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시편 7:1-17]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이 시는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 "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냐민 사람 구시는 시므이를 말합니다.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받고 읊은 시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따라가면서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를 죽일 수 있는 힘도 있었고 충분히 죽일 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시므이 같은 사람은 아비새가 말한 대로 한 칼이면 당장에 베어 버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이 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 시편을 읽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배워야 할 여러가지 문제들이 다윗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윗


[시편 7:1-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기서 '주께 피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다윗 왕은 오랫동안 사울에게 쫓겨다녔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는데 시므이도 같은 지파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없애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사울과 다윗은 피차간에 원수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원수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질투심에 의해 일방적으로 다윗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소년 때에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임명하셨지만 다윗은 자기의 힘으로 왕권을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은 상당히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사무엘상 20:40-42]

요나단이 그 병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으로 가라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요나단과 다윗이 처남 매부간이기 때문에 이런 언약을 한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은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자기 아버지 사울과는 달리 장차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요나단은 조금도 질투심이 없었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였고, 변함없이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배신하여 악으로 갚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자세 


 그런데 시므이라는 사람은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다윗이 베냐민 지파의 왕권을 빼앗아가고 피를 흘려 사울의 부자를 죽였다고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실은 사울이 블레셋 군사와 싸울 때 블레셋 사람이 사울 부자를 죽인 것입니다. 블레셋 가드 왕이 다윗을 전쟁에 데리고 가려 했을 때에 다윗은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른 장군들도 또 만류하여 다윗은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자신을 따르는 병사에게 "창을 가지고 나를 찔러서 죽여 달라. 내가 저 블레셋 사람에게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면 그가 좋아할 것이라 여기고 전장에서 빠져나와 다윗에게 급히 가서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죽었느냐고 묻는 다윗 왕의 물음에 그 사람은 화살에 맞아서 거의 죽어갈 때에 자기를 보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목숨을 끊어달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가 창으로 찔러서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 얘기를 듣고 통분하여 그 사람의 목을 베게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생각이 없었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여러 번 여러 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없다며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지만 자기가 원수 갚으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는 길에 나와서 "피를 흘린 자여, 가라."고 저주를 하면서 괴로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으니

[시편 7:3-5]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다윗은 사울의 가정에 대해서 전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피난가다가 땅에 떨어져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자기 상에서 같이 먹게 했습니다. 자기와 언약을 맺은 그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하여 므비보셋을 그렇게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시므이가 욕하고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신하 아비새가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 가서 그 목을 베어 오겠다고 하니까 다윗이 "내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군신의 관계였지만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아비새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보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일을 육신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많은 군중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다라고 하자 "누가 내 어머니요 내 동생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내 어머니요 내 동생이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는 말씀들은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영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보면 다윗이 시므이를 죽여 버릴 수 있었지만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시므이를 통해서 자기를 저주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자기 신하더러 뛰어들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다윗은 직접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로마서 12:18-21]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바로 그 사건에 있어서 이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같으면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원수를 갚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직접으로 내가 원수를 갚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을 시켜서 갚는 것도 직접 내가 갚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직접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면 굉장히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실 때에는 내게 상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에도 보면 그 원수를 용서해 주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화풀이를 한바탕 해버리면 당장에는 쾌감이 있을지 몰라도 그 뒤에 여운이 남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양심이 괴롭고 답답하고 가슴속에 메아리쳐 걸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에 손해를 가져옵니다.


 다윗이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시편 7:5)라고 한 것은 자기가 만일 그 시므이가 저주한 대로 그런 악한 일을 했으면 망해서 음부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나 자기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


[시편 7:6-8]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시기 위해서 재판을 하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그 당시의 현실적인 의미가 있지만 먼 미래에 대한 예언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온 세상 백성을 좌우에 갈라놓습니다. 한 무리는 양이고 한 무리는 염소로 갈라집니다. 그때에 주님이 심판주로서, 모든 왕들, 만조 백관이 두르고 있는 가운데 심판을 베푸십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할 때 이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한 것은 먼 미래에 대한 한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는 상태였지만 왕권을 도전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왕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일어나 다윗에게 도전하여 왕권을 운운한 것입니다. 시므이는 마치 사탄의 그림자처럼 나타났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왕이 될 것을 알고 그에 도전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사로잡습니다. 지금 사탄은 주님의 왕권을 빼앗기 위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므이 같은 존재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저주하고, 욕을 퍼붓고 도전하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 36장 내용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땅이 황무지가 되었는데 그 황무지가 다시 복구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36:1-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을 떠나자 이방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서 비웃고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는 굉장히 중한 죄입니다.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땅은 선민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셨고 분명히 약속하셨던 선민의 기업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온 세상에 흩어지게 만들고, 그 땅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기업인 그 땅이 완전히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때가 왔을 때 이번에는 반대로 하나님이 진노를 품으셔서 그 땅을 비웃고 황무하게 만든 이방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수욕이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은 욕을 먹고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끝까지 보고만 계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36장에 있는 말씀대로 이 교회를 향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이천 년 동안 역사해오면서 사탄의 공격을 계속 받았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힘이 없고,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은 역시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외부적으로도 끊임없이 교회를 비방하고 누명을 덮어 씌우는 사람들이 시므이처럼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교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를 발하실 때에 온 세상이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다윗은 기도하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뢰한 다윗


