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4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시편 24:1-10]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예루살렘


시편 24편은 다윗 왕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읊은 시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6:12-15]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다가 소가 뛰므로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붙들었다가 즉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법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가기를 두려워하여 이방 사람이면서 다윗의 신하인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가 석 달 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사건과 관련하여 시편 24편이 기록된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고, 특히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 지역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법궤가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 속에 예정해 놓으신 곳입니다.



[히브리서 11: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는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짓는데 그 솔로몬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또 그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형성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지역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운반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에 의한 이스라엘 땅의 정복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말씀은 다윗에 의해서 이스라엘 땅이 정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다윗의 힘에 의해 정복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그 땅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의 칠 족속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일곱 귀신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모든 것이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는 말씀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사실은 예수님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리를 하신 결과 성령이 오시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은 교회가 세워진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승리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승리로 종노릇에서 해방될 피조물

 

[로마서 8:19-23]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은 자연의 세계를 뜻합니다. 자연의 세계가 허무한 데 굴복했다는 것을 썩어짐의 종노릇 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이 모든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을 뜻합니다. 이 모든 자연의 세계도 먼 훗날의 주님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은 곧 이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이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숫자가 가득 차고 영광이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자연의 세계가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지면 모든 자연계도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고 썩어짐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그것이 천년왕국입니다. 예수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되고 예수님이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때 모든 자연계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자유와 영광스러운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터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시편 24: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그 터를 땅 위에 세웠다고 하지 않고 바다 위에 세웠다고 한 것은 예루살렘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동쪽으로는 사해가 있어서 그 양쪽 바다 위에 예루살렘이 솟아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에스겔 47장이라든지 계시록 22장을 보면 이 강은 영적인 뜻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말하는데 그 터에서 강물이 발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했는데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가 터입니다. 그 밑으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 즉 생명의 말씀, 생명의 진리, 생명의 성령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생수로 비유했는데 또 복음의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전 자체도 예수님이시고 제사장도 예수님이시고 이 전체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는 그림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터도 되시고 건물도 되시고 그 안에 제단, 지성소, 등불 전부 다가 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라는 말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를 닦은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그 집은 예수님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온 우주 만물의 근본이고 모든 새로운 세계의 기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 하나님의 계획, 축복, 그 모든 것에는 예수님이 터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위에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치를 생각해 보면 현재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져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예수님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유대인들이 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버린 돌이지만 하나님이 그 돌을 머릿돌로 놓은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그 머릿돌에 연결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집은 사람들이 손으로 짓는 집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 돌이 되는 것은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교회는 진리가 흐르는 곳이고,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계획이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진행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영적인 모든 일은 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의 머릿돌이 되시기 때문에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분명히 산 돌로서 주님과 연결이 되어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지는 것이지 산 돌로서 연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성전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시편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여호와의 산”은 여호와의 성전이 지어질 산, 바로 법궤가 안치된 그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네 아들 중 두 아들입니다. 구약시대는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맡았습니다. 혈통을 좇아서 이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께 드렸다’는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성령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성령의 마음으로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은 산 제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봉사하는 것도 성령을 따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산에 설 자, 그 거룩한 곳에 설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육신의 욕망이나 명예, 이권에 도취되어서 하는 것은 거룩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신령한 것을 깨달았다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려고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면 그것은 전부 ‘다른 불’입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순한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어느 날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은 경험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자기는 아직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어떤 환경에 따라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성령과 관계없이 일을 하면서도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구원받는 역사가 있고 참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과 경건한 삶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거룩한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구원받았으면 그 산에 오를 자인데 솔직하게 주님 앞에서 자기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인정 하고 그 이상 과장하지 말아야 됩니다. 과장하지 않고 자기 있는 그대로 낮은 자세에서 교회 안에 살면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행사와 청결한 마음


[시편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부정한 행위가 아닌 깨끗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는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행동은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또 “마음이 청결하며”라고 했는데 깨끗한 행위는 마음이 깨끗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한일서 2:15)라는 말씀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야고보서 4:4)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했는데 거짓 맹세는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서원하는데 거짓된 서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야고보서 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유의 율법”은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해방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 자유의 율법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자유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유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령 헌금을 한다든지, 교회를 섬긴다든지, 성도가 서로 사랑한다든지 하는 행위를 자신의 의가 아닌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성령으로 하면 그것이 자유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는다는 말은 구약의 율법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되어 있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심판을 받는데 자유의 법대로 심판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온 민족을 다 모아 놓고 심판하실 때에 목자가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분리시킨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또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다”고 하니까 양에 속한 사람들이 “언제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5:35-40). 그것이 자유의 율법을 따라서 했다는 말입니다. 자유의 법을 따라서 성령으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했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반대편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벗었을 때에 입히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을 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했다는 그 일은 성령으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히 예배당 다니고 헌금하고 주의 종을 대접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지만, 주님 앞에 가서 하나도 인정이 안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남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얼굴


[시편 24:5-6]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못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가 영적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연락도 하지만 얼굴을 봐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면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리스도인 피차간의 얼굴 속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처음 구원을 받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구원받은 사람을 만나면 그냥 반갑습니다. 그 반가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 하나님 의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 얼굴에 나타납니다. 서로 만나면 반갑고 안 만나면 보고 싶은 그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지나면 그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사함이 마음속에 넘칠 때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갑고 그리스도인들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그 마음이 식어 버리면 전에 보던 형제나 자매들이 별로 반갑지 않고 감사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이 자라가야 됩니다. 믿음이 자라가야만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이 받을 복


[야고보서 1:22-25]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사람들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치장합니다. 그러나 금방 보고 지나가 버리면 어디 흠이 생겼는지 어디 뭐가 묻었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마치 거울을 본 뒤 금방 제 모습을 잊어 버리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거울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의 거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그 말씀을 실행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읽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이 자유의 율법을 계속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의 나쁜 점, 잘못된 점을 알게 되고 하나씩 하나씩 고쳐갑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좇아서 시련과 고난을 거치고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해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본받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 곧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왕이신 주님이 들어가실 문


[시편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여호와는 신약에서 주님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주님이 만왕의 왕이시고 영원한 왕으로 왕노릇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고 했는데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니까 닫혀 있는 문이 열려야 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문은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음 문이 있습니다.



[시편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을 하는 사람이 문지기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답답하고 애석하게도 주님이 들어가시려는 문을 닫아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21:9-14]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처음에는 신부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가 완성되면 예루살렘 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 자체가 교회의 완성입니다.


 그 성의 문들은 구원받은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문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씌여져 있지만 이스라엘 열 두 지파나 신약시대의 교회나 같은 반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문의 역할이 있습니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이 천국인데 그곳의 문들은 바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신 주님께서 그 문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깨어 주님을 맞이하라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물을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은 문지기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다 문지기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지금 하고 있는데 깨어 있지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면 낭패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