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성경적 근거(1)

1. 신앙이란 무엇이며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말은 오늘날 교인들에게는 다분히 오해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모순되는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그것이 생기는 즉시 모든 문제는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안식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자마자 주님 안에서 영이 완전히 쉬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갈등과 불안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고 하셨는데, 진실로 주님 안에서 영, 곧 양심이 쉬고 있는 교인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마음에 고달픔이 있다는 것은 주님께로 가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주님을 참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 안에 있어 주님의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누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자기의 것" 즉 죄나 죽음이나 기타 일체의 것이 다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믿기 전보다 더 마음에 괴로움을 안고 고달픔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참 마음으로 믿지 않고,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혹시 이렇게 탄식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아, 참으로 괴롭다. 안 믿으면 지옥 갈 것 같고, 믿자니 힘이 들고. 차라리 믿지 않았더면 좋았을 것을!' 이러한 상태의 마음은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젖먹이 어린 아이는 오로지 어머니 안에 있습니다. 자신은 알지 못해도 어머니의 것은 전부 자기의 것입니다. 자신은 어머니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내 스스로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이요, 양심의 평안입니다. 또 영의 구원입니다. 이와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믿음으로 나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없어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내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참고 : 캐나다 토론토의 피플스 교회에 시무하며 가정 문서 선교회 총재로 있는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쓴『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소책자나. 거듭난 경험 이후에 오랜 옥중생활속에 엮어진 죤 번연의『천로역정』을 읽으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은 육이 있고 하나님은 영이신데,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바로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은 '사망의 몸' 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사망을 지니고 있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 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6) 


고 했습니다. 사망 안에 있는 육신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靈) 이시지 육신이나 물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체가 아닌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진 인간은 자기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성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의식을 꾸미고 외부적인 조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각종 종교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모양으로 섬기려는 데서 우상은 생겨납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 '육체를 따라 판단치 않으신다' 등등의 말씀이 여러 곳에 있는 것은 의미 깊은 사실입니다. 

신명기 4장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며 호렙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둘째 계명이 생겨났습니다. 이것 또한 영이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어떤 형상이나 외형, 의식 또는 조직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자면 영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께서는 영이 없는 존재에게서 섬김을 받을 수도, 교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의 육체의 형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체 속에 거하고 있는 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신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인간만이 영이 있는 이유는 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섬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개, 돼지나 소와 같은 짐승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이유는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고 했습니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영을 알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을 자기의 인격적 활동과 혼동하여 인격의 일부인 이지(理智) 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知的) 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신앙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곧 지적인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에 호소해서 흥분되는 것이 신앙인 줄 알고 있습니다. 곧 신비주의적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믿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 가려고 합니다. 곧 의지의 결단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지적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4. 영의 활동은 양심


그와 같이 인격적인 세 방면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깊은 속에는 갈등과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며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음을 밝혀줍니다.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일은 양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인격인 내 마음과 다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 하면 양심은 소송 기관으로써 비판을 하며 잘못을 정죄합니다. 바로 이러한 양심의 활동이 영의 기능인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인식하고, 느끼고, 결심하는 믿음을 가진다 해도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자면 영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비춰져서 해방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져 있다는데 있습니다. 영이 죄로 더러워져 있고 죽어 있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비애이며 문제입니다.  

에배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라고 한 말씀은 영이 죄로 더러워져서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러워진 영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과의 다툼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즉시 영이 죽고 양심의 괴로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다툼과 불안이 생겼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한 것은 양심을 가리우려는 행동으로 종교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앞에 아담은 스스로 벗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양심의 괴로움을 가리우려는 인간의 노력인 종교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는 너무나도 무력하여 벌거벗은 수치는 가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자면 영이 살아야 하고 양심의 괴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라고 했고, 또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즉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을 깨끗이 씻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요, 거듭남으로써 양심은 비로소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은 영의 더러움입니다. 양심의 억눌림은 영의 억눌림이며 양심의 시달림은 영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와서 비출 때에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더러움은 씻겨집니다. 양심이 해방을 받아 자유로워지는 것이 영의 구원이며 거듭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만이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선한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노아의 홍수는 이 구원의 예표입니다. 이제 그 구원의 예표로서 노아의 홍수의 물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방주는 물위에 떠서 노아의 여덟식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또한 세례의 의미입니다. 곧 침례의 의미입니다. 육체가 깨끗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이 깨끗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영의 세례입니다. 진정한 세례는 죄에서 해방된 선한 양심을 지닌 영혼이 깨끗하게 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식이나 장소나 육체의 모양이나 억지의 행동이나 거창한 종교 형식은 모두 육체의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깨끗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양심과 영의 깨끗함으로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동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기 전에는 영, 즉 양심은 더러운 상태에 놓여 있게 됩니다. 이유인즉, 인간은 완전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동으로는 양심이 완전히 깨끗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리로써 깨끗해지는 복음을 세상에 전하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행동의 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이며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나라" (벧전 1:23-25) 


