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10)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요한일서 3장에서는 의와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하게 되고, 또 그쪽으로 치우치다 보면 자칫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쳐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든지 의와 사랑이 병행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의 두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울의 한쪽에 하나님의 의를, 다른 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얹으면 평형을 이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도 사랑만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몸에 이루어지는 행위만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두 속성의 균형을 잘 잡아야만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안에서 교제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요한일서 3장 이후에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4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 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그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구원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천당 뒷자리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게 되겠지, 어쨌든 지옥은 면했지 않느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런 사람들은 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한일서4:18)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할 때에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사실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 지옥의 두려움은 아니지만 어떤 두려움이 감돌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 즉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에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완전히 거룩하고 깨끗하시기 때문에 불결한 사람은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다 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그 생활은 제각기 다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원은 받았지만 불신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다 똑같은 영광에 참여한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요한계시록 20:13)
이 말씀은 지옥가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받는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의 자기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르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그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받는 영광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로마서 3:2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는데, 이는 구약의 예언과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그 영광은 이 땅에서의 삶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으로 행한 의와 장차 받을 영광은 비례합니다. 우리 육신의 지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만큼, 이 육신을 죽이는 만큼, 이 육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만큼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 이 땅에서의 생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증거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한일서2:29)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의롭게 되었고, 동시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성령에 의한 의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줄을 안다는 말씀과,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요한일서 3:14)는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의를 행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의를 행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난 줄을 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전혀 없다면,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났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생활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 13:12-17)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행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라는 말은 피차간에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섬기는 일 자체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곧 의를 행하는 것인데, 그것도 알고 행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그 말씀을 구실삼아 육신을 만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이것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육신이 당하는 죽음의 고통,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과의 단절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을 포기 하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드렸는데, 그것이 곧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 란,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그 앞에 자신의 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소 매사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인지, 어떤 것이 의롭게 사는 생활인지 하는 문제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을 섬기는 생활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원에 따라 섬기는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원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지만, 자기 원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의를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 생활은 허공을 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형태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각 지체의 역할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
일찍부터 주님을 따라다녔고, 또 주님의 제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이고 영광이며 놀라운 일인지를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으면 의를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행한다 할지라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아무리 큰 희생이라도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구제, 희생, 금욕생활 등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면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나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불을 면하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로구나하는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인간적으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따라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없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한일서 3:1)
이 세상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영광스러운 위치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속 사람이 크게 변화되고 마음 속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겉 모양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겉 모양만 보는 세상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껏 자기 관념 속에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적 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과, 실제적인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또 구원받은 후의 하나님과 구원받기 전의 하나님도 완전히 다릅니다. 저도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었고 유년 주일 학교에도 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구원을 받고 나서 보니 하나님은 전부터 내가 믿어오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두려운 하나님이었는데 구원받던 날부터 더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사도 요한은 감사를 드리며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놀랍고 영광스러우며 다행한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놀랍고 신기하고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서 이 사실을 아무리 자랑해 봐도 세상이 알아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랑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의를 행할 때 조금씩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삶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고 또 의를 행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변화를 받아 예수님과 같아지고,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 보훈 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다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장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좇은 만큼 주님을 보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좇지 않는 생활은 주님을 보면서 사는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느날 주님이 오셨을 때 당장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다가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온전히 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깨끗하게 하는 길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이라고 하지 않고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라고 한 것은, 주를 향해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모두가 주님의 깨끗 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5:26-27)
"물로 씻어"라는 것은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는 말씀대로 말씀에 의해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나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구원받을 때에도 말씀으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위에 언급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은 물론 교회를 깨끗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도 말씀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아야 됩니다. 머리이신 주님은 자기의 몸인 교회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깨끗하게 하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언제든지 깨끗하게 하여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머리는 말씀과 생각, 뜻이 있는 곳입니다. 머리의 뜻에 의해서 몸을 정결케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이듯이, 주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우리 개인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2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8-19)
예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인데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깨끗하게 한다’ 는 말은 반드시 죄를 씻는다는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생겨나기 전에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을 때에, 즉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경우 자기의 생각을 좇느냐 하나님의 뜻을 좇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태도 결정의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죄는 그런 경우에 생겨납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 자기의 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안에 죄가 침범해 들어오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 버리면 깨끗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두움과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가, 주님의 피가 마음에 떠올라서 깨끗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물론 이미 죄를 범했을 경우는 그 방법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더욱 더 주님을 닮아 가는 생활은, 자기에게 침범해 들어오려고 할 그 때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대로, 미리 막아서 그 죄에서 자기를 지키는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해결하기보다 죄를 짓기 전에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점점 더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20)라는 말씀이 있으나, 그 뒤에 곧 이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1-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더 많이 깨닫고,자기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만큼 은혜를 더 많이 느낍니다.
