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랑의 길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4)



사랑의 실천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문제는 사랑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여러 측면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모든 말씀의 핵심 역시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새 계명도 한 마디로 말하면 모두 ‘사랑’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경 말씀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는 별로 감각 없이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목적은,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에 양식이 되어 우리의 삶이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단지 하나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긴 하지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듣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항상 듣는 말씀이고 또 듣는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여도, 막상 실생활에 부딪치게 되면 잘 실천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결심이나 의지에 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주일마다 사랑이라는 제목으로만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아무리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를 해도 실행되지 않으니 실행될 때까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꾸며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함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의 어떤 무리들, 곧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 속에서 온전하게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관계가 없는 남남끼리 모였을 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 슬하의 형제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베드로전서 1:22)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을 보내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면 자기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인 다른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끼리 사랑하라고 강제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생명 속에 살고 있는 같은 형제끼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한일서 3:11)


 성경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있고 또 의를 행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참으로 사랑이 있다면 남을 해하지 않고 남에게 죄를 짓지도 않고 하나님께도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생활입니다. 이처럼 의로운 생활과 사랑하는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영혼이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앞으로는 이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단체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회체제에 도전을 한다든가 모든 세상 일을 저버리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며, 또 육신을 담고 있는 국가의 모든 제도에 충실히 순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통치하게 된 이 세상,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해치고, 죄를 짓는 이 세상 속에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천국 백성들의 삶을 마련하셨고, 이들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들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무리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 천국 백성들의 율법입니다. 성경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세상 속의 천국을 명확히 구분지어 놓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엄격하게 규명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원은 받았으면서도 그런 사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구원받기 전과 똑같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특별한 차원, 특별한 위치, 완전히 구별된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 속에서는 믿음의 성장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자기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생활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속이며, 또 물질적인 문제로 남에게 해나 누를 끼치는 일은 없는지?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도리어 그의 뜻에 역행하는 처사가 됩니다.



쓴 뿌리와 투쟁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신 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는 가인이고 하나는 아벨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틀림없이 한 부모 슬하의 형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형제 사이는 항상 서로 사랑하고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며, 운명을 같이 하는, 서로 해칠 수 없는 관계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후 세계는, 절대 서로 타협할 수 없고 융화될 수 없는 두 계통, 곧 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의 두 계통이 영원히 평행선을 이루며 흘러가는 섭리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 세계는 서로 짓밟고 죽이는 미움의 세계로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한일서 3:12)


 이 말씀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가령 어느 가정에 두 형제가 있는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한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반드시 그 구원받은 사람을 육신적으로 죽이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라도 서로 친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린도전서 15:33)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생명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주의하고 정신을 차려서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면 다행인데, 자칫 방심하여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편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반드시 육신이 죽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세력을 잡은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자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이면에 어디나 마귀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 영에 의해서 방해받고 희생당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과 영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다보면, 어느새 생명의 삶이 단절되어 버리고 악의 세력, 악의 영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참으로 간증이 확실하고 신앙 상태가 아주 좋던 사람들도 다시 찾아 오는 쓴 뿌리(히브리서 12:15), 즉 구원받기 전의 습관, 본성을 이기지 못하여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지나오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느날 주먹에 칼 자국이 난 사람이 저를 찾아와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는 과거에 못된 짓을 많이 하여 형무소 생활도 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알고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청산했다면서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이 지금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또 구원받기 전에 몸을 팔아서 살던 여성이 처음 구원 받았을 때는 구원받기 전의 성격이나 육신적인 욕구에서 잠시 동안 떠나 삽니다. 그런데 좀 지나고 나면 그러한 욕망이 다시 강하게 밀려올 수 있습니다. 이때 아주 단단히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그 세계로 다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또 구원받기 전에 노름과 도박을 많이 하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은 그 쓴 뿌리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교회에 착실히 다니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은 대개 구원받은 이후에도 세상에 빠져 들어가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것은 교회의 제도와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고정 관념과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반면, 전혀 종교 생활도 하지 않다가 구원받은 사람은 방향을 잘 잡기만 하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 생활의 길로 제일 빨리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신앙 생활에 대한 습관에 전혀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몸에 배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이와 같이 어떠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든지 각각 신앙 생활을 하기에 쉬운 점과 어려운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말씀에 착념하고, 자기의 행동이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야 하며, 또한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가며 자기의 생활을 조절해 가야 합니다, 한때는 구원의 기쁨이 넘쳤다 하더라도 그후의 생활에서 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주위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구원받은 후 그 주위에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들 속에 싸여서 함께 계속 전진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면 신앙의 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을 향해 성경은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에베소서 5: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잠들어 버리면 의식이 없어집니다.

