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한일서 5:4-5)
어떻게 기도할까?
처음으로 복음을 깨닫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난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과 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간단히 몇 가지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일서 5:14)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성경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를 하셨던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따라서 기도를 했습니까? 만일 지금까지 기도한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한 것이라면 그 기도는 완전히 헛수고였고 그 소리는 공간에 흩어져버렸을 뿐이며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못 들으실까? 하는 생각으로 기도를 해왔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우주 공간 어디에나 계시는, 소위 ‘무소부재’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분명히 말하기를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놓고 오늘까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해왔다면 그것은 헛수고였고 공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2)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 66:18)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31)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함부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신에게 무엇을 비는데 그것을 종교적인 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은 진리이며,우리의 신앙 생활은 종교를 믿는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느 날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진 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도 종교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 들어와서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며 눈을 막아 버립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나타나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권면하신 말씀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받고 나면 형식적인 신앙 생활,종교적인 신앙 생활을 하던 옛 습관을 하나씩 벗겨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여러가지 참되지 않은 껍질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가는 과정에는 진통이 생기고 오해도 있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을 처리하기 전에 교제를 떠나 버린다거나 신앙 생활을 중단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옷을 벗어가는 생활
잘못 생각하면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앞으로 나가면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기만 하면 신앙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되자면 이미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야만 됩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의 신앙 생활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해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거룩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은 성령을 좋아하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육신은 그러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 내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한다든지 내 상식대로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도 있을 것이고 더 좋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마저도 한번 껍질을 벗겨야 할 문제들입니다. 내 육신의 본능은 세상의 법대로,풍속대로.습관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령의 생각과 육체의 생각은 완전히 원수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할 때 거침이 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육신입니다. 가령 내가 구원을 받고 나서 먼저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행동을 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주 못마땅하고 그를 보면 내 얼굴이 찡그려지곤 합니다. 물론 먼저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잘못을 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한 일을 행한 그 사람의 문제가 내 안에 걸리는 것은 내 육신 때문입니다. 육신이 아니면 그것 때문에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지 아무리 오래 되어도 그 사람도 육신이 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16)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육신입니다.그런데 그 육신을 보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자기’ 라는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내가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내 육신의 생각을 조금씩 벗어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8)
육신을 꺾을 때는 아깝고,괴롭고.아쉽고,고통스러운 것을 느낍니다. 그런 고통이나 아픔을 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기도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육신을 부흥시키는 쪽으로 육신의 생각을 북돋워 줍니다.그러나 그 기도하는 습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육신의 쾌감을 느낄 뿐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같고 내가 마치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것 같은 육신의 생각을 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신앙 생활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도서 5:1-2)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라는 말씀은 예배당에 들어갈 때 소리 내지 말고 사뿐사뿐 들어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먼저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냥 함부로 입을 열면 그것은 망발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가로막혀 있으면 물론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어도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고 했는데 내가 과연 경건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또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그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육신이 있는 세계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는 육신을 가지고 땅에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신령한 영의 세계에 계신다면 내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대로 살고, 성령을 순종하며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것은 얼마나 먼 거리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로 잴 수 있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굉장히 먼 거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영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영이라도 육신의 생각에 잡혀버리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육신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도서 5:2-3)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5-8)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그러므로 기도할 때 그 모양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타나도록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보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일이 있어 부탁하고 싶으면 단 한번만 기도하면 됩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일서 5:14)고 했듯이 하나님 앞에는 한 번만 기도하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24)
여기 보십시오.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극히 간단하며 하나님 앞에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가운데 어떤 문제가 생기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
내가 살아가는 생활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의심없이 사는데도 하나님께 기도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도에 대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라기 3:16-18)
여기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서로가 이야기하며 의논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이야기하고 의논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아 보고 싶은 충실한 마음으로 모여서 의논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 마음 하나만 충실하면 말하는 방법이 서투르고,생각이 잘못된 것도 있고,혹 어떤 때는 서로 의견이 상충하여 싸우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이나 자기의 개인에 속 한 일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마음이 안 맞아 문제가 생기고 어떤 때는 서먹서먹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미쁘게 보십니다.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 어린애들이 뭔가 한다고 하는 그 모습은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마냥 귀여워 보일 것입니다.
