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나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일서 5:6-8)
성경과 생활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세상을 이기지 못할 때가 상당히 많은데, 그렇다면 성경 말씀과 우리의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성경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이 잘 안 되는 하나의 이상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믿고 있는데 때로 자신이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패배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허공에 떠도는 이상론에 불과하고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분명히 이 성경대로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사랑을 많이 받던 제자입니다. 그 요한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믿음의 경지는 우리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그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어려운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때 성경은 읽기 힘들고 알기 어렵고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성경 말씀을 실제로 우리의 생명과 생활에 직접 연관시키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이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 내 눈이 가지고 있는 욕망, 내 이성이 가지고 있는 욕망, 이러한 욕망을 유혹하는 것으로 세상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죄이거나 이 세상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끌리는 내 속의 욕망이 문제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있어도, 또 아무리 좋고 아무리 매혹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으로 끌려 가지 않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 속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욕망이 생겨버리고,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아름다운 것, 자랑스러운 것을 찾게 되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에게 아직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욕망을 채우려고 이 세상을 향해서 달음박질해 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예수님이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을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에 자기를 내맡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기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바라본다면 아무리 큰 걱정,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죽자’라고 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문제가 닥칠 때에 그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는 힘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어려운 갈림길에 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내 육신의 음성을 듣느냐 하는 문제는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나로 하여금 번민케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가겠다는 각오가 설 때에 그 십자가를 작게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하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그 이후부터 예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며 순종하셨습니다.
침례는 순종의 약속
예수님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후 마귀가 와서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3)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한 후 이기에 몹시 허기진 상태에 있었고, 또 그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육신으로 이루려고 오신 것이지 말씀과 반대가 되더라도 육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편에 육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생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침례(물 속에 들어갔다 나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침례를 받았다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침례는 굉장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곧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으로 우리는 물로 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했습니다.(창세기 1:1) 이는 모든 구름이 이 지구를 덮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말씀의 법칙이 물과 같아서 모든 것의 근본 원리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낸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 자신을 복종시켜 마지막 그 시점까지 나는 이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약속이 침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임하셨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복음3:14)라고 했을 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시작입니다.
의를 이루신 예수님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예수님이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4-25)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로마서 1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고, 또 4장에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것과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살아난 것과는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39)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맡은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 버린 증거가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활에서 그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완성한 결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 선한 양심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이시지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3:17) 장차 부활할 때에 그 말이 완성되는 것이지만 부활은 이미 침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신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것을 거기에서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데에는 참으로 큰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내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중요한 뜻의 표현입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21)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침례는 이제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출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양심의 가책이 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고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양심의 괴로움을 털어놓고 괴로워하면 그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인 줄 압니다. 항상 주여, 주여, 소리를 발하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눈물이 없는 자신보다 그 사람이 훨씬 더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괴로우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22:32)
양심이 괴로우면 죽은 것입니다.양심이 산 것이 생명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양심의 괴로움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섬김을 받습니다. 죽은 상태라는 것은 영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활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1-14)
우리의 마음에 고통이나 괴로움이 있다면 신앙 생활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대로 되었을 때 살아 있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믿음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 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요" (요한일서 5:4-5)
이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기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물로 임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내 앞에 다가오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그 십자가의 무거운 일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바치신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내맡기고 물 속에 들어가는 그 행위, 그것으로 예수님은 죄를 이길 수 있었고, 자신을 드리는 그 삶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세상을 이겼다고(요한복음 16:33)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셨고 완전히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 내 의지력으로, 내 육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써 세상을 이기었다는 이 사실을 내 자신이 받아들이는 그 믿음 안에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문제와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보고 견디어보고 통과하는 어떤 과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 믿음이 당장에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내 속에 있는 욕심, 내 육신의 생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하고 무척 참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력을 행사하여 육신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돌리고 인내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며 믿음이 자라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구원 받은 그 자체로는 내가 죄의 심판에서 해방 받았으니 감사하다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씩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시련을 하나 겪으면 겪은 만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로 인해 내가 실패해 버리면 알지 못합니다. 그 문제 속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1-4)
