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빛과 어두움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일서 1:5)



도의 초보를 버리고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으로서, 성경 가운데서 많이 읽혀지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이 요한일서는 다른 서신서들과는 달리 저자 자신에 대한 소개나 인사도 없이 바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중심 내용은 교제입니다. 물론 고린도전서나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에도 교제, 즉 그리스도 안의 사귐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이것을 기록한 목적이 오직 교제를 위한 것임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요한일서 1:3)


 그리고 교제를 방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고 상당한 시일이 경과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어렵더라도 이 말씀을 계속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드러운 음식인 젖이나 죽을 먹지만 차츰 자라나면서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듯이 말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히브리서 5:12-14)


성경은 그 내용이 어려운 것일수록 그 속에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말씀들도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초보적인 말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고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한일서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같은 저자가 쓴 요한복음 1장과 연결시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졌으므로, 이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여 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빠진다면 그 전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을 때 보고, 주목하고, 만졌습니다. 그것은 경험을 의미합니다. 곧 자신이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 보고 듣고 만진 바를 전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라고 한 것처럼, 금방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에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보고 만질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육신을 직접 보는 시대가 아니고 다른 보혜사, 즉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대로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진 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한꺼번에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씩 따라다니면서 그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남자의 수만 5,000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예수님께 떡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무리 중에 섞여 따라오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아 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나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부딪힐 수도 있고 건드릴 수도 있는데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아 보려고 무리를 둘러보셨고,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고백과 간증을 했습니다.(마가복음 5:25-34)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 2,000년간에 걸친 역사의 행렬 속에 함께 가고 계십니다. 그 행렬 속에서 예수님께 접촉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적으로,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그러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만지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슬쩍 건드리는 것과 마음으로 예수님께 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귐


 사도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을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이 요한일서를 기록했는데, 그 목적은 사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생들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은 인간을 사랑의 짝으로 삼으시고 그 사랑의 짝과 함께 영원한 교제를 가지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교제는 생명이 있는 곳에만 존재합니다. 죽은 사람끼리는 바로 옆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교제가 안됩니다. 죽은 사람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는 참으로 조용합니다.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대화도 없으며 생명의 동작도 없습니다. 한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끄럽습니다. 이 세상은 무척 소란스러우며 때로는 시비와 다툼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혼의 생명이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 그리워"라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떠나본 적 이 없는 사람도 자기 집 아랫목에 누워서 "타향살이 몇 해던가..." 등의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구슬픈 곡조에 마음이 끌려가고 공감을 느낍니다. 그 근원을 파헤쳐보면 마음 속에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주목하고, 만졌는데, 이것을 전함은 죽은 너희들이 살아서 그 생명 안에서 함께 사귐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말합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끊겼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가지는 생활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구원받으면 지옥 갈 사람이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가게 된다는 편협적인 문제만을 항상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근본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부산물로 오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 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던 영혼이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값있는 삶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한일서 1:4)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쓰면서, 이 편지가 널리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회복하고 원만한 교제를 계속하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겠느냐면서,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그는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오직 자기가 쓰고 있는 편지의 결과에서 오는 기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니 잘한 일도 있었고, 실패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나간 생애는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이 언제 오실지, 혹은 그 전에 제가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좀 더 젊어서 육신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그 방면에서 주님의 뜻을 순종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재의 입장에서는 남은 생애 동안 좀 더 충실하게 성경을 전하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위대하고, 번창하고, 성공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으며 다 허무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24-25)


 ‘주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주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는 나훔 3장 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나훔 3:17)


 이 세상에서 지식이나 재력, 권력 등 모든 것을 갖추고 큰소리치며 산다 하더라도, 때가 지나면 그 모든 것들은 마치 해가 뜨면 날아가 버리고 없는 메뚜기 떼같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으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하는 일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펜을 들고 글을 쓸 것이고, 어떤 이는 계산대에 앉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 노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형편,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히 발견하고, 그 일로부터 언젠가는 기쁨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확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데, 그것을 씀은 자기들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사도 요한과 똑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또 흉내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사도 요한과 똑같습니다. 무엇입니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사도 요한의 생명이나 구원받은 우리의 생명이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맡은 일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에서 어떤 충만한 기쁨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충만한 기쁨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는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대로, 대개 자기가 하고 있는 일보다는 남이 하는 일을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불만 속 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빛을 받은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언젠가 충만한 기쁨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을 위해서나 혹은 자기의 육신을 위해서 살았다면 기쁨이 없을 테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다면 반드시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많은 일 가운데서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 그 부분만은 언젠가 자신에게 기쁨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부끄럼도 의심도 없이 참으로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생명의 근원 - 빛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빛의 역할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봅시다. 빛의 역할은 너무나 다양하고도 광범위합니다. 빛은 세상을 밝혀줍니다. 햇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더듬거릴 것입니다. 빛이 있으므로 어둠이 사라지고 온 세상이 밝히 드러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또 햇빛이 없으면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이 양분을 얻지 못하므로 자랄 수 없고, 따라서 식물을 먹고 사는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이 살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색깔도 빛 때문에 나타납니다. 만약 빛이 없다면 빨강, 노랑, 파랑 등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빛의 역할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햇빛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편 119:9)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길을 바로 찾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태양 광선을 통해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오고 또 그 빛이 세상을 밝혀주고 행동을 자유롭게 해 주듯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빛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는 각양의 좋은 은사라든지 선물이 오고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빛에 의해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먹을 것을 얻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사귐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정확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빛에 접하고 이 빛 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말씀을 먼저 해두었습니다. 그 다음에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교제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에 거하는 생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로새서 1:12)


