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2:20)
마지막 때
앞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에게 권면했는데, 2장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또 다시 아이들에 대한 권면이 있습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의 영은 어느 시대에나 활동하고 있는데 아직 신앙이 다져지지 못한 사람들, 곧 ‘아이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칫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했습니다.
성경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위의 말씀 때문에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기록된 시점, 즉 서기 60-70년경을 마지막 때라고 했는데 1,9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의 마지막은 오지 않았으니 사도 요한의 말이 엉터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당 앞에 살면서 새벽 기도, 주일 예배 등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면 참으로 열심히 하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분이 어느날부터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울 뿐만 아니라 예배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 버렸어요. 그래서 하루는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목사였습니다. "왜 요즈음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목사님, 내 말 좀 들어보시오. 2,000년 전부터 말세 말세 했는데 세상은 아직 계속되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이제 믿지 않기로 했소." 라고 말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이 한 시대, 한 시점만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란 말일(末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未世)를 의미하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6)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세상 끝’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들이 로마에 의해 몰락당한 주후 70년부터 나라를 다시 회복한 1948년까지가 공백 기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때에서 바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시기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마지막 때' 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 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이방인들의 ‘은혜 받을 만한 때’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약 2,000년간인데, 이 기간을 인류 역사 전체 위에 놓고 보면 마지막 때에 해당됩니다.
또한 이 기간은 예수님과 마귀가 전쟁하는 기간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이 말씀은 마귀와 예수님의 전쟁을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끝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마귀는 완전히 멸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도 2,000년 동안에 계속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때란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때라는 뜻도 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으로 나타나는 인물인 적그리스도는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나서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렇지만 그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활동을 해 왔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배후는 ‘용’, 즉 마귀입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요한계시록 13:2)
마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악을 만들어내는 일 따위는, 사람들 속에 있는 죄의 법칙을 이용한 마귀의 보편적인 일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이미 적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여, 복음 전파를 방해하거나 이단적인 것을 전하는 등 복음의 역사를 무너뜨리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때는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분별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나 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할 적그리스도는 단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앞세워 구약의 모든 역사를 진행시켰던 것처럼 자기의 선지자, 전도자, 증거자 등 앞잡이들을 먼저 보내어 복음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도록 만든 후, 마지막에 가서야 나타나서 이 세계를 장악하고 통치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들이라면 적그리스도와 투쟁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평범한 생활이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를 도전하는 세력과의 계속적인 싸움입니다. 그런데 싸우는 사람들의 자세나 마음가짐이 군인답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많은 권면의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한일서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했는데, 이는 항상 교회 안의 이탈자가 적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함께 거한다'라는 말은 성도들이 진정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경험도 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 안의 모든 것을 다 배운 뒤에 나가서는 진리를 완전히 전복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함으로써 복음을 완전히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또 구원받은 척하고 함께 교제 속에 섞이면서 딴소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행위도 역시 적그리스도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의 교제인데, 어처구니없게도 간혹 자신을 아주 신령한 사람으로 부각시켜, 많은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도 역시 적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입니다
물론 구원받고 교제 속에 있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확실히 구원받고 구원의 역사 속에 동참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약간의 견해 차이, 이해 부족 등으로 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복음 운동의 대적이 된다거나 원수가 되어 도전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떤 이유로 교제를 떠났다 하더라도 복음 운동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눈이 이상하게 생기고 머리에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모습을 연상하기 쉽습니다만 외면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으며, 또 아주 조용히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분간되는 것이 아니라 교제 속에서만 분간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 속에서 나갔으나"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 교제 속에서 모든 적그리스도의 활동이 분간됩니다. 지금 세상에는 적그리스도의 운동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계를 통치할 한 인물의 출현을 위한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경험이 없어 교제 속에 있지 못한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눈 앞에 두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령에 의한 교제 속에서만 그러한 활동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장차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또 그의 제도를 실현시키는 도구가 될 것 입니다.
