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믿음·사랑·순종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2-3)



물질과 신앙생활


 성경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 물질을 드린다, 마음을 드린다는 등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표현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얘기를 해 왔지만 물질을 드린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구원을 받고 나서도 물질과 신앙 생활을 어떻게 연관시키며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또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마치 사람에게 구걸을 하거나 무엇을 강요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물질을 바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나면 물질을 바치는 문제에서도 해방받아 버려 일생 동안 물질을 전혀 바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물질에서 참으로 해방받으면 온전히 드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을 드리는 것이 신앙 생활과 전혀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도 무시하고 물질 문제에 태만한 경향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유념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물질 문제와 신앙 생활이 연관되어 일어난 사건도 많고 또 그러한 것을 가르친 사건도 많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당히 깊은 의미를 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가 쉽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얘기 또한 십일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정당하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십일조를 당당하게 바치지 않으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며 사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담력이 있고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담력이 없습니다. 만일 양심이 마비되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가책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정복해 갈 때에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아간이란 사람이 옷과 금덩이 얼마를 감추었다가 나중에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여호수아 7장) 그 사건이 전적으로 물질에 관한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물질과 관계가 있는 사건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자기가 가짐으로써 하나님께 커다란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고 나서 어느날 그 아간의 사건을 읽다가 내가 바로 아간 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통곡한 적이 있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속에 있어서 그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길 수 없었고, 또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내가 사용했다는 것에 대하여 심히 가슴이 아팠습니다.

 선악과는 십일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시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를 남겨 놓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표현하는 뜻으로 그 중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수 없으면 내 생활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산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내 모든 소유는 어디까지나 내 주관 아래 있고 내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관념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끊어서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은혜로 내게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아간과 똑같이 하나님의 것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다 차지해 버리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속인 죄 때문에 육신이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소유를 온전히 바치지 못하고 반만 바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온전히 바친 것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는데 그들은 반만 베드로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그리고 베드로가 "네가 판 것이 이것뿐이냐?" 라고 묻자 그렇다고 말해 성령을 속였습니다. 당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교회 안에 성령이 역사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을 속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당장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신앙 생활이 죽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고통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


 신앙 생활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음에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려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물질 문제가 나오면 항상 양심에 거리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이것만 바치면 안 되는데’ 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반만 바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 바쳤다고 말한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역 사하는 성령과 교회 안에 역사하는 성령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 속에 강력히 도전해 오는 성령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물질 문제만 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 얘기가 아주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틀림없이 물질적으로도 어떤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물질적인 축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맡겨진 일이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물질면에서 하나님께 양심적으로 충실히 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을 충분히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많은 물질로 부자가 되어 풍족하고 즐거워하며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온전히 드린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더 풍부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고 더 풍부하게 사람 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 충분히 쓰고 살다가 남아 있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인색한 마음으로 아끼고 아끼다가 남겨 놓은 것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됩니다. 내가 들림 받아 가 버린다면 남은 재물은 녹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0)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8)라고 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디모데전서 6:6)


 여러분,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에 지족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만하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물질적인 면에서 족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해서 더 주시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이것으로 만족하다’ 하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디모데전서 6:7)


 사람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갑니다. 하늘 나라에 가는 데 있어서 세상의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물질 문제가 내 마음을 괴롭히고 내 마음을 잡고 있으면 정상적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항상 불만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 먹을 것이 없고 헐벗고 굶주렸을 때에도 자족하는 비결을 안 사람입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만은 신앙 생활 가운데 실천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 6:9)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근면하게 일하다가 부자가 되었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으면 틀림없이 올무에 걸리고 시험에 빠지고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집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하고 부자가 되려고만 애쓰면 많은 근심에 눌려서 그 마음에 행복이 없고 평안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어진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통로 - 십자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이러한 말씀이 내 마음에 찾아와서 이 말씀대로 주님 앞에서 살 수 있다면 참으로 부요한 신앙 생활이 될 것입니다.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에 먼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물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물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물질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왔을 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회도 오고 또 주님이 맡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을 내가 떠받들고 섬기는 마음 자세가 되어 버립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주님이 그에게 물질을 맡길 수 없습니다. 물질을 떠받들어 섬기는 사람에게 물질을 주면 그것이 그의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돈이 있을지라도 마음은 언제나 물질에 대해 가난합니다. 이렇게 되면 물질이 내 것이 아니고 내가 물질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물질에 얽매여 쩔쩔매거나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물질에 잡혀 있는 마음을 끊고 물질을 지배하면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헌금 얘기가 나오면 마음이 씁쓸해 진다면 그 마음은 벌써 물질에 짓밟혀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더라도 한 번 단호하게 결단을 내려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우물우물하고 있다가는 항상 움츠리고 괴로운 상태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에서 마음이 해방받는 믿음의 축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담력 있고, 자신 있고, 힘차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초대 교회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는데, 당시 그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 피흘림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4-47)


