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한일서 5:1)
신앙의 첫 걸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2)
해마다 수양회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나 몇 해 동안 수양회에 참석하고 또 지역의 전도 집회에 참여해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는 그렇게 되는 이유가 아마 두어 가지 정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어진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비슷한 듯하나 차이가 큽니다. 성경을 모두 인정하고 시인을 해도 믿어지지 않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까닭은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연하게는 죄를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바닥까지 낮아지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느낌을 기다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느낌을 기다리는 사람은 육신의 감정으로써 구원을 얻어보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12절 말씀의 후반부에 그런 분들이 생각을 좀 할 수 있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갓 받으신 분들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성경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구원받고 나면 성경 말씀이 달고 성경을 많이 읽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성경을 알기 위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알아지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공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잔뜩 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히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 얼마 동안은 별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평안과 기쁨이 있어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전부 다 구원의 말씀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필요한 말씀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10년 동안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설교했습니다. 물론 다 도덕론에 불과한,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지요. 책을 보고 연구해서 하는 설교, 사람이 만들어서 하는 것이었으므로 주로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보니 생활에 대한 성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전부 구원에 대한 말씀뿐이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이야기들도 다 구원에 대한 것으로 알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을 통해서 받은 구원을 다져가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 생활에 관한 것을 알게 해 준다거나 더욱 풍성한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성경을 상식적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자연스럽게 성경을 읽어나가면 성경에 대한 상식이 많이 늘고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성경이 참으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참으로 자기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읽은 말씀이 당장 나의 양식이 되지는 않았다 해도 내 머리 속에 많이 쌓이면 신앙 생활을 해 가다가 문제가 생길 때 그 쌓인 것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
가만히 보면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설교는 많이 들었으니 주일에 나와서 설교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뜯는 것이 필요합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경을 지식으로 알기만 할 뿐 생활에 실현이 되지 않는 경우입니다.머리만 굵어지고 손과 발은 작은 사람처럼 신앙 생활이 비정상적으로 될까봐 성경을 많이 듣고 아는 것이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에게 가르치려고 욕심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자기에게는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 가운데 그런 목적으로 듣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이 머리 속에만 머무는 것 이 아니라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신령한 것을 깨달았다면서 이 교회의 활동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깨달았으면 그것이 그의 삶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해서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있어 온 모임 자체를 부인하고 반기를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임을 부인하고 반기를 든다면 성경에 대해 잘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다고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그것만 진짜라고 한다면, 과거에 구원받은 것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어떤 경험을 한 것을 기초로 해서 형성된 교회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부정되어 버리고 그 몇 사람들의 말만 옳은 것입니까?
우리 모임은 구원받은 경험을 가졌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없는 사람들로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차원 높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지난 날에 성경 속에서 깊은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대로 형성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수천 명씩 생겨날 정도로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다 무시해 버리고 자기 자신들만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바로 마귀의 운동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책을 쓰면서 ‘이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고, 교회가 무엇인지 참으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고도 잘 알 수 있겠나? 하는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 교회, 즉 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나가는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 왔는데,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팽개쳐 버리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혹시 성경을 올바로 깨달았더라도 그 다음 순간에 악령에게 조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음성이 들린 직후에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도 예수님과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으므로 찾아오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제목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납니다. 첫째 종류는 구원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태복음 5:44-45)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이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 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은 같은 예수님이지만 다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일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출발을 하려고 하니까 마귀가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고 시험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교회에 적용시키지 않고 개인에게 집착시키면 이상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전혀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경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일을 하는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가 시작되는 때에 교회의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경험이 있고 또 마귀의 시험을 거치는 등 많은 문제를 거쳐서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개인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나타내고 선전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있어도 그것은 자기 개인의 어떤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히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러한 일로 지금까지의 신앙 생활과 이 교회가 가고 있는 길과 모임 자체를 부정하고 자기만 옳다고 한다면 설령 올바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마는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일에 도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역행하는 악령의 시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잘 못 된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의 의(義)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기의 의로써 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의로써 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자기와 개인적으로는 의식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한 것입니다.