기름 부음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20)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름 부음이 없으면 잘못된 것을 알아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흔히들 구원받는 것이 곧 기름 부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과 기름 부음 받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구원받은 각 개인은 모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마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만 그것이 곧 기름 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그림자인 구약 시대를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선자자와 제사장, 왕의 직분을 세울 때만 기름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구원을 상징하는 할례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다 받았습니다만, 기름 부음은 세 직분의 일을 맡은 사람만 받았습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다시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것이 기름부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한복음 3:34)
이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의 위에 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마태복음3:16)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일을 맡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다시 성령이 기름부어져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름이 부어졌다는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와 제사장과왕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두 역할
그러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다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형성되고 주님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기에는 틀림없이 한 사람이나 혹은 몇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기는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그 기름 부음이 교회, 역사가 있고 나서야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구원받은 몇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거기에 기름 부음이 있든지 말든지 교회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 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고린도전서 12:26-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했는데, 이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자기 자신의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게 하는 성령과 일하는 성령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 속에 역사한 성령은 일하는 성령이지 생명의 성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원의 약속은 받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 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린도전서 2:13-14)
이 말씀에서 좀더 차원 높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만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그런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이지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20)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교회 안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그 교제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하고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그리스도 영의 활동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한일서 2:21)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지, 또 그분의 뜻과 진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혹시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의해서 그 믿음이 약화되고 혼돈이 생길까 해서 썼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움직이는 생명체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한일서 2:22-23)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거짓말하는 자, 즉 빛 가운데 있지 않으면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 적그리스도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도 빛 가운데 있다. 나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함께 행동하다가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초대 교회의 노스틱 주의나 니골라 당처럼 교회 안에서 발표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성령을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기름 부음이 있는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표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체이므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활동이 계속되는 중에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이나 진행 중인 여러 가지 활동들이 인위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 모든 활동은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밝혀져 나온 것입니다.
간혹 교제를 떠났다가 몇 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모임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옛날과 상황이 아주 달라져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밝혀지고, 교회는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 계속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는 성령의 인도와 기름 부음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인 내용을 모르면 구원은 받았어도 생각이나 마음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신앙 생활’ 하면, 주일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았어도 성경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나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생각은 아주 뒤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뒤떨어진 안목으로 교회의 움직임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 사람의 생각이나 기준에 맞으면 정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미에 다 맞는 교회라면 그것이 신령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육신적인 생각, 거짓 것을 사랑하는 마음, 잘못된 교회관에 꼭 맞는 교회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뒤떨어진 자기의 생각에 맞아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발전해 가는 교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의 주장을 전함으로 그리스도를 잘못 전하는 일이 초대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형상들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구약 시대를 잠깐 살펴봅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5:24)
에녹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데려간 바 되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씀을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추어서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구원받았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려면 다시 한번 성령의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 경험은 개개인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워치만 리는 그의 저서「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다시 한번 성령의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이 성경 안에서 발견한 것만큼, 교회의 원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킨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한 경험, 즉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받을 때에 분명히 성령에 접해서 거듭난 경험을 했으나, 그 후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신으로 돌아가서 육신대로 살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원받은 개개인이 다 이차적인 성령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으면 됩니다.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데서 함께 사는 것이 곧 에녹과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 안에 계셨고,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가 분명히 하나님의 성전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자칫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을 자초하고 스스로 큰 손해를 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내게는 성령이 있다. 그리고 성령이 내게 계시니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 라고 단정해 버리고,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 그냥 살아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 둥병 환자와유출병이 있는 자와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 어 보내되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민수기 5:1-3)
이 말씀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진이 더럽혀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 유출병이 있는 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는 다 진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기회가 있으면 상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분리시키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영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영이 성령에 접한 것이므로 그때 우리의 영은 확실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육신이 가로막는 담이 되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진영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진영 밖에서 하는 생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떨어져 있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혼자서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이 어디 있으냐 하는 것이 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9:45-4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것은 그들 가운데 거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셨는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안치시킬 회막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거기서 이스라엘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은 회막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그렇듯이 지금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방법도 단 한 가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은 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면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 전부가 하나의 그림자로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 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 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았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누가복음 19:12-24)
자기가 받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온 사람은 굉장히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사람과 같은 책망을 받을 사람도 무척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받은 한 므나로 장사하지 못한 사람을 향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라고 꾸중하셨습니다.