 이렇게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핍박을 당당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연습을 하지 않고는 그러한 담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언제나 물질 문제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거리낌이 있다면 양심의 명령을 따라서 사십시오. 그러면 담력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이유는 그의 마음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 사랑을 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서슴지 않고 이삭을 바쳤을 때 놀라운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내렸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세기 22:15-18)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그 다음에 우리에게 오는 각양 좋은 선물, 각양 좋은 은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만큼 옵니다. 우리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내 육신의 생각이 꺾이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각양 좋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내려오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냥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냉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생각을 꺾어 버리고, 마음속의 우상을 꺾고 우리의 마음이 단순하게 하나님만 섬기게 되도록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물질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좋은 은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헌금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신약 성경에 성도 섬기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언급되었는데 우선 십일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일이 내 마음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십일조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만을 드리며 살고 있지만 자기의 생애 전부를 드리며 살아 가는 사람들은 마음에 담력이 있고 즐거움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섬기는 즐거움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즐거움,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힘 있고 마음에 감사와 행복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돈을 써야 할 곳에 쓰지 못했을 때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드려야 할 곳을 발견했다든지, 드려야 할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는 자동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즐겁고 만족해 하는 사람은 성령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돈을 맡길 때는 무슨 일엔가 쓰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주님을 섬기는 데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조절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붙어 있는 육신의 생각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를 내어놓으셨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그 정욕을 잘라내시려고 우리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훗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물질 문제로 양심의 괴로움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양심이 괴로운 상태에서 살아 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누누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한일서 2:15)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을 느끼고 ‘참 갈수록 태산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려고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태산을 한 번 넘고 난 후 굉장한 즐거움과 마음의 평안, 담력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괴로운 것 같지만 절대로 괴로운 생활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늘까지 물질 문제 때문에 마음에 괴로움이 있고 싸움이 있다면 한번 단호한 결정을 내려 보십시오. 마음이 풀리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믿음, 사랑, 계명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1-3) 


 믿음, 사랑, 계명 이 세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는 요한일서 4장에서 이미 많은 얘기를 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얘기하지 않아도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또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나와 꼭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 자매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2-3)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셨던가 살펴봅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22)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가끔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실 때 ‘우리’ 라고 한 데가 있습니다. (창세기 1:26)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4)


 창세 전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계셨는데 아들에게 어떤 일을 맡겨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지극히 시랑하시고 아들도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모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는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으며 그 아들도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십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살아 오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제 고집대로, 제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나를 몰아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세워 주신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제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제가 현재 가고 있는 이 길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이 아니고 확실한 믿음의 행로인 것에 의심이 없습니다. 이 말은 내 개인이 생활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성경이 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안다면 괴로움이 있거나 부담이 있을지라도 즐겁게 신앙의 길을 갈 것입니다. 모임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어떤 불만과 불평이 있다면 ‘아직은 내가 모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뜻을 알고 이루어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아직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들어 왔지만 실은 그것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랑이 하나도 없더라"라고 합니다.물론 인정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정이 아닙니다. 인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도 가능합니다. 육신의 형제 간이나 친척, 가족, 친구 간에 뜨거운 애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랑하며 깡패들도 의리가 있습니다. 자기 친구 하나가 누구에게 맞으면 대신 나서서 싸워주는 의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 5:2)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적인 계명이 아닙니다. 이 계명은 이미 죄에서 놓임을 받아서 구원받은 후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목으로 나타나는 어떤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두신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제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설교 듣는 것도 예배지만 그러한 것은 예배 중에 아주 적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전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지 않다가 교회에 나와서만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그 섬기는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기에 함께 모일 때에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 양심에서 가치관이 한번 확실하게 바뀌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도 이 세상을 본받아 살았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 자기 삶의 목적을 한번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세상을 사는 목적이 세상 사람과 같고 가치관이 구원받기 전과 똑같으면 하나님께 산제사 드리는 예배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또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는 줄 압니다. 채소를 좋아하는 며느리가 고기를 좋아하는 시아버지 밥상에 밤낮 채소만 놓으면 시아버지가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려고 하면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내 삶이 그 아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인간들이 볼 때는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39)


 말씀에서 예수님에게도 내 뜻 즉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예수님의 육신은 다른 사람의 육신과 똑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육신적으로 ‘내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짐을 당할 일을 두고 예수님이 육신과 싸우시는 내용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자기 뜻이 전혀 없는 것같이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도 내 뜻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을 때, 40일간이나 금식을 하셔서 시장하신 예수님에게는 무엇이든지 먹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이용해서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하고 유혹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 때에 내 뜻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그런 내 뜻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가 와서 네 뜻이 하나님의 뜻도 되고’ 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지만 내가 즐겨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것이 선한 일 같고 거룩한 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르고 열심히 하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맞지 않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시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원하셨겠습니까? 그렇지만 잠시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맞서 있을 때, 예수님은 내 뜻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하셨듯 이 예수님은 그 육체로써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러 오셨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온 한 사람,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루어진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순종하는 길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내 뜻을 행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내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 앞에 나 자신을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려해도 못 지키는 자신을 어느날 알았을 때 믿음의 문이 열리고 구원을 받듯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열심으로 순종하다 보면 나중에 쉽게 순종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것을 이 요한일서 5장에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로 깊은 의미도 없이 함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쉽습니다.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막 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압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10)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켜가는 그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고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절대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 가는 사실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목숨을 버리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고 이 현실 속에 한 육체를 통해서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 가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3-4)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 뜻에 따라 순종해 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구원을 갓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더라도 순종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애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생명이 없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훨씬 쉽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육신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원치 않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이후에 그 믿음이 있으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성경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사랑, 순종이라는 의를 행하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