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20]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 (셀라)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다윗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제사드릴 수 있기를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시편 9편은 그 일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이 어렵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법궤를 두 번째 옮기는 시도에서 이루어진 일로,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다윗은 법궤를 옮겼을 때에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은 사무엘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아무렇게나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옮길 사람도 준비되어야 하고, 또 예루살렘도 정리되어야 합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지만,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이미 성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이 장차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나아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또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지성소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여 꾸며졌습니다. 실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는 것은 교회가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는 말씀이 있고, 9절 이하에는 성령이 요한을 데리고 가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인다고 했는데, 그 신부는 바로 새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엄청난 예루살렘 성전의 모양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기는 것은 굉장한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법궤가 승리를 상징하지 않는다면 법궤는 예루살렘에 안치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5:12-16]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은 가득 차지 않았지만 그 땅에 죄가 가득 차면,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점령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수 있는 것은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법궤를 옮길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죄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탄이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발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도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과 세상의 멸망은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감사와 찬송
[시편 9:1-2]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모든 것이 준비되어 법궤를 옮겨놓게 될 때에 다윗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모든 기사를 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참으로 어떤 사실을 깨달을 때 이러한 찬송이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것은 법궤가 운반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궤를 모신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처음 법궤를 옮길 때,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가 뛰자 법궤가 떨어질 것만 같아 웃사가 법궤를 잡았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법궤는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는 어떤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 법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머리이십니다. 그 분을 우리가 모시고 살아가는 것, 머릿돌이 되신 주님과 산 돌로서 함께 연결되어 가는 것이 성전이 지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일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고, 다윗 당시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참여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다윗 못지 않게 우리도 감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
[시편 9:3-6]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망시키는 일에 선두로 나서서 싸웠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일 때부터 시작해서 왕이 된 후로도 계속해서 그 일곱 족속을 물리치는 일에 주력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이 4절에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라고 한 것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책망이라는 말은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죄는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의에 대한 말씀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의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 즉 예수님의 부활을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죽으신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신 예수님이시고, 사신 예수님은 의를 성취하신 예수님, 새 생명을 이루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 이 세상 임금이 벌써 심판을 받았다'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탄이 심판받은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이 사탄의 운명으로써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으면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을 죽이는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탄에 속한 세상은 부정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림자인 다윗이 전쟁을 했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은 일곱 귀신을 뜻합니다. 다윗이 그들과 싸워서 승리를 한 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지어질 터전이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터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사탄이 심판되고, 승리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편 9:4)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믿는 우리들을 위해서 변호하시고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9:5-6]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이 말씀은 장차 되어질 일로서 성전인 교회가 완성될 때에 이 세상이 완전히 심판되고 멸망될 것을 말합니다. 또, 현실적으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것이 사탄의 패배이고 주님의 승리임을 말합니다.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된 것을 합니다. 법궤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사랑의 계명이 씌어 있는 돌비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게 나타나신 살아 계신 사랑의 말씀입니다.
압제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주님
[시편 9:8-10]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기서 압제란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제를 말합니다. 사회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민주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압제라는 말을 들으면, 부르조아 계급에게 압제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있는 일이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는 사탄이 사람을 압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난이나 핍박을 당하는 것도 사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악한 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탄의 압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지 않습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하면서 물매돌을 던졌습니다. 그 물매돌 역시 말씀으로 사탄을 때려 부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힘
[사무엘하 6:12-15]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올 때, 베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뛰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사무엘하 6:20-23]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베옷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낮아진 마음을 말합니다. 춤을 추다 보니 옷이 걷혀 몸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부인되는 미갈이 일국의 왕이 체통 없이 계집종에게 몸을 보였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이보다 더 하나님 앞에 낮아질지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포기하고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에 가나안 일곱 족속에게 승리할 수 있었고 마침내 법궤도 예루살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전에 웃사가 죽는 바람에 법궤를 모시지 못했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져서 다윗은 어린애처럼 춤을 추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그만큼 마음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도 분명히 법궤를 모셨는데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교만하고 주님을 완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들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며, 춤 추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
[시편 9:11-12]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하시도다
가난한 자는 돈이 없어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재산이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가난을 취하면서도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 예를 들어 예술가나 문학가나 정치가나 사상가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의롭게 보이고, 정직하게 보이고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것처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가인 같은 사람입니다. 가인은 농사해서 농작물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 농작물은 인간 육체의 활동으로 생겨난 열매입니다. 인간의 정직성이라든지 인간의 의나 노력, 종교나 도덕 따위가 바로 가인의 농사지은 열매를 말합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왕으로서 살았지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자기의 권위를 자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왕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싸워 승리한 것도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있습니다. 그 성령께 우리가 순종하면,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도시, 시온은 교회입니다. 보통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물으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시온에 계십니다.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는 사탄의 세력이 패배하는 만큼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원수는 우리 육신에 붙어있습니다. 즉, 육신은 사탄의 처소입니다. 성경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물론 이 세상도 원수의 세상이지만 육신도 원수입니다.
