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목자이신 주님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하심을 입은 다윗이 목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사무엘상 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 내용은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에 사울에게 한 말입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다윗의 세 형과 많은 장수들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블레셋 군사 중에 키가 장대하고 힘이 센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 몇 명이 덤벼들어도 당할 수 없을 만큼 힘이 강한 장수였습니다. 그 골리앗 대장을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다윗이 나섰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 골리앗을 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었을까요? 그가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이 그를 해하려고 했을 때 죽인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은혜에 의해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이 길러진 것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도 사자나 곰과 같이 보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한 신앙적인 안목에서 골리앗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군사가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상대해 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것을 계기로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다윗을 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다윗은 양치는 목자이었고 장성해서는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한복음 10:7-12]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목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한 말씀에 우리도 '아멘'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신데 왜 부족함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로만 부족함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생애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도 사람에게서 어떤 힘을 구하거나 어떤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부족함이 없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마음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자기 방법과 노력, 꾀를 동원해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구원과 함께 큰 약속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영혼만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실질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모시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제 영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주님께로 돌아왔으면 무엇이든지 주님이 감독하고 인도해주시는데 뭔가 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틀림없이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구원은 받았지만, 믿는 것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안식처
[시편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초장"은 양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을 말합니다. 초장에서 많은 양 떼들이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참 평화로워 보이고 좋은 느낌을 갖게 되지요.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라고 읊은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무사 안일하게만 지낸 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도 전쟁을 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다 정복하지 못했는데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그 가나안 땅에 사는 칠 족속과 더불어 전쟁을 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을 했고, 왕이 된 후는 평생 전쟁을 했는데도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고 부족함이 없다고 했고, 또 자기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가 6:2-3]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동산에 올라가지 않고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잃어진 양들인 우리들을 다시 찾아서 내려오신 목자가 주님의 동산에서 우리를 먹여 주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양 떼를 먹이는 초장과 동산은 교회를 뜻합니다. 우리가 꼴을 먹고 양식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인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먹이시는 곳이 푸른 초장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있고, 먹을 꼴이 있고, 또 물을 마시는 곳, 그 초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꼴을 먹고 양이 살찌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양으로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꼴을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공부를 해서만 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서로 진정으로 교제를 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도 꼴을 먹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윗은 일평생 동안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 왔지만 내적인 마음의 상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영적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꼴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을 얻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견뎌내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윗처럼 전쟁하는 생활입니다. 전쟁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든지 영양실조에 걸린다든지 하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풍성한 꼴을 먹었기 때문에 전쟁할 때 힘이 있고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고 외치셨는데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39)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을 마신다는 것은 성령의 은혜에 젖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완전히 구별해 놓았습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람들은 무엇이 성령인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면 마냥 육신적으로 평안하고 좋은 방향으로만 나가고 또 복을 주신다고 오해합니다.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강하게 훈련시킵니다. 시련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찾아오는 여러 가지 고난, 어려움, 핍박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육신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육신적인 평안이고, 병도 낫는 달콤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충만했을 때 교회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다 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못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거룩하고 깊은 영적 차원에서 소유한 것을 다 팔아서 내놓으니까 자기도 마지못해 한번 해보려다가 오히려 화를 입었습니다. 재산의 반은 감추고 반은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뿐이냐고 할 때 이것뿐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고, 충성스럽고, 잘 믿는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그런 것입니다. 그는 구원은 받았지만, 성령으로 인도받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성령으로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이나 좋지 않는 비판을 받을 때 마음에 쉽게 화가 납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는 마음 때문에 항상 마음이 쫓기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길을 안다면 거기에 나를 투자할 수 있고 나를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고, 주님이 잔잔한 물가로 자기를 인도해 주신다는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목이 컬컬하고 목마를 때 냉수를 마시면 시원한 것처럼 물가에서 풀을 뜯어 먹고 물 마시고 또 잠들어 쉴 수 있는 그러한 평화로운 상태는 외부적인 것이 아닙니다. 외부적으로는 전쟁이 있지만 그 마음은 평안히 쉬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에는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인 싸움도 있고 자신과의 내적인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평안히 쉴 수 있게 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
[시편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구원받은 사람도 생활 속에서 가끔가끔 영혼이 소생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칠 대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몸이 지친다기보다는 마음이 지치고 힘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거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도 그렇습니다.
