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심
사람들은 큰 죄는 심판받으나 작은 죄는 심판 받지 않고 관대한(너그러우신) 하나님 앞을 그대로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깨끗하시고 거룩하시다고 하셨고,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참새 한 마리라도 떨어지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 만큼 세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 중에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 26절 중에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호리는 도량(度量) 에 있어서 가장 적은 단위를 표시합니다. 돈을 계산하는 데 있어서도 리 (釐) 는 푼(分) 의 십분의 일이며 호 (毫) 는 리(釐) 의 십분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죄를 갚는 데의 최하의 단위인 호리만한 죄의 값도 갚아지지 않으면 죄는 해결되지 않고 지옥에 영원히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옥은 있느니 없느니 따질 것이 못됩니다.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들어가는 곳이니까 없다고 하든 있다고 하든 어떻게 생각해도 진리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공의가 완성되지 않으며, 십자가 밖에 있는 영과 육에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곳이 지옥이니, 아무리 호리의 값어치밖에 안 되는 죄도 그만큼의 벌을 댓가로 받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 12절 ~15절에
"죽은 자(구원 받지 못한 자) 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사화(私和) 되지 않은 양심에 의하여 기소된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다. 양심과 사화된 사람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해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크든 작든 그 행위대로 지옥 앞에서 형벌의 양이 언도됩니다. 원, 전, 리, 호 만큼의 죄대로 언도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억울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죽었습니다. 지옥은 양심의 죄만큼 벌을 받는 곳입니다. 죄의 정도만큼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물론 실제의 불과 달라 꺼지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지옥의 괴로움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7. 선·악을 몰랐다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악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7)
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면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아담은 과연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죽었습니다. 물론 육신도 나중에 죽었으나 당장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죽은 것이 있습니다. 즉 영이 죽은 것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없어진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자유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닥쳐 왔습니다.
그것이 영의 죽음이며, 양심의 괴로움입니다. 또 선을 알게 된 까닭입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선을 알기 때문에 양심의 부담이 있지 않습니까? 개, 돼지와 같은 짐승은 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자는 사람의 팔을 잘라 먹어도, 개는 사람을 물어도, 또 소는 남의 곡식을 뜯어 먹고도 양심의 괴로움이 없습니다.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의 존재이며 아담의 후손이니 선을 알고 있습니다. 선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영은 죽었습니다. 양심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알기만 하고 양심에는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선을 아는 것과 양심에 비추이는 것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것을 가리우기 위해서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것이 양심을 가리우는 수단이고 또 모든 종교의 시작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의 힘에 의해서 자기 양심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보려는 수단입니다. 전부는 아니라 하겠으나, 오늘날 기독교는 열심히 양심의 괴로움을 가려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참 평안과 자유가 결핍된 기도, 형식적이며 감정적인 찬송, 이성과 감정 혹은 의지에 영향을 주는 설교, 그리고 눈을 끄는 의식과 건물, 교육적, 사회적 사업, 기타 모든 행사에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위의 열거한 것들 속에 양심의 참 평안과 행복이 있었습니까? 저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만족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까? 없어지지 않고 변치 않는 안식이 있었습니까? 참으로 양심 속에 '나는 확실하다' 고 하는 증거가 있었다면 의식이든 무엇이든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무화과 잎을 두르고 두려워하던 아담과 같은 것입니다. 무화과 잎을 입고 나는 벗었다고 하며 두렵다고 했던 아담이었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떨리고 뜨겁고 전기가 통하는 듯한 체험을 한 후에도 깊은 속에서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에 빛이 없고 양심의 해방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경험들은 무화과 잎과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판단의 기준과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선의 기준은 사회를 위해서는 유효하나 그 것은 단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선일 뿐입니다.
그러한 선의 기준에서 신앙을 논하니 종교가 생기고, 인생을 논하니 실존주의 철학이 생기며, 윤리를 논하니 사회 윤리관이 생기고, 정치를 논하니 무신론을 토대로 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생깁니다. 또 성경을 논할 때에 여러 가지 인본주의 신학과 중생(重生) 의 체험을 도외시하는 지식주의나 영에 관계없는 신앙관이 생깁니다. 위에 열거한 일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선 이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도 (願倒) 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否定) 되는 십자가가 있을 뿐 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고 했으며, 사람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진리의 탈선이, 또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분야이며 무화과 잎에 불과합니다.