사망의 문과 시온의 문
[시편 9:13-14]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두 문이 있는데, 하나는 사망의 문이고 하나는 시온의 문입니다. 다윗은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사망의 문 속으로 들어갈 뻔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 했고, 압살롬이 죽이려 했고, 세바라는 사람이 죽이려 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사망의 문 앞에서 사탄으로부터 그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 바울의 생애, 우리의 생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3:24-2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리로 가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망의 문 앞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을 경계로 하여 문 안쪽은 생명의 세계이고 문 밖은 사망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볼 때는 사망의 문이고, 사망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생명의 문입니다.
[로마서 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지옥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는 것은 사망의 문 앞에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가는 곳마다 사망의 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렸지만 주님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위협을 당하고 끌려가는 것, 또 핍박이나 환난 등 우리를 위협하는 문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끌려 들어갈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창녀가 어리석은 청년을 기다리다가 문으로 끌고 들어가는 광경이 나옵니다.
[잠언 7:6-27]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찌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성경에는 두 여자가 상징되어 있습니다. 한 여자는 깨끗한 여자,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참 신부이고, 다른 여자는 여기에 나타난 음란한 여자, 타락한 교회 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여자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열 뿔 있는 짐승을 타고 나오는 음녀, 그 이름은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과 상대되는 것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바벨론은 음녀로서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은 교회로서 완성되어서 영원한 천국이 됩니다.
이것은 음녀와 교회,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대립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음녀에게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음녀의 유혹에 끌려서 사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잠언 5:5-6]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자기가 가는 길이 든든하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가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망의 문 앞에서 싸웠습니다.
주님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는 신앙생활
시편 14절에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는 말씀에서 '딸 같은 시온'은 주님과 약혼한 사이인, 하나님의 딸 같은 시온의 처녀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문 앞에까지 끌려가 아슬아슬하게 구출되었는가 하면 이번에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게 되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완전한 신부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정결한 처녀의 상태에 있습니다.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는 말은 우리가 처녀로서의 순결성을 주님을 향해서 지킨다는 말입니다. 순결성을 지킨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 순결성을 잃어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결한 처녀로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했는데 그 기름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에는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까 너희가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그 기름 부음이 너희를 가르친다'(요한일서 2:27)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개개인마다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기름 부어진 교회 안에 우리 자신들이 맡겨져서 사느냐 못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자기의 은을 은행에 맡겼는지 아닌지에 따라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주님의 책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은 기름 부어진 은행 안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영혼 구원은 단번에 받은 것이고 현재 신앙생활은 정결한 처녀로 꾸며져 가는 생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현재도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구원을 계속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주체는 주님이시므로 내가 스스로 날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현재도 구원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주님의 문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의 문으로 들어가고 사망의 문 앞에서 헤매는지 모릅니다.
멸망 받을 웅덩이
[시편 9:15-16]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힉가욘이란 말은 손을 치켜 들고 올린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뜻입니다. 열방은 일곱 족속입니다. 이 일곱 족속이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고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교회가 들림을 받고 완성됨과 동시에 이 세상은 완전히 멸망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이 세상은 자기가 멸망받을 웅덩이를 스스로 파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세상 전부를 멸망할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잠언 1:10-19]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찌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 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그물 치는 것이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물을 치고 뭔가를 잡으려고 하지만 자기가 걸려 멸망하고 맙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물에 걸리기 직전에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심판
[시편 9:17-20]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 (셀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구원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편은 구원이고 한편은 심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멸망받을 웅덩이를 스스로 파는 것이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는 이 엄청난 사실을 모르면서 스스로 심판을 자처합니다.
'자기가 인생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달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창세기 3장 5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는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본래 천사였던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떨어졌는데, 그 사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사람을 설득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공부를 많이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정치를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압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가장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을 향해서 갑니다. 기쁨이든 만족이든 지배욕이든 명예욕이든 가장 최고라야 됩니다. 그 최고를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다윗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한복음 10:35)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처럼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모르고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말을 받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설득당하고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인류 역사는 그렇게 꾸며져 흘러왔지만 결국 인간은 다 지옥에 갑니다.