굉장히 지치고 도저히 일어날 가망이 없어 막다른 골목에 갔을 때 소생하는 어떤 계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히브리서 4:16)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더 내려갈 수 없으니 올라올 수밖에 없잖습니까. 거기에서 어떤 말씀이 주어지게 되고 다시 소생을 합니다.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굉장히 축복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부활의 권능"은 영혼이 소생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침체 상태, 거의 죽은 상태에서 소생되면 부활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부활의 힘, 부활의 능력, 부활의 권능이라는 것은 죽는 데 있습니다. 심한 어려움을 당할 때, 견딜 수 없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가 가장 희망이 있는 때입니다. 그 어려움은 자기를 포기시키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도, 능력도, 주권도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 심한 어려움이 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그 심한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 영혼이 소생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거의 잡혀 죽을 뻔한 때도 있었고 전쟁하면서도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만 그는 언제나 이 소생하는 힘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다툼이 있고, 화가 나는 것은 자기 권리나 자기 주권이 침해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속성입니다. 자기 주권, 자기 권리를 악착같이 지키려는 그 속성이 육신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포기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57:14-15]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아무나 그 마음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겸손한 자의 마음을 소생시킨다고 했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겸손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진정으로 드릴 줄 아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자기 손으로 피 흘리지 않고 치지 않겠다는 것이 자기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권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소생시키는 힘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는데 그 의의 길은 부활의 길입니다.
[요한복음 16:9-10]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실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길을 통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길이 의의 길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그 의로운 길을 따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의 길은 주님이 부활하신 길이고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시는 곳,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육신의 생각과 마음, 육신의 욕망과 육신의 주권이 십자가에 죽고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시련이 있지만 그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 힘이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고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 육신의 힘은 줄어들고 믿음은 더욱 단련되어 더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주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탄은 이 세상에 사망의 골짜기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사망의 골짜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핍박이나 시련, 세상적인 유혹 등 이 사탄이 우리 앞에 파놓은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창세기 4:9-1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았다'고 한 대로 저주 받은 이 땅에는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는 피를 마신 땅덩어리입니다. 이 지구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피를 몽땅 쏟은 곳입니다. 그 흘리신 피의 효험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가끔가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이르게 되지만 영이 죽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옥 가거나 완전히 멸망 받지는 않지만, 이 세상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구원받은 주님의 양 무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짐승도 쫓아 버리지만 때로는 나무 잎사귀를 끌어당겨 먹여 주기도 하고 또 구렁텅이에 양이 빠졌으면 지팡이의 휘어진 끝으로 목을 끌어 구해 주기도 합니다.
[이사야 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팡이도 역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가 홍해를 갈랐고 또 아론의 지팡이에서는 싹이 났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주의 말씀은 원수를 쫓아버리고,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승리의 생활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었다'는 말은 승리의 상을 뜻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왕이 개선 장군에게 큰 상을 베풀어 그 원수들 앞에서 잔치를 합니다. 다윗의 일평생은 전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동안 사탄과 싸우는 내적인 전쟁과 외적인 전쟁을 합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그 시험에 제자들이 동참했습니다. 어떤 때는 굶주리고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어떤 때는 욕을 먹고 풍랑에 시달리고 하는 가운데 제자들이 함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동참을 하고 그 시험 속에 함께하기보다는 작은 시험이 오면 도망쳐 버리고 피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은 행복된 일이요 큰 축복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반드시 고난과 시련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복음 20:22)고 한 그것은 고난의 잔입니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한 이 잔은 축복의 잔 이고 구원의 잔입니다. 그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얼마나 풍성한 잔치입니까?
영원히 거할 내 집
[시편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세상의 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선입니다. 그 선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선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선한 것을 주장하며 전부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따라오는 것이 없지만 마음은 계속 무엇엔가 쫓기며 쉬지 못하고 사는 세상입니다. 황무지 같은 세상이지만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평생 동안 자기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교제 속에 살 때 하나님의 선이 알아지고 선하심이 따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는데 여호와의 집은 바로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님이 지으신 교회입니다. 현재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장막 집입니다. 이 장막 집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우리가 실지로 보고 함께 살 수 있는 영원한 처소가 됩니다.
