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믿음의 세 단계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한일서 2:12-13)



우리에게 온 편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한일서 1:4)


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보다는 근심과 괴로움을 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근심과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기쁨을 알게 해줍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3)라는 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속에서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1:4)


"나의 자녀들아 내가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2:21)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3)


 이처럼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려주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들을 상고하는 가운데서 이 서신의 기록 목적이 우리에게도 달성될 수 있도록 해야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객관적으로 막연하게 읽지 말고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서신들을 보면, 모두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쓴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린도서는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그 외의 서신들도 각각 어떤 지역의 교회 또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편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준 것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각 시대, 각 곳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편지 속에 나타난 말씀을 통하여 권면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성경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에베소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를 필요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 바울, 그리고 기타의 사도들을 통해서 보내주신 그 편지들이 바로 내게 하신 편지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는 받자마자 즐거운 마음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라는 편지는 매일 읽고, 일년 내내, 그리고 또 일생 동안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반갑거나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항상 읽어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편지는 내용이 너무 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내 주신 편지들을 주의 깊게 읽고 그 말씀들이 실생활에서 이루어져 가고 또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역할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1)


 사도 요한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구원받은 너희가 함부로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죄를 지었을 경우의 처리 방법이 나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그러나 이는 항상 죄 속에 파묻혀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지 중에, 또는 부득이한 상황 중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의 처리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도 요한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처럼 보입니다. 방금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해놓고는, 곧이어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원리를 모르면, 이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일서 2:2)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다 용서되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다 용서되었는데, 왜 또 우리에게 대언자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하십니다. 하나는 화목제물로서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입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과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 제물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은 같은 예수님이지만, 그 역할은 각각 다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단번에 해결해 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사람 앞에 흘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흘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피를 보시고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 죄를 위하심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


 칼빈은, 예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의 죄만 위해 돌아가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이 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용서를 해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온 세상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지 않고,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죄만 해결되었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월등히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약 4,000만에 달하는 우리 한국인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령,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부 사람들의 죄는 용서되고 나머지 사람들의 죄는 용서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깨끗한 해결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셨을 때,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해결된 것입니다. 누구의 죄는 용서하시고 누구의 죄는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죄를 다 용서해 놓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개인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알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서로 원수되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보시고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인생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모순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아시고 계셨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마귀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자녀가 아닌 인간의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완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마태복음 3:7)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아 "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나는 마귀의 후손으로 결정이 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아직은 마귀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마귀의 자녀가 됩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하나님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은혜의 때가 끝나버리면 그때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전부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사람이 마귀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용서가 안되며 심판을 받습니다. 마귀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의 사람의 죄는 예수님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다 용서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때는 제물인 어린 양이나 수송아지 등을 잡고, 그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뿌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제물로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의 피가 있다 해도 그것을 지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뿌릴 대제사장이 없으면 안됩니다. 대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해서 제물의 피를 하나님 앞에 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일은 단번에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번에 인생의 죄를 해결해 버리는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은 사람 편에 있는 분입니다. 사람을 대표해서 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들어가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 그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셔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즉 지성소에서 나오시는 그 날까지 대제사장으로서 그 제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가 시간 속에 계속 흐르고 있으며 따라서 범죄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성경이 풀리기 전까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다고 했는데 왜 그 후에 죄에 대한 문제가 또 생기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세상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신 예수님의 피의 의미가 하나님 편에서 볼 때와 인간 편에서 볼 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살고 하나님은 영원 속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넓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동시에 보십니다. 그런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죄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용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모든 인간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듯이 단번에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펼쳐 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 현재 살고 있는 사람, 미래에 태어날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죄도 있고 현재의 죄도 있으며 미래의 죄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흐르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사가 부활하신 날부터 재림하시는 날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의 보혈로 하나님 앞에 계속 죄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죄가 지금도 하나님 앞에 사함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과,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계속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예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씀에 나타난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기간은 예수님이 제사를 드리는 기간과 일치 합니다. 예수님의 제사가 끝나버리면 은혜의 때도 끝나버리며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는 없어집니다. 그 후에 짓는 죄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어도 죄 때문에 심판받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의 보혈로 계속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으로, 대언자로 하나님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죄를 지을 경우,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내 놓고 자백하기만 하면, 지금도 주님이 우리를 대언해 주시는 대변자로 계시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를 아는 생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한일서 2:3-4)