가령 어떤 분이 구원을 받고 나서 모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게 생각되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 보니까 자기가 성령의 안식 속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의로써 억지로 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나의 의니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 해서 그렇게 살지 않겠다’ 라고 생각해서 모임과 관계 없이 산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다음의 삶이 더 크게 잘못됩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의로써 했다 하더라고 그것이 모임 안에서 행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적어도 그것을 사용하셨습니다.그러면 지금까지는 내가 억지로 했지만 똑같은 일을 하되 그 후로는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분들을 만났는데 그 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엔 남편에게 순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고 자식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었는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이 고쳐졌습니다. 그 때부터 참으로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그 때부터는 남편을 참으로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웃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식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하는 일은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나는 이제 이렇게 순종하는구나’하는 그것을 자기가 알고,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선전하게 되는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하는 일은 내가 이렇게 한다’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의식이 있어 그것을 입으로 말하고 자랑할 만큼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의 도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5-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아주 독실하고 큰 믿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 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종이 있는데 들판에 가서 하루 종일 땀을 흘려가면서 밭을 갈고 일을 하고 왔다고 하자. 그렇다고 주인이 네가 수고를 많이 했으니까 와서 쉬어라. 그리고 나와 같이 먹자"라고 하겠느냐? 오히려 주인이 먹을 음식을 나르고 주인이 먹을 동안 시중들고 주인이 다 먹은 후에 음식을 먹는 이것이 종의 태도가 아니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참으로 믿음 이 큰 사람의 태도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어떤 일을 하면서 마음에 으쓱한 생각이 들고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하는 생각이 든다면 참 유치한 것입니다. 생각 해 보십시오. 조그마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스럽고 우쭐하고, 남보다 내가 나은 것같이 생각된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참된
종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많은 일을 했지만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칭찬 받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어떤 자부심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그것이 충실한 종이고 믿음이 있는 종의 태도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한일서5:1)
현대에는 이 성경 말씀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을 너무 쉽게만 읽어가지 말고 조금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었다’는 뜻인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그 말을 의미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는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당시나 지금이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 가 예수님의 이름이라도 되는 듯,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은 교리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붓는다, 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는 영적으로 우리의 선지자이시고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임금이시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질적으로 이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선지자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지금까지도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참된 대제사장이시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다음, 그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마치고 나오시는 날, 왕으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 해가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을 맡으신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그 때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 3년간은 선지자의 역할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대변해 주시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 만일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번에 흘리신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는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그 말 속에는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나를 위해 대언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장차 그 대제사장 직분을 마치고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라는 말 속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으므로 구원받은 지 오래된 사람들도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런저런 어려움이 몰려오고, 죄를 짓는 문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문제 등 많은 문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대변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브리서 7:22)
구약 시대에는 아론부터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까지 제사장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 많았습니까? 제사장들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히브리서 7:23)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참제사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신 고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브리서 7:24)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부터 그 제사장 직분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도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병자를 고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죄와 허물과 질병을 짊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이 제사장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이 시간도 그는 살아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2,000년 전에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믿었을 때 내 죄가 용서되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떤 예수님을 믿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이제도, 내년도. 영원히 순간 순간 짓는 나의 죄와 실수, 불행, 모든 어려움, 내게 오는 온갖 시험 등 모든 어려운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항상 간구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어느날 그 사실을 발견하고 크나큰 평안을 얻었습니다. 호렙 산에 손들고 서 있는 모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손들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에 제 마음 속에 있던 전쟁이 끝났습니다. 굉장히 무섭던 마음의 전쟁이 끝나버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주님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4-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는 말씀 속에는 아주 깊은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걱정하고 괴로워할 때에 예수님도 우리의 걱정 속에, 우리의 괴로움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혹시 죄를 범하는 일이 있어도 주님은 내가 죄를 짓는 그 심정내 연약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완전하시고 홈이 없는 분이시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구한말(舊韓末) 민비가 당시 새로 도입된 운동인 테니스 경기장에 관람을 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하는 사람을 보더니 "저렇게 힘든 것을 왜 자기가 직접 하느냐? 종에게 시키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돈 많은 사람은 돈 몇천 원이 없어서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밥을 한 끼도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해서 밥 굶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밥을 굶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습니다.