8. 종교에서의 해방
참된 복음은 바로 종교에서 해방 받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심의 해방 이전의 양심의 활동입니다. 복음은 양심의 해방을 가져옵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는 주님의 음성은 유대의 종교 의식과 율법의 멍에로 인해 양심에 시달린 유대인을 향하여 자유를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고(갈라디아서 3:24) , 초등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에서 해방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입고 괴로워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 주신 가죽옷은 해방이요 복음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영혼에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환상도 육신의 체험도 아니며, 추상적 그 무엇도 인간의 지식도 아닙니다. 양심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9. 영에 비취는 빛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편 90:8, 9)
당신의 은밀한 죄, 그리고 당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마저 주의 얼굴빛 앞에서 비춰져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이 주님의 분노 중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는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정직한 양심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취기 전에는 새로워지는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습니다. 무디, 찰스 피니, 요한 웨슬레, 죤 번연이나 칼빈, 루터, 그 외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役事) 와 그 경험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인정을 한다해도 신비주의적 경험이나 외부적인 것을 주장할 뿐. 영의 깊은 경험은 부인합니다. 그리고도 천국 간다고 가르치며, 평안이 없으면서도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고 했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 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한1서 5:10)
유다서 3절에는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성 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라고 했습니다.
의심이 있거나 양심의 참 평안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영혼이 깨끗해지고 양심이 온전해지며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변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역사 속에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 속에도, 양심 속에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편 107편 19, 20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당신의 양심을 죄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참으로 고친 일이 없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계시록 21장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깨끗지 못한 것) 이나 가증(可僧, 얄미움) 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10. 영원한 문제 앞에 자신을 세우라
인간의 현생(現生) 은 짤막한 순간입니다. 이 짤막한 순간에도 복잡한 많은 문제와 중대하게 생각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여러 교파가 있으며, 그 나름대로 자기 교파의 주장을 옳게 생각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교인의 수도 문제이겠고, 교회가 커가고 잘 되어 가는 것도 문제이겠으며, 무엇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도 문제가 됩니다. 이단이 들어와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높이 올라 하나님의 위치에서 생각하면 그런 것이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외부의 것을 보시겠는가 말입니다. 무슨 교회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과 양심이 어찌 되었나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안에 국한된 것, 당신의 현재에 관계된 것이 모조리 그 영원으로 뻗어갈 때에, 과연 그 모든 문제와 함께 가버리지 않고 당신은 그 영원에 연결되어 남아 있을 자신이 있는가도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예리한 두뇌로써 진리를 전공한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정통적인 교리를 전공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신 안에 생명의 실현이 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참이요, 참은 사실입니다.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칼로리를 따지고 기타 모든 성분을 분해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일지는 모르나, 먹지 않으면 체력과 건강에 보탬이 되는 사실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 그 속에 있는 칼로리가 사람 안에서 진리가 됩니다. 이론적으로 알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사실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사실이 양심 속에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리에 불과할 뿐 진리가 아닙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진리로 양심이 해방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생애가 변화된 일이 있습니까? 인간적인 훈련이나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당신의 양심을 포박하고 있는 죄의 사슬에서 놓인 일이 있습니까?
11. 이제는 온전하여 부끄럽지 않은가?
과연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나에게 정죄함 없네.' 그리고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는 찬송이 흘러나옵니까? 당신은 사도신경을 읽을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 참으로 깊은 데서 우러러보며, 영광을 돌리며 그 사실 때문에 솟구쳐 오르는 소망과 감격을 누리십니까? 그리고 성령을 믿고 성도의 참된 교제를 알고 하나님과의 교제까지도 아십니까?