 위의 말씀에 나타나는 ‘계명’은 반드시 십계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계명이라고 하면 십계명만을 연상하는데, 계명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사람에게 계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십계명이나 신약 시대의 새 계명이나 그 원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는 말씀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접하며 생활 속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그 생명의 표현으로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가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비록 입으로는 예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안다 하더라도 그의 생활에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말은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안 사람은 말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말씀을 지켜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간증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한일서 2:5)


 신앙 생활이란 ‘저 안에 있는’ 것, 즉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3)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하는 생활이 곧 예수 믿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제하는 생활, 즉 ‘사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이루어지면 그 말씀으로 인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마서 5:5)


 우리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으며,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죽은 자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깨달았습니다. 즉,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마음에 깨닫고도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 이 역사 속에 더욱 널리 퍼지고 드러나 온전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사랑을 받은 형제 자매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교제요 곧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된 상태입니다.

 주님의 부탁대로 서로 사랑하고 그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활동이 일어날 때에 비로소 그 사랑은 온전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그 사랑의 실천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한일서 3:9)


 ‘씨’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 씨는 자라서 나중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이식됩니다. 그 생명은 점차 성장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씨는 뿌려졌으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싹이 터 자라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씨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면 마땅히 그 생명의 활동이 나타나고 또 열매가 맺혀야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 알게 됩니다.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를 가진다.’ 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는 사실이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는 사실이 나타나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리는 나태해지기가 아주 쉽습니다. 과거에 기도나 선한 행실로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해서 천국에 가려고 애쓰던 사람들 중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모든 노력을 중지해 버린 채 그 한 사실만 붙들고 있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예수님의 행함이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재현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만 앞세우고, 생활 속에 교제도 없고 예수님의 행함과 같은 행함이 전혀 없으면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도 가짜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입으로만 ‘구원받았다’, ‘주님을 안다’, ‘하나님과 사귄다’ 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라고 했으니, 일단 믿음으로 구원받고 나면 그 후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생활에서 그것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은 억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데, 논조와 말하는 형태가 다를 뿐 내용은 요한일서와 비슷합니다.



새 계명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한일서 2:7-8)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참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쓴다고 해놓고는, 곧 이어 또 새 계명을 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십계명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교리는 다 옛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부 선행을 강조하고 선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준 십계명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우상이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면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계명들은 이 두 가지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8절의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는 말씀에서 ‘새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의 계명이나 신약 시대의 새 계명이나 모두 사랑의 원리인 데, 왜 하나는 옛 계명이고 하나는 새 계명입니까? 이는, 빛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별됩니다. 빛이 없을 때 받은 것은 옛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어두움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어두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주신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주신 새 계명은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에 서 알아야 할 것은, 다 같은 사랑의 계명이지만, 옛 계명은 빛이 없는 자에게 준 것이고 새 계명은 빛이 있는 자에게 준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따지자 면 새 계명은 교회의 계명이고, 옛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명입니다.

 마음에 빛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하라’ 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계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수 있는 영이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영이 벌써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여기서 새 계명을 쓰는 이유는, 어두 움이 지나고 참빛이 비취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소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도 마음에 빛을 받은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영이 와 있으므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새 계명이 됩니다. 하지만 빛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무서운 율법이요, 옛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말씀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생깁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요한일서 2:9)


 여기서 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짓 그리스도인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지만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자(1:6), 저를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2:4),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2:9)는 모두 거짓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들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한일서 2:10-11)

 1장에서는 빛을 하나님 안에서의 사귐과 관련시켜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 하는 문제를 빛과 연결지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사귐에 관한 문제입니다.

 위의 말씀은, 빛을 받고, 또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에 빛이 있어야만 형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거의 10억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요즈음 크리스마스만 되면 길거리에서 자선금을 모으는 구세군을 비롯하여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위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과는 엄격히 구별되며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사랑보다는 ‘형제사랑’ 이 훨씬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형제’ 란 한 하나님의 생명을 함께 받아 가진 자입니다. 혹자는, ‘이 세상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민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며, 따라서 모두 다 형제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 가운데 있는 자와 어두운 가운데 있는자, 즉 하나님의 자녀와 아닌 자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는 성경 말씀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빛 가운데 있지 않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목적은 아닙니다. 지금 일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 불쌍한 자, 억눌림 받는 자를 위해 오셨으므로 기독교도 그런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 구제 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런 구제 운동 이전에 더 중요한 문제는 성경이 훨씬 더 강조하고 있는 ‘형제 사랑’이 무시되는 데 있습니다.