높은 곳,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곳에 계시고 너무도 깨끗한 자리에 계시니까 이 세파 속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우리의 심정, 우리의 사정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 괴로움,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상황, 그 마음의 상태를 친히 맛보신 주님으로 모든 사정을 알고 그것을 대변해 주고 계신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 주님으로만 믿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시험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만 지금도 그 십자가는 연장되어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으로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 마음 속에 내가 고통당하는 순간 그 고통을 맛보고 계시며, 죄를 짓는 그 죄인의 심정을 주님께서 맛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의 간구, 그 주님의 대변이 우리를 현실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 인간이 당하는 괴로움과 고통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질병, 죄, 시련 등 그 모든 고통의 절정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에는 우리의 고통을 아셨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의 사 정을 주께 기도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다 당하셨으므로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현재 우리가 짓는 죄와 고통을 다 아시고 하나님 앞에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언제든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릴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 속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변해 주시는 그 은혜를 24시간 계속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시험을 당할 때에나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에는 언제든지 그 보좌 앞에 가기만 하면, 우리의 눈을 뜨기만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마음에 많은 괴로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이 나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대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스데반은 이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태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 교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4-60)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곧 죽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육신적으로 읽는 사람 들은 "스데반이 어디 죽었느냐? 잤다"라고 말합니다. 돌로 머리를 맞고 이마에 피를 철철흘리면서도 잠을 잡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잡아와서는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그 거짓 증인은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라고 거짓 증거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동안에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성전된 예수님의 육체를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육신을 죽여버리면 성전인 육신이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몸이 교회라는 몸으로 다시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유대인들을 보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마가복음 11:17)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가「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책자 속에 설명을 했습니다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스데반이 제사장 앞에서 죄수로서 변명을 한것이 사도행전 7장의 내용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사도행전 7:49-50)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보좌로 앉아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거할 처소로 물리적인 집을 짓겠느냐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은 진짜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이 스데반의 사건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지는 중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이고 신약 시대의 성전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를 가지는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마음 속에 완전한 성전의 오묘한 진리가 깨달아졌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스데반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스데반은 죽음 직전에 놓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 시대에 물질로 지은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 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한일서 4:12)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연결된 그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조금 알아서 자기 기분이 좋으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무엇을 깨닫는 것보다 이 문제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니까요. 예수님이 머리이십니다. 머리, 곧 뇌의 작용 속에 생각이 있고, 이 머리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는 그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며 그 외 모든 지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머리가 바로 하나님 곧 예수님이시고 그 머리에 붙어 있는몸은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봤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지는 그 경계선에서 스데반이 발견한 것은, 교회라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대변자. 곧 교회의 머리로 계시는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핍박이 오는 이유
간혹 교회와 상관 없이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왜 핍박이 없는 줄 아십니까?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그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작은 무리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핍박받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초대 교회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그것 때문에 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대 로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지는 거기에 핍박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오순절날 3,000명이 구원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고 그것으로 끝났다면 거기에 핍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모이고 날마다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단순하게 사람들이 구원받는 그 자체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귀는 영혼을 구원시키는 모체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모체가 곧 교회입니다.
복음이 진정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성전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 곧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가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강력히 전했을 때 예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가득 찼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 고자 함이로다"(사도행전 5:28)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3,000명이 구원받았는데, 그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3-47)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데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모이는 장소가 성전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 교회, 하나님의 성령의 전, 이것이 형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마귀는 무엇을 대적하고 방해합니까? 마귀가 구원받은 영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역사가 끊어지느냐? 교회를 파괴해 버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일로 희생을 당한 첫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스데반은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명을 다 한 후에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그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참믿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사도행전 7:54-56)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는데 그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 피를 하나님께 보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본 것은 바로 지성소 안의 그 광경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스데반의 눈에 보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릴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발견하는 날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여기서 우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고도 거룩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발견한다면 사소한 일 가지고 교회를 도전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쓰러 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것입니다. 누가 나를 비방해도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만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말합니다. 우리 소망의 근거가 예수님께 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있고, 예수님 때문에 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발견되지 않으면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 하고 두려워하고 약해집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한일서 5:1)
이 말씀은 요한일서 4장에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 속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따르는 이유는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 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는 교회는 벌써 거짓이 시작되는 것인 줄 알아야합니다.
