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편]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시편 17:1-15]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편은 사무엘상 22장의 내용이 배경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에게로 갔는데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떡을 주고 칼을 무기로 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사울 왕에게 가서 고발했습니다. 그리하여 80명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시편 17편은 다윗이 제사장 격으로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정직한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


[시편 17:1]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여러 가지 허물이 있는데 자신은 정직하다고 했고 거짓되지 않은 입술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다녔지만 그 마음에 사울 왕을 미워하거나 대적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였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갔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직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뜻 앞에는 흠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당하셨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연악함을 체휼하시는 주님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관련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고 시련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그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넘어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성입니다.


 여기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우리의 약함에 동참을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탄이 아주 교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4:3-9]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사탄의 시험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시험을 예수님은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상태와 연악함을 충분히 아십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험 속에서 이기셨기 때문에 그 승리를 가지고 우리를 시험에서 통과시키고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많은 시험이 닥쳐옵니다. 시험은 반드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나타내시려는 하나님 편의 목적입니다. 시험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확실히 가진다면 그 시험을 물리치고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가치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우리가 죄의 유혹에 넘어져 실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 시험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시험을 받을 그 때가 바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은혜가 그 뒤에 숨어있습니다. 시련이 올 때 시험을 이기지 못하거나 유혹에 넘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 뒤에 오는 은혜는 놓쳐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내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흠없는 예수님 생애의 그림자


[시편 17:2-3]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여기에 말하는 밤은 어두움을 말합니다. 다윗의 경우,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동안은 언제나 주변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도 사탄이 넘어뜨리려고 시험하고 공격하는 가운데 사셨습니다. 시련 가운데서 다윗은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생애를 그림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8]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밤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밤에 주님을 맞이하는 일은 없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님이 밤에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는데 그 밤은 무엇입니까?그 밤은 마음에 빛이 없는 사람들의 밤입니다. 밤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은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한 걸음


[시편 17:4-5]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왜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이라고 했습니까? 아담 이후로 이 세상 사람의 행사는 마음에는 사탄의 생각이 있고 입으로는 사탄의 말을 하고 행위는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사람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사탄의 말을 따라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이 한 분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왕이 되는 길이고 구원자가 되는 길입니다. 구원자, 주권자는 반드시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일부러 고난을 만들어 받을 필요는 없지만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쓰임을 받기 위해서 훈련 받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탄이 뒤에서 내 마음을 움직여서 짓는 죄와 내가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칙에 의해서 짓는 죄가 있습니다. 누가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짓는 죄는 육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법칙입니다. 할 수 있으면 그런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해서 하나님의 일을 도전하게 만드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도전하는 죄가 훨씬 크고 무서운 죄 입니다. 사울이 바로 그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지은 죄는 자기 안에 있는 죄성 때문에 나온 죄이고 사울의 죄는 사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도전한 죄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버려졌고 다윗은 버려지지 않은 것 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모임을 도전하거나 떠나게 되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사탄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있고 무서운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도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계속적으로 부추겼지만 다윗은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욥기 23:10-12]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일정한 음식보다 주의 말씀을 더욱 귀히 여겼다"는 욥의 말과 시편 17편 4-5절에 나타난 다윗의 신앙고백이 동일한 내용입니다.





주의 기이한 인자一부활


[시편 17:6-7]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했는데 기이한 인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기이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시편 17편이나 다른 곳을 보면 다윗이 부활을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이한 인자를 베풀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열쇠입니다. 우리가 부활해버리면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해버린 자에게는 사망의 화살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 중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유대인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구원도 못 받느냐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고 조롱했습니다.



[시편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조롱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 주변에 있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합니다.



[마태복음 27:39-44]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저 같으면 당장에 뛰어내려서 그 조롱하는 무리들을 싹 쓸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된 승리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이적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도들이 이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는 부활이 복음의 주제였습니다. 깊은 어려움과 견딜 수 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 마음속에 한 가지 믿어야 할 것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으면 부활이 있다는 그 말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 그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떠한 시험도 참고 견뎌가면 그 모든 환경을 이기도록 해 주시는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활의 생활입니다. 주위 환경 속에 아니면 마음속에 죽음이 닥쳐오는 그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말 속에는 날마다 부활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이 닥치고 온갖 욕을 당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대처하고 견뎌가면 필연코 부활의 환경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며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기이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 보호 받는 역사


[시편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어느 날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누가복음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 아래 있으면 주님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던 날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그 성령은 모임 안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날 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평안을 얻는다고 해서 죽는 날까지 죄를 안 짓고 걱정과 괴로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을 앎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 속에 있으면 성령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 안에 산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그 성령이 오순절에 오셨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곳입니다.



 성령이 두 가지 역사를 하시는데 하나는 구원받은 생명의 역사이고, 또 하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 있는 것을 팔아서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고 주님의 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령이 계시면 그 두 가지 역사가 병행됩니다. 


 구원받은 역사와 그 다음에 성도가 서로 돕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성령이 계시는 그 안에 있어야 성령의 인도 아래 보호를 받습니다. 이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5-6]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의 영혼 구원이 아닙니다. 시험을 받고 근심하게 되는 그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고 마음으로 견뎌가는 것이 보호 받는 생활입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육신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


[시편 17:9-10]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자기 기름에 잠겼다는 말은 육신적으로 잘 살고, 행복한 생활을 너무 찾으면 마음이 막혀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윤택한 생활이 마음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일에 공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엄청난 손해를 봅니다.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탄


[시편 17:11-12]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마귀들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탄이 항상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눈을 휘둥그리며 계속 돌아보는데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갈 데 못 갈 데 함부로 다닙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유혹을 받아 죄도 짓고 원망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만 가지면 모든 것을 이기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인도 아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구원과 말씀의 칼


[시편 17:13]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주의 칼은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말씀의 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혼 구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 못 받았으니까 구원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활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시편 17:14]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자녀를 키워서 만족하고 많은 상속을 남기는 것은 이 세상 사람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거기에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생활의 구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 소원이 있어야 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생활


[시편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기이한 인자라는 말씀도 여기에서 풀려집니다. 이 말씀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한 사람은 완전히 육신까지도 다 의롭습니다. 다윗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의 형상이었습니다.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님을 볼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형상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형상입니까? 지금 세상에서는 잘나고 못 나건, 힘이 있건 없건 간에 그날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난 것도, 많이 가진 것도 다 소용 없습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 동안 주님의 표준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생활이 있어야 됩니다.


 다윗은 오해와 핍박과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내시는 그 뜻을 따라 충실히 참고 견디며 살아갔습니다. 그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고 거기에 다시 살아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