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1편]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시편 21:1-13]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이 시편 21편은 다윗이 암몬과 아람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지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그의 말과 행동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뜻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10장에 암몬 자손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다윗에 대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편 20편에서 다윗은 그들 연합군과 싸울 때에 환난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1편에서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영광스럽게 되는 예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


[시편 21:1-2]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다윗이 승리한 것은 그의 군사가 강하다든지 전술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승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고 간구할 때에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항상 전쟁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에게도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대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왕으로 군림을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이미 이기셨는데 자칫 잘못 생각하면 마치 우리 자신이 우리 힘으로 전쟁한다고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전쟁은 믿음 안에서 주님이 이미 승리해 놓으신 그 승리에 우리가 참예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11)는 말씀이 있는데 그러한 말씀 역시 이미 주님이 전쟁을 하셔서 승리해 놓으신 그 승리 안으로 우리가 참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일에 우리가 참여를 하고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 일을 나타내시는 과정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원리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기셨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신 일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승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그 믿음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거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만큼 우리 안에서 주님의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을 믿었을 때에 우리 개인에게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재림하실 예수의 그림자


[시편 21:3]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왕들이 면류관 같은 관을 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은 제일 귀한 것으로 꾸몄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그렇지만 모세의 명령으로 지은 장막 성전도 그러합니다. 지성소 안의 벽이나 법궤 등의 모든 기구가 정금으로 싸여 있었습니다. 그 성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육신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별 모양이 없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기 때문에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 때에 그 아름다운 것을 조금 맛본 것뿐입니다. 구원받은 그 순간에는 정말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신성, 아름다운 성품을 잠깐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이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를 외형적으로 보면 별로 볼 것이 없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혹시 교회를 외형적으로만 보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신앙생활의 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 못 보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참으로 즐겁고 영광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두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겉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을 보는 것입니다. 성전 안이 금으로 꾸며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시편 27편에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편 27:4)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바로 주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조금씩이라도 맛보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모르고 살 때 상대적으로 물질에 더 가치를 두게 되고 세상의 오락이나 즐거움에 마음이 끌려들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4-7]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육신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간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구원받은 그 사실은 우리 마음에 비추어진 그 빛이 가장 아름답고 값지고 보배로운 것, 귀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그냥 상식적으로 교리적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접촉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너무 놀랍고 복스러운 일입니다. 현재의 생활 속에서 조금씩 그러한 영광을 알아가면서 살아갈 때 세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왕의 면류관을 쓴 것은 장차 주님이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생활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면류관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결국 내 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생활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입니다.


 자기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는 바울은 얼핏 보면 굉장히 자기를 자랑하고 자긍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세상에 빠져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난과 부활의 주님


[시편 21:4-6]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님께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는데 그 승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승리이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이 승리한 그 승리에 동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고 하나님께 기름 부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가 됩니다. 또 다윗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서 영광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이 대표자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대표로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도 우리의 대표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20)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대표로 죽었으니까 우리도 죽었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그 주님의 부르짖음 속에 내 부르짖음도 같이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이 부활하실 때에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이 부활하게 됩니다. 주님은 고난과 부활의 대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 십자가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경험을 하면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화를 낼 때 내 속에서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십자가가 떠오르면 화를 낼 필요가 없게 됩니다. 화를 내는 나의 옛사람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함께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유혹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 받을 수 있는 나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모든 것이 나를 대표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나도 있습니다.





핍박 받는 교회


[시편 21:7-8]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마태복음 23:29-3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가장 표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가르치는 정통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죄인이다, 독사의 새끼들이다'라고 말할 사람은 그 시대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두움이 짙은 곳에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탄이 거룩한 척하고 신령한 척하는 속에 숨어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행동이 나타나니까 사탄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사탄의 비밀은 우리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환경 속에도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고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면 우리 주변에 있는 어두운 면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비밀입니다. 어떤 말씀이 와서 마음속에 나타나면 자기가 굉장히 많은 죄가 있고 행하는 모든 것이 죄였구나 하는 것이 발견될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숨어 있는 사탄을 찾아내서 멸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육신에도 숨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여 사탄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은 구원받았지만, 우리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빛을 받으면 받는 만큼 내 안에서 악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할수록 자신이 낮아지고 자신의 부정적인 면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영적이면 영적일수록 자기 안에 더 부정적인 것, 더러운 것, 악한 것, 위선적인 것이 자꾸자꾸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귀신 들린 사람이 제일 많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사탄이 자기를 노출시킨 것입니다. 주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 구원받은 사람을 핍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시는 곳이고 주님이 일을 나타내시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 주변에는 언제나 핍박이 따릅니다. 핍박을 전혀 받지 않는다면 벌써 거기는 사탄에게 점령된 세상입니다. 사탄이 점령을 해버렸기 때문에 공격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욕과 핍박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거짓으로 너희를 욕하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탄의 맹렬한 노와 하나님의 심판


[시편 21:9]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사탄의 맹렬한 노가 발동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조롱하는 것,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 뱉고 욕한 일들이 맹렬한 풀무에 해당됩니다.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이 풀무 불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또 한 사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 맹렬한 풀무 불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서운 풀무 불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자체가 사탄을 멸망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 멸망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탄 자신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육신은 사탄의 소굴이 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의 연단 뒤에 오는 믿음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금이나 은을 불에 달구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을 불에 녹이면 녹일수록 불순물이 제해지고 순금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 속에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불순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신 속에 불순물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불순물이 제해집니다. 그 불순물이 사탄의 비밀입니다. 이것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달구어야 불순물이 제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을 거친 후 순수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시련과 고난은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련이나 시험이 올 때에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면 징계로 보고 하나님의 채찍을 당연하게 맞아야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이 없으면 믿음을 단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견뎌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육신의 고난이 이미 죄를 그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오는 어떤 고난도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맡기면 고난을 이길 수 있고 틀림없이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


[시편 21:10]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적 그리스도는 사탄의 아들입니다. 세상 마지막에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대결하게 됩니다. 사탄의 아들인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5-7]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불법의 비밀"이라는 것은 사탄의 비밀이고 적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세상에서 조직적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법의 비밀은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노출됩니다. 현재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노출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 버리면 적그리스도의 세상이 됩니다. 이 세상 배후에는 사탄의 비밀이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계획대로 세상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끌려가지 말고 참 믿음으로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시편 21:11-13]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결국 마지막에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적그리스도와 온 세계의 군대로서 도전을 받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라고 했듯이 결과적으로 주님이 승리하시고 영원히 높임을 받습니다.


 계시록 5장에 온 천지 만물이 찬송하는 광경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리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로서 이 노래가 읊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같이 섞여 살다 보면 혼돈상태에 빠지고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사탄의 계획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순간순간에 직면하는 그 모든 환경 속에서 믿음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백성이라는 확실한 믿음 안에서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 생활 속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