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하나님의 처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일서 4:10)



누구의 영향을 받는가?


 글 속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사상, 철학, 감정 등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기는 했으나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에 접하지 않고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알게 되면, 그 말씀은 하나의 사상에 그치게 될 뿐 실질적인 영의 양식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요한일서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결론지어져 있습니다. 이 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처음 몇 절에서는 먼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한일서 4: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의해서 적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구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노스틱 주의라는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노스틱 주의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가장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과 마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의 대결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단의 영의 화신인 한 인물, 즉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는 지금 이 지구 어느 곳에선가 먹고, 자고, 말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듯이 예수님과 대결하는 적그리스도 역시 육체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데살로니가후서 2:7)라는 말씀대로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가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성령이 떠나버리면 그가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에 불원간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멸망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는 마지막 결전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이 아주 분명히 대립된 채 활동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는 사람보다는 적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휠씬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도 성령을 떠나 살면 반드시 다른 영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만약 다른 영의 인도를 받는 위험이 없다면 2,000년간의 교회사에 변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가지라"(요한계시록 2:4-5)


 이 말씀은 주님이, 성령이 충만했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받던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던 교회가 100년이 못 가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벌써 다른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적그리스도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요한일서 4장에서는 사랑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두 영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것은 주후 70년경으로서, 그때 벌써 적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육체의 장본인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 나타날 것이지만 적그리스도의 영은 옛날부터 활동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살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산다면 언제 어느 사이에

 적그리스도의 영향을 받아 그와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될지 알 수 없는, 굉장히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연결되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적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으며 사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이유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본, 진리의 근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그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는 모든 풍성한 은혜와 축복, 무궁무진한 비밀들을 인간에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인간과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일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은혜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고 우리는 육신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5장 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도서 5:2)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며, 하나님은 거룩하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은 지혜롭고 사람은 미련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 거룩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풍성함이 낮고 낮은 인간들에게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과 같은 한 육신이 와야 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온갖 풍성함과 비밀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타난 분이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뜻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6-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 속에 만세 전부터 감춰져 있던 비밀이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밀’ 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밀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의 하나로 생각하고 또 크리스마스를 술 마시고 즐기는 날인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영생할 수 있는 길이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그의 영광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비밀을 아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로새서 1: 24-26)


 예수님 안에 있던, 만세와 만대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지금은 머리와 연결되어 있는 그 몸인 교회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로새서 2:9)


 예수님의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비밀이 그 안에 가득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밖에도 요한일서 4장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데에는 상당히 귀중한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는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깊고, 거룩한 뜻이 있기 때문에 그 육체를 부인하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시인하는데도,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영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충만하다든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어져 있던 것이 예수님의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사실 등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예수님을 다만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서라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김일성한테 가서 주후 4년경에 예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탄생한 것을 믿느냐고 물으면 아마 믿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브레즈네프한테 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기는 하지만,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 날이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것은 세계가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 자체는 시인한다 하더라도 그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인할 때, 그것은 틀림없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요한일서 4장에서는 서두부터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노스틱 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 보기에는 육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이단 교파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거룩한 분이시고, 물질은 다 더럽고 악한 것인데, 거룩한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물질을 입고 오실 수 있겠느냐? 그러니 예수는 물질적인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와서 사람들 눈에 보인 것뿐이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되지않는 소리입니다. 그런 이단 교파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9)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육체로 오신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사랑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한일서 4:4-6)