 같은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끼리는 비록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는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한 피, 즉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내 형제들을 사랑하는가? 믿지 않을 때의 친구들이 아직도 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날 한 학생이 저에게, 자기는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정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랑은 아닙니다. 몇 사람이 서로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들어가 대화를 할 수 없다거나 다른 사람과의 경계가 생긴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칫 사랑보다는 인정이 앞서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 나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 성격이나 생각이 잘 맞는 사람만 사랑하고 그들과만 대화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상당히 먼 상태입니다. 물론 어떤 일이 있을 때,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에서까지 자기와 의견이 같고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다분히 인정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정 때문에 한 교회 안에서도 어떤 그룹(무리)이 따로 생길 수 있고, 그것이 전체 교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요즈음은 없어졌습니다만, 몇 년 전만 해도 각 지역에서 구역 집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구역 집회들을 전부 중지시켰습니다. 그 구역 집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떤 그룹이 생겨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어떤 구역이나 지역 모임 속에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어떤 그룹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그것은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룹들은 대개 육신적으로 가깝거나, 인정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된 교제, 참된 사랑의 큰 방해물입니다. 한 곳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그러한 모임이 교회 안에서 하나의 특정한 그룹이 되어, 그 결속으로 말미암아 다른 것이 흡수될 수 없는 경우가 된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또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는 자칫 남을 비판한다든지,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 쉽습니다. 모임의 순수성을 위해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현상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들끼리 나누는, 흔하디 흔한 인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 하면 으레 인정적으로, 인간적으로 가깝고 재미있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사랑은 인정과 상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항상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가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경우도 허다 하지 않습니까?



참이웃


 어느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0:30-36)


 강도 만난 사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종교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유대인과는 상극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과 타민족의 혼혈족으로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무시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유대인을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여러 면에서 가까운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가장 멀게 생각 했던 사람은 도와주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형제 사랑’에 인정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돌보아야 할 때는 언제든지, 누구든지 돌보아 주고, 결핍이 있을 때는 결핍을 채워주는, 그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을 좀 생각해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알았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지, 목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희생이 없는 것에는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있으며,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 이란 자연성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 나를 위해 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사랑,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가령 구원받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참으로 마음이 낮아져 있다면, 그 형제의 죄를 탓하거나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누가복음 11:4)라는 주기도문대로 마음에서부터 그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어떤 형제나 자매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거나 또 그에 대하여 굉장히 많은 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합니다. 그를 사랑해서 그를 용서하는 것은 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사랑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마음 상태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 정의, 이치를 따진다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아직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사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어두워져 있으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모든 것이 몽롱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한다 해도 그 말에서는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자기가 행할 길도 모르고 있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마음을 가로 막는 것이 없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분명히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알게 됩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빌레몬서 1:6)


그 믿음의 교제 속에 빛이 있으므로, 그 빛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 보며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 단계


 그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어려운 말씀으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 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한일서 2:12-14)


 사도 요한은 현재 쓰는 편지와 과거에 쓴 편지를 동시에 논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현재형, 과거형으로 두 번씩 말했습니다. 그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단계적인 믿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서 말했습니다. ‘아비들’, ‘청년들’, ‘아이들’ 이라는 믿음의 단계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아이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청년의 단계를 거쳐 아비의 단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부류들은 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하나하나 자세히 상고해 봅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12절) 이 내용이 14절에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는 것이나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하는 것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를 참으로 알고, 아버지의 사랑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알았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막연히 ‘하나님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아버지가 상당히 많습니다. 고아원에 가보면 고아들은 전부 고아원 원장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도 고아원 원장처럼 되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적이 없는 고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목이 쉬도록 부른다 해도 하나님이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입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받아들인 사실이 없는 사람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 살 먹은 제 손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잘 외웁니다. 그렇지만 그 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입으로 설명은 잘 못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않는지 의식조차 없으나 그 사랑 안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자신의 생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그 사랑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그 사랑 안에서 편히 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시기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요한일서 2:13)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이인 예수님을 처음 알았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시작일 뿐, 살아가면서 그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 는 말씀은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경험해 가고 알아가는 신앙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들을 거쳐서 어느 시점에 가면 열매 맺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아비들’은 열매 맺는 시기에 들어간 신앙 상태의 소유자를 말하며, 그때에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베드로후서 1:2-3)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를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흠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베드로후서 1:4-8)