무릎을 꿇고 영이신 하나님 앞에 물어 보시고 당신의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나 스스로 믿고 산다는 것이 육신을 위해서인가. 영을 위해서인가를. 또 성취된 사실을 보고 구원을 받아 기뻐 하는 것을 감히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요? 교인을 잃을 염려와 손익을 따지는 잠재의식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참으로 영혼에 목적이 없이 육신만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당신을 지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수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이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참으로 주님의 것이 된 사람은 주님께서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이단에 속한다면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6.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심
사람들은 큰 죄는 심판받으나 작은 죄는 심판 받지 않고 관대한(너그러우신) 하나님 앞을 그대로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깨끗하시고 거룩하시다고 하셨고,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참새 한 마리라도 떨어지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 만큼 세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 중에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 26절 중에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호리는 도량(度量) 에 있어서 가장 적은 단위를 표시합니다. 돈을 계산하는 데 있어서도 리 (釐) 는 푼(分) 의 십분의 일이며 호 (毫) 는 리(釐) 의 십분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죄를 갚는 데의 최하의 단위인 호리만한 죄의 값도 갚아지지 않으면 죄는 해결되지 않고 지옥에 영원히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옥은 있느니 없느니 따질 것이 못됩니다.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들어가는 곳이니까 없다고 하든 있다고 하든 어떻게 생각해도 진리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공의가 완성되지 않으며, 십자가 밖에 있는 영과 육에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곳이 지옥이니, 아무리 호리의 값어치밖에 안 되는 죄도 그만큼의 벌을 댓가로 받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 12절 ~15절에
"죽은 자(구원 받지 못한 자) 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사화(私和) 되지 않은 양심에 의하여 기소된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다. 양심과 사화된 사람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해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크든 작든 그 행위대로 지옥 앞에서 형벌의 양이 언도됩니다. 원, 전, 리, 호 만큼의 죄대로 언도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억울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죽었습니다. 지옥은 양심의 죄만큼 벌을 받는 곳입니다. 죄의 정도만큼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물론 실제의 불과 달라 꺼지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지옥의 괴로움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7. 선·악을 몰랐다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악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7)
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면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아담은 과연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죽었습니다. 물론 육신도 나중에 죽었으나 당장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죽은 것이 있습니다. 즉 영이 죽은 것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없어진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자유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닥쳐 왔습니다.
그것이 영의 죽음이며, 양심의 괴로움입니다. 또 선을 알게 된 까닭입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선을 알기 때문에 양심의 부담이 있지 않습니까? 개, 돼지와 같은 짐승은 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자는 사람의 팔을 잘라 먹어도, 개는 사람을 물어도, 또 소는 남의 곡식을 뜯어 먹고도 양심의 괴로움이 없습니다.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의 존재이며 아담의 후손이니 선을 알고 있습니다. 선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영은 죽었습니다. 양심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알기만 하고 양심에는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선을 아는 것과 양심에 비추이는 것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것을 가리우기 위해서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것이 양심을 가리우는 수단이고 또 모든 종교의 시작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의 힘에 의해서 자기 양심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보려는 수단입니다. 전부는 아니라 하겠으나, 오늘날 기독교는 열심히 양심의 괴로움을 가려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참 평안과 자유가 결핍된 기도, 형식적이며 감정적인 찬송, 이성과 감정 혹은 의지에 영향을 주는 설교, 그리고 눈을 끄는 의식과 건물, 교육적, 사회적 사업, 기타 모든 행사에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위의 열거한 것들 속에 양심의 참 평안과 행복이 있었습니까? 저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만족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까? 없어지지 않고 변치 않는 안식이 있었습니까? 참으로 양심 속에 '나는 확실하다' 고 하는 증거가 있었다면 의식이든 무엇이든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무화과 잎을 두르고 두려워하던 아담과 같은 것입니다. 무화과 잎을 입고 나는 벗었다고 하며 두렵다고 했던 아담이었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떨리고 뜨겁고 전기가 통하는 듯한 체험을 한 후에도 깊은 속에서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에 빛이 없고 양심의 해방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경험들은 무화과 잎과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판단의 기준과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선의 기준은 사회를 위해서는 유효하나 그 것은 단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선일 뿐입니다.
그러한 선의 기준에서 신앙을 논하니 종교가 생기고, 인생을 논하니 실존주의 철학이 생기며, 윤리를 논하니 사회 윤리관이 생기고, 정치를 논하니 무신론을 토대로 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생깁니다. 또 성경을 논할 때에 여러 가지 인본주의 신학과 중생(重生) 의 체험을 도외시하는 지식주의나 영에 관계없는 신앙관이 생깁니다. 위에 열거한 일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선 이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도 (願倒) 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否定) 되는 십자가가 있을 뿐 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고 했으며, 사람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진리의 탈선이, 또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분야이며 무화과 잎에 불과합니다.
