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한일서 5:9)
확실한 증거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과거에 어떤 확실한 증거 없이 막연하게 "이렇게 믿다가 천당이 있으면 가게 되겠지, 행여나 없으면 그만이고" 하는 식으로 믿던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또 내세가 있고 하늘 나라가 있는 것은 분명히 알지만 자신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지 못한 채 막연하고 희미한 가운데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해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생활이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성경은 그 증거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요한일서 5:9)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이 설명하고 전해주는 말들을 믿고 신앙 생활이나 여 타의 생활을 합니다. 가령, 시장에 갔을 때 물건 파는 사람이 자기의 물건을 선전하는 말을 듣고 과연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 물건을 삽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증거삼아 그 물건을 사게 된 것입니다. 케이에스(KS)마크란 정부에서 품질의 우수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마저도 요즘은 가짜가 많은 시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만들어낸 증거를 신용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신적으로는 사람이 만들어낸 이론이나 사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믿고 삽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실천하면 평등한 세상,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믿고 삽니다.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기는 커녕 백성들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불평등하며 무자비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또 모든 종교는 전부 사람의 증거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의 말을 따릅니다. 그리고 유교 에서는 공자, 이슬람교에서는 모하멧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하나인데 왜 종 파나 교파가 그리도 많으냐?’ 라고 질문을 합니다. 구교는 무엇이며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는 무엇이냐, 왜 나뉘었느냐는 등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 니다. 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천주교와 신교가 무엇이 다릅니까? 제일 큰 차이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하지만 신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또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여 교황을 계속 세워 왔으나 신교에 서는 교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교황을 세울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니?"라고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3-19)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졌으니 초대 교황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엉터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뜻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모두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신약 시대 교회의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사람입니다만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바울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사도가 되었다면 나는 이방 사람을 위해 사 도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망발을 했습니까?
사람의 증거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6-8)
여기 보십시오. 베드로는 율법을 좇아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례란 포경수술 같은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민족만 아니라 백인들도 그렇게 하고 또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곧 수술을 해 버 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위생적으로 좋은 점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난 지 8일 만에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었습니다 .
여기에서 잠깐 알아야 할 것은 사도가 열두 명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열두 지파이기 때문니다.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방 사람인 우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도는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가 됩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한 예로 고넬료 같은 사람 이 베드로에게 전도받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울의 네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을 거쳐 터키 지역을 다니면서 소아시아에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한 후 에게해를 건너 현재의 그리스 땅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지에 가서 전하고 마지막 제4차 전도 여행 때에 죄수가 되어 로마에 갔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방의 세계에는 바울의 활동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 7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건너간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노아가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 세 아들이 자기에게 한 행위를 알고 앞 일을 예언하는 데까지 소급해 갑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세기 9:26-27)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사도 바울이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한 대로 예수님이 셈의 계통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 속에 천국의 집을 지어놓았는데 그 복음의 터전 안에 누가 2,000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까? 백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해서 이 세상에 그대로 실천된 것입니다. 그것이 실천되는 과정에 있어 길르기아 다소,곧 이방 지역에 살던 바울을 불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황의 위치에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이 올라야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곡해해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았다는 것은 성경의 이치나 원리를 모르고 순전히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사로운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완전히 사람의 증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을 하자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은 반석이신 예수 님을 그가 믿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중세기 때에는 교황의 권세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재판을 받아서 그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화형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으로 화형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교황의 절대 권위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정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간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합니다. 물론 사도, 목사, 선지자 등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 쓰시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상화된다든지 어떤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요한계시록22:8-9)
사도 요한이 너무 황송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천사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했을 때,천사는 "나도 네 형제나 선지자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니 내게 경배하면 안 된다.하나님께만 경배하라"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그렇게 겸손했지만 자기도 경배받으려고 한 천사는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경배를 받는 위치에 올라가면 완전히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네 형제들과 같이 나도 종된 자이다"라고 말했듯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과는 달리 신과 같은 위치에서 떠받듦을 받는 교황처럼 그만큼 엄청난 위치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연옥에 간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 또한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성경과 멀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에 의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에 의해서 풀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
어느날 이스라엘 민족이 사무엘이라는 사사에게 우리에게도 이방 사람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워 주어라 이 백성이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무엘상8:7)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성령께서 교회를 인도해 가십니다. 즉 사사는 성령의 그림자입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의 통치를 원하지 않고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버리고 사람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했던 것이 큰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민주주의 방식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뜻이 곧 성령의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 육신의 생각을 가졌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 육신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방식대로 한다는 말은 곧 사람의 뜻대로 한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들의 의사를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운행되어 가는 그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증거를 통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증거에 의존하여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딴 길로 가게 됩니다. 종교 개혁 이후 생긴 신교만 해도 교파가 100개는 넘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심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1-3)
여기 보면 성령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임이 20년 동안 내려오면서 조금씩 갈라져 가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따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잘못되었거나 우리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혹 마음에 불평이 생기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아무리 좋은 구실이 있고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뉘어지면서 그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 다"(에베소서 4:3-6)
