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시편 10:1-18]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편은 다윗이 가나안 일곱 족속과 가나안 땅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는 동안 어려움을 당한 때에 읊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마지막 시대에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악을 정복하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은 천년왕국 때에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의 왕으로서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그 땅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과 전쟁하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부터 전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그는 양을 기르는 목동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군사들이 전쟁할 때 그 아버지가 형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싸움터에 갔다가 돌팔매로 골리앗 대장을 죽여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전쟁을 하기 전에 다윗은 장인되는 사울 왕에게서 미움과 질투를 받아서 오랫동안 쫓겨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나중에는 그 아들 압살롬의 배반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역경 속에서도 시를 읊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환난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묵묵하시고, 별로 응답이 없으신 상황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노력하고, 애쓰면서 사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의복을 입고 또 여러 가지 일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주님과 함께 의논하면서 사는 생활을 한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린도전서 1:9)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혼자 있을지라도 마음속으로 주님과 대화를 하고, 또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는 생활이란 뜻입니다. 기도하는 생활이란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나 의무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 가운데서 사는 생활, 묵묵하지만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세상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과의 대화가 완전히 막혀버린, 캄캄한 마음으로 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활 속에서도 그러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이라는 곳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갔을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창세기 12장). 또 이스마엘을 낳아 기르는 13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자기가 혼자서 애썼고 가정에 분란이 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사실이 있습니다(창세기 16장). 


 살아가는 중에 마음이 답답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왔을 때에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점이 있거나, 혹시 죄가 있거나, 아니면 불신앙이 들어왔을 때 마음이 캄캄하고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고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뚜렷한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등 복음서에 보면, 어느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을 때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 하여, 베드로가 그물을 깊은 데로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8)하고 주님 앞에 자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눈이 열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을 때에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 의지해 승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


 다윗은 무서운 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 상대국인 가나안 일곱 족속이 굉장히 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블레셋과 같은 강한 나라들이 많았으므로 다윗은 자기의 육신적인 힘이나 세력을 가지고는 절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지시가 없으면 견뎌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끔 주님이 멀리 떠나 있는 것 같고, 주변의 환경은 너무도 위험하고 원수의 위협들로 둘러싸인 때에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육신과의 싸움


 다윗이 평생 전쟁을 치렀듯이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도 전부가 육신과의 싸움입니다. 다윗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 땅에 안식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듯이 우리도 역시 육신과의 전쟁이 끝나야만 안식이 오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치열한 영적 전쟁이 끝이 나면 사탄이 멸망을 하고 천년왕국이 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31:16-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모세가 떠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과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버리며 얼굴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할 것임을 경고한 내용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숨어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 우리는 분명히 뉘우쳐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물질, 즉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돈이 다른 신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는데 재물을 섬기는 마음이 깊으면 하나님은 숨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이 떠나계시는 것같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돈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一지위, 명예, 권력 등一 은 모두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은 바로 재물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재앙과 환난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세상의 힘


[시편 10: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여기에 나오는 가련한 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는 그리스도인은 가련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고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전부가 원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세상은 사탄의 세상이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가련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고 염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이 직접 병들고 옥에 갇히고 헐벗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언제 주님이 주리시고 헐벗으시고 병들고 옥에 갇히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나 당시로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련합니까? 어떤 때는 굶주리고, 어떤 때는 헐벗고, 어떤 때는 옥에 갇히고…. 요즈음 구원받은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별로 가련한 상태가 아닙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굶주리거나 헐벗은 사람은 거의 없고,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히지도 않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는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나서 구원받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어디가서든지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당장 싫어합니다. 따라서 혹시 큰 환란이 일어나게 될 때에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옥에 갇히는 상황에 부딪힐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악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시편 10편에서 다윗이 일곱 족속과 싸우는 전쟁은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이 세상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과정의 그림자입니다. 사탄이 주님과 대결전을 벌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은 전위대로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에베소서 6:12)고 하신 것처럼 지상의 교회는 주님의 전쟁을 대신해서 싸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탄과 싸우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한 다윗의 기도처럼 악한 자는 결국 자기의 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악인


[시편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이 순전히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대립이 된다는 말씀이 있고, 갈라디아서 5장에도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양의 피를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농사한 것을 제물로 바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자기 육신의 소욕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를 자랑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의를 자랑하는 것은 육신의 소욕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 12:13-21]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송사를 했습니다. 형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고 다 차지해 버렸으니 억울하다며 예수님께 형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고 얘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아주 냉정하게 "누가 나를 너희 재산 나누는 사람으로,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말하셨습니다. 가끔 구원받은 사람 간에도 물질 문제 때문에 시비가 생겨서 서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이 구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동생되는 사람이 형에게 자기 몫을 빼앗겼는데 세상 도덕이나 법적으로 본다면 형이 대단히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주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문제를 재판해 주시지 않습니다.