그러면 은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은행의 은행장은 주님이십니다. 그 은행장인 주님이 계시는 거기에 맡기는 생활만 하면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한일서 2:24)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편지를 받은 지역 교회의 신자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한복음 3:3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밖에 모릅니다. 게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마저도 다분히 추상적이고 공상적이며, 하나님의 실상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참으로 알 때에만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만, 비로소 나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또 그에게 나의 모든 죄짐을 지우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아버지를 동시에 발견하고, 동시에 마음 속에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시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예수님을 생각하는 비중이 하나님보다 극히 적어 밤낮 아버지만 부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시여 ··· "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즉 신약 시대는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3:12)는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를 살면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1:8)
그러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으로 기도가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 하면서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감사의 초점은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하나님, 곧 내 영혼의 구원에 근거합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라는 사도 요한의 권고 대로 참으로 마음 속에 처음부터 들은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단에 넘어간 다거나 적그리스도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가지는 사람에게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미혹의 소리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사귀고 있는데 딴 사람이 구애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겠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한일서 2:25)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아들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은 주님의 재림과 우리 육신의 부활이 있은 후에 완전히 누리게 됩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요한일서 2:26)
이 말씀은,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쓰는데,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마음에 거하게 하면 어떤 미혹하는 자들이 온다 하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일서 2:27)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름 부음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 지혜의 가르침이면 기독교는 변질되고 맙니다. 요즈음의 기독교계를 살펴볼 때, 세상 학문이 높은 사람들만 설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완전히 학문화하여 인간의 지혜와 생각,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개개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속에서 말씀이 열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선을 알게 하고"라는 말씀대로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모든 것을 분별해 가는 분명한 길입니다.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라는 말씀은 곧 성도의 교제 속에 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법칙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안에, 참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그 교제 속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 오실 때에 틀림없이 부끄러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지옥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형벌도 지옥의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큰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한 사람 들은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고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한일서 2:29)
흔히들 이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죄가 없고, 죄가 없으니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의롭다 하는 이유 속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순종해서 자기에게 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담당시켜 인류의 속죄물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혼이 떠나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고도 오직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구원인데, 왜 또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새 생명을 받아서 거듭나는 순간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의로움이 조금씩 조금씩 나타납니다.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의로움이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에서 주님의 의가 나타나면 그가 하나님에게서 난 줄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서 난 표이며, 생명의 법칙, 영의 법칙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앞에 자신을 드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의로움은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 안에서 살면 자연히 흘러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장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지 말고 성도의 교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라고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마지막 때
앞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에게 권면했는데, 2장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또 다시 아이들에 대한 권면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어느 시대에나 활동하고 있는데 아직 신앙이 다져지지 못한 사람들, 곧 ‘아이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칫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했습니다.
성경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위의 말씀 때문에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기록된 시점, 즉 서기 60-70년경을 마지막 때라고 했는데 1,9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의 마지막은 오지 않았으니 사도 요한의 말이 엉터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당 앞에 살면서 새벽 기도, 주일 예배 등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면 참으로 열심히 하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분이 어느날부터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울 뿐만 아니라 예배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 버렸어요. 그래서 하루는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목사였습니다. "왜 요즈음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목사님, 내 말 좀 들어보시오. 2,000년 전부터 말세 말세 했는데 세상은 아직 계속되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이제 믿지 않기로 했소." 라고 말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이 한 시대, 한 시점만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란 말일(末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未世)를 의미하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6)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세상 끝’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들이 로마에 의해 몰락당한 주후 70년부터 나라를 다시 회복한 1948년까지가 공백 기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때에서 바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시기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마지막 때' 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 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이방인들의 ‘은혜 받을 만한 때’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약 2,000년간인데, 이 기간을 인류 역사 전체 위에 놓고 보면 마지막 때에 해당됩니다.
