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편]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시편 20:1-9]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환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편 20편은 다윗이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대항해서 싸울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 드린 내용입니다. 이 기도가 나중에 다윗의 시로 되었고 노래가 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웅락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래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 찬송가이면서 기도이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를 찬송으로 부르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시편 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이나 환난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어떤 응답이나 우리에게 내리시는 표시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편 119편 기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한 이후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축복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당하는 환난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당하는 환난도 있습니다. 그 환난을 거쳐서 신앙생활에 힘을 얻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히브리서 4:16)라는 말씀이 있고 또 시편 1편에 보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시편 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또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그 시절이나 때는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서 4:4)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찼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인에게는 언제가 시절이고 언제가 때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결정한 때도 아니고 우리들이 꼭 아는 때도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 보면 때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시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이고 하나님의 시절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심한 고통을 당할 때 마음에 걱정과 근심이 있고 태산 같은 괴로움이 쌓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시절이고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들이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열매 맺을 수 있는 때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때가 무르익고 우리 앞에 찾아오는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회피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자세 때문에 많은 경우 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성경도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그러한 때가 지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들은 뭔가 뜻이 있고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를 더 크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


[시편 20:2-3]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하러 나가 있었습니다. 상대편 아람 군대는 얼마 후면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강한 대군이었습니다. 그 대군과 맞서는 이스라엘 군대는 수적으로나 무력 면으로는 아주 약합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단순히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승패가 가름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군대를 내보낼 때에 성소에서 번제와 소제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능력은 성소 안에서 드리는 번제나 소제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첫째 의미는 번제입니다. 둘째 의미는 소제이고, 셋째 의미는 화목제이고, 넷째 의미는 속죄제, 다섯째 의미는 속건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다섯 가지 제사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번제는 완전히 자신을 불사루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도 번제이고 노아가 홍수 후에 아라랏 산에서 드린 제물도 번제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들도 번제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잡아 드리는 것도 번제입니다. 또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불사루어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것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힘이 되었습니다.



 또 소제는 레위기 2장에 나타나는데 밀가루를 아주 가늘게 빻아 그 가루를 드리기도 하고 떡을 만들어서 드리기도 합니다. 주님의 삶이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하게 가루가 되는 순종하는 생활, 드려지는 생애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소제의 뜻입니다. 다윗 역시 그런 의미에서 번제와 소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번제와 소제를 받으시는 성소 안에서 힘이 되어 주시고 응답을 해 주셔서 다윗이 승리하도록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도 우리 육신과 싸우고 사탄과 싸우고 있는데 우리의 싸움도 역시 주님이 번제물이 되시고 주님이 소제물이 되신 그 제물에 의해서 이미 승리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과 능력만으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소제나 번제는 성소에서 드려집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소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의 진리가 서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계속적으로 역사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육신의 생각을 이기는 것입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즐거워하나 육신은 죄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역사해야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날마다 죽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넘겨 준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고집이 세고, 남을 미워하고, 남의 흉도 잘 보고 말을 막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합시다. 참고 견디고 아무리 해 보아도 자기 힘으로는 안됩니다. 물론 내 힘으로 내 성격을 죽이려고 노력해 보아야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 도저히 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주님이 하셨구나 하고 주님이 이런 나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육신 때문에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죽음에 자기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 위에 있는 하나님의 기(旗)


[시편 20:4-5]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5절에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라고 했는데 다윗이 승리했을 때 백성들이 개가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경우에는 주님의 승리로 우리가 개가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고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미 세상을 이겼고, 사탄도 이겼고, 모든 것을 다 이기셨습니다. 모든 승리의 원천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주님의 승리가 꾸준히 나타나서 교회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은 눈이 밝아져 주님의 승리에 우리들이 참여하여 그 승리를 찬송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승리 안에 우리들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너희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올림픽 때 금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상 받을 때에 제일 먼저 게양하는 것이 국기입니다. 그리고 메달을 받고 애국가를 부릅니다. 이럴 때 그 기가 상징하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뜻이고 그 밑에 보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는 하나님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한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이 아람과 암몬에게서 승리한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가 되어 그 깃발 아래서 움직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아가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이 기는 주님의 사랑의 표식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무시무시한 밤길을 걷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원수가 추격해 오고 어찌할지 모르는 지경에서 갑자기 자기 앞에 훤하게 빛이 비치면서 자기 편의 기가 나타나면 얼마나 안도감이 들겠습니까? "여호와 닛시 "(출애굽기 17:15), 하나님의 이름이 '기'라고 할 때에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큰 사랑 속에 언제나 보호를 받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기름부음이 있는 교회


[시편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6절부터 9절까지에는 응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가 비록 약하고 숫자가 적다할지라도 그 원수, 아람과 암몬의 원수들에게 패해서 멸망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지키십니다.


 예수님이 침례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항상 구원받을 때 성령 받은 것만 생각하는데, 단순히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을 마신다, 성령을 받는다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셨습니다. 요단 강에서 침례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 교회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역사가 없이는 실지 활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들 개인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함께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 자신의 육신의 문제가 십자가에 처리되면서 마음에 한 번 더 평안을 얻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름 부음과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처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일에 사명이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은사 받는 문제와 마음에 안식 얻는 문제를 혼돈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으면 주님께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 육신과 더불어 싸우는 싸움에서 평안을 다시 한번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 그 평안을 얻지 못하더라도 은행인 교회에 자신을 맡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평안을 경험했다고 하면서 기름 부어진 교회에 맡기지 않고 혼자서 뛰쳐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가보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


[시편 20:7-9]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사도행전 2:32-33]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해서 방언도 하고 병을 고치니까 사람들은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장시간 설교를 하면서 이 일은 요엘 선지자가 말한 사실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은 부활 승천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부어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서 육신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육신적인 인간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변화 받으면 그때는 실제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려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는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성령을 이 세상에 오게 하는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만약 성령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 흘린 역사가 우리 속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을 훼방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마지막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성령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미운 사람은 밉고, 화도 내고, 남의 흉도 보게 되기 때문에 내 안에 과연 성령이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도 육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르면서 사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령을 알고 살려면 교회를 보아야 됩니다. 교회를 보지 않으면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령이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창세기 19장에 있는 말씀대로 롯의 가족을 천사가 이끌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수해서 병 고치고 방언하는 것이 성령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사람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성령으로 살아간 삶을 하나님께서는 응락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대결했는데 엘리야가 말하기를 '제물을 차려 놓고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면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불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현재 많은 사람들이 물과 불로 임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불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온 것도 하나님 이 성령으로 나에게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캄캄하고 괴롭던 마음 이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것만 해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만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계속 성령의 역사가 눈에 보이고 그 역사를 깨달아 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응답이 있을 때 성경 말씀도 깨달아지고 문제도 해결됩니다. 동시에 이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를 합니다.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말씀과 주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 속에서 성령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