[시편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심장을 살핀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생각과 양심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후 침상이 젖도록 울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 죽어갈 때에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죽었을 때에 탁 털고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는 금식을 하고 울더니 죽고 나니 음식을 먹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나는 저에게로 돌아가지만 저는 내게로 돌아올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승복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처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솔로몬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다윗은 비록 흠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깊은 속마음은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대해서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분명히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는 호랑이가 달려오더라도 엄마 품에 안기면 안심을 합니다. 어린애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그냥 엄마 품에 안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조건없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해 주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성실히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네"라는 찬송처럼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의로운 일도 육신으로 하는 의가 있고, 성령으로 하는 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고 성령에 이끌리지 않고 내가 억지로 율법적으로 하는 것은 자기의 의입니다. 다윗의 의는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시편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은 영혼 구원을 받아야 되고,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은 현재 살아가는 생활에서 구원을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아주 부정직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이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정직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구원받은 후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거기서 다시 빠져 나옵니다. 깊은 양심 속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흐리터분하게 살아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큰 죄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사람에게 지탄받을 만한 일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도 우선은 자기 자신을 깊이 아는 데서 출발하듯이 그 다음 생활 구원 역시 자신을 생활 가운데서 깊이 들여다 보고 문제를 발견하여 그것이 해결될 때 받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문제에 있어서 형제 자매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다투어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면 내가 형제나 자매간에 거리낌이 생기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나 자매들 사이에 어떤 자그마한 다툼이라도 있으면 당장 주님 앞에 기도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간과하고 살게 되면 교제가 막혔는지 안 막혔는지도 생각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이 정직하면 그런 문제를 두고 못 견딥니다. 그러면 자백을 해보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그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씨름을 하다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를 구원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한 것입니다.





방패되시는 하나님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 고모라 성의 백성들이 잡혀가고 그중에 롯도 잡혀갔는데 아브라함이 집에서 키운 군사 318인을 데리고 바벨론 북쪽에 있는 대군을 쫓아가서 그들을 쳐부수고 자기 조카 롯과 소돔 성의 백성들과 그 모든 물질을 전부 다 찾아가지고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혹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저들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너의 방패다"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다윗도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완전히 믿는 데까지는 못 들어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이 세상은 죄가 가득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와 사랑과 윤리, 도덕을 부르짖지만 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오관으로 경험하는 그 모든 일들 속에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고, 깨끗하고, 참된 실체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럽다, 악하다, 불안전하다, 불의하다라는 말들이 모두 상대적인 것입니다. 완전히 깨끗하고, 완전히 의로운 것이 없이 어떻게 더럽다고 말합니까? 완전히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의롭고, 영광스러운 한 분, 그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 앞에 죄가 어떻게 취급되어야 됩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재판장이십니다. 이 세상의 재판장은 법을 따라 재판하지만 재판하는 그 사람 자체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죄인이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의롭고 깨끗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짓는 죄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에 대해 계속적으로 마음에 감사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지은 죄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그 죄도 주님이 피 흘려서 담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비된 심판의 날


[시편 7:12-13]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이런 말씀들은 예언적인 의미로 읽어야 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노아의 홍수로 세상 사람들이 멸망했듯이 불사른다는 그 말씀으로 인해 세상이 불에 탄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개발된 무기가 지하에, 바다 속에, 그리고 공중에 수많이 배치되어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전이라는 말은 불화살이라는 뜻입니다. 이 화전은 오늘날의 폭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웅덩이에 빠지는 악


[시편 7:14-16]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시편의 말씀대로 자기들 딴에는 멋진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성공할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결국 자기가 묻힐 웅덩이를 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이 세상에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람의 꾀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고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어리석은 궤휼을 낳고 잔해를 품은 악인들이 가야 할 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져가는 그 길입니다.



[이사야 50: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지금 일각에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은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어지고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천국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 기독교의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심판을 얘기한다든지 지옥을 얘기한다든지 하는 것은 케케묵은 소리이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을 인간들이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웅덩이 파는 것입니다.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말씀의 방향으로 지금 이 세상 전체가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더러운 죄악이 결코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깨끗하고 거룩하시지 않다면 죄가 죄로 인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세기 4:7)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죄를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됩니다. 완전히 깨끗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할 줄 알아야 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짓는 죄가 완전히 악하고 더러운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의 피의 은혜를 마음속에 더 느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 갚는 것을 자신이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은 죄를 엄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원수를 심판하면 그 심판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그만한 진노를 낼 수 없고, 우리가 죄를 미워한다고 해도 내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이지 거룩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죄를 심판하여도 그것은 정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


[시편 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자기가 시므이를 심판했으면 자신의 분을 해소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한 판단을 내리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의 의로 시므이에게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따라 다윗을 의롭다 해 주는 심판입니다.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와는 정반대가 됩니다. 다윗이 만일 스스로 원수를 갚았으면 자기 의가 되고 그 의는 하나님의 의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십니다. 그 심판은 완전한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았는데 그 의가 우리에게 왔을 때에는 우리를 의롭다 해 주는 의가 됩니다. 그 의는 한편으로는 심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짐으로 완성됩니다.



[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다 짊어지고 완전히 복종하신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사도 요한이 그걸 보고 울었습니다.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장로 중 한 사람이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요한계시록 5:5)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책을 받으시는 순간에 온 천지만물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주변에 있는 영물들과 이십사 장로들과 천군 천사가 다 우렁찬 소리로 찬송을 불렀고 산 위와 땅 위와 땅 아래 바다 속과 모든 만물이 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느 날 그 일이 시행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이 세상, 사탄의 것이 되어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완전히 도로 찾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분으로서 나타나기 위해서 그 모든 만물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이 시편 7편은 다윗이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의에 감사하고 그 이름을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대예언입니다.


[이사야 26:8-9]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그 길목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서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때 이 세상 사람들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를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의로우신지 몰랐는데 심판받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는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다 심판을 배우게 되지만 우리들은 주님의 의를 배움으로써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