또한 이 기간은 예수님과 마귀가 전쟁하는 기간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이 말씀은 마귀와 예수님의 전쟁을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끝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마귀는 완전히 멸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도 2,000년 동안에 계속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때란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때라는 뜻도 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으로 나타나는 인물인 적그리스도는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나서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렇지만 그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활동을 해 왔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배후는 ‘용’, 즉 마귀입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요한계시록 13:2)
마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악을 만들어내는 일 따위는, 사람들 속에 있는 죄의 법칙을 이용한 마귀의 보편적인 일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이미 적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여, 복음 전파를 방해하거나 이단적인 것을 전하는 등 복음의 역사를 무너뜨리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때는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분별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나 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할 적그리스도는 단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앞세워 구약의 모든 역사를 진행시켰던 것처럼 자기의 선지자, 전도자, 증거자 등 앞잡이들을 먼저 보내어 복음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도록 만든 후, 마지막에 가서야 나타나서 이 세계를 장악하고 통치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들이라면 적그리스도와 투쟁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평범한 생활이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를 도전하는 세력과의 계속적인 싸움입니다. 그런데 싸우는 사람들의 자세나 마음가짐이 군인답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많은 권면의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한일서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했는데, 이는 항상 교회 안의 이탈자가 적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함께 거한다'라는 말은 성도들이 진정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경험도 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 안의 모든 것을 다 배운 뒤에 나가서는 진리를 완전히 전복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함으로써 복음을 완전히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또 구원받은 척하고 함께 교제 속에 섞이면서 딴소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행위도 역시 적그리스도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의 교제인데, 어처구니없게도 간혹 자신을 아주 신령한 사람으로 부각시켜, 많은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도 역시 적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입니다
물론 구원받고 교제 속에 있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확실히 구원받고 구원의 역사 속에 동참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약간의 견해 차이, 이해 부족 등으로 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복음 운동의 대적이 된다거나 원수가 되어 도전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떤 이유로 교제를 떠났다 하더라도 복음 운동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눈이 이상하게 생기고 머리에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모습을 연상하기 쉽습니다만 외면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으며, 또 아주 조용히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분간되는 것이 아니라 교제 속에서만 분간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 속에서 나갔으나"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 교제 속에서 모든 적그리스도의 활동이 분간됩니다. 지금 세상에는 적그리스도의 운동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계를 통치할 한 인물의 출현을 위한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경험이 없어 교제 속에 있지 못한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눈 앞에 두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령에 의한 교제 속에서만 그러한 활동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장차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또 그의 제도를 실현시키는 도구가 될 것 입니다.
기름 부음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20)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름 부음이 없으면 잘못된 것을 알아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흔히들 구원받는 것이 곧 기름 부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과 기름 부음 받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구원받은 각 개인은 모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마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만 그것이 곧 기름 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그림자인 구약 시대를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선자자와 제사장, 왕의 직분을 세울 때만 기름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구원을 상징하는 할례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다 받았습니다만, 기름 부음은 세 직분의 일을 맡은 사람만 받았습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다시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것이 기름부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한복음 3:34)
이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의 위에 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마태복음3:16)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일을 맡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다시 성령이 기름부어져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름이 부어졌다는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와 제사장과왕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두 역할
그러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다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형성되고 주님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기에는 틀림없이 한 사람이나 혹은 몇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기는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그 기름 부음이 교회, 역사가 있고 나서야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구원받은 몇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거기에 기름 부음이 있든지 말든지 교회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 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고린도전서 12:26-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했는데, 이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자기 자신의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게 하는 성령과 일하는 성령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 속에 역사한 성령은 일하는 성령이지 생명의 성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원의 약속은 받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 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린도전서 2:13-14)
이 말씀에서 좀더 차원 높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만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그런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이지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20)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교회 안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그 교제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하고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그리스도 영의 활동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한일서 2:21)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지, 또 그분의 뜻과 진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혹시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의해서 그 믿음이 약화되고 혼돈이 생길까 해서 썼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움직이는 생명체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거짓말하는 자, 즉 빛 가운데 있지 않으면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 적그리스도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도 빛 가운데 있다. 나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함께 행동하다가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초대 교회의 노스틱 주의나 니골라 당처럼 교회 안에서 발표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성령을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기름 부음이 있는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표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체이므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활동이 계속되는 중에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이나 진행 중인 여러 가지 활동들이 인위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 모든 활동은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밝혀져 나온 것입니다.
간혹 교제를 떠났다가 몇 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모임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옛날과 상황이 아주 달라져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밝혀지고, 교회는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 계속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는 성령의 인도와 기름 부음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인 내용을 모르면 구원은 받았어도 생각이나 마음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신앙 생활’ 하면, 주일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았어도 성경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나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생각은 아주 뒤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뒤떨어진 안목으로 교회의 움직임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 사람의 생각이나 기준에 맞으면 정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미에 다 맞는 교회라면 그것이 신령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육신적인 생각, 거짓 것을 사랑하는 마음, 잘못된 교회관에 꼭 맞는 교회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뒤떨어진 자기의 생각에 맞아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발전해 가는 교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의 주장을 전함으로 그리스도를 잘못 전하는 일이 초대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형상들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구약 시대를 잠깐 살펴봅시다.