참으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주님 앞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비록 실수로 잘못된 소리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그 중심만 보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어떻게 상달되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 있는가 하는 사실을 참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기도하는 문제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그 사랑 힘입어
저는 요즈음 어린애들이 활동하는 원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애들이 무엇에 의해서 활동할 수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입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 때든지, 자연 속에서 뛰놀 때든지 공부할 때든지 그 모든 배후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풍성히 받고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 어릴 때를 회상하면서 쓴 글이「갈림길의 대화」라는 책자로 나왔습니다만, 어머니의 사랑 속에 살던 생활이 어느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달라져 버렸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고 처마 끝에 깃든 둥지 속의 새 소리가 울음으로 변했으며, 하늘의 태양도 이전에는 행복과 사랑을 조명해 주는 빛이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은 미래의 꿈과 찬란한 빛을 실어오는 바람이었는데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는 생의 환희를 모두 앗아가버린 바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친구를 만나 재미있게 노는 것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 푸욱 놓고 놀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참된 즐거움이 없고 아름답고 예쁜 꽃을 보아도 별 감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꽃을 보고 예쁘다,곱다, 아름답다 하는 생각을 가진 그 배후에도 역시 어머니의 사랑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다 변해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활,내가 살아가는 삶의 배경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상의 가치관,모든 사물의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접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 없이 우리를 향해 내리부어져도 내 마음에 뭔가 거리낌이 있고 그 사랑의 힘이 배경이 되지 않으면 구원받기 전의 까칠까칠한 마음이 되돌아와서 다시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 수 있다면 언제나 힘 있고,자신 있고,늠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로 인해 예수님의 피를 다시 한번 맛보아야 합니다.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며 신앙 생활입니다. 기도도 그러한 속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이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무엇을 주문처럼 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 5:1-2)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그 말 속에는 너무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현재 생활 속에서 믿는 그 믿음이어야 합니다.
또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형제 자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문제를 말했습니다.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의를 겸하지 않으면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두 번째로 말했습니다.이 세상에는 인정적인 사랑, 육신의 형제, 부자, 부부, 남녀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등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서로 희희낙락하면서 취중에 사랑하는 것도 있고 명절에 먼 곳에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만나 서로 즐거워하는 가운데 나누는 그런 사랑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모든 사랑이 한 가지를 겸해야 하는데 그것은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은 십계명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화신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살 동안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즉 피를 흘려서 죽기까지 순종을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하나님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육신의 생각대로 멋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불가항력인 것도 있습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십분 있는데 내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구원받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내 모든 노력을 경주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종하고 싶은 마음 자세가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안 되는 것과 아예 순종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마음 속에 명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진정으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순종하고 싶은 그 마음이 진정으로 있으면 신앙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갑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없으면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면에는 너무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경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올바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진정으로 있는 사람에게만 이 성경 말씀이 계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있을 때에 커다란 일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그 마음이 진정으로 서 있으면 그 문제 앞에서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순종 뒤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굉장히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내 멋대로 살아버리면 그 축복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베드로전서 1:22)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는 말은 그 앞의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는 말에 연결된 것입니다. 영혼이 깨끗해진 사람,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와 있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는 말은 명령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으므로 그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게 내딛지 않고 그냥 있으면 언제까지 있어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또 형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해 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고 그 말씀이 내게 나타납니다.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말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리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어떻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자칫하면 "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고 단념해 버리기 쉽습니다. 또 그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걸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데 내 육신이 버티고 있습니다. 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그런데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한일서 5:4)
이것 참 큰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가로막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죽음 앞에는 아무런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모든 문제는 죽음으로 끝납니다.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누구에게 1억이나 빚을 졌다고 합시다. 그러나 죽어버리면 그 빚에서 벗어납니다. 무덤에 와서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의 속에 있는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그 진리가 이루어지면서 나의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옛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세상의 명예,행복,육신의 잡다하고 복잡한 것을 내 앞에 내놓고 자꾸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면서 그것을 취하고 그것을 위해 살도록 항상 손짓을 합니다. 그런데,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이미 이 세상을 향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 육신이 되살아나서 이 세상을 향해서 요구하는 그런 것은 내가 구원받기 전의 것이고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런 것을 얻으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목표도 아니며 나는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 보면 그 다음에 아무 것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지만 아직도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물질에 대한 미련이 도사리고 있고, 아직도 체면을 유지하고 싶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버젓하게 살고 싶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타진을 해 봅시다.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시시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처음 구원받았을 그 당시에는 참으로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가치관이 다시 한번 완전히 바뀌어 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에 구원받을 당시에는 세상이 포기됩니다. 다른 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구원받은 뒤 세상이 시궁창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육신적으로 사는 데 필요한 만큼 다시 세상적인 욕구가 찾아옵니다. 구원받은 직후에도 마음속에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구원이 아닐지 모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구원을 받으면 성령이 오시고 분명히 내 안에 보배가 하나 생기는데 그 보배는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확실한 사실을 표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하나 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힘이 와 있는데 내 육신의 생각이 그 힘을 약화시켜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로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소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한일서 5:4-5)
요한일서의 중심에 점차 다가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쓴 근본에 도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누구나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는데 아직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없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인하고 믿는 그 믿음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있다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 이라는 말 속에는 훨씬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 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한일서 5:4-6)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내용이 요한일서의 결론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기도할까?