신앙의 첫 걸음
해마다 수양회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나 몇 해 동안 수양회에 참석하고 또 지역의 전도 집회에 참여해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는 그렇게 되는 이유가 아마 두어 가지 정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어진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비슷한 듯하나 차이가 큽니다. 성경을 모두 인정하고 시인을 해도 믿어지지 않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까닭은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연하게는 죄를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바닥까지 낮아지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느낌을 기다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느낌을 기다리는 사람은 육신의 감정으로써 구원을 얻어보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12절 말씀의 후반부에 그런 분들이 생각을 좀 할 수 있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갓 받으신 분들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성경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구원받고 나면 성경 말씀이 달고 성경을 많이 읽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성경을 알기 위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알아지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공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잔뜩 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히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 얼마 동안은 별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평안과 기쁨이 있어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전부 다 구원의 말씀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필요한 말씀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10년 동안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설교했습니다. 물론 다 도덕론에 불과한,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지요. 책을 보고 연구해서 하는 설교, 사람이 만들어서 하는 것이었으므로 주로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보니 생활에 대한 성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전부 구원에 대한 말씀뿐이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이야기들도 다 구원에 대한 것으로 알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을 통해서 받은 구원을 다져가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 생활에 관한 것을 알게 해 준다거나 더욱 풍성한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성경을 상식적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자연스럽게 성경을 읽어나가면 성경에 대한 상식이 많이 늘고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성경이 참으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참으로 자기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읽은 말씀이 당장 나의 양식이 되지는 않았다 해도 내 머리 속에 많이 쌓이면 신앙 생활을 해 가다가 문제가 생길 때 그 쌓인 것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
가만히 보면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설교는 많이 들었으니 주일에 나와서 설교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뜯는 것이 필요합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경을 지식으로 알기만 할 뿐 생활에 실현이 되지 않는 경우입니다.머리만 굵어지고 손과 발은 작은 사람처럼 신앙 생활이 비정상적으로 될까봐 성경을 많이 듣고 아는 것이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에게 가르치려고 욕심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자기에게는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 가운데 그런 목적으로 듣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이 머리 속에만 머무는 것 이 아니라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신령한 것을 깨달았다면서 이 교회의 활동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깨달았으면 그것이 그의 삶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해서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있어 온 모임 자체를 부인하고 반기를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임을 부인하고 반기를 든다면 성경에 대해 잘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다고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그것만 진짜라고 한다면, 과거에 구원받은 것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어떤 경험을 한 것을 기초로 해서 형성된 교회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부정되어 버리고 그 몇 사람들의 말만 옳은 것입니까?
우리 모임은 구원받은 경험을 가졌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없는 사람들로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차원 높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지난 날에 성경 속에서 깊은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대로 형성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수천 명씩 생겨날 정도로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다 무시해 버리고 자기 자신들만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바로 마귀의 운동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책을 쓰면서 ‘이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고, 교회가 무엇인지 참으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고도 잘 알 수 있겠나? 하는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 교회, 즉 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나가는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 왔는데,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팽개쳐 버리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혹시 성경을 올바로 깨달았더라도 그 다음 순간에 악령에게 조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음성이 들린 직후에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도 예수님과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으므로 찾아오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제목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납니다. 첫째 종류는 구원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태복음 5:44-45)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이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 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은 같은 예수님이지만 다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일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출발을 하려고 하니까 마귀가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고 시험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교회에 적용시키지 않고 개인에게 집착시키면 이상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전혀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경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일을 하는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가 시작되는 때에 교회의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경험이 있고 또 마귀의 시험을 거치는 등 많은 문제를 거쳐서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개인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나타내고 선전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있어도 그것은 자기 개인의 어떤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히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러한 일로 지금까지의 신앙 생활과 이 교회가 가고 있는 길과 모임 자체를 부정하고 자기만 옳다고 한다면 설령 올바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마는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일에 도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역행하는 악령의 시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잘 못 된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의 의(義)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기의 의로써 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의로써 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자기와 개인적으로는 의식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한 것입니다.