다윗은 양 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목자로 등장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양으로서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적과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다는 그 경험을 이 시로 읊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승리요 원수 앞에 상을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대접을 받는다는 말씀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든지 신앙생활의 싸움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길러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하심을 입은 다윗이 목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이 내용은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에 사울에게 한 말입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다윗의 세 형과 많은 장수들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블레셋 군사 중에 키가 장대하고 힘이 센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 몇 명이 덤벼들어도 당할 수 없을 만큼 힘이 강한 장수였습니다. 그 골리앗 대장을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다윗이 나섰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 골리앗을 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었을까요? 그가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이 그를 해하려고 했을 때 죽인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은혜에 의해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이 길러진 것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도 사자나 곰과 같이 보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한 신앙적인 안목에서 골리앗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군사가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상대해 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것을 계기로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다윗을 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다윗은 양치는 목자이었고 장성해서는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목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한 말씀에 우리도 '아멘'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신데 왜 부족함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로만 부족함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생애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도 사람에게서 어떤 힘을 구하거나 어떤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부족함이 없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마음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자기 방법과 노력, 꾀를 동원해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구원과 함께 큰 약속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영혼만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실질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모시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영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주님께로 돌아왔으면 무엇이든지 주님이 감독하고 인도해주시는데 뭔가 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틀림없이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구원은 받았지만, 믿는 것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안식처
"초장"은 양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을 말합니다. 초장에서 많은 양 떼들이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참 평화로워 보이고 좋은 느낌을 갖게 되지요.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라고 읊은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무사 안일하게만 지낸 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도 전쟁을 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다 정복하지 못했는데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그 가나안 땅에 사는 칠 족속과 더불어 전쟁을 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을 했고, 왕이 된 후는 평생 전쟁을 했는데도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고 부족함이 없다고 했고, 또 자기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동산에 올라가지 않고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잃어진 양들인 우리들을 다시 찾아서 내려오신 목자가 주님의 동산에서 우리를 먹여 주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양 떼를 먹이는 초장과 동산은 교회를 뜻합니다. 우리가 꼴을 먹고 양식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인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먹이시는 곳이 푸른 초장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있고, 먹을 꼴이 있고, 또 물을 마시는 곳, 그 초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꼴을 먹고 양이 살찌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양으로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꼴을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공부를 해서만 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서로 진정으로 교제를 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도 꼴을 먹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윗은 일평생 동안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 왔지만 내적인 마음의 상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영적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꼴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을 얻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견뎌내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윗처럼 전쟁하는 생활입니다. 전쟁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든지 영양실조에 걸린다든지 하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풍성한 꼴을 먹었기 때문에 전쟁할 때 힘이 있고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고 외치셨는데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39)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을 마신다는 것은 성령의 은혜에 젖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완전히 구별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성령인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면 마냥 육신적으로 평안하고 좋은 방향으로만 나가고 또 복을 주신다고 오해합니다.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강하게 훈련시킵니다. 시련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찾아오는 여러 가지 고난, 어려움, 핍박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육신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육신적인 평안이고, 병도 낫는 달콤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충만했을 때 교회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다 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못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거룩하고 깊은 영적 차원에서 소유한 것을 다 팔아서 내놓으니까 자기도 마지못해 한번 해보려다가 오히려 화를 입었습니다. 재산의 반은 감추고 반은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뿐이냐고 할 때 이것뿐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고, 충성스럽고, 잘 믿는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그런 것입니다. 그는 구원은 받았지만, 성령으로 인도받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성령으로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이나 좋지 않는 비판을 받을 때 마음에 쉽게 화가 납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는 마음 때문에 항상 마음이 쫓기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길을 안다면 거기에 나를 투자할 수 있고 나를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고, 주님이 잔잔한 물가로 자기를 인도해 주신다는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목이 컬컬하고 목마를 때 냉수를 마시면 시원한 것처럼 물가에서 풀을 뜯어 먹고 물 마시고 또 잠들어 쉴 수 있는 그러한 평화로운 상태는 외부적인 것이 아닙니다. 외부적으로는 전쟁이 있지만 그 마음은 평안히 쉬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에는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인 싸움도 있고 자신과의 내적인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평안히 쉴 수 있게 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
구원받은 사람도 생활 속에서 가끔가끔 영혼이 소생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칠 대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몸이 지친다기보다는 마음이 지치고 힘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거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도 그렇습니다.