교회도 하나고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이 가르친 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주일에 말씀 듣는 것으로 끝나고 성경이 우리 생활에 적용되지 않으면 일반 종교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만나 교제도 나누고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하려고 모입니다. 평소의 모든 생활이 다 예배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것은 그 예배 생활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증거
또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이는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듣기 위함입니다.그러므로 정확하게 성경이 전달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철학자 나 종교가들이 내세운 사상이나 교리들은 다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의 증거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5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증거와 하나님의 증거, 이 두 증거 중 어느 증거가 더 확실하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흐뭇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사람의 증거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록 사람의 말로 전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거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가 셋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6-8)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뜻, 자신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육신을 통해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증거했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피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 피를 가지고 증거하신 것입니다.이것은 사람의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물과 피로써 증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물로써 증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21-23)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이미 구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그것 역시 물로써 증거하신 것입니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5-6)
바로 미가 5장에 있는 그 말씀을 이루려고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께 경배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디에 나셨는지 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헤롯 왕은 기절 초풍할 듯 놀랐습니다.자기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났다고 멀리서 박사들이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혜롯 왕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박사들의 꿈에 나타나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15-18)
이런 말씀을 보아도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임하셨다는 말은 이 세상에 실지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한 육신이 와서 활동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신 그 모든 삶, 침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거침돌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한복음 5:5-9)
예수님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그런데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해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사이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 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16-18)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질 않나, 하나님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한다고 하질 않나 뚱딴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니 그들로서는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그 당시 상황과 유대인들의 심리를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에 그들의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 정부를 쫓아 버리고, 이스라엘이 로마처럼 온 세계를 통치하는 이상 국가가 될 것을 유대인들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성취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 안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편 22:1,16)
또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2-3)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예언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영광스럽게 오는 그 메시야만 잔뜩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입니다. 여러분들도 욕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자기의 욕심, 자기의 정욕이라는 기준에서 성경을 읽으면 딴 소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령한 것을 깨달아야 할 텐데'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신다면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계셨듯이 교회는 더욱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철통같이 믿으면서 주님의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사는 것은 믿지 못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추상적이고 환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든지 구체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읽었어도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욕심을 내고 성경을 보다가 첫번째 오시는 예수님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읽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로마를 물리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내가 하 아님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라는 소리를 하니 유대인들이 볼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복음 5:30-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또한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한복음 5:36)
하나님의 증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 역사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를 고칠 수 없었고 물이 동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나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예수 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 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3-39)
위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요한일서 5장 9절로 돌아갑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를 확실히 믿었다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기 누구뇨"(요한일서 5:4-5)
자기 안에 있는 증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증거,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의 증거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역사의 증인이다,재판의 증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1)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실제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요한일서 5:9)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안될 확률은 1퍼센트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내 마음 속에 확실히 믿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내가 믿었을 때 성령이 와서 인쳐버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그 때 성령이 와서 증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한일서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물과 피, 성령으로 증거하신 그 증거 안에 영생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자동으로 영생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들 안에 영생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증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로 증거 하시는 증거를 받는 사람은 영생까지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놓고 이런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이 있습니다. 200만 원 빚을 졌는데 빚장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서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돈을 꾸었으면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인데 갚을 돈은 없고 큰일났습니다. 빚에 시달리다 그만 죽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빚장이가 무덤에까지 가서 돈 달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일입니다. 죽음으로 빚을 갚아 버린 셈입니다.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빚장이는 '아이구 200만 원 날아갔구나' 하고 깨끗이 단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돈 200만 원 가지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느날 옛날부터 아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빚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가 듣고 있다가 "그래. 그러면 그 빚장이 오거든 나한테 데려오게. 내가 빚을 갚아 주겠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말을 믿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또 빚장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빚을 갚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비록 그 친구가 집에 같이 있지 않지만 그 친구가 한 약속이 그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약속이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는 말씀 이 마음에 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아들이 있는 자’ 이며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그 말씀이 없는 사람은 아들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요한복음 12:48-50)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며 영생이 있습니다.