에녹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데려간 바 되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씀을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추어서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구원받았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려면 다시 한번 성령의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 경험은 개개인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워치만 리는 그의 저서「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다시 한번 성령의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이 성경 안에서 발견한 것만큼, 교회의 원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킨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한 경험, 즉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받을 때에 분명히 성령에 접해서 거듭난 경험을 했으나, 그 후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신으로 돌아가서 육신대로 살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원받은 개개인이 다 이차적인 성령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으면 됩니다.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데서 함께 사는 것이 곧 에녹과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 안에 계셨고,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가 분명히 하나님의 성전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자칫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을 자초하고 스스로 큰 손해를 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내게는 성령이 있다. 그리고 성령이 내게 계시니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 라고 단정해 버리고,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 그냥 살아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 둥병 환자와유출병이 있는 자와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 어 보내되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민수기 5:1-3)
이 말씀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진이 더럽혀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 유출병이 있는 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는 다 진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기회가 있으면 상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분리시키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영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영이 성령에 접한 것이므로 그때 우리의 영은 확실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육신이 가로막는 담이 되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진영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진영 밖에서 하는 생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떨어져 있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혼자서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이 어디 있으냐 하는 것이 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9:45-4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것은 그들 가운데 거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셨는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안치시킬 회막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거기서 이스라엘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은 회막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그렇듯이 지금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방법도 단 한 가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은 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면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 전부가 하나의 그림자로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 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 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았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누가복음 19:12-24)
자기가 받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온 사람은 굉장히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사람과 같은 책망을 받을 사람도 무척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받은 한 므나로 장사하지 못한 사람을 향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라고 꾸중하셨습니다.
그러면 은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은행의 은행장은 주님이십니다. 그 은행장인 주님이 계시는 거기에 맡기는 생활만 하면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편지를 받은 지역 교회의 신자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한복음 3:3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밖에 모릅니다. 게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마저도 다분히 추상적이고 공상적이며, 하나님의 실상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참으로 알 때에만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만, 비로소 나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또 그에게 나의 모든 죄짐을 지우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아버지를 동시에 발견하고, 동시에 마음 속에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시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예수님을 생각하는 비중이 하나님보다 극히 적어 밤낮 아버지만 부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시여 ··· "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즉 신약 시대는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3:12)는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를 살면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1:8)
그러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으로 기도가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 하면서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감사의 초점은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하나님, 곧 내 영혼의 구원에 근거합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라는 사도 요한의 권고 대로 참으로 마음 속에 처음부터 들은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단에 넘어간 다거나 적그리스도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가지는 사람에게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미혹의 소리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사귀고 있는데 딴 사람이 구애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겠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한일서 2:25)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아들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은 주님의 재림과 우리 육신의 부활이 있은 후에 완전히 누리게 됩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요한일서 2:26)
이 말씀은,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쓰는데,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마음에 거하게 하면 어떤 미혹하는 자들이 온다 하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일서 2:27)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름 부음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 지혜의 가르침이면 기독교는 변질되고 맙니다. 요즈음의 기독교계를 살펴볼 때, 세상 학문이 높은 사람들만 설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완전히 학문화하여 인간의 지혜와 생각,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개개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속에서 말씀이 열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선을 알게 하고"라는 말씀대로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모든 것을 분별해 가는 분명한 길입니다.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라는 말씀은 곧 성도의 교제 속에 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법칙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안에, 참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그 교제 속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 오실 때에 틀림없이 부끄러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지옥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형벌도 지옥의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큰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한 사람 들은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고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한일서 2:29)
흔히들 이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죄가 없고, 죄가 없으니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의롭다 하는 이유 속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순종해서 자기에게 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담당시켜 인류의 속죄물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혼이 떠나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고도 오직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구원인데, 왜 또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새 생명을 받아서 거듭나는 순간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의로움이 조금씩 조금씩 나타납니다.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의로움이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에서 주님의 의가 나타나면 그가 하나님에게서 난 줄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서 난 표이며, 생명의 법칙, 영의 법칙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앞에 자신을 드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의로움은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 안에서 살면 자연히 흘러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장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지 말고 성도의 교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라고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름 부음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