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편]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편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계에 역사하신 것을 표현했고, 7절부터는 우리 영혼을 건강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자연계와 영적 세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


[시편 147:15-20]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편 147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보내신 말씀이 있고 또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신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자연계 속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계와 영적 세계에 역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천지 만물


[시편 19:1-2]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공중도 하늘이라고 하고 천체도 하늘이라고 합니다. 또 하늘들의 하늘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계시는 영적 세계를 말합니다.


 여기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말에서 "하늘"은 천체를 의미합니다. 천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습니까? 이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겨났으면 별로 의미가 없고 거기에 영광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의 넓이는 수천억만 광년이 됩니다. 빛이 몇천만년 동안 갈 만큼 이 우주가 넓습니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도 작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하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펄펄 끓는 힘을 가진 태양, 그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또 지구의 공전 원리,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원리, 지구가 23.5도 기울어진 원리, 이 지구상에 되어지는 모든 조화들, 이러한 원리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롭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날이 날에게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날은 낮을 말합니다. 하루가 연속되는 과정에서 어떤 지식이 전해진다고 했는데 바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지구가 한 번 자전하면 하루가 이루어집니다. 낮과 밤이 이루어지면서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인간을 통해서는 역사가 꾸며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너무도 세밀하고 정확한 법칙대로 운행되는 것입니다.


 지구가 일정하게 자전을 하고 또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면서 계절이 바뀌고 일 년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도 세밀한 법칙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체가 운행되는 법칙에 따라 지식을 전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이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대로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 또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모든 만물 속에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생각을 하면 이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과학자들은 우주 만물이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연구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을 총동원해도 그 원리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광대한 우주와 인간의 신체적인 조직까지도 전부 알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조금만 생각한다면 그 크신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미련하기 때문에 깨닫지를 못합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세력가들이 약자를 압박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분이 만들었겠냐고 전제를 하니까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속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실지로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전한 평화의 세계, 완전한 이상의 세계를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사탄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을 멸망시키고 사탄을 제거하는 과정이 바로 역사입니다. 사탄에게 속한 자도 함께 심판하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은 완전한 세계를 창조해 가십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모든 것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


[시편 19:3-4]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라고 했는데 자연법칙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귀로는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터키는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터키의 서북쪽에 있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일부분은 유럽에 속해 있고, 일부분은 아시아에 속해 있습니다. 이 터키에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라는 곳도 있고, 두아디라 교회를 비롯하여 사도행전에 나오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터키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 학생들이 아라랏산의 노아의 방주에 대한 얘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아의 방주는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은 못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노아의 방주를 보면 성경 말씀을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역사에서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000년 전에 다윗은 대자연을 보면서 언어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는데 바로 대자연의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하나하나가 전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옛적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주어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3절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했는데 이 모든 만물이 파괴되지 않고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피곤하면 쉬고 밤에 잠을 자는 것도 전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 만물 속에 있는 세밀한 법칙이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농부들이 밭에 밀씨를 뿌리면 밀이 생기고 논에 벼를 심으면 쌀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것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법칙은 전혀 모르고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사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만큼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를 삼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계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했는데 만일 이 천체에 다른 별들이 하나도 없고 태양만 있다면 태양은 아무런 영광도, 권위도 없습니다. 태양 빛은 상대적으로 어떤 물체가 있어야 빛을 거기에 비췰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태양이 존재하는 의미입니다. 천체가 태양을 장막처럼 두르고 있기 때문에 태양이라는 것에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19: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캄캄하고 정적이 감도는 세계에 해가 떠오르면 그 해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고 자기의 신부를 향해서,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는 멋진 표현입니다.


 만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잔디씨를 나무 그늘 밑과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 뿌려 놓았는데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 있는 잔디는 잘 자라고 그늘 밑에 있는 것은 그냥 죽는 수가 많았습니다. 씨는 태양의 열을 받아서 땅속에서 올라오는 온기와 양분으로 말미암아 잎이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태양의 따뜻한 온기에 모든 푸른 식물들이 자라가는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 태양의 강한 힘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물리칩니다. 태양이 어둠을 물리치면서 그 힘으로 모든 만물을 소생케 하는 사실을 힘 있게 달려가는 장사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시편 19: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이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포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아름다움, 자비심, 사랑 등 모든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복음 5:45)고 했는데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계시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술어로 이것을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대자연을 보는 것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을 보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고,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자연을 그리스도인이 보호한다는 것은 더욱 뜻있는 일입니다.





