부르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병폐는 오로지 뒷전에서 설교만 듣고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입을 모아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함께 찬송 부르는 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신다고 했는데 이러한 문제를 너무 등한히 여기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찬송을 부르고 안 부르고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 앞에 영광과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찬송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고통스럽고 마음에 즐거움이 없던 사람이 복음을 깨달으면 기뻐하면서 찬송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저절로 마음속에 찬송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찬송 부르는 문제를 좀 깊이 생각하면 시편 133편에 나타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봉사하고 교제하는 것도 찬송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제 속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찬송이 절로 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원수들이 침범할 때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고난의 길
4-5절과는 달리 이 말씀은 예수님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마태복음의 내용은 위 시편 말씀에 나타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천 년 전에 자기 자신의 경험 속에 되어진 일을 시로 표현했지만, 그 말씀은 예언이 되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여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무리를 형성하여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역시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이루는 것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고난과 시험을 당하나 그런 일을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갑니다. 결코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 굉장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낙담하지만, 욥처럼 고난을 이기는 생활이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의 핍박
황소는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산은 이스라엘 북쪽의 헐몬 산부터 시작해서 갈릴리 바다에 인접한 들로, 많은 목장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이방 세계와의 경계로 이방 사람들이 가끔 침범해 와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당했던 곳입니다. 힘센 원수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위협하는 모습을 바산의 소들에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기 얼마 전에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목이 마르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가 다 쏟아지고 물이 다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서 땀을 약간만 흘려도 곧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목마르신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몸에서 수분이 다 빠지고 몸이 완전히 힘이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심한 육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인 갈등을 여기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자, 황소와 마찬가지로 개도 이성 없는 짐승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분명히 이들에 의해 수족이 못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습니다.
꺾이지 않는 뼈
'내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로마의 형법에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일 때에 목숨이 질겨 여전히 살아있는 죄수는 망치로 다리를 쳐서 숨지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셔서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와 관련된 영적인 뜻도 담겨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이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모진 핍박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참교회는 항상 원수들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수의 공격이 없이 편안하게만 산다면 생명력을 잃기 쉽습니다. 사탄은 자기 세력권 내에 있는 세상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있는 교회는 사탄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하는 것처럼 언제든지 핍박합니다.
2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어떤 때에는 교회가 거의 없어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황권이 세상의 정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할 때에는 진정한 교회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가느다란 목숨을 유지해 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가령 루터가 구원을 받은 것도 그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계통은 가느다랗게 이어져 왔습니다. 외적으로 세력이 왕성한 교회를 진정한 교회인 줄 알지만 참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력 있는 말씀에 따라서 역사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회를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거의 실패하는 것 같아도 살아남아 이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18절에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히는 일을 다윗이 실제로 당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 수족이 못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린 경험은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예언했듯이 이 대목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드린 통곡과 눈물의 기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이방 사람들과 싸우고 어떤 때에는 피하기도 하는 역정을 겪었습니다. 다윗의 생명을 노략하는 세력들이 바로 사자요 들소 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심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외의 부분도 히브리서에 언급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내용도 있습니다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는 자신을 구원하실 이에게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심각한 고통이 있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현실에 부딪혀서 육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혹 너무도 육신의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도 없으시지만, 그 육신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는 무서운 고통의 과정 속에서 통곡하셨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송하라
우리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죄를 지을 때가 많고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 생명 때문에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십니다.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입니다. 다른 이들이 듣는 데서는 형제 자매라고 큰소리치며 부를 필요는 없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는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떳떳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사장님, 부장님, 교수님 등등의 높은 직함이나 호칭을 불러 주지 않고 형제라 부르면 속에 은근히 불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이름이 훨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형이 되십니다. 이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들이 생겨나 교회가 이루어지고 여기서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서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서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마음에 어떤 감동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이런저런 서원을 하게 됩니다.
저도 구원받은 이후에 '제가 만일 침례를 받고 교파에서 쫓겨나면 굶어 죽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고 나서 굶어 죽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서원을 해놓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면 큰 어려움과 시험이 부딪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더욱 반드시 갚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약속한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약속한 것을 함부로 어기는 일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말 것이며 일단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
여기서 겸손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하였습니다(마태복음 5:6). 이것은 단지 육신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풍성한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찬송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땅 끝까지 전해지는 복음
열방의 모든 족속 중에는 우리들도 들어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한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 한국도 땅끝입니다. 해남에 가도 땅끝이 있지만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땅끝이 우리나라이므로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사 부활 승천하신 후로 오늘날에 이르러 구원의 복음이 이 땅끝까지 전해져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선포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의 백성을 불러 경배케 하십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살릴 수 없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이 믿음의 후손들로서 주님께 봉사하며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날 백성은 오순절이 되어 성령이 오심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생겨날 천국 백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장차 날 백성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구가 수십억에 달하고 우리 한국에도 4천여 만 명이나 되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맡겨진 축복스런 일이 이미 3천 년 전에 읊어진 다윗의 시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놀랍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