 여기, 여러 가지 믿음의 계단이 나타납니다. 이 계단들을 계속 올라가 그리스 도를 더욱 알아가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비밀로서, 그 안에는 우리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로새서 2:9)


우리가 받은 구원 속에는 분명히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성과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가는 만큼씩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알아가는 가운데서 나중에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차츰차츰 알아가는 사실들을 많이 경험해서 열매 맺을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들이 여기에서 말한 ‘아비들’ 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하여 부지런히 뛰어갑시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아비의 단계에 이르려면 반드시 청년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 람이라도 금방 구원받은 사람들은 ‘아이들’ 에 해당됩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한일서 2:14)


 13절에서나 14절에서나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미 이긴 사람들을 ‘청년들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이긴 것이 없으면 아직 청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느 정도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어느 정도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강력히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권면의 말씀 중에서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는 단계는 이미 경험했어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까지 숙제로 남아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게 20세 이상 된 남자를 계수한 숫자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 중에 자라서 전쟁할 수 있는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믿음의 연수도 다소간 계산이 되겠지만, 믿음의 연수만 말한 것이 아니고 신앙 생활에서 성장해 온 경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바로 전투입니다. 그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청년인데, 청년은 악 한 자를 이긴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흉악한 자를 이긴 경험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우리 성도들의 표준인 예수님의 생애에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30세가 될 때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다가,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침례를 받으시고 전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투 생활이었는데 그 기간은 3년밖에 안됩니다. 과거에 저는 종종 ‘예수님이 좀 더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셨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남기셨을 텐데, 왜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만 일하셨을까’ 하고 아쉽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레위 지파의 남자는 30세가 되어야 제사장 직무를 맡아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민수기 4:23) 예수님은 전쟁하는 청년뿐만 아니라 제사장도 되셔야 했기 때문에 30세 때부터 일을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침례받을 때 성령 충만을 받으신 후 곧 40일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전쟁할 수 있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 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였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태복음 4:1-4)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큰 일을 행하셔야 했습니다. 그 큰 일이란 바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 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 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3:15)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귀를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와 대결하기 전에 먼저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그 시험을 겪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시는 동안 계속 마귀의 도전을 받을 터인데, 마귀를 물리친 경험이 없으면 그 도전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도 역시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마귀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속에는 말씀이 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거하면 마귀, 즉 악한 자를 이길 수 있고 시험을 이기고 청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있어, 그 말씀으로 유혹이나 마귀의 시험을 확실하게 물리친 사람만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16-17)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시기는 싸움을 하는 기간인데 싸울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무기 없이 전쟁에 나선 군인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속성을 가진 육신이었습니다. 그 육신으로 40일 동 안이나 금식을 하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잡수시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틈을 타서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시험이 오는 이유는 사람 속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야고보서 1:14)


 마귀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타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욕심이 없을 때는 절대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신 후 극도로 배가 고파 먹고 싶은 생각이 있을 때, 마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뭘 그러고 있느냐? 네 앞에 돌덩이가 많은데, 그 돌들에게 명령하면 떡이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는 시장기를 면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방법은 창조의 능력을 보이는 길뿐이지 않느냐?"

 과연 예수님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갔을 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어느날 큰 무리가 모였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이로 5,000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돌덩이로 떡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에게 창조의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곧 구원받은 것을 이 세상에 나타내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종로 네거리에서 큰 돗자리 하나 펴 놓고는 "돌아, 떡이 되라!"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능력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면, 그것에 만족해서 ‘아,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라고 자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만들어 잡수시지 않은 이유는 먹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귀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에게 패하는 이유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예수님이 왜 금식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마음 속에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만나는 바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한 신약 시대의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홍해를 건너왔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왜 그런 어려움 속으로 몰아넣었을까요? 그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고 그들이 애굽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인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욕구가 있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불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욕구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 앞에 부딪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청년으로 등장 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방법, 세상이 주는 방법, 순전히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욕심에 의해서 그 문제를 처리하면 패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청년의 시기로 올라서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유치한 어린아이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몰라서 그런 시기를 놓쳐버리기도 합니다만,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시기를 절대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성장은 조용하고 문제가 없는 평탄한 시기에는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셨듯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주변에서 몰려오는 시험을 이긴다면 청년이 되며, 그때부터 하나님께 쓰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없고,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항상 마귀에게 시달리면서 살 수밖에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태복음 4:5-7)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것이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왜 하필이면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높은 절벽, 아주 위험한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뛰어내려도 별로 심하게 다치지 않을 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는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었습니다.