굉장히 지치고 도저히 일어날 가망이 없어 막다른 골목에 갔을 때 소생하는 어떤 계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히브리서 4:16)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더 내려갈 수 없으니 올라올 수밖에 없잖습니까. 거기에서 어떤 말씀이 주어지게 되고 다시 소생을 합니다.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굉장히 축복된 것입니다.
이 "부활의 권능"은 영혼이 소생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침체 상태, 거의 죽은 상태에서 소생되면 부활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부활의 힘, 부활의 능력, 부활의 권능이라는 것은 죽는 데 있습니다. 심한 어려움을 당할 때, 견딜 수 없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가 가장 희망이 있는 때입니다. 그 어려움은 자기를 포기시키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도, 능력도, 주권도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 심한 어려움이 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그 심한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 영혼이 소생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거의 잡혀 죽을 뻔한 때도 있었고 전쟁하면서도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만 그는 언제나 이 소생하는 힘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다툼이 있고, 화가 나는 것은 자기 권리나 자기 주권이 침해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속성입니다. 자기 주권, 자기 권리를 악착같이 지키려는 그 속성이 육신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포기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그 마음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겸손한 자의 마음을 소생시킨다고 했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겸손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진정으로 드릴 줄 아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자기 손으로 피 흘리지 않고 치지 않겠다는 것이 자기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권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소생시키는 힘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는데 그 의의 길은 부활의 길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실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길을 통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길이 의의 길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그 의로운 길을 따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의 길은 주님이 부활하신 길이고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시는 곳,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육신의 생각과 마음, 육신의 욕망과 육신의 주권이 십자가에 죽고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시련이 있지만 그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 힘이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고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 육신의 힘은 줄어들고 믿음은 더욱 단련되어 더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주
사탄은 이 세상에 사망의 골짜기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사망의 골짜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핍박이나 시련, 세상적인 유혹 등 이 사탄이 우리 앞에 파놓은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았다'고 한 대로 저주 받은 이 땅에는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는 피를 마신 땅덩어리입니다. 이 지구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피를 몽땅 쏟은 곳입니다. 그 흘리신 피의 효험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가끔가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이르게 되지만 영이 죽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옥 가거나 완전히 멸망 받지는 않지만, 이 세상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구원받은 주님의 양 무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짐승도 쫓아 버리지만 때로는 나무 잎사귀를 끌어당겨 먹여 주기도 하고 또 구렁텅이에 양이 빠졌으면 지팡이의 휘어진 끝으로 목을 끌어 구해 주기도 합니다.
"그 입의 막대기"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팡이도 역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가 홍해를 갈랐고 또 아론의 지팡이에서는 싹이 났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주의 말씀은 원수를 쫓아버리고,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승리의 생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었다'는 말은 승리의 상을 뜻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왕이 개선 장군에게 큰 상을 베풀어 그 원수들 앞에서 잔치를 합니다. 다윗의 일평생은 전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동안 사탄과 싸우는 내적인 전쟁과 외적인 전쟁을 합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그 시험에 제자들이 동참했습니다. 어떤 때는 굶주리고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어떤 때는 욕을 먹고 풍랑에 시달리고 하는 가운데 제자들이 함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동참을 하고 그 시험 속에 함께하기보다는 작은 시험이 오면 도망쳐 버리고 피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은 행복된 일이요 큰 축복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반드시 고난과 시련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복음 20:22)고 한 그것은 고난의 잔입니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한 이 잔은 축복의 잔 이고 구원의 잔입니다. 그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얼마나 풍성한 잔치입니까?
영원히 거할 내 집
이 세상의 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선입니다. 그 선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선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선한 것을 주장하며 전부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따라오는 것이 없지만 마음은 계속 무엇엔가 쫓기며 쉬지 못하고 사는 세상입니다. 황무지 같은 세상이지만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평생 동안 자기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교제 속에 살 때 하나님의 선이 알아지고 선하심이 따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는데 여호와의 집은 바로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님이 지으신 교회입니다. 현재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장막 집입니다. 이 장막 집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우리가 실지로 보고 함께 살 수 있는 영원한 처소가 됩니다.
다윗은 양 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목자로 등장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양으로서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적과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다는 그 경험을 이 시로 읊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승리요 원수 앞에 상을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대접을 받는다는 말씀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든지 신앙생활의 싸움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길러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