승리의 하나님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탄에게 설득을 당해서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그 말씀만 받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구원받은 우리 속사람은 승리하신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신입니다. 세상 철학과 정치와 종교 등은 그 목적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데에 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 속아 멸망당하는 그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온 세계가 힘을 합쳐도 심판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을 받으면 온 세계가 힘을 합쳐도 못하는 일을 말씀 한 마디로 이룰 수 있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모셔지면 성전이 완성되고 그 자리에 심판의 보좌가 놓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문제는 인류 역사 전체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3절,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나타냅니다. 피 뿌린 옷을 입은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48-50]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나의 한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고,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산더미같이 서적이 쌓이고 사람들이 일평생을 투자해서 연구하고 온갖 애를 쓰지만 그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다윗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제사드릴 수 있기를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시편 9편은 그 일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이 어렵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법궤를 두 번째 옮기는 시도에서 이루어진 일로,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다윗은 법궤를 옮겼을 때에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은 사무엘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아무렇게나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옮길 사람도 준비되어야 하고, 또 예루살렘도 정리되어야 합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지만,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이미 성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이 장차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나아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또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지성소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여 꾸며졌습니다. 실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는 것은 교회가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는 말씀이 있고, 9절 이하에는 성령이 요한을 데리고 가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인다고 했는데, 그 신부는 바로 새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엄청난 예루살렘 성전의 모양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기는 것은 굉장한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법궤가 승리를 상징하지 않는다면 법궤는 예루살렘에 안치될 수 없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은 가득 차지 않았지만 그 땅에 죄가 가득 차면,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점령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수 있는 것은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법궤를 옮길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죄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탄이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발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도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과 세상의 멸망은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감사와 찬송
모든 것이 준비되어 법궤를 옮겨놓게 될 때에 다윗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모든 기사를 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참으로 어떤 사실을 깨달을 때 이러한 찬송이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것은 법궤가 운반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궤를 모신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처음 법궤를 옮길 때,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가 뛰자 법궤가 떨어질 것만 같아 웃사가 법궤를 잡았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법궤는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는 어떤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 법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머리이십니다. 그 분을 우리가 모시고 살아가는 것, 머릿돌이 되신 주님과 산 돌로서 함께 연결되어 가는 것이 성전이 지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일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고, 다윗 당시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참여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다윗 못지 않게 우리도 감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망시키는 일에 선두로 나서서 싸웠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일 때부터 시작해서 왕이 된 후로도 계속해서 그 일곱 족속을 물리치는 일에 주력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이 4절에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라고 한 것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책망이라는 말은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죄는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의에 대한 말씀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의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 즉 예수님의 부활을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죽으신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신 예수님이시고, 사신 예수님은 의를 성취하신 예수님, 새 생명을 이루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 이 세상 임금이 벌써 심판을 받았다'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탄이 심판받은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이 사탄의 운명으로써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으면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을 죽이는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탄에 속한 세상은 부정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림자인 다윗이 전쟁을 했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은 일곱 귀신을 뜻합니다. 다윗이 그들과 싸워서 승리를 한 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지어질 터전이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터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사탄이 심판되고, 승리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편 9:4)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믿는 우리들을 위해서 변호하시고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장차 되어질 일로서 성전인 교회가 완성될 때에 이 세상이 완전히 심판되고 멸망될 것을 말합니다. 또, 현실적으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것이 사탄의 패배이고 주님의 승리임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된 것을 합니다. 법궤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사랑의 계명이 씌어 있는 돌비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게 나타나신 살아 계신 사랑의 말씀입니다.
압제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주님
여기서 압제란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제를 말합니다. 사회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민주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압제라는 말을 들으면, 부르조아 계급에게 압제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있는 일이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는 사탄이 사람을 압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난이나 핍박을 당하는 것도 사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악한 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탄의 압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지 않습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하면서 물매돌을 던졌습니다. 그 물매돌 역시 말씀으로 사탄을 때려 부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힘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올 때, 베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뛰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베옷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낮아진 마음을 말합니다. 춤을 추다 보니 옷이 걷혀 몸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부인되는 미갈이 일국의 왕이 체통 없이 계집종에게 몸을 보였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이보다 더 하나님 앞에 낮아질지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포기하고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에 가나안 일곱 족속에게 승리할 수 있었고 마침내 법궤도 예루살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전에 웃사가 죽는 바람에 법궤를 모시지 못했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져서 다윗은 어린애처럼 춤을 추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그만큼 마음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도 분명히 법궤를 모셨는데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교만하고 주님을 완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들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며, 춤 추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
가난한 자는 돈이 없어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재산이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가난을 취하면서도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 예를 들어 예술가나 문학가나 정치가나 사상가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의롭게 보이고, 정직하게 보이고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것처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가인 같은 사람입니다. 가인은 농사해서 농작물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 농작물은 인간 육체의 활동으로 생겨난 열매입니다. 인간의 정직성이라든지 인간의 의나 노력, 종교나 도덕 따위가 바로 가인의 농사지은 열매를 말합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왕으로서 살았지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자기의 권위를 자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왕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싸워 승리한 것도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있습니다. 그 성령께 우리가 순종하면,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도시, 시온은 교회입니다. 보통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물으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시온에 계십니다.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는 사탄의 세력이 패배하는 만큼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원수는 우리 육신에 붙어있습니다. 즉, 육신은 사탄의 처소입니다. 성경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물론 이 세상도 원수의 세상이지만 육신도 원수입니다.