8. 종교에서의 해방
참된 복음은 바로 종교에서 해방 받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심의 해방 이전의 양심의 활동입니다. 복음은 양심의 해방을 가져옵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는 주님의 음성은 유대의 종교 의식과 율법의 멍에로 인해 양심에 시달린 유대인을 향하여 자유를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고(갈라디아서 3:24) , 초등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에서 해방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입고 괴로워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 주신 가죽옷은 해방이요 복음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영혼에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환상도 육신의 체험도 아니며, 추상적 그 무엇도 인간의 지식도 아닙니다. 양심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9. 영에 비취는 빛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편 90:8, 9)
당신의 은밀한 죄, 그리고 당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마저 주의 얼굴빛 앞에서 비춰져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이 주님의 분노 중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는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정직한 양심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취기 전에는 새로워지는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습니다. 무디, 찰스 피니, 요한 웨슬레, 죤 번연이나 칼빈, 루터, 그 외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役事) 와 그 경험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인정을 한다해도 신비주의적 경험이나 외부적인 것을 주장할 뿐. 영의 깊은 경험은 부인합니다. 그리고도 천국 간다고 가르치며, 평안이 없으면서도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고 했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 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한1서 5:10)
유다서 3절에는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성 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라고 했습니다.
의심이 있거나 양심의 참 평안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영혼이 깨끗해지고 양심이 온전해지며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변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역사 속에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 속에도, 양심 속에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편 107편 19, 20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당신의 양심을 죄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참으로 고친 일이 없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계시록 21장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깨끗지 못한 것) 이나 가증(可僧, 얄미움) 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10. 영원한 문제 앞에 자신을 세우라
인간의 현생(現生) 은 짤막한 순간입니다. 이 짤막한 순간에도 복잡한 많은 문제와 중대하게 생각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여러 교파가 있으며, 그 나름대로 자기 교파의 주장을 옳게 생각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교인의 수도 문제이겠고, 교회가 커가고 잘 되어 가는 것도 문제이겠으며, 무엇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도 문제가 됩니다. 이단이 들어와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높이 올라 하나님의 위치에서 생각하면 그런 것이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외부의 것을 보시겠는가 말입니다. 무슨 교회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과 양심이 어찌 되었나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안에 국한된 것, 당신의 현재에 관계된 것이 모조리 그 영원으로 뻗어갈 때에, 과연 그 모든 문제와 함께 가버리지 않고 당신은 그 영원에 연결되어 남아 있을 자신이 있는가도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예리한 두뇌로써 진리를 전공한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정통적인 교리를 전공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신 안에 생명의 실현이 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참이요, 참은 사실입니다.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칼로리를 따지고 기타 모든 성분을 분해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일지는 모르나, 먹지 않으면 체력과 건강에 보탬이 되는 사실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 그 속에 있는 칼로리가 사람 안에서 진리가 됩니다. 이론적으로 알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사실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사실이 양심 속에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리에 불과할 뿐 진리가 아닙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진리로 양심이 해방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생애가 변화된 일이 있습니까? 인간적인 훈련이나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당신의 양심을 포박하고 있는 죄의 사슬에서 놓인 일이 있습니까?
11. 이제는 온전하여 부끄럽지 않은가?
과연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나에게 정죄함 없네.' 그리고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는 찬송이 흘러나옵니까? 당신은 사도신경을 읽을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 참으로 깊은 데서 우러러보며, 영광을 돌리며 그 사실 때문에 솟구쳐 오르는 소망과 감격을 누리십니까? 그리고 성령을 믿고 성도의 참된 교제를 알고 하나님과의 교제까지도 아십니까?
무릎을 꿇고 영이신 하나님 앞에 물어 보시고 당신의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나 스스로 믿고 산다는 것이 육신을 위해서인가. 영을 위해서인가를. 또 성취된 사실을 보고 구원을 받아 기뻐 하는 것을 감히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요? 교인을 잃을 염려와 손익을 따지는 잠재의식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참으로 영혼에 목적이 없이 육신만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당신을 지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수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이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참으로 주님의 것이 된 사람은 주님께서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이단에 속한다면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