여기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왜 홍해를 건너야 하고 구름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까? 애굽과 광야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 홍해입니다. 그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애굽을 벗어나는 결정적인 선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종 노릇했던 애굽을 떠나 멀리 하나님이 계시는 땅, 그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지금의 시나이 반도에서 만나를 먹었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치니 반석이 갈라지면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가면서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던 그 행로, 바로 그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반석을 치니 그 속에서 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48-50)라고 말씀하셨듯이 현재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그 과정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신령한 음식을 먹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치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만나를 내려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탄탄대로를 걸어가고 아무 걱정, 괴로움이 없으면 신령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무사태평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신령한 음식이 먹어지겠습니까? 배가 고파야 만나를 먹고 목이 말라야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목도 마르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은데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하나님이 너무 야비하신 것같이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십니다. 말씀을 열어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키워가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5:5-6)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신 사실을 조금씩이라도 아는 만큼 세상을 이겨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예수님을 모르고는 세상을 이겨가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모든 사실, 완성된 그 사실에 눈이 기울어지고 그것을 향해 주목하고 그 사실을 알아가는 만큼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서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 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일서 5:7)
그 다음에 증거하는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우리를 위해 살아가신 그 삶,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사실을 증거하는 이가 누구입니까?그 사실이 어떻게 증거되었습니까? 여러분,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으로만 끝이 났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소식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후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승천하신 지 열흘 후, 즉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왜 오셨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성령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잘 모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물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신 사실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죽은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 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으로 구원은 이미 2,000년 전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안에 전달해 주는 역사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 흘리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사실을 믿었을 때에 내 마음에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한복음 16:7-14)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는데 그가 오면 내 것을 가지고 와서 알게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다 못하신 부분, 예수님이 남겨놓은 내용을 성령이 와서 전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성령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다음,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 내용,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사실 속에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부분을 알려주신 것으로, 사도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써 사도들에게 계시로 알게 해서 써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진리의 영이 되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8)
하나님께서 하나님 속에 감취어져 있던 그 진리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하시는데, 물과 피로 임하신 아들을 통해서 증거하십니다. 그 다음 또 성령을 보내셔서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물의 증거나 성령의 증거나 한 하나님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생활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세상을 이기지 못할 때가 상당히 많은데, 그렇다면 성경 말씀과 우리의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성경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이 잘 안 되는 하나의 이상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믿고 있는데 때로 자신이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패배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허공에 떠도는 이상론에 불과하고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분명히 이 성경대로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사랑을 많이 받던 제자입니다. 그 요한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믿음의 경지는 우리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그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어려운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때 성경은 읽기 힘들고 알기 어렵고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성경 말씀을 실제로 우리의 생명과 생활에 직접 연관시키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이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 내 눈이 가지고 있는 욕망, 내 이성이 가지고 있는 욕망, 이러한 욕망을 유혹하는 것으로 세상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죄이거나 이 세상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끌리는 내 속의 욕망이 문제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있어도, 또 아무리 좋고 아무리 매혹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으로 끌려 가지 않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 속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욕망이 생겨버리고,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아름다운 것, 자랑스러운 것을 찾게 되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에게 아직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욕망을 채우려고 이 세상을 향해서 달음박질해 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예수님이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을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에 자기를 내맡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기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바라본다면 아무리 큰 걱정,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죽자’라고 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문제가 닥칠 때에 그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는 힘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어려운 갈림길에 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내 육신의 음성을 듣느냐 하는 문제는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나로 하여금 번민케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가겠다는 각오가 설 때에 그 십자가를 작게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하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그 이후부터 예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며 순종하셨습니다.
침례는 순종의 약속
예수님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후 마귀가 와서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3)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한 후 이기에 몹시 허기진 상태에 있었고, 또 그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육신으로 이루려고 오신 것이지 말씀과 반대가 되더라도 육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편에 육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생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침례(물 속에 들어갔다 나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침례를 받았다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침례는 굉장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곧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으로 우리는 물로 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했습니다.(창세기 1:1) 이는 모든 구름이 이 지구를 덮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말씀의 법칙이 물과 같아서 모든 것의 근본 원리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낸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 자신을 복종시켜 마지막 그 시점까지 나는 이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약속이 침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임하셨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복음3:14)라고 했을 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시작입니다.