 빛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기업을 얻게 합니다. 기업은 빛 가운데서만 오는 것이므로 빛이 없으면 기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 있다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두움이 있다고 하면 기업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한 곳을 더 찾아봅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 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에베소서 5:8-13)


 빛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장마가 길면 그 해에는 흉년이 듭니다. 모든 식물이 다 그렇지만 특히 벼는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충실하게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라는 말씀대로 어두운 가운데서는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열매가 맺힐 수 없다는 점은 자연의 원리나 영적인 원리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생명 유지에 절대적인 필수 요건입니다.

 인생길을 가는 중에 앞날이 캄캄하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혼돈 속에 있으며, 모든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은 하나님을 떠나 있을 경우에 찾아옵니다. 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마음의 어두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하나님을 발견하면 모든 문제가 밝혀져 버리고 다 해결되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풀리지 않을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어두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완전한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요한계시록 22:5)


정한 때가 되면 해도 달도 전등도 필요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빛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면 해나 달, 별들이 하나도 없다 해도 이 세상은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태양이 없어진다고 해서 빛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켜면 성냥개비에 불이 붙고 거기서 작게나마 빛이 생깁니다. 그 작은 성냥불에서부터 이글이글 타고 있는 큰 불덩어리인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빛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훗날 영원한 천국이 도래했을 때, 자연계의 빛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서 오는 빛만이 대낮 보다도 더 밝고 환하게 비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인 면에서나 진리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은 빛의 근본이심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이 빛 가운데서 더 영광스러운 일을 경험할 수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두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6-7)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빛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면서 한편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그들 나름대로 어떤 진리를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 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 초대 교회의 노스틱 주의자들, 여러 가지 철학 등 이단 학설을 전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향해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라"라고 했는데, 빛의 반대가 바로 어두움입니다. 어떤 것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곧 이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8-10)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남에게 나쁜 짓 하고 악한 짓 하는 것 등 법적, 도덕적인 면에 위배되는 것을 가리켜 죄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 이란 용어 속에는 훨씬 더 광범위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인간의 의(義)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두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다고 해도 다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의 빛과 관계 없는 일은 전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과는 타협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조금도 교제를 할 수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귀려면 마음에 어두움이 없어야 하고, 죄가 해결되어 있어야 하며, 언제든지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사귄다는 문제를, 실생활과는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해 버리고, 별로 중요시하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육신이 세상이나 어두움을 좋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19)


 마음에 하나님의 빛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데, 언제까지나 그 교제가 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막힌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처럼 슬프고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막히면 단순히 교제만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이 단절됩니다. 하나님의 각양 좋은 선물은 빛으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에 빛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들도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두운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는 말씀을 예사롭게 듣고 흘려버리지 말고 심사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갓 구원받았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통하는 내적 사귐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 그 교통이 막혀버리고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자리잡는다면 이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 막혀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어두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았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영원한 속죄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우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사함받았다는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8)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브리서 10:17)


 이와 같이 우리의 죄가 영원히 사함받았다는 것을 강조해 놓고서는 왜 또 여기서는 아직 사함받을 죄가 우리에게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을까요? 왜 이처럼 상반된 말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2장 1,2절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7절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참된 양식과 음료


 요한일서 1장 7절의 말씀 중에서 "사귐이 있고"라는 말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자리에 가보면 반드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역시 먹을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한복음 6:53-57)


 성찬식을 할 때에는 으레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떡은 예수님의 살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귐에 필요한 양식과 음료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받을 때에 한 번만 마시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간의 사귐 속에도 반드시 예수님의 피가 있어서 그것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마음에 어둠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말입니다.(베드로후서 1:9) 

 마음이 어둡고 교제가 없는 가운데 살면서"예수님의 피로써 내 죄를 대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어두움이 있는 가운데서 이 말을 한 다면 이는 완전히 거짓말인 것입니다. 교제가 끊어지고, 자기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도 잊어버리고 마음이 어둡고 침울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어찌 예수님의 피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지옥간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는 말은, 빛 가운데 있으면 사귐이 있고, 그 사귐 속에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람도 피를 마시는 그 사귐 속에서 또 다시 마음이 회복될 수도 있고,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해 주신 은혜를 새로이 감사하고 다시 밝아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누가복음 15장)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아들과 한 상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한 상에서 제물 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님 안에서 계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의 피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비밀을 알아가고, 그 안에서 가장 좋은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면서 살아갑니다.