영혼을 소성시키는 주의 율법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율법은 말씀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이고 신약에 오면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해서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영혼이 소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시편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은을 단련하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단련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이 세상에 오셔서 생활 속에서 단련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단련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홈이 없이 완전하시고 순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소생시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살릴 수 있었습니다.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확실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히 지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97-100]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원수는 사탄인데 사람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는 악한 꾀로 사람을 넘어뜨렸고 계속 속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여러 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셋돈 하나를 자신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셋돈에 그려진 형상이 누구의 화상이냐고 묻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했습니다(누가복음 20:22-25). 유대인들은 언제나 사탄의 조종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원수보다 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있으면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확실히 거하면 우리에게 지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하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라고 했는데 노인은 이 세상에 경험이 많고 아는 것이 많습니다. 공자, 석가모니 등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남겼지만, 그러한 교훈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마음의 빛을 밝히는 순결한 계명


[시편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사탄의 교훈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나타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와는 사탄의 말에 현혹되어 선악과를 보는 순간 먹음 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따먹었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나니 벗었다는 것이 발견되어 버렸습니다. 벗은 사람은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담처럼 우리도 어떤 것은 분명히 삼가해야 되는데, 삼가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에 끌려 어떤 일을 행하고 나면 마음에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그것이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죄 지을 순간에 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기 때문에 죄 지을 순간이 오면 죄를 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순간순간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이기고 죄를 지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괴롭고 앞이 캄캄해집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이라는 사탄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탄의 말은 우리 속에서 욕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리를 따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고치는 것이 힘이 듭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기 때문에 축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더듬거리고 자유가 없습니다. 여기 "네게 있는 빛"은 마음의 빛을 말합니다. 마음의 빛은 바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계명 곧 말씀은 순결해서 눈을 밝게 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은 자유가 없고 눈이 밝은 사람은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가 좋은 줄 알지만 오늘날 이 세상은 육신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 짓는 자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밝으면 진정으로 마음이 자유롭고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 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깨끗하지 못한 것은 쉽게 썩어 버립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썩는 것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깨끗지 못하니까 썩어 버립니다. 그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시편 19: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밥상에 앉았는데 갑자기 모든 음식이 다 금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시다. 물론 그 금으로 음식을 사 먹으면 되지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사람에게는 금보다 음식이 더 중요합니다. 실질적으로 사람의 몸에는 음식보다 금이 훨씬 못합니다.


 금은 맛을 느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맛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갈등과 고통이 심하여 말할 수 없이 마음이 공허할 때 어떤 말씀이 내 마음에 깨달아지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금 따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


[시편 19:11-12]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혼자만 아는 죄가 있는데 성경 얘기를 들으면 그것이 튀어나와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말씀 한 마디가 깨달아지면 해결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어지면 자유롭게 됩니다. 죄를 지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해결되어 버리면 죄 짓기 전보다 훨씬 더 힘을 갖게 됩니다. 말씀에 의해서 풀려지느냐 풀려지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시편 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고범죄라는 말은 고의적인 죄입니다.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여기에 "짐짓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마음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에 순종해야 하는데 진리를 다 듣고 나서도 불순종하는 것은 "짐짓 죄"를 범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 습관적인 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계속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죄가 나를 주장해야 되겠습니까? 진리가 나를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불순종하고 자꾸 죄를 지으면 나중에는 그 죄가 나를 완전히 지배해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사는 생활입니다. 양심상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양심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어떤 일을 해 버리면 그 다음에 또 하게 되고 나중에는 양심이 마비됩니다. 죄로 마취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나를 주장하여 죄 밑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어떤 것이 좋지 않다 생각되면 결단을 내려 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죄에 끌려다니면서 결단력 없이 사는 것은 죄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주의 율법을 묵상하는 지혜로운 자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시편 19편 14절에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7장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24)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반석이신 주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있고 늘 그 말씀을 마음에 묵상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긴급한 일을 당할 때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평소에 말씀이 마음에 없으면 그것은 자기 푸념이지 주님 앞에 진정한 기도가 안됩니다. 주님 앞에 진정한 기도는 마음에 있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말씀으로 기도를 하면 주님이 그 말씀 때문에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법칙이고 마음의 법칙이고 우리 생명의 모든 법칙입니다. 말씀이 온 세상을 창조하고 자연질서를 유지해가는 법칙인 것처럼 우리 영혼의 법칙과 신앙생활의 법칙도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축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내 멋대로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해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과는 상관 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라고 했듯이 틀림없이 그 삶에 축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