만 냥 빚진 자와 열 냥 빚진 자가 각각 빚을 탕감받았을 경우, 어느 쪽이 더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는 말씀이 결코 적용될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될 수 있으면 죄를 짓지 않는 길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앞에 놓여 있을 때 육신의 생각을 좇으면 틀림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면 우선 육신적으로는 손해를 볼 지 모르지만 죄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이 무척 시장하셨을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라는 유혹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육신의 욕구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지키는 만큼 장차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와 계시면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공급받고 말씀 앞에 서 있기만 하면,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날 분명히 성령을 받았고, 자기 속에 성령이 계시는데도 그 성령의 인도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 편에 결정지으면 성령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곧 성령의 인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힘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줄 압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만, 실상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는 그분이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 우리 자신이 직접 져야 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처리하시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는 죄가 없으나 예수 밖에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날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원칙적으로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3:6)
그러나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이 말씀으로 인하여 문제에 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구원받고 예수 안에 거하는 줄 알았는데 때때로 죄를 짓게 되니 ‘혹시 내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안에는 한 점의 흠도 죄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그러한 예수님 안에 있다면 원칙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주먹질도 하고 욕도 하고 거짓말도 거침없이 한다고 하면 그를 예수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은 굉장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 앞에 서면 모순 투성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우리 영혼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행동은 예수 안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 밖의 행동입니다. 문제는 아직 우리가 육신으로 존재하는 데에 있습니다. 육신은 항상 예수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육신은 예수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살면서 의를 행하고 싶으면 육신을 깨끗하게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꾸만 죄로 향하는 육신을 죽여가면서 육신을 통제하고 이끌어 예수님 안에 사는 생활을 연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훈련받는 생활, 육신을 죽이는 생활,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깨끗한 데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알게 되는 과정을 겪기도 합니다.
의롭게 되는 길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3:7-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활 중에 다소간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혹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납하는 마음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뚜렷이 죄의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죄들, 즉 도둑질. 간음 등은 세상 사람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인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일상 생활에 묻어 들어오는 것들, 즉 거짓말, 형제 자매를 흉보는 일, 화나면 욕하는 일, 성나면 폭행하는 일 등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미혹된 것입니다. 뭔가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끗해지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에 의해서 인도받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큰 죄나 허물 없이 그럭저럭 살면 천당 가겠지’ 하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노스틱 주의 등 죄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이단 사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앞에 언급된 요한일서 3장 7절에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성경에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두 가지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0-28)
이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배격하고, 순전히 예수님이 이루어놓은 의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준 편지인 요한일서에는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한일서 3:7)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육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그 의로움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나 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 그 의지가 있어야만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의롭게 산다는 것이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하여 아예 단념해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으면 방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나를 통과해서 의를 나타내실 수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결심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동기는 유발시켜야 합니다.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하는 그 동기 유발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하려고 했을 때는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만 결정한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라는 약속대로 성령께서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쉽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라는 말씀대로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 중에서도 죄를 짓는 일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간음, 도둑질, 싸움, 거짓말, 흉보는 일 등 범죄를 하면 그것은 다 마귀의 일이요, 육신의 일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진 일이라도 그런 것은 성령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는 마귀의 일이 멸해져 있고 죄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한일서 5:3-5)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났고 그에게서 난 사람은 그의 계명인 새 계명을 지키는데, 그것은 결코 무겁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이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승리가 믿는 자들의 것이 되어 어렵지 않게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3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죄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생활,그것이 바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아들 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교제의 가장 큰 장애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9-10)
이 요한일서에서는 특히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제의 가장 큰 장애물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히 우리의 경험과 다르고,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요한일서 1:10)라는 말씀과도 상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요한일서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곳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도 죄를 짓는다고 했고,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라는 말씀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말씀이 다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로마서 8:10)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이란 말씀에서 '너희'란 교회를 지칭함은 물론 개인도 해당됩니다. 