 이 편지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을 가진 사람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미혹의 영, 즉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구별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아주 중요한 문제로 등장시켜서, 이것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한다고 말한 후, 이것을 다시 사랑이라는 문제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7절부터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7절부터의 말씀, 즉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하기 위해 먼저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서론으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이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며 이 서신을 보내는 주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라고 결론부터 먼저 내린 뒤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사랑을 인간의 역사 속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점점 깊이를 더하고 확대되어 어느날 완성되는 곳이 바로 영원한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시는 방법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체이므로,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을 인간과 같은 육체 속에 담아 인간 세상에 보이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사상, 환상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의 이상이나 이론,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상이나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어느날 하나의 육신을 통해서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한일서 3:16)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구체적인 사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 :18)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말과 혀로만 사랑하고 구체적인 사실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접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도 실생활 속에서 그 사랑을 이루어가는 삶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어 선민의 역사를 꾸미셨습니다. 그 목적은 예루살렘도 성을 건설하여 그곳에 성전을 건축한 후,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스라엘 민족과 관계를 맺어 그 민족 속에 거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대홍수라는 심판 속에서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을 구원하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번창해 갔고, 또 다시 홍수 이전의 사람들처럼 악해졌으며, 마침내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귀신의 처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절에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패성입니다. 그들은 노아 홍수에서 특별히 구원받은 여덟 명의 후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죄의 혈통을 좇아서 태어났기에 사람들이 많아지자 어느덧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귀신의 조종을 받으면서 귀신을 만족시키는 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떠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에게 기대를 걸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한 계획, 즉 한 민족을 선택해서 그 민족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에게 한 지역을 지시하여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12: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경영하실 터가 있는 가나안 땅, 곧 현재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 11:8-10)


 예루살렘에 가보면, 모리아 산의 솔로몬 성전 터에 지금은 알 아크샤라는 이름의 회교 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회교 사원 내에 있는 큰 바위는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바로 그 자리 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회막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애굽기 25:8-9)


 하나님은 성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기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제사는 어떻게 지낼것인가에 대해 일일이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마치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9:42-46)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야곱, 이삭에게는 성전 제도를 명령하지 않으시다가 4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모세에게 말씀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전에는 성전을 지을 근거, 즉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명령하시고, 또 십계명을 돌비에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두 돌비를 보관하기 위한 법궤가 생겼고, 그 법궤를 안치시킬 지성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른 율법은 잠시 덮어두고 십계명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성전에 대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는 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되신 예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일서 4:10)


 문제는 이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 : 37)라는 계명이 주어져 있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우리’ 라는 말 속에는 모든 인류가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둔 곳이 성전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을 뿐.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이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이방인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전혀 없었습니다.그러므로 그 계명은 이루어 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성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육체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한 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육신이 바로 성전이지 않습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나 다른 어떤 민족의 역사 속에도 이루어져 본 적이 없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라는 계명이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곳이 성전이니,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이 완전히 섬김을 받은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섬김과 사랑이 실천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래로는 인간을 대표하여 인간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 사귀는 그 사랑의 길을 온전히 열어놓으셨고, 위로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쏟으시는 그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유통되는 그 사랑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온갖 비밀을 지니고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마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하고.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아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던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비로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하나님을 사랑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새 계명을 생각해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구약 시대의 계명인 십계명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신약 시대에 주신 새 계명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는 새 계명을 실천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저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라는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건물인 성전에,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에만 계십니다. 예수님의 육신 안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 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의 연합체인 참교회 안을 말하는데,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자 하나님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 가서, 어떤 이는 기도원에서, 어떤 이는 예배당에서 고함을 지르며 하나님을 만나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 찬송이 "복의 근원 강림하사…"하는 것입니다. 복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면 구태여 "하나님, 은혜주십시오, 복 주십시오…" 운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일진대,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복입니까? 여러분, 이건 너무도 엄청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그리스도의 몸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을 보려면 무엇을 보아야 했습니까?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육신이 계시지 않으므로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시대는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기, 곧 교회가 바로 오늘날 존재하는 또다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보려면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원리를 참으로 안다면 삶의 방법이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편 84:10)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참하나님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만일 진정한 교회라면 예수님의 육신도 보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보이는 육체로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론이나 사상에 그치지 않고 역사 속에 사실로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다른 몸인 교회도 분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정으로 안다면, 내 개인의 어떤 이권이나 명예를 교회보다 중하게 여기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복받을 수 있으며 그 은혜 속에 거할 수 있습니까?



왜 사는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까? 그들 중에 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단지 천국 가는 것뿐이라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땅에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각자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과 같이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성전,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우리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할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어물어물 살면서 거지가 밥 얻어먹듯이 주일 설교나 얻어먹고 살 수는없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굶어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25)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몇 끼니를 걸러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굶겨 죽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이 말씀이 사실임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에게는 최소한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모든 힘과 시간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보자고 간곡히 권하는 바 입니다.