 종종 잘못된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 더 큰 것을 잃어 버리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주님의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교제를 하자면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올바로 잘해야 된다는 생각에만 집착하여 잘못된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 마음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 미움이 생기는 문제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벌써 실패한 것입니다.



 앞에서 주님께 억울함을 호소했던 동생이 자기 형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주님께 호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희생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형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형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판결해 줌으로써 자기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만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주님이 판결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에게 '너는 동생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 정당하지 않느냐'고 판결하게 되면 동생은 욕심과 탐심을 채우게 되지만 형을 사랑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와서 "제게 돌아올 분깃을 제가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던 동생처럼 현재 세상 제도는 물질에 가치를 두고 물질의 권익을 똑같이 나누자고 하는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도 사회주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앞장 서서 사회 구원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사회 구원 운동은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눌린 자의 대변자가 되고 억울하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대변해 줄 것을 강조합니다. 공동 분배하고 똑같이 나누어 먹자고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물질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물질 위주의 세계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물질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물질을 섬기는 세상


[시편 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참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같이 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사탄이 꾸며놓은 세상인데 사탄이 하나님을 믿도록 그냥 두겠습니까?


 소련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유럽의 동서독이 통합됨으로써 공산주의 세계가 다 무너지면서 완전히 자유 세계가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님이 꾸며놓은 계획대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사탄도 역시 자기 일을 하면서 이 세계를 끌고 갑니다.



 공산주의란 본래 무신론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기본 철학인 유물사관은 모든 가치를 오로지 물질에 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치의 기준을 영적 세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물질에다가 두고 영적 세계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만 인정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역사도 먹을 것을 찾아서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물사관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입니다. 골고루 똑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이며, 골고루 먹도록 해주면 이 세상은 싸움도 없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룰 때까지는 무자비한 투쟁을 해야 하고 폭력을 동원해 부르주아 계급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실제로 이상 뿐이고 실천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 바로 물질입니다. 물질이 곧 신이며 우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간에 물질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토대로 한 이 세계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관심사는 오로지 경제 문제뿐입니다. 치열한 경제 전쟁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한국에 압력을 가하고 시장을 자유화 하라는 것도 전부가 경제 전쟁의 일환입니다. 유럽연합 역시 경제 전쟁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유럽이 통합되면 화폐가 하나로 바뀌고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면서 큰 경제 공동체가 되고, 미국, 일본도 당할 수 없는 굉장한 경제 대국이 형성됩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마지막으로 가는 길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666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각국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로 통합될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하나님 대신 물질을 사랑하고 섬길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수는 성령의 역사


 그런데 사도행전 12장에 성령이 오셨을 때 아무도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돈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없어져버립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사도 시대의 오순절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교회는 이적을 행하고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사도 시대의 오순절 교회는 물질이 가장 핵심이 되는 생각에서 완전히 떠나 아무도 제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던 교회입니다.


 성령이 지배하는 세계는 물질에 치중하고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세계가 바로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구원받고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서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을 약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끌고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물질 위주의 생각을 부수어 가고 꺾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롯의 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로서 가야 할 길이 그 길입니다.



 현재 우리의 선한 싸움一 주님을 맞이할 신부로서의 싸움一은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육신적인 마음을 부수는 것입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다윗이 평생 동안 싸웠던 가나안 족속은 자기의 소욕을 자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악인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싸웠다는 것은 물질과의 싸움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곧 가나안 일곱 족속입니다. 악한 사탄에 붙잡힌 세상으로 완전히 물질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되어 교회를 형성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물질에 시달려야 합니까? 우리 육신에 속한 마음,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을 깎고 부수는 전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롯의 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과 물질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함께 어울려 성도 섬기는 문제가 생활의 쟁점으로 대두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방이 되어 참으로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시대의 오순절 교회였습니다. 현재도 오순절 교회의 성격을 가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라면 반드시 앞에서 말한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자


[마태복음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에서 눈이 어두운 사람은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곧 하나님을 향해서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교회는 성령이 오셨을 때 물질에 대해서 완전히 해방이 되어, 눈이 물질에서 하나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리지 않았습니까?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이 성도가 서로 섬기게 되는 진정한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온몸이 어둡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듬더듬거린다는 뜻입니다. 영안이 어둡습니다. 영안이 어두우니까 영적 생활을 더듬더듬하면 주님을 향해서, 하늘나라를 향해서 바른 길을 못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하고 더듬더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성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을 향해서 눈이 띄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보이면서 물질적인 세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물질에 기준을 두는 경제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돈 뿐입니다. 바로 사탄이 세상을 그렇게 만듭니다. 666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대표자, 적그리스도입니다. 666을 사람의 이마에나 손에 표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제 문제를 앞세워서 나중에 세상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육신의 생각은 다분히 돈 문제가 앞섭니다. 구원받았지만 육신의 생각이 꺾이지 않으면 돈 문제가 앞서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롯의 처가 됩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육신이 꺾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롯의 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롯의 처가 되지 않는 교회를 참으로 원하십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수는 것이 교회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롯의 처가 되지 않는 생활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따라서 유무상통을 하고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던 오순절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본보기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롯의 처가 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하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훈련시키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우리에게 붙어있는 가나안 족속, 가나안의 사자, 가나안의 일곱 족속, 가나안의 귀신은 바로 물질입니다. 물질과의 전쟁이 우리에게는 아주 치열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눈