현재 우리가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신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라고 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우리의 생명 자체는 죄를 지을 수 없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좇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를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혹 그리스도 밖에서 육신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두 가지 삶은 너무나 뚜렷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등한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육신을 따라 살고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분간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10)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죄는 구원받은 사람들 간에, 즉 형제 자매간에 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신 목적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4:3-8)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음란을 버리고 색욕을 좇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간에 정당한 부부 생활이 아닌 성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육신의 정욕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결국은 서로를 해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형제 자매 사이에 조금이라도 해치는 일, 손상시키는 일이 있으면 성령이 심히 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사느냐 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고 난 뒤 자기의 친척이나 친지, 이웃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굉장히 열심을 내면서 그것만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다 더 큰 데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로마서 11:25)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주님이 오십니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실 징조가 가까이 보이기 때문에, 지금 생각에는 남보다 자기 가족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겠지만,하늘나라에 가보면 내 친척들이 구원받은 것이나 다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피차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돕고 섬기며 살아가는 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거룩함과 의로운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의로운 생활과 형제 사랑이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요한일서 3:12)라고 했습니다.
결국 요한일서 3장에서 말하는 죄는 가인 같은 죄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고 그 의를 이루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 밖에서 마귀의 뜻을 순종하면서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형제 사랑이 실천되고 있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요한일서 3장에서는 의와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하게 되고, 또 그쪽으로 치우치다 보면 자칫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쳐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든지 의와 사랑이 병행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의 두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울의 한쪽에 하나님의 의를, 다른 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얹으면 평형을 이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도 사랑만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몸에 이루어지는 행위만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두 속성의 균형을 잘 잡아야만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안에서 교제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요한일서 3장 이후에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4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 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그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구원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천당 뒷자리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게 되겠지, 어쨌든 지옥은 면했지 않느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런 사람들은 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한일서4:18)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할 때에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사실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 지옥의 두려움은 아니지만 어떤 두려움이 감돌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 즉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에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완전히 거룩하고 깨끗하시기 때문에 불결한 사람은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다 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그 생활은 제각기 다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원은 받았지만 불신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다 똑같은 영광에 참여한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요한계시록 20:13)
이 말씀은 지옥가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받는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의 자기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르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그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받는 영광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로마서 3:2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는데, 이는 구약의 예언과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그 영광은 이 땅에서의 삶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으로 행한 의와 장차 받을 영광은 비례합니다. 우리 육신의 지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만큼, 이 육신을 죽이는 만큼, 이 육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만큼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 이 땅에서의 생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증거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의롭게 되었고, 동시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성령에 의한 의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줄을 안다는 말씀과,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요한일서 3:14)는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의를 행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의를 행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난 줄을 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전혀 없다면,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났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생활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행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라는 말은 피차간에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섬기는 일 자체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곧 의를 행하는 것인데, 그것도 알고 행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그 말씀을 구실삼아 육신을 만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이것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육신이 당하는 죽음의 고통,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과의 단절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을 포기 하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드렸는데, 그것이 곧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 란,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그 앞에 자신의 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소 매사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인지, 어떤 것이 의롭게 사는 생활인지 하는 문제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을 섬기는 생활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원에 따라 섬기는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원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지만, 자기 원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의를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 생활은 허공을 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형태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각 지체의 역할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
일찍부터 주님을 따라다녔고, 또 주님의 제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이고 영광이며 놀라운 일인지를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으면 의를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행한다 할지라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아무리 큰 희생이라도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구제, 희생, 금욕생활 등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면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나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불을 면하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로구나하는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인간적으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따라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없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한일서 3:1)