처음으로 복음을 깨닫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난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과 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간단히 몇 가지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성경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를 하셨던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따라서 기도를 했습니까? 만일 지금까지 기도한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한 것이라면 그 기도는 완전히 헛수고였고 그 소리는 공간에 흩어져버렸을 뿐이며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못 들으실까? 하는 생각으로 기도를 해왔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우주 공간 어디에나 계시는, 소위 ‘무소부재’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분명히 말하기를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놓고 오늘까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해왔다면 그것은 헛수고였고 공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2)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 66:18)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31)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함부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신에게 무엇을 비는데 그것을 종교적인 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은 진리이며,우리의 신앙 생활은 종교를 믿는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느 날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진 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도 종교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 들어와서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며 눈을 막아 버립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나타나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권면하신 말씀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받고 나면 형식적인 신앙 생활,종교적인 신앙 생활을 하던 옛 습관을 하나씩 벗겨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여러가지 참되지 않은 껍질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가는 과정에는 진통이 생기고 오해도 있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을 처리하기 전에 교제를 떠나 버린다거나 신앙 생활을 중단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옷을 벗어가는 생활
잘못 생각하면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앞으로 나가면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기만 하면 신앙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되자면 이미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야만 됩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의 신앙 생활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해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거룩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은 성령을 좋아하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육신은 그러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 내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한다든지 내 상식대로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도 있을 것이고 더 좋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마저도 한번 껍질을 벗겨야 할 문제들입니다. 내 육신의 본능은 세상의 법대로,풍속대로.습관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령의 생각과 육체의 생각은 완전히 원수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할 때 거침이 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육신입니다. 가령 내가 구원을 받고 나서 먼저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행동을 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주 못마땅하고 그를 보면 내 얼굴이 찡그려지곤 합니다. 물론 먼저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잘못을 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한 일을 행한 그 사람의 문제가 내 안에 걸리는 것은 내 육신 때문입니다. 육신이 아니면 그것 때문에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지 아무리 오래 되어도 그 사람도 육신이 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16)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육신입니다.그런데 그 육신을 보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자기’ 라는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내가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내 육신의 생각을 조금씩 벗어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8)
육신을 꺾을 때는 아깝고,괴롭고.아쉽고,고통스러운 것을 느낍니다. 그런 고통이나 아픔을 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기도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육신을 부흥시키는 쪽으로 육신의 생각을 북돋워 줍니다.그러나 그 기도하는 습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육신의 쾌감을 느낄 뿐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같고 내가 마치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것 같은 육신의 생각을 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신앙 생활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도서 5:1-2)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라는 말씀은 예배당에 들어갈 때 소리 내지 말고 사뿐사뿐 들어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먼저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냥 함부로 입을 열면 그것은 망발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가로막혀 있으면 물론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어도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고 했는데 내가 과연 경건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또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그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육신이 있는 세계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는 육신을 가지고 땅에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신령한 영의 세계에 계신다면 내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대로 살고, 성령을 순종하며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것은 얼마나 먼 거리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로 잴 수 있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굉장히 먼 거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영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영이라도 육신의 생각에 잡혀버리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육신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도서 5:2-3)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5-8)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그러므로 기도할 때 그 모양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타나도록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보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일이 있어 부탁하고 싶으면 단 한번만 기도하면 됩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일서 5:14)고 했듯이 하나님 앞에는 한 번만 기도하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24)
여기 보십시오.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극히 간단하며 하나님 앞에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가운데 어떤 문제가 생기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
내가 살아가는 생활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의심없이 사는데도 하나님께 기도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도에 대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라기 3:16-18)
여기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서로가 이야기하며 의논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이야기하고 의논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아 보고 싶은 충실한 마음으로 모여서 의논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 마음 하나만 충실하면 말하는 방법이 서투르고,생각이 잘못된 것도 있고,혹 어떤 때는 서로 의견이 상충하여 싸우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이나 자기의 개인에 속 한 일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마음이 안 맞아 문제가 생기고 어떤 때는 서먹서먹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미쁘게 보십니다.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 어린애들이 뭔가 한다고 하는 그 모습은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마냥 귀여워 보일 것입니다.