[시편 10:5-6]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큰소리치며 자고하는 자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런 자는 안력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합니다.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참으로 높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너무도 높기 때문에 사람들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눈이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물질에 마음이 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가는 길, 교회가 이루어지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평탄치 못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성도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교회는 진정으로 성도를 섬겼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육신의 생각이 꺾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진심으로 성도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생명을 사냥하는 사탄의 앞잡이


[시편 10:7-9]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악인은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물질의 반석 위에 집을 짓고 거기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들은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통채로 삼키고 잔인하게 끌고 갑니다. 이 세상은 비밀이 있습니다. 향촌 유벽한 곳, 은밀한 장소에 숨어 음흉한 흉계를 꾸미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항상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깨어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비밀한 흉계에 그만 속아 넘어가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음흉하고 비밀한 흉계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무죄한 자, 구원받은 사람一세상에서는 가련한 사람一을 유혹해서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23:23-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 선지자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사람을 잡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이 세상 도처에 위험이, 비밀한 그물을 쳐놓은 사탄의 계획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물질적인 그물로써 올가미를 만들어 사람을 잡으려는 계획이 이 세상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데 하나님 뿐만 아니라 먼 데 하나님도 된다. 내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비밀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들을 하나하나 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모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버리면 사람들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갑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정신 차려야 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깨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1-18]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에 보면 이 세상은 비밀이 많고 은밀히 행하고 어두움의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13절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책망을 받으면 빛이 옵니다.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 있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무엇인가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 마음에 어두움이 옵니다. '마음에 책망이 오면 빛으로 나타난다' 하는 말은 어떤 말씀에 의해서 내가 어두움을 알아버리면 틀림없이 깨끗하게 해결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새겨서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잠들어버리면 시체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잠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교회 안에는 성령의 충만이 있습니다. 현재 성령의 충만은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충만이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훈련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읽고 깨닫기도 하고 참 평안이 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안식을 얻었다 무엇을 얻었다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로 안됩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깨달음이 있어도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일하는 훈련을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곳, 성령이 인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개인에게는 강한 훈련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서히 훈련되어 가는 것, 그것이 교회가 가는 길이며, 바로 주님이 주시는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가난한 자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


[시편 10:10-13]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악인의 상태가 드러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 여기서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서 도움을 못 받은 자입니다. 악인은 가난한 자를 일일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시편 10:14-15]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14절부터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있습니다. 이 시를 읊은 다윗은 심한 곤경 속에서 강한 훈련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훈련 중에 있지만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을 뿐이지 마음에 흔들리거나 불안해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4절에 "주께서는 보셨다"는 말씀은 먼저 예레미야 2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가까운 데 하나님 뿐만 아니라 먼 데 하나님도 되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눈에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고 이미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베드로후서 2:1-3]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악인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이유는 탐심 때문입니다. 또 사람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자


 하나님의 일과 사탄의 일은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도 부인하고 사탄이 눈에 안 보이므로 사탄도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때에 성령으로 체험한 하나님을 절대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때로 잠깐씩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있다가 넘어지는 일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것처럼 , 세상에 사는 동안 접촉하고 만지는 모든 일의 배후에 눈에 안 보이지만 분명히 사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갑자기 돈 천만 원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 돈 천 만원 때문에 궁리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한 잠도 못 잘 것입니다. 천만 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겠는가, 그 천만 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이 물질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그 천만 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이전보다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천만 원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련 없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돈 뒤에는 분명히 악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도 안 믿고 사탄도 물론 안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사실은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시편 10:16-18]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땅이 주의 땅인데 그 땅 안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이 멸망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적인 얘기로서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이 전부 이스라엘 땅에서 멸망합니다. 소련이 이스라엘을 치러 가서 그 땅에서 멸망합니다. 아마겟돈 전쟁으로 적그리스도의 군대, 동방의 군대가 모두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멸망합니다. 또 다윗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망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세계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서 멸망하고 아마겟돈 전쟁 끝에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0편은 다윗이 전쟁하면서 읊은 시이지만 실제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영적 싸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사니 얼마나 다행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