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빛을 받은 그 사실

1. 암흑의 여정


어느 초겨울 저녁놀이 짙어갈 무렵. 제법 차가운 날씨에 예배당 옆 초가집 안방에서 내 인생의 한 꿈을 어린 가슴에 심어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덜덜 떨면서 한 걸인이 밥을 좀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를 한참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추우냐고 물으셨습니다. 


 "예 - , 춥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는 잠자코 그 자리에서 입으셨던 저고리를 벗으시더니 "여기 있다. 입고 가거라." 하시면서 입혀주시던 그 인상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내 가슴에 작은 씨앗이 되어 잊혀지지 않는 감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후 아마 5~6년쯤 지난 12세 때, 한 자리에 나란히 누웠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커서 목사가 되어라." 


이 말씀으로 내 생애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어도 아버지처럼 참으로 남을 사랑하는 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사명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고향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보시면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소하셨고, 심지어는 거지를 방에서 함께 재워 온 방에 이가 기어 다니는 등 숱한 일화가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29세에 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천사들이 모인 곳인 줄 알았던 신학교와 기숙사에서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못할 상처로 남아 끝내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졸업 당시에는 안수를 거부하려 했으나, 부친의 책망과 이웃의 권면에 못 이겨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교회의 내분때문에 갈등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진흙 속의 옥처럼 이상적인 목회를 해 보리라 다짐을 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 앞에 맹세했습니다. 새벽이면 두, 세 시 간 울면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교만한 생각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아버지처럼 살아 가리라는 생각에서 이웃 사람, 특히 곤경에 처한 이웃 사람들을 향해서 도움을 주려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양심의 구석에서 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방법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나, '그것이 네 몸같이냐?' 하는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낱낱이 설명하지는 않겠으나, 하여튼 극단적인 방법으로 살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랬기에 가정에서는 "그렇게 살면서 가정은 어떻게 하라는가?" 라는 불평을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 대구의 어느 골목을 지나다가 거지가 남의 연탄 아궁이 위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음날 설교가 완전히 거짓말이 되느냐 아니면 그대로 진실이 되느냐 하는 갈등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데리고 갈까 하고 망설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데리고 가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기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생각 끝에 문득 '됐다! 집에 가서 이불을 한 채 갖다 주자.' 이렇게 생각하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 누운 나의 양심에서는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위선자! 위선자! 저 거리를 보라. 얼마나 많은 불쌍한 자들이 떨고 배고파하고 있는가. 그러나 너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 잘 자고 아침에는 흰 쌀밥으로 배를 채우겠지? 그리고 설교 단상에서 사랑하라고 소리치겠지? 너는 위선자가 아닌가!' 

이리저리 생각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주일 오전 설교는 단상에 서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겨우 원고만 읽은 채 지났습니다. 차츰차츰 설교가 싫어지고 설교의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설교를 해야 하나? 결국은 먹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나님 맙소사. 먹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 훨씬 떳떳한 방법이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내 생활은 완전히 의미를 잃어 갔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생산이 있고 농민에게도 소출이 있는데 목사로서 나의 생산은 무엇인가? 나, 목사는 선한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있으나. 생활에는 그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양심은 소리쳤습니다. 

언젠가 어느 바닷가에서 목사들만의 수양회가 있었는데, 둘러앉아서 방담하는 시간에 나는 동료 목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목사로서 목회할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어느 목사가 말하기를 "권목사는 목회의 성공자라고 이름이 났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권목사가 못 한다면 누가 하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정의 쌀독에 쌀 두 되가 있으면 한 되는 굶는 자에게 주고 한 되는 먹어야 할 터인데.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 했더니 주위의 목사들이 "아, 그것은 너무 심각한 이야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했으나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평신자이거나 또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모르나, 설교를 하고 남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법칙이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말이었습니다. 

설교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졌고, 어떻게 목사 생활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사상계』를 읽던 중, 어느 분이 "창녀는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 살기 위해 지식을 팔고, 목사는 먹고 살기 위해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판다. 무엇이 다르냐?"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양심이 예리한 칼로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차라리 창녀가 더 솔직하다. 그는 만천하에 자신이 죄인임을 폭로하고 짓밟히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설교단상에 서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이 모든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나, 내 속에도 창녀 못지 않은 죄가 중심에 있지 않은가? 미모의 여성을 보았을 때 비록 육신으로서의 죄는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유혹을 느끼며, 돈뭉치를 보면 욕심이 나지 않은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며칠 후 설교 준비를 마친 토요일 밤에 괴롭고 어두운 양심을 달랠 길 없어 대성통곡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다른 직업을 주십시오, 아니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더 이상 목사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 큰 소리로 울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여 밤 중에 예배당에 찾아온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암흑의 여정(旅程) 이었습니다. 



2. 빛을 받은 그 후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서 온 어떤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중 "여러분 거듭났습니까?" 라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설교 후 그 선교사와 마주 앉아 일대일로 담판을 했습니다. 