이 세상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영광스러운 위치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속 사람이 크게 변화되고 마음 속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겉 모양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겉 모양만 보는 세상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껏 자기 관념 속에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적 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과, 실제적인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또 구원받은 후의 하나님과 구원받기 전의 하나님도 완전히 다릅니다. 저도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었고 유년 주일 학교에도 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구원을 받고 나서 보니 하나님은 전부터 내가 믿어오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두려운 하나님이었는데 구원받던 날부터 더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사도 요한은 감사를 드리며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놀랍고 영광스러우며 다행한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놀랍고 신기하고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서 이 사실을 아무리 자랑해 봐도 세상이 알아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랑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의를 행할 때 조금씩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삶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고 또 의를 행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변화를 받아 예수님과 같아지고,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 보훈 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다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장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좇은 만큼 주님을 보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좇지 않는 생활은 주님을 보면서 사는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느날 주님이 오셨을 때 당장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다가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온전히 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깨끗하게 하는 길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이라고 하지 않고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라고 한 것은, 주를 향해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모두가 주님의 깨끗 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로 씻어"라는 것은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는 말씀대로 말씀에 의해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나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구원받을 때에도 말씀으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위에 언급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은 물론 교회를 깨끗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도 말씀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아야 됩니다. 머리이신 주님은 자기의 몸인 교회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깨끗하게 하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언제든지 깨끗하게 하여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머리는 말씀과 생각, 뜻이 있는 곳입니다. 머리의 뜻에 의해서 몸을 정결케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이듯이, 주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우리 개인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2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8-19)
예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인데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깨끗하게 한다’ 는 말은 반드시 죄를 씻는다는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생겨나기 전에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을 때에, 즉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경우 자기의 생각을 좇느냐 하나님의 뜻을 좇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태도 결정의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죄는 그런 경우에 생겨납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 자기의 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안에 죄가 침범해 들어오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 버리면 깨끗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두움과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가, 주님의 피가 마음에 떠올라서 깨끗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물론 이미 죄를 범했을 경우는 그 방법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더욱 더 주님을 닮아 가는 생활은, 자기에게 침범해 들어오려고 할 그 때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대로, 미리 막아서 그 죄에서 자기를 지키는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해결하기보다 죄를 짓기 전에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점점 더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20)라는 말씀이 있으나, 그 뒤에 곧 이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1-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더 많이 깨닫고,자기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만큼 은혜를 더 많이 느낍니다.
만 냥 빚진 자와 열 냥 빚진 자가 각각 빚을 탕감받았을 경우, 어느 쪽이 더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는 말씀이 결코 적용될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될 수 있으면 죄를 짓지 않는 길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앞에 놓여 있을 때 육신의 생각을 좇으면 틀림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면 우선 육신적으로는 손해를 볼 지 모르지만 죄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이 무척 시장하셨을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라는 유혹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육신의 욕구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지키는 만큼 장차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와 계시면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공급받고 말씀 앞에 서 있기만 하면,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날 분명히 성령을 받았고, 자기 속에 성령이 계시는데도 그 성령의 인도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 편에 결정지으면 성령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곧 성령의 인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힘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줄 압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만, 실상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는 그분이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 우리 자신이 직접 져야 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처리하시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는 죄가 없으나 예수 밖에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날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원칙적으로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3:6)
그러나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이 말씀으로 인하여 문제에 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구원받고 예수 안에 거하는 줄 알았는데 때때로 죄를 짓게 되니 ‘혹시 내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안에는 한 점의 흠도 죄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그러한 예수님 안에 있다면 원칙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주먹질도 하고 욕도 하고 거짓말도 거침없이 한다고 하면 그를 예수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은 굉장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 앞에 서면 모순 투성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우리 영혼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행동은 예수 안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 밖의 행동입니다. 문제는 아직 우리가 육신으로 존재하는 데에 있습니다. 육신은 항상 예수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육신은 예수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살면서 의를 행하고 싶으면 육신을 깨끗하게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꾸만 죄로 향하는 육신을 죽여가면서 육신을 통제하고 이끌어 예수님 안에 사는 생활을 연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훈련받는 생활, 육신을 죽이는 생활,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깨끗한 데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알게 되는 과정을 겪기도 합니다.