가령 어떤 분이 구원을 받고 나서 모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게 생각되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 보니까 자기가 성령의 안식 속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의로써 억지로 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나의 의니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 해서 그렇게 살지 않겠다’ 라고 생각해서 모임과 관계 없이 산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다음의 삶이 더 크게 잘못됩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의로써 했다 하더라고 그것이 모임 안에서 행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적어도 그것을 사용하셨습니다.그러면 지금까지는 내가 억지로 했지만 똑같은 일을 하되 그 후로는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분들을 만났는데 그 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엔 남편에게 순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고 자식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었는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이 고쳐졌습니다. 그 때부터 참으로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그 때부터는 남편을 참으로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웃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식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하는 일은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나는 이제 이렇게 순종하는구나’하는 그것을 자기가 알고,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선전하게 되는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하는 일은 내가 이렇게 한다’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의식이 있어 그것을 입으로 말하고 자랑할 만큼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의 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아주 독실하고 큰 믿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 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종이 있는데 들판에 가서 하루 종일 땀을 흘려가면서 밭을 갈고 일을 하고 왔다고 하자. 그렇다고 주인이 네가 수고를 많이 했으니까 와서 쉬어라. 그리고 나와 같이 먹자"라고 하겠느냐? 오히려 주인이 먹을 음식을 나르고 주인이 먹을 동안 시중들고 주인이 다 먹은 후에 음식을 먹는 이것이 종의 태도가 아니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참으로 믿음 이 큰 사람의 태도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어떤 일을 하면서 마음에 으쓱한 생각이 들고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하는 생각이 든다면 참 유치한 것입니다. 생각 해 보십시오. 조그마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스럽고 우쭐하고, 남보다 내가 나은 것같이 생각된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참된
종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많은 일을 했지만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칭찬 받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어떤 자부심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그것이 충실한 종이고 믿음이 있는 종의 태도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현대에는 이 성경 말씀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을 너무 쉽게만 읽어가지 말고 조금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었다’는 뜻인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그 말을 의미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는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당시나 지금이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 가 예수님의 이름이라도 되는 듯,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은 교리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붓는다, 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는 영적으로 우리의 선지자이시고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임금이시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질적으로 이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선지자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지금까지도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참된 대제사장이시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다음, 그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마치고 나오시는 날, 왕으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 해가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을 맡으신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그 때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 3년간은 선지자의 역할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대변해 주시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 만일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번에 흘리신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는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그 말 속에는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나를 위해 대언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장차 그 대제사장 직분을 마치고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라는 말 속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으므로 구원받은 지 오래된 사람들도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런저런 어려움이 몰려오고, 죄를 짓는 문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문제 등 많은 문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대변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브리서 7:22)
구약 시대에는 아론부터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까지 제사장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 많았습니까? 제사장들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히브리서 7:23)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참제사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신 고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브리서 7:24)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부터 그 제사장 직분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도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병자를 고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죄와 허물과 질병을 짊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이 제사장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이 시간도 그는 살아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2,000년 전에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믿었을 때 내 죄가 용서되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떤 예수님을 믿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이제도, 내년도. 영원히 순간 순간 짓는 나의 죄와 실수, 불행, 모든 어려움, 내게 오는 온갖 시험 등 모든 어려운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항상 간구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어느날 그 사실을 발견하고 크나큰 평안을 얻었습니다. 호렙 산에 손들고 서 있는 모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손들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에 제 마음 속에 있던 전쟁이 끝났습니다. 굉장히 무섭던 마음의 전쟁이 끝나버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는 말씀 속에는 아주 깊은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걱정하고 괴로워할 때에 예수님도 우리의 걱정 속에, 우리의 괴로움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혹시 죄를 범하는 일이 있어도 주님은 내가 죄를 짓는 그 심정내 연약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완전하시고 홈이 없는 분이시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구한말(舊韓末) 민비가 당시 새로 도입된 운동인 테니스 경기장에 관람을 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하는 사람을 보더니 "저렇게 힘든 것을 왜 자기가 직접 하느냐? 종에게 시키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돈 많은 사람은 돈 몇천 원이 없어서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밥을 한 끼도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해서 밥 굶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밥을 굶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습니다.