사망의 문과 시온의 문
두 문이 있는데, 하나는 사망의 문이고 하나는 시온의 문입니다. 다윗은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사망의 문 속으로 들어갈 뻔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 했고, 압살롬이 죽이려 했고, 세바라는 사람이 죽이려 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사망의 문 앞에서 사탄으로부터 그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 바울의 생애, 우리의 생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리로 가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망의 문 앞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을 경계로 하여 문 안쪽은 생명의 세계이고 문 밖은 사망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볼 때는 사망의 문이고, 사망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생명의 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지옥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는 것은 사망의 문 앞에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가는 곳마다 사망의 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렸지만 주님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위협을 당하고 끌려가는 것, 또 핍박이나 환난 등 우리를 위협하는 문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끌려 들어갈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창녀가 어리석은 청년을 기다리다가 문으로 끌고 들어가는 광경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두 여자가 상징되어 있습니다. 한 여자는 깨끗한 여자,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참 신부이고, 다른 여자는 여기에 나타난 음란한 여자, 타락한 교회 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여자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열 뿔 있는 짐승을 타고 나오는 음녀, 그 이름은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과 상대되는 것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바벨론은 음녀로서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은 교회로서 완성되어서 영원한 천국이 됩니다.
이것은 음녀와 교회,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대립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음녀에게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음녀의 유혹에 끌려서 사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든든하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가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망의 문 앞에서 싸웠습니다.
주님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는 신앙생활
시편 14절에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는 말씀에서 '딸 같은 시온'은 주님과 약혼한 사이인, 하나님의 딸 같은 시온의 처녀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문 앞에까지 끌려가 아슬아슬하게 구출되었는가 하면 이번에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게 되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완전한 신부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정결한 처녀의 상태에 있습니다.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는 말은 우리가 처녀로서의 순결성을 주님을 향해서 지킨다는 말입니다. 순결성을 지킨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 순결성을 잃어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결한 처녀로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했는데 그 기름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에는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까 너희가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그 기름 부음이 너희를 가르친다'(요한일서 2:27)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개개인마다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기름 부어진 교회 안에 우리 자신들이 맡겨져서 사느냐 못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자기의 은을 은행에 맡겼는지 아닌지에 따라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주님의 책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은 기름 부어진 은행 안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영혼 구원은 단번에 받은 것이고 현재 신앙생활은 정결한 처녀로 꾸며져 가는 생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현재도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구원을 계속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주체는 주님이시므로 내가 스스로 날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현재도 구원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주님의 문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의 문으로 들어가고 사망의 문 앞에서 헤매는지 모릅니다.
멸망 받을 웅덩이
힉가욘이란 말은 손을 치켜 들고 올린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뜻입니다. 열방은 일곱 족속입니다. 이 일곱 족속이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고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교회가 들림을 받고 완성됨과 동시에 이 세상은 완전히 멸망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이 세상은 자기가 멸망받을 웅덩이를 스스로 파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세상 전부를 멸망할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그물 치는 것이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물을 치고 뭔가를 잡으려고 하지만 자기가 걸려 멸망하고 맙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물에 걸리기 직전에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심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구원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편은 구원이고 한편은 심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멸망받을 웅덩이를 스스로 파는 것이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는 이 엄청난 사실을 모르면서 스스로 심판을 자처합니다.
'자기가 인생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달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창세기 3장 5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는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본래 천사였던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떨어졌는데, 그 사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사람을 설득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공부를 많이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정치를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압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가장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을 향해서 갑니다. 기쁨이든 만족이든 지배욕이든 명예욕이든 가장 최고라야 됩니다. 그 최고를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다윗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한복음 10:35)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처럼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모르고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말을 받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설득당하고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인류 역사는 그렇게 꾸며져 흘러왔지만 결국 인간은 다 지옥에 갑니다.
승리의 하나님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탄에게 설득을 당해서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그 말씀만 받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구원받은 우리 속사람은 승리하신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신입니다. 세상 철학과 정치와 종교 등은 그 목적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데에 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 속아 멸망당하는 그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온 세계가 힘을 합쳐도 심판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을 받으면 온 세계가 힘을 합쳐도 못하는 일을 말씀 한 마디로 이룰 수 있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모셔지면 성전이 완성되고 그 자리에 심판의 보좌가 놓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문제는 인류 역사 전체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3절,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나타냅니다. 피 뿌린 옷을 입은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한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고,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산더미같이 서적이 쌓이고 사람들이 일평생을 투자해서 연구하고 온갖 애를 쓰지만 그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