 육이오 때의 일입니다. 어떤 군인이 자기 부대를 잃고 계속 숨어 다니다가 밤 중에 조그만 오두막집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 방문을 열어보니 모두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 군인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자기도 그 속에 들어가 함께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잤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방 안에 누워 있는 사람 들은 모두 시체였던 것입니다. 그는 시체들과 함께 잠을 잔 것이지요. 사실 그가 잠자고 있을 때는 그도 시체와 별 다름이 없었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잠들어 버리면 옆 사람이 죽어 있어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생각이 있다면, 항상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게 되고, 그 앞에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 끌려가지 않고 항상 그를 끌어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도 그가 자기에게 끌려오지 않으면 자기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한 투쟁과 치열한 전쟁이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 세상은 가인의 계통과 아벨의 계통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이 두 계통 사이에는 절대로 융화나 타협,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세상과 잘 타협하라든지 하나가 되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계명이라는 원리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사랑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랑의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문제가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까요? 가인은 악하고 아벨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악함과 의로움이라는 구별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에 있어서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잘 이해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가인도 자기 나름대로는

 땀 흘려 농사 지은 곡물로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이 왜 악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7) 하고 말씀하시면서 가인의 제사를 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저주받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저주받은 땅의 소산물이나 즐겨 받으시는 분으로 생각했으니, 이는 하나님을 무시함은 물론 인간의 위치까지 끌어내린 것이 됩니다. 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도 가인의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 20:23-24)


 이는 다른 신의 상만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비겨서 은이나 금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지극히 더럽고 악하며 저주받은 물질 세계에까지 끌어내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물질로 비유하여 형상화한다는 것은, 완전히 거룩하고 신령하고 깨끗한 하나님을 더러운 인간과 같은 신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저주받은 세계로 끌어내리는 것이 얼마만큼 큰 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도 저주받은 하나님밖에 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고 하지만,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물질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 물질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다 변질되고 썩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물체와 동격으로 만든다면, 이는 썩어질 피조물의 영광으로 만드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죄는 엄청난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육적이었기 때문에 열납되지 않았으나, 아벨이 드린 제사는 영적인 차원의 제사였으므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리의 양이 죽은 것은 부정한 물질의 세계, 즉 보이는 세상이 부정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브리서 11:4)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평행선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함이라 하시니라"(요한복음 3:19-21)


 빛과 어두움은 타협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악을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환한 빛으로 나가면 자기가 행하고 있는 악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행위는 악했으나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빛인 아벨의 행위에 비추어볼 때, 너무도 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여 그를 없애버렸던 것입니다.

 도둑은 밤중에 남몰래 가만가만 돌아다닙니다. 왜냐하면 어두움 속에서는 자기의 악행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어느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가 보니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지켜 보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빛입니다. 도둑은 그 빛을 없애야 자기의 죄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악의 근원은 아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나타난 것은 가인과 아벨 때부터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유대인들은 절기를 잘 지키고 양과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율법을 가르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생활은 정말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하여 아주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이 아주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등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의도야 어디에 있었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와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하고 물었던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겉으로는 비록 율법 생활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 있는 자기들의 거짓과 위선, 악이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폭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누가 그분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위한 발돋움


 악은 항상 의를 미워하고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인같이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가인같이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돌을 들어서 구원받은 형제를 때려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서로 사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형제 자매들을 미워하거나 흉을 보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한일서 3 :10-12)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 행위는 의를 행치 않은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의로운 생활은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가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분명히 죽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니라"라는 말씀은, 그 영혼이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자라 할지라도 자칫 잘못하면 마귀에게 속한 생활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그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겠습니까? 마귀로 부터 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같은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그냥 평범하게 듣고 넘어가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아 자신의 생활이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면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분명히 그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앞에 새로운 방향의 신앙 생활이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발돋움이 없이, 많은 말씀 들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일서 3:13)


예수님도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 배후에서 마귀의 영이 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14-15)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명과 사망은 구원 여부에 달려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순서상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먼저는 자기가 죄사함 받은 사실을 깨달음으로 영생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면 그 후에 생활에서는 필연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생활이 나타납니다. 그 생활을 보고 그가 생명에 거하는지 사망에 거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고 했는데, 사망에 거하는 자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해서 사망에 거할 수도 있고, 구원은 받았지만 그 생명은 꼼짝 못하고, 죽은 육신이 활동 하기 때문에 사망에 거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로마서 8:10)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육신은 죽음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순종하면 죽음의 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생활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일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용서하심에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간단히 사람을 용서하셨으면 되었지, 왜 굳이 희생을 치뤄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이유는, 희생이 없이는 참사랑이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사랑이 겉으로 표현되려면 분명히 육신적인 어떤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 없는 희생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사랑을 알지 못하고도 자존심, 명예 등의 이유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산당 만세!"를 외치고 죽는 공산당원이 있는가 하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고 죽은 일본인도 많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모은 수십억 원의 돈을 국가·사회 또는 어떤 사업에 써달라고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행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형제 자매간에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다툼은 자기 목숨을 버리기 싫은데서 비롯됩니다. 자기 목숨을 버릴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 즉 자기 희생이 없으면 성도들과 한마음이 된다든지, 어떤 문제가 조절된다든지, 또는 서로간의 다툼이 잘 해결될 수 없습니다. 적든지 많든지 자기의 육신적인 희생이 있는 속에만 사랑이 존재합니다.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 우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자기 자신이 그 죄를 심판해서 억울함을 풀고 그 죄의 대가도 자신이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일단 마음을 돌려 그를 용서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부딪혀 왔을 때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 그것이 곧 의롭게 사느냐 악하게 사느냐 하는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마다, 그리고 일상 생활 가운데서 항상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는 말씀을 실천한다면 성령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7-18)