높은 곳,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곳에 계시고 너무도 깨끗한 자리에 계시니까 이 세파 속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우리의 심정, 우리의 사정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 괴로움,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상황, 그 마음의 상태를 친히 맛보신 주님으로 모든 사정을 알고 그것을 대변해 주고 계신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 주님으로만 믿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시험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만 지금도 그 십자가는 연장되어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으로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 마음 속에 내가 고통당하는 순간 그 고통을 맛보고 계시며, 죄를 짓는 그 죄인의 심정을 주님께서 맛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의 간구, 그 주님의 대변이 우리를 현실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 인간이 당하는 괴로움과 고통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질병, 죄, 시련 등 그 모든 고통의 절정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에는 우리의 고통을 아셨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의 사 정을 주께 기도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다 당하셨으므로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현재 우리가 짓는 죄와 고통을 다 아시고 하나님 앞에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언제든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릴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 속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변해 주시는 그 은혜를 24시간 계속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시험을 당할 때에나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에는 언제든지 그 보좌 앞에 가기만 하면, 우리의 눈을 뜨기만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마음에 많은 괴로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이 나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대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스데반은 이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태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 교회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곧 죽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육신적으로 읽는 사람 들은 "스데반이 어디 죽었느냐? 잤다"라고 말합니다. 돌로 머리를 맞고 이마에 피를 철철흘리면서도 잠을 잡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잡아와서는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그 거짓 증인은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라고 거짓 증거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동안에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성전된 예수님의 육체를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육신을 죽여버리면 성전인 육신이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몸이 교회라는 몸으로 다시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유대인들을 보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마가복음 11:17)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가「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책자 속에 설명을 했습니다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스데반이 제사장 앞에서 죄수로서 변명을 한것이 사도행전 7장의 내용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사도행전 7:49-50)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보좌로 앉아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거할 처소로 물리적인 집을 짓겠느냐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은 진짜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이 스데반의 사건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지는 중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이고 신약 시대의 성전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를 가지는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마음 속에 완전한 성전의 오묘한 진리가 깨달아졌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스데반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스데반은 죽음 직전에 놓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 시대에 물질로 지은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 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한일서 4:12)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연결된 그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조금 알아서 자기 기분이 좋으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무엇을 깨닫는 것보다 이 문제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니까요. 예수님이 머리이십니다. 머리, 곧 뇌의 작용 속에 생각이 있고, 이 머리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는 그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며 그 외 모든 지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머리가 바로 하나님 곧 예수님이시고 그 머리에 붙어 있는몸은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봤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지는 그 경계선에서 스데반이 발견한 것은, 교회라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대변자. 곧 교회의 머리로 계시는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핍박이 오는 이유
간혹 교회와 상관 없이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왜 핍박이 없는 줄 아십니까?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그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작은 무리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핍박받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초대 교회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그것 때문에 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대 로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지는 거기에 핍박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오순절날 3,000명이 구원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고 그것으로 끝났다면 거기에 핍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모이고 날마다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단순하게 사람들이 구원받는 그 자체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귀는 영혼을 구원시키는 모체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모체가 곧 교회입니다.
복음이 진정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성전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 곧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가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강력히 전했을 때 예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가득 찼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 고자 함이로다"(사도행전 5:28)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3,000명이 구원받았는데, 그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3-47)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데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모이는 장소가 성전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 교회, 하나님의 성령의 전, 이것이 형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마귀는 무엇을 대적하고 방해합니까? 마귀가 구원받은 영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역사가 끊어지느냐? 교회를 파괴해 버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일로 희생을 당한 첫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스데반은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명을 다 한 후에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그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참믿음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는데 그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 피를 하나님께 보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본 것은 바로 지성소 안의 그 광경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스데반의 눈에 보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릴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발견하는 날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여기서 우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고도 거룩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발견한다면 사소한 일 가지고 교회를 도전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쓰러 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것입니다. 누가 나를 비방해도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만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말합니다. 우리 소망의 근거가 예수님께 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있고, 예수님 때문에 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발견되지 않으면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 하고 두려워하고 약해집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한일서 5:1)
이 말씀은 요한일서 4장에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 속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따르는 이유는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 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는 교회는 벌써 거짓이 시작되는 것인 줄 알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