사랑의 통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단순히 나를 죄에서 구원만 해주신 주님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면 나를 보호하사 내가 살아 가는 동안에도 지켜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의해 온갖 죄로 물든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간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부족함이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어떤 문제라든지 시험이라든지 시련과 고난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해 나가는 중에 여 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구원받은 사람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 마음이 불편한 것도 일종의 위기입니다. 그것이 나를 넘어지게 하는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두면 항상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틀림없이 그러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음미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싶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고 복잡한 일이 있을 때에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고난 속에서 생겨납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러한 것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한 단계 뛰어오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며, 믿음이 있으면 충분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과거에 어떤 확실한 증거 없이 막연하게 "이렇게 믿다가 천당이 있으면 가게 되겠지, 행여나 없으면 그만이고" 하는 식으로 믿던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또 내세가 있고 하늘 나라가 있는 것은 분명히 알지만 자신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지 못한 채 막연하고 희미한 가운데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해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생활이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성경은 그 증거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요한일서 5:9)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이 설명하고 전해주는 말들을 믿고 신앙 생활이나 여 타의 생활을 합니다. 가령, 시장에 갔을 때 물건 파는 사람이 자기의 물건을 선전하는 말을 듣고 과연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 물건을 삽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증거삼아 그 물건을 사게 된 것입니다. 케이에스(KS)마크란 정부에서 품질의 우수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마저도 요즘은 가짜가 많은 시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만들어낸 증거를 신용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신적으로는 사람이 만들어낸 이론이나 사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믿고 삽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실천하면 평등한 세상,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믿고 삽니다.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기는 커녕 백성들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불평등하며 무자비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또 모든 종교는 전부 사람의 증거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의 말을 따릅니다. 그리고 유교 에서는 공자, 이슬람교에서는 모하멧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하나인데 왜 종 파나 교파가 그리도 많으냐?’ 라고 질문을 합니다. 구교는 무엇이며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는 무엇이냐, 왜 나뉘었느냐는 등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 니다. 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천주교와 신교가 무엇이 다릅니까? 제일 큰 차이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하지만 신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또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여 교황을 계속 세워 왔으나 신교에 서는 교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교황을 세울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니?"라고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3-19)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졌으니 초대 교황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엉터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뜻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모두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신약 시대 교회의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사람입니다만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바울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사도가 되었다면 나는 이방 사람을 위해 사 도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망발을 했습니까?
사람의 증거
여기 보십시오. 베드로는 율법을 좇아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례란 포경수술 같은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민족만 아니라 백인들도 그렇게 하고 또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곧 수술을 해 버 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위생적으로 좋은 점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난 지 8일 만에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었습니다 .
여기에서 잠깐 알아야 할 것은 사도가 열두 명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열두 지파이기 때문니다.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방 사람인 우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도는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가 됩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한 예로 고넬료 같은 사람 이 베드로에게 전도받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울의 네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을 거쳐 터키 지역을 다니면서 소아시아에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한 후 에게해를 건너 현재의 그리스 땅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지에 가서 전하고 마지막 제4차 전도 여행 때에 죄수가 되어 로마에 갔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방의 세계에는 바울의 활동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 7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건너간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노아가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 세 아들이 자기에게 한 행위를 알고 앞 일을 예언하는 데까지 소급해 갑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세기 9:26-27)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사도 바울이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한 대로 예수님이 셈의 계통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 속에 천국의 집을 지어놓았는데 그 복음의 터전 안에 누가 2,000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까? 백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해서 이 세상에 그대로 실천된 것입니다. 그것이 실천되는 과정에 있어 길르기아 다소,곧 이방 지역에 살던 바울을 불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황의 위치에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이 올라야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곡해해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았다는 것은 성경의 이치나 원리를 모르고 순전히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사로운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완전히 사람의 증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을 하자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은 반석이신 예수 님을 그가 믿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중세기 때에는 교황의 권세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재판을 받아서 그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화형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으로 화형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교황의 절대 권위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정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간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합니다. 물론 사도, 목사, 선지자 등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 쓰시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상화된다든지 어떤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요한계시록22:8-9)
사도 요한이 너무 황송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천사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했을 때,천사는 "나도 네 형제나 선지자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니 내게 경배하면 안 된다.하나님께만 경배하라"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그렇게 겸손했지만 자기도 경배받으려고 한 천사는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경배를 받는 위치에 올라가면 완전히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네 형제들과 같이 나도 종된 자이다"라고 말했듯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과는 달리 신과 같은 위치에서 떠받듦을 받는 교황처럼 그만큼 엄청난 위치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연옥에 간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 또한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성경과 멀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에 의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에 의해서 풀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