의를 이루신 예수님
예수님이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4-25)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로마서 1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고, 또 4장에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것과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살아난 것과는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39)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맡은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 버린 증거가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활에서 그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완성한 결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 선한 양심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이시지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3:17) 장차 부활할 때에 그 말이 완성되는 것이지만 부활은 이미 침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신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것을 거기에서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데에는 참으로 큰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내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중요한 뜻의 표현입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21)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침례는 이제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출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양심의 가책이 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고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양심의 괴로움을 털어놓고 괴로워하면 그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인 줄 압니다. 항상 주여, 주여, 소리를 발하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눈물이 없는 자신보다 그 사람이 훨씬 더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괴로우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22:32)
양심이 괴로우면 죽은 것입니다.양심이 산 것이 생명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양심의 괴로움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섬김을 받습니다. 죽은 상태라는 것은 영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활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1-14)
우리의 마음에 고통이나 괴로움이 있다면 신앙 생활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대로 되었을 때 살아 있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믿음
이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기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물로 임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내 앞에 다가오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그 십자가의 무거운 일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바치신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내맡기고 물 속에 들어가는 그 행위, 그것으로 예수님은 죄를 이길 수 있었고, 자신을 드리는 그 삶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세상을 이겼다고(요한복음 16:33)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셨고 완전히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 내 의지력으로, 내 육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써 세상을 이기었다는 이 사실을 내 자신이 받아들이는 그 믿음 안에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문제와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보고 견디어보고 통과하는 어떤 과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 믿음이 당장에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내 속에 있는 욕심, 내 육신의 생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하고 무척 참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력을 행사하여 육신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돌리고 인내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며 믿음이 자라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구원 받은 그 자체로는 내가 죄의 심판에서 해방 받았으니 감사하다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씩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시련을 하나 겪으면 겪은 만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로 인해 내가 실패해 버리면 알지 못합니다. 그 문제 속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1-4)
여기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왜 홍해를 건너야 하고 구름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까? 애굽과 광야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 홍해입니다. 그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애굽을 벗어나는 결정적인 선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종 노릇했던 애굽을 떠나 멀리 하나님이 계시는 땅, 그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지금의 시나이 반도에서 만나를 먹었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치니 반석이 갈라지면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가면서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던 그 행로, 바로 그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반석을 치니 그 속에서 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48-50)라고 말씀하셨듯이 현재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그 과정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신령한 음식을 먹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치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만나를 내려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탄탄대로를 걸어가고 아무 걱정, 괴로움이 없으면 신령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무사태평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신령한 음식이 먹어지겠습니까? 배가 고파야 만나를 먹고 목이 말라야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목도 마르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은데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하나님이 너무 야비하신 것같이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십니다. 말씀을 열어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키워가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5:5-6)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신 사실을 조금씩이라도 아는 만큼 세상을 이겨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예수님을 모르고는 세상을 이겨가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모든 사실, 완성된 그 사실에 눈이 기울어지고 그것을 향해 주목하고 그 사실을 알아가는 만큼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서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 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
그 다음에 증거하는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우리를 위해 살아가신 그 삶,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사실을 증거하는 이가 누구입니까?그 사실이 어떻게 증거되었습니까? 여러분,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으로만 끝이 났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소식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후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승천하신 지 열흘 후, 즉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왜 오셨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성령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잘 모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물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신 사실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죽은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 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으로 구원은 이미 2,000년 전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안에 전달해 주는 역사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 흘리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사실을 믿었을 때에 내 마음에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한복음 16:7-14)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는데 그가 오면 내 것을 가지고 와서 알게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다 못하신 부분, 예수님이 남겨놓은 내용을 성령이 와서 전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성령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다음,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 내용,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사실 속에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부분을 알려주신 것으로, 사도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써 사도들에게 계시로 알게 해서 써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진리의 영이 되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8)
하나님께서 하나님 속에 감취어져 있던 그 진리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하시는데, 물과 피로 임하신 아들을 통해서 증거하십니다. 그 다음 또 성령을 보내셔서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물의 증거나 성령의 증거나 한 하나님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