 여기서는 물질 문제를 예로 들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심히 궁핍해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는데, 자기의 물질이 아까와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하고 결론지었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항상 물질로 시험당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이의 됨됨이나 인격 문제를 알아보는데 가장 빠른 길은 물질과 여자(이성), 이 두 가지 문제입니다. 이성 문제와 물질 문제에 대해 깨끗하면 그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아 인격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물질은 구원받은 후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육신의 문제를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마음이 꽉 잡혀 있다거나 그 때문에 성도들간에 의가 상한다면 거기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간의 관계가 흐트러진다든지 마음을 잃어버리는 문제는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인데, 조그마한 물질 때문에 서로 싸우고 마음 상하는 일이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한번 살펴 봅시다.

 사도행전 2장부터 나타나고 있는 초대 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역시 물질 문제로 인한 갈등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고 사도들은 필요에 따라 이를 다시 공급해 주었습니다. 거기에 비인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그들은 양심을 속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둘 때 그들 부부는 자기 재산의 반만 내어 놓으면서다 내어놓은 척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위신 문제, 즉 이생의 자랑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잠시 보였다가 없어지는 것에 얽매여서 그 영광스러운 것을 희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은혜로 굳게 다진 마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한일서 3:18-19)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서 13장 9절에는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굳세다는 말은 흔들림이나 두려움, 불안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터 위에 굳게 섰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마음에 흔들림이나 불안이 없이 평안한 가운데서 지낼 수 있는 길은 그 생활 속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구체적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니면 구원 받았어도 언제나 굳세지 못합니다. 왠지 흔들리고 불안하고, 즐거움이나 평안이 없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밀입니다.구약 성경 신명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이 의심나는데 달린 것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제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명기 28:58-67)


 이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할 경우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알려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재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라는 말씀대로 ‘내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생명에 대한 불확신 때문에 주야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날들이 그 앞에 전개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이나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모두 새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인 생각이 약해지고, 희생 가운데서 성도간의 사랑을 나누는 새 생명의 활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이 없는 사람은 외톨이가 됩니다. 몸은 모임에 나와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화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면 ‘혹시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왠지 모르지만 마음이 불안 하고 답답하고 즐거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는 분명히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안을 누리며, 계속적으로 자기를 튼튼하게 만들어가는 생명의 삶이 전개됩니다. 이런 삶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그러한 삶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은혜 속에서 자유롭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면 나중에는 결과적으로 굉장히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답답하여 '빨리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구차스럽고 고달프고 불안한 신앙 생활에서 탈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살펴 보십시오. 만일 불안이나 두려움, 흔들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생활, 자기 희생을 감수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담대함을 얻는 길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한일서 3:20)


우리가 각자 자신을 돌아보면, 그동안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가책을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샅샅이 모르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잘못 생각하면, 내가 내 마음에 책망할 것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책망할 것이 많으시겠느냐는 말씀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성의를 다하여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역시 부족한 것이 있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볼 때 마음에 책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므로, 우리가 그 표준에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피차간에 서로 돌아보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또 서로 의논하는 가운데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실 때 굉장히 만족해 하시고 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터전으로 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한일서 3:21-22)


 담대함을 얻는다는 말은 마음이 굳세어진다는 뜻입니다. 또한 ‘굳세다’ 는 말은 마음이 강퍅하다든가 고집이 세다는 말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 없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다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순수한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책망할 것이 없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책망할 것이 없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동기를 유발했을 경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 그런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마음에 책망이나 흔들림이없게 되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담대한 태도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구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막연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지내는 것,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새 계명을 지키는 그것입니다.



그분의 계명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라는 말은 '구원받고' 라는 말인데, 이 말씀 속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만일은 세계가 사랑의 대상이라면 굳이 이런 구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세계 안에 주신 새 계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구별되어 있는데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회 구원을 주장하며, 그 운동을 열심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움직임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이 사회 속에 사랑의 정신을 불어넣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한일서3:24)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에 의해 자기가 주 안에 거하는지 주 밖에 거하는지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주님 안에 거하는 줄 알고 그렇지 않으면 주 안에 거하지 않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 사이에 참되게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살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는 의식조차 전혀 없으면서 '내가 구원받았으니 나는 주님 안에 거한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만 이론에 불과할 뿐입니다. 서로의 사랑으로 하나된 그 속에 성령이 계시는데, ‘서로 사랑한다’는 말과는 상관없이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있으면서 자신이 주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고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가르침에 의한 마음의 증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주안에 거하는지 주 밖에 거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무리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것은 조직이나 이론이 아니라, 말씀대로 새 계명이 지켜지는 사랑의 연합체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삶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령만이,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는 확신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