참으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주님 앞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비록 실수로 잘못된 소리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그 중심만 보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어떻게 상달되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 있는가 하는 사실을 참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기도하는 문제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그 사랑 힘입어
저는 요즈음 어린애들이 활동하는 원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애들이 무엇에 의해서 활동할 수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입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 때든지, 자연 속에서 뛰놀 때든지 공부할 때든지 그 모든 배후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풍성히 받고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 어릴 때를 회상하면서 쓴 글이「갈림길의 대화」라는 책자로 나왔습니다만, 어머니의 사랑 속에 살던 생활이 어느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달라져 버렸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고 처마 끝에 깃든 둥지 속의 새 소리가 울음으로 변했으며, 하늘의 태양도 이전에는 행복과 사랑을 조명해 주는 빛이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은 미래의 꿈과 찬란한 빛을 실어오는 바람이었는데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는 생의 환희를 모두 앗아가버린 바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친구를 만나 재미있게 노는 것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 푸욱 놓고 놀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참된 즐거움이 없고 아름답고 예쁜 꽃을 보아도 별 감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꽃을 보고 예쁘다,곱다, 아름답다 하는 생각을 가진 그 배후에도 역시 어머니의 사랑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다 변해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활,내가 살아가는 삶의 배경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상의 가치관,모든 사물의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접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 없이 우리를 향해 내리부어져도 내 마음에 뭔가 거리낌이 있고 그 사랑의 힘이 배경이 되지 않으면 구원받기 전의 까칠까칠한 마음이 되돌아와서 다시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 수 있다면 언제나 힘 있고,자신 있고,늠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로 인해 예수님의 피를 다시 한번 맛보아야 합니다.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며 신앙 생활입니다. 기도도 그러한 속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이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무엇을 주문처럼 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그 말 속에는 너무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현재 생활 속에서 믿는 그 믿음이어야 합니다.
또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형제 자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문제를 말했습니다.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의를 겸하지 않으면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두 번째로 말했습니다.이 세상에는 인정적인 사랑, 육신의 형제, 부자, 부부, 남녀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등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서로 희희낙락하면서 취중에 사랑하는 것도 있고 명절에 먼 곳에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만나 서로 즐거워하는 가운데 나누는 그런 사랑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모든 사랑이 한 가지를 겸해야 하는데 그것은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은 십계명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화신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살 동안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즉 피를 흘려서 죽기까지 순종을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하나님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육신의 생각대로 멋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불가항력인 것도 있습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십분 있는데 내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구원받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내 모든 노력을 경주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종하고 싶은 마음 자세가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안 되는 것과 아예 순종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마음 속에 명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진정으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순종하고 싶은 그 마음이 진정으로 있으면 신앙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갑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없으면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면에는 너무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경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올바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진정으로 있는 사람에게만 이 성경 말씀이 계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있을 때에 커다란 일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그 마음이 진정으로 서 있으면 그 문제 앞에서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순종 뒤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굉장히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내 멋대로 살아버리면 그 축복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베드로전서 1:22)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는 말은 그 앞의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는 말에 연결된 것입니다. 영혼이 깨끗해진 사람,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와 있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는 말은 명령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으므로 그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게 내딛지 않고 그냥 있으면 언제까지 있어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또 형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해 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고 그 말씀이 내게 나타납니다.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말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리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어떻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자칫하면 "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고 단념해 버리기 쉽습니다. 또 그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걸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데 내 육신이 버티고 있습니다. 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그런데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한일서 5:4)
이것 참 큰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가로막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죽음 앞에는 아무런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모든 문제는 죽음으로 끝납니다.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누구에게 1억이나 빚을 졌다고 합시다. 그러나 죽어버리면 그 빚에서 벗어납니다. 무덤에 와서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의 속에 있는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그 진리가 이루어지면서 나의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옛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세상의 명예,행복,육신의 잡다하고 복잡한 것을 내 앞에 내놓고 자꾸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면서 그것을 취하고 그것을 위해 살도록 항상 손짓을 합니다. 그런데,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이미 이 세상을 향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 육신이 되살아나서 이 세상을 향해서 요구하는 그런 것은 내가 구원받기 전의 것이고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런 것을 얻으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목표도 아니며 나는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 보면 그 다음에 아무 것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지만 아직도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물질에 대한 미련이 도사리고 있고, 아직도 체면을 유지하고 싶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버젓하게 살고 싶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타진을 해 봅시다.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시시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처음 구원받았을 그 당시에는 참으로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가치관이 다시 한번 완전히 바뀌어 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에 구원받을 당시에는 세상이 포기됩니다. 다른 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구원받은 뒤 세상이 시궁창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육신적으로 사는 데 필요한 만큼 다시 세상적인 욕구가 찾아옵니다. 구원받은 직후에도 마음속에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구원이 아닐지 모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구원을 받으면 성령이 오시고 분명히 내 안에 보배가 하나 생기는데 그 보배는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확실한 사실을 표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하나 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힘이 와 있는데 내 육신의 생각이 그 힘을 약화시켜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로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소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
요한일서의 중심에 점차 다가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쓴 근본에 도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누구나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는데 아직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없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인하고 믿는 그 믿음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있다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 이라는 말 속에는 훨씬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 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한일서 5:4-6)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내용이 요한일서의 결론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