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이 영, 즉 양심 속에 투입되어 깨달아질 때에 양심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9절에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라 했는데, 이는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인 염소나 양을 잡아 성소 안에서 제사드리는 것은 비유에 불과해서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가 아닌 실제의 제물이 드려져야 합니다. 이 양심상으로 온전케 하는 실제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함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면 양심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독자여, 당신의 양심에는 티 하나 구름 한점 없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양심은 하나님과 다투고 있지 않습니까? 양심의 송사가 전혀 없습니까? 양심이 완전히 깨끗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양심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당신의 영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영에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영이 사망 이편에서 헤매면서 부활 저편을 맛보지 못했다는 뜻이며 거듭나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양심의 해방입니다.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 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진리를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깨닫고 양심의 평안을 얻었습니까? 거짓 진리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 양심의 해방을 받았습니까? 요한복음 1장 4절, 9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이성(理性) 에 비추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 비추어서 양심을 풀어주는 계시입니다. 묶여 있는 영을 풀어주는 계시의 진리입니다. 



5. 송사자와 사화하라


마태복음 5장 25절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 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생을 송사자에 의해 끌려가는 죄수의 길에 비유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송사자는 곧 양심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길에 있을 때란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 인생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  (열왕기상 2:2) 


재판장은 심판주 하나님이시며 옥은 지옥입니다. 송사자와 길에 있을 때에 또 심판대 앞에 가기 전에 급히 사화(私和) 하라고 하신 것은 죽기 전이나 예수께서 오시기 전, 이 육신으로 있을 동안 안에서 송사하고 있는 양심과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재판관이 기다리고 있어도 검사가 불기소 처분해 버리면 판결할 수 없습니다. 송사자 곧 양심과 사화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고 죄에서 해방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4절~16절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고 했습니다. 요컨대 양심의 투쟁 곧 가책이 있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한구석에는 '잘못이다', '죄다', '거짓이다' 소리치는 송사가 있고, 또 한편 구석에서는 열심히 그 소리를 막고자하는 변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에서는 두 소리가 싸웁니다. 창세기 4장에 가 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0절)


인간의 귀에도 양심에서 하나님께 송사하는 정죄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 무서워 하나님 앞을 피했습니다. 그 자손들도 그 소리를 막기 위해서 퉁소를 만들어 그 소리를 피하려 했고 또 농사를 짓고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어 냈으나 멸망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양심의 송사하는 소리를 피하려고 쾌락으로, 세상 영광으로, 전쟁으로 자기를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안락을 찾으나 없고, 행복을 구하나 없습니다. 빌라도는 물로 손을 씻었고 가룟 유다는 은 30을 성전에 던지고 목매어 죽었으니, 이것은 양심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죄 없이 심판받는 것을 보는 순간 마귀가 그의 마음을 풀어 놓아 양심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죄를 범하고 소리치는 양심의 송사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변명해서 숨겨 버립니다. 그리고는 죄를 은밀한 구석으로 몰아넣어 버립니다. 그런 후 자신의 기억 선상에 떠오르지 않으면 그 죄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부흥회' 때 되살아나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변명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데까지는 좋으나, 사단은 찾아와서 '눈물을 흘렸으니 이젠 됐다' 고 후련한 기분을 넣어 주어 일단 안심시켜 주며 그의 죄는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맛자락 밑으로 은밀히 숨어 버립니다. '울어도 못하네' 하고 찬송을 부르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울면서 기도하고 또 다시 그 찬송을 하곤 합니다. 그러는 동안 죄는 은밀한 창고 속에 자꾸만 쌓여 갑니다. 이렇게 은밀히 숨어가는 죄를 성경말씀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찌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예레미야 2:22) 


죄는 잿물이나 비누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종교적인 의식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양심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죄는 그런 것으로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짓는 죄마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며 그 곳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만 상대하는 사람의 영, 곧 양심에는 자꾸만 때가 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투어 한 사람이 뺨을 맞으면 때린 사람은 얼마 후 잊어 버린다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린 자의 죄는 맞은 자의 속에 도사리고 있어 다른 기회를 노리게 하고 있습니다. 

죄가 있는 장소는 하나님 앞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는 사람의 영이 있고 그 사람의 죄가 그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 하나님의 법을 범했기 때문에 - 한 번이라도 양심을 스쳐간 것은 비록 잊어버렸더라도 은밀히 하나님 책에 기록되어 있다가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판결의 제목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