 첫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이고, 둘째 시험은 이생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둘째 시험은 상당히 뜻이 깊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성전이 되는 길은 죽음을 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거부하도록 했습니다. 즉,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거부해 버리고 그것보다 더 기발한 방법, 더 쉬운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면 훨씬 더 좋지 않느냐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3-4)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라는 말씀 속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도 그 음성이 들렸습니다. 앞의 사건 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온 인류에게 인정되고 길이길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은 부활을 통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으려면 반드시 죽음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사도행전 17:3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을 만한 증거는,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후에, 이적을 행하시다가 죽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승천해 버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긴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위대한 분으로 추앙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를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베드로전서 3:21)


 예수님이 죽음을 거쳐서 부활하셔야만 성전이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를 대언하고 계십니다. 이런 큰 일을 해야 할 예수님께, 마귀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방법을 택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겼지만 그 후에도 같은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 27:38-4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성큼 뛰어내려서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이것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이것은 앞에 언급된 시험, 즉 성전에서 뛰어내려서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높임을 받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거부하고 거기서 안전하게 뛰어내려 자신을 구원해 보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의 자녀


 이 시험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시험은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 좀 더 편리하고 쉽게 믿고 살지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생활 속에서 아무 십자가도 지지 않고 쉽게 살려는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누가복음 20:36)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생활 속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부활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육신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욕망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커다란 방해 물인 육신의 욕망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만 부활의 자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2-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거듭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왜 또 이런 말이 필요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거듭나기만 하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는 말씀은 육신의 부활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행실을 하던 그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 생활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육신은 빚쟁이이므로 항상 무엇인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언 30:15-16)


 이것이 바로 육신의 속성입니다. 우리 육신은 좋은 것을 보면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 끝없는 육신의 요구는 도저히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라고 바울 사 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육신의 요구를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꺾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길인데, 그 경험을 통해 청년이 됩니다. 이는 꼭 큰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시험이라도 이긴 경험이 있으면 다음에 조금씩 더 큰 시험이 닥쳐와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육신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육신이 요구하는 대로만 살다 보면 그 종이 되고 맙니다.



선악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한일서 2:15)


 얼핏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창조물을 보고 "좋았더라"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는데(창세기 1장), 그걸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16)


 예수님도 바로 이 세 가지,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이생의 자랑,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언제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바로 에덴 동산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찾아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4-5)고 하면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선악과니 생명과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던 하와가 마귀의 그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마귀의 말이 그 속에 들어 갔고, 그 말을 통해서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하와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1:25)

 사람의 마음 속에 어느날 마귀의 말이 자리를 잡게 된 이후, 사람들은 그 마귀의 음성을 좇아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정말 풍요롭고, 인간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곳, 즐겁고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에게 부각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세상 모든 것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악과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물질이나 이 세상 그 자체가 곧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싶다는 생각, 아름다운 것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 높임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역시 죄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의 법칙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끌어당기고 유혹할 때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유혹하고 사로잡아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낄 때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그 창조주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연인 으로서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


 그리스도인은 생활해 가면서 항상 이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가면 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루 스물 네 시간 가운데 한 시간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다면 그것만 남게 됩니다. 칠십년을 산 사람이 그중 일 년 동안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다면, 그 일 년이라는 기간만 가치있는 삶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하라"(디모데전서 6:12)라고 했는데, 이는 영생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 영원히 가치 있는 것,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을 위하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애에서 항상 교차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어떤 일은 순전히 자기 육신의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의 생애 자체가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알아진다면 먹는 것, 마시는 것 등 모든 삶이 주님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졌으므로, 우리의 생명 자체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전개되는 우리의 삶 자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영원히 남아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엮어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