 교제가 없는 생활은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됩니까? 자기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즐기면서 사는 삶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서 찾아오는 모든 열매, 즉 모든 은총을 힘입을 수 없게 되어 그 삶이 비참해지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성도들간의 교제는 이토록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성찬 예식입니다. 그러나 그 의식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만약 자신의 마음 속에 죄가 있다든지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생활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싹터 있는 죄를 해결할 길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자연히 양심에 고통이 있고, 그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교제의 음료인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가 마음에 찾아와서 괴로웠던 죄를 씻어줍니다. 그것만이 교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그 살을 먹는 교제의 생활 속에는 항상 감사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10)


 이 두 구절은 같은 내용입니다. 사람의 육신 속에는 죄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시기심도 생기고 여러 가지 음란한 마음도 생기고 욕심도 생깁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자기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가 만일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일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자칫 잘못 생각하여 죄를 심상히 여길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담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서 6장 2절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난 후, 죄를 심상히 생각하고 살면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공급되는 새로운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믿음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 괴로움은 쉽게 찾아오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주님을 더 알아가는 새로운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는 생활은 어두움을 좋아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절대로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있으면, 죄와 상종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부득이 해서, 또는 본능적으로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것을 괴로워하고 날카롭게 반응하면 빨리 해결이 됩니다. 이 경우, 그 죄를 처리하는 방법 이 9절에 나타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을 경우, 하나님이 굉장히 인색해서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려고 위엄을 부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용서해 달라고 자꾸 기도하고 애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빛 가운데서 구별이 잘 안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새벽마다 울고 부흥회 때마다 우는 형태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범죄했을 경우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솔직히 자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자백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빛 앞에 자기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은 그냥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설교를 듣던 중에, 또는 성경을 읽는 중에, 아니면 교제 가운데에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췰 때 자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든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의 관심 거리가 아니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건 감히 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에 의해 자기의 더러운 죄가 드러났을 때, 그 죄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저절로 "하나님 저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입으로 하든지 마음으로 하든지 간에 그것이 바로 자백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고 싶은 마음, 정직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빛이 비췹니다. 그 빛 가운데서 이렇게 솔직히 자기의 부정한 것과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어두움은 끝나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범죄했을 경우,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자기의 죄, 부정, 부끄러움을 발견하기만 하면 마음 속에서 저절로 자백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즉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회복됩니다. 그것이 곧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죄의 두 가지 면


 그런데 죄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힌 죄가 그것입니다. 전자일 경우는 하나님 앞에만 자백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 때문에 성도들 사이에 시비 또는 기타의 죄가 생겼을 경우, 서로 솔직히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자백했다 하더라도, 관계된 사람 사이에 서로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마음에 어두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이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도 여전히 막혀 있고 어두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제인데, 이 교제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죄, 그리스도인 피차간에 막혀 있는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12)라는 말씀도 역시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기는 했지만, 형제가 형제에 대해서 용서해야 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빛이 없으며 교제도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지은 죄가 마음에 남아 있어서 양심을 괴롭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괴롭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백해야 합니다. 그 자백이 없으면 교제가 열리지 않고, 교제가 열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시지 못하면 그 죄 때문에 계속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토록 분명히 우리가 원만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기 어두움 가운데 그냥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제 자신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을 때 아무것도 몰랐지만 침례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장로교 목사였기 때문에, 침례를 받으면 그 교단에서 제명을 당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를 생각하니 앞으로 처자식들을 거느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강한 성령의 가르침 때문에 저는 침례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굶어 죽을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히 큰 맹세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작정이 매우 중요했었습니다. 얼마 후 결심한 대로 침례를 받고, 장로교단에서 제명당했습니다. 그러자 굶어 죽기는 커녕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 이후 다른 문제가 부딪혀 왔을 때,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애굽기 20:5-6)


 저는 요즈음 제 경우를 돌아보면서 이 말씀이 정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경험한 자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여러분, 그 영향은 먼 장래에까지, 그리고 자손에게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산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경우, 그 징벌이 즉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을 보통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도서 8:11)라는 말씀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요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 것에 대해서도 절대로 잊지 않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브리서 6:10)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 그리고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도 하나님이 잊어버리셨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 6:11-12)


 어떤 일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그 일이 너무나 괴로워 도저히 견딜 수 없고,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것이 마치 허송세월하는 것 같고 자신이 공연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고 갚아주십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강물 위에다가 식물을 던지면 그것이 세월과 함께 다 떠내려가 버리고 아무 결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구구절절이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무엇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도중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식언치 아니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다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에는 우리의 삶에 징계가 따르고, 어려움과 괴로움이 가로놓여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른다면 틀림 없이 후일에 풍성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지금 곧 당신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