 평탄한 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크게 번창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이왕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자녀 답게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그러한 마음이 부족한 사람도 있고, 또 그 길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아침마다 날개를 달고 자기 집을 방문해 주고, 길을 걸어갈 때 나타나서 갈 길을 인도해 주는 하나님이라면 아마 그 하나님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하나님의 거처를 확실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물론 이 과정에는 아직 미숙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의견 충돌도 있을 수 있고, 또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조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사실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이해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이해를 못합니다. 또 뭔가를 알아서 함께 하고 자기 자신을 양보하는 사람이있는가 하면, 인색함과 개인주의적인 것, 차디찬 성격이 두드러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융화가 잘 안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남을 보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의 허물이 자기 눈에 일일이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간의 허물이 보였습니까?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를 보고도 욕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한복음 8 :11)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허물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만 문제는 바로 자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 특색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용서, 구원 등의 모든 축복이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양보하고 희생할 때 용서가 있고, 남을 도와주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오직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길, 즉 자기 희생의 생활뿐임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알고 믿었노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4:13-15)


 이 짧은 몇 말씀 속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이 다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씀을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사실을 알고 믿었습니다. 현재 이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는 못했지만, 그에 대한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인간의 역사 속에 나타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했습니다. 결코 "너희가 나를 잘 모르지만 믿으라"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객관적인 사실, 즉 분명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없이 해주시려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모든 인간의 죄는 다 없어졌습니다. 2,000년 전에 모두 용서된 것입니다.

 어느날 성령이 분명히 그 사실을 알려 주셔서 우리는 그 사실을 참으로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사실을 증거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어디까지나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불과할 뿐, 예수님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성령의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은 영이십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고 합시다. 그 글 속에는 애인의 영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져 있습니다. 글로 표현되어 있는 사랑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읽고 나면 불현듯 그가 그리워지고, 또 빨리 만나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뜻이 듬뿍 담겨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4:9)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죄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성령에 접하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에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속에 실제로 아들을 보내어 구속의 역사를 꾸미시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이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에 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 가장 근본적인 역사가 바로 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엄청난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활한 우주와 우주 안의 만물을 창조하신 후 지구 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 속에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일이 보통 일입니까?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고 자신의 뜻을 계속 나타내고 계시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아주 무성의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지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얼마나 큰 차질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는 비결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한일서 4 :17)


 이 말씀 중에 나오는 단어는 어려운 것이 전혀 없는데도 이 말씀의 내용이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이로써’ 라는 말은 바로 앞에 있는 16절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지 거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생활 속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그 의문을 해소하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해보면 틀림없이 그 문제는 간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안에 거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생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 거한 다는 말은 자기가 남을 사랑하면서 사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곧이어 17절의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하는 말씀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희생하면서 성도 섬기는 일에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하나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17절을 봅시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여기에 심판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 :10)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받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인 것입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 하나님의 사이가 어떠했습니까?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에게 책망받으신 적이 있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사랑에 관계되지 않는 그 어떤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주님과 하나님의 사이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였고 또 마음이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의문도 있을 수 없는 완전히 평안한 상태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나님과 아들 사이가 얼마만큼 친밀하고 평안한 관계였던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은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잔을 받기에는 육신이 약하고 고통스럽 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면 달게 받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아버지와 그 아들 사이에 전혀 거리가 없었으며 조그마한 두려움도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좇아서 참으로 그 사랑 안에 거한다면 우리도 두려움 없이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이 있든지 말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사실입니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이 형벌도 역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형벌. 즉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는 지옥의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때(고린도후서 5:10) 당할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 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일서 4:19-21)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새 계명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목표, 초점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중에는 아마 이런 것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미워하지 않는데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 안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구원받은 형제 자매 사랑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를 사랑하기 싫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길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하느냐?"라 는 질문이 당연히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사랑이 일어나지 않고 자꾸만 미움이 생긴다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행동을 취하십시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위선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바꾸어서 생각해 봅시다. 내 마음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마음 속에서부터 샘솟듯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랑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누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자기의 힘이 자라는 데까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사랑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성령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로 행동할 때 성령께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한일서 4장의 결론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