의롭게 되는 길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활 중에 다소간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혹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납하는 마음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뚜렷이 죄의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죄들, 즉 도둑질. 간음 등은 세상 사람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인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일상 생활에 묻어 들어오는 것들, 즉 거짓말, 형제 자매를 흉보는 일, 화나면 욕하는 일, 성나면 폭행하는 일 등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미혹된 것입니다. 뭔가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끗해지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에 의해서 인도받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큰 죄나 허물 없이 그럭저럭 살면 천당 가겠지’ 하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노스틱 주의 등 죄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이단 사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앞에 언급된 요한일서 3장 7절에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성경에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두 가지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0-28)
이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배격하고, 순전히 예수님이 이루어놓은 의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준 편지인 요한일서에는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한일서 3:7)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육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그 의로움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나 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 그 의지가 있어야만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의롭게 산다는 것이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하여 아예 단념해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으면 방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나를 통과해서 의를 나타내실 수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결심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동기는 유발시켜야 합니다.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하는 그 동기 유발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하려고 했을 때는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만 결정한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라는 약속대로 성령께서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쉽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라는 말씀대로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 중에서도 죄를 짓는 일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간음, 도둑질, 싸움, 거짓말, 흉보는 일 등 범죄를 하면 그것은 다 마귀의 일이요, 육신의 일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진 일이라도 그런 것은 성령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는 마귀의 일이 멸해져 있고 죄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한일서 5:3-5)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났고 그에게서 난 사람은 그의 계명인 새 계명을 지키는데, 그것은 결코 무겁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이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승리가 믿는 자들의 것이 되어 어렵지 않게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3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죄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생활,그것이 바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아들 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교제의 가장 큰 장애물
이 요한일서에서는 특히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제의 가장 큰 장애물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히 우리의 경험과 다르고,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요한일서 1:10)라는 말씀과도 상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요한일서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곳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도 죄를 짓는다고 했고,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라는 말씀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말씀이 다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로마서 8:10)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이란 말씀에서 '너희'란 교회를 지칭함은 물론 개인도 해당됩니다. 현재 우리가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신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라고 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우리의 생명 자체는 죄를 지을 수 없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좇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를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혹 그리스도 밖에서 육신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두 가지 삶은 너무나 뚜렷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등한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육신을 따라 살고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분간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10)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죄는 구원받은 사람들 간에, 즉 형제 자매간에 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신 목적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뜻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음란을 버리고 색욕을 좇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간에 정당한 부부 생활이 아닌 성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육신의 정욕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결국은 서로를 해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형제 자매 사이에 조금이라도 해치는 일, 손상시키는 일이 있으면 성령이 심히 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사느냐 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고 난 뒤 자기의 친척이나 친지, 이웃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굉장히 열심을 내면서 그것만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다 더 큰 데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로마서 11:25)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주님이 오십니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실 징조가 가까이 보이기 때문에, 지금 생각에는 남보다 자기 가족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겠지만,하늘나라에 가보면 내 친척들이 구원받은 것이나 다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피차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돕고 섬기며 살아가는 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거룩함과 의로운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의로운 생활과 형제 사랑이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요한일서 3:12)라고 했습니다.
결국 요한일서 3장에서 말하는 죄는 가인 같은 죄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고 그 의를 이루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 밖에서 마귀의 뜻을 순종하면서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형제 사랑이 실천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