 "나는 믿고 있는데 왜 거듭났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때 선교사는 "목사님,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의심은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믿기 때문에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그러면 됐습니다. 의심없이 천당엘 갈 수 있으면 됐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후 3주가 지난 1961년 11월 18일 토요일, 아침부터 설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제목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것이며 제 일 대지(大旨) 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즉 첫째 대지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1절에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내가 율법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義) 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義) 이 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양심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여야 하는 것은 율법의 의로서 나의 양심을 내리누르는 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서 입혀졌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2-3) 


고 했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해에 그치지 않고 양심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십 수 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번에 풀어졌습니다. 문제를 찾으려고 아무리 돌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후에 마음 속 깊이 하나님께 참된 감사와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 죄 사함 받고 구주를 안 뒤에 모든 것이 변화하여서

지금 내가 밟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 내 죄를 씻으셨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 되시니 나에게 정죄함 없네. (합동 411) 


이 찬송을 오후 두 시에서 해가 지도록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또 놀란 것은 성경이 전 (前) 의 성경과 달랐습니다. 모두가 처음 보는 말씀이 되었고 성경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전부가 시시한 것 뿐이었습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 것과 비교하니 하잘 것 없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설교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을 볼 때 에 헌금 많이 하는 것. 지위있는 교인, 열심 있거나 일 잘하는 교인 또는 목사 잘 섬기는 교인 등등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참으로 구원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외에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듣기 싫어하든 말든 그들의 영의 각성을 위하여 촉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월급이 잘 나올지 어떨지 지위있는 장로나 돈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 할 것 없이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줄기차게 공격해 갔습니다. 

전도사를 통하여 교인들의 염려하는 "전에 설교 잘하던 우리 목사가 어째서 저렇게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동요가 없음을 말하고 '나를 배척하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대문을 나서면서라도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내가 굶어서 죽을찌언정 먹기 위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강단에서 언제나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깨달아 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년 후에는 많은 영혼의 각성이 있었습니다.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났으나, 교파 내의 문제로 인하여 교파에서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많은 가난과 괴로움의 기간이 지나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참으로 이 복음 운동은 계속 전국 각지에까지 전파되고 깨달아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므로 오직 주님 당신이 일하심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언해서 말하는 것은 구원 받으면 죄를 지어도 상관 없다고 가르친다는 비판을 하는 자들이 있으나, 전혀 근거없는 말입니다. 구원이라함은 이론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므로 구원은 말로만이 아닌 말씀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하여 인도되던 종교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가 왔으나, 성령에 인도되기 때문에 함부로 죄 짓는 방종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 했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1-2)

 

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율법 밑에 있으면 죄를 더욱 짓게 되고 은혜 아래 있으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이 로마서 6장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세밀한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침례는 구원의 조건은 전혀 아니나. 구원 받은 자이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첫번째 순종이며 순종하는 생활의 제 일보이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침례가 교파의 근거는 아니기 때문에 어느 특정 교파에 가담되는 것은 아니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받은 침례가 교파에서는 정죄되었으니, 교파의 교리는 주님의 뜻 밖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침례가 주님의 뜻임은 그 내용의 진리가 참으로 깊은 것이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침례받은 것이 교파에 서는 정죄 되었을지라도 주님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을 알고 따르고자 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느냐. 교파의 법에 순종해야 하느냐?' 는 것은 참으로 깨끗한 양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양심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8, 9) 


라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제가 목사다 혹은 아니다 하는 시비입니다. 혹자는 "권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장로교에서 목사 면직을 당했다" 고 선전을 합니다. 목사라도 좋고 아니라도 상관이 없으나, 밝혀 두는 것은 목사 안수는 한 번 받으면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면직된 자를 복직시킬 때는 안수 없이 목사로 복직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교에서 면직되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또 안수해서 목사로 취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목사로 받으면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또 세상에서 파렴치한 범죄를 한 일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목사 면직이 되었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목사로 안수 받은 사람이면 목사이기에 방송국에서 그 사실을 알고 방송목사로 받았고, 성동 교회(독립 교회) 에서 당회의 결의에 의해서 목사로 청빙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가 세상에서 대중과 영합되고 환영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아벨로부터 노아, 아브라함과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 또 사도 바울, 그리고 근세사에서 주의 빛 안에 있던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더욱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살펴보십시오. 십자가의 험한 길이 그 과정이었으며 진리가 그 목표이었습니다. 이것이 옛 신앙의 위인들의 환상과 꿈 속에서 몽유병자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를 합리화시킨 자취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이용하여 아담을 속인 사단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줄곧 활기찬 생명의 역사를 잠재우는 명수였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손에 가슴이 토닥이고 부드러운 자장가를 들으며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이 곧 인류의 역사였다면 초대교회와 카타콤의 순교 생활의 역사와 함께 살펴볼 때 어느 편이 잠꼬대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 어떻게 이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승리와 성취를 위해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한 것은 고차원의 학문도 고매한 인격도 구비치 못한 자를 진리로 눈을 띄워 주셨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없었고 이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빗발치 듯한 비방과 이단이란 규탄과 교파에서 끊기었을 당시부터의 극한에 도달한 가난과 전국 교회의 미움과 질시의 눈초리 앞에서도 참으로 후회해 본 일이 없고 후회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을 통해서 너무도 풍성하고 넘치는 보배와 영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 것을 생각할 때에 보배는 질그릇 속에서 더욱 귀함을 느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