어느날 이스라엘 민족이 사무엘이라는 사사에게 우리에게도 이방 사람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워 주어라 이 백성이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무엘상8:7)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성령께서 교회를 인도해 가십니다. 즉 사사는 성령의 그림자입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의 통치를 원하지 않고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버리고 사람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했던 것이 큰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민주주의 방식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뜻이 곧 성령의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 육신의 생각을 가졌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 육신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방식대로 한다는 말은 곧 사람의 뜻대로 한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들의 의사를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운행되어 가는 그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증거를 통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증거에 의존하여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딴 길로 가게 됩니다. 종교 개혁 이후 생긴 신교만 해도 교파가 100개는 넘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심
여기 보면 성령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임이 20년 동안 내려오면서 조금씩 갈라져 가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따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잘못되었거나 우리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혹 마음에 불평이 생기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아무리 좋은 구실이 있고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뉘어지면서 그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 다"(에베소서 4:3-6)
교회도 하나고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이 가르친 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주일에 말씀 듣는 것으로 끝나고 성경이 우리 생활에 적용되지 않으면 일반 종교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만나 교제도 나누고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하려고 모입니다. 평소의 모든 생활이 다 예배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것은 그 예배 생활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증거
또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이는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듣기 위함입니다.그러므로 정확하게 성경이 전달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철학자 나 종교가들이 내세운 사상이나 교리들은 다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의 증거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5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증거와 하나님의 증거, 이 두 증거 중 어느 증거가 더 확실하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흐뭇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사람의 증거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록 사람의 말로 전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거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가 셋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6-8)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뜻, 자신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육신을 통해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증거했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피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 피를 가지고 증거하신 것입니다.이것은 사람의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물과 피로써 증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물로써 증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21-23)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이미 구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그것 역시 물로써 증거하신 것입니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5-6)
바로 미가 5장에 있는 그 말씀을 이루려고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께 경배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디에 나셨는지 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헤롯 왕은 기절 초풍할 듯 놀랐습니다.자기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났다고 멀리서 박사들이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혜롯 왕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박사들의 꿈에 나타나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15-18)
이런 말씀을 보아도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임하셨다는 말은 이 세상에 실지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한 육신이 와서 활동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신 그 모든 삶, 침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거침돌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한복음 5:5-9)
예수님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그런데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해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사이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 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16-18)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질 않나, 하나님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한다고 하질 않나 뚱딴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니 그들로서는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그 당시 상황과 유대인들의 심리를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에 그들의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 정부를 쫓아 버리고, 이스라엘이 로마처럼 온 세계를 통치하는 이상 국가가 될 것을 유대인들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성취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 안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편 22:1,16)
또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2-3)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예언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영광스럽게 오는 그 메시야만 잔뜩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입니다. 여러분들도 욕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자기의 욕심, 자기의 정욕이라는 기준에서 성경을 읽으면 딴 소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령한 것을 깨달아야 할 텐데'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신다면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계셨듯이 교회는 더욱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철통같이 믿으면서 주님의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사는 것은 믿지 못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추상적이고 환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든지 구체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읽었어도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욕심을 내고 성경을 보다가 첫번째 오시는 예수님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읽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로마를 물리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내가 하 아님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라는 소리를 하니 유대인들이 볼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복음 5:30-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또한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한복음 5:36)
하나님의 증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 역사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를 고칠 수 없었고 물이 동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나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예수 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 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3-39)
위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요한일서 5장 9절로 돌아갑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를 확실히 믿었다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기 누구뇨"(요한일서 5:4-5)
자기 안에 있는 증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증거,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의 증거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역사의 증인이다,재판의 증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1)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실제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요한일서 5:9)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안될 확률은 1퍼센트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내 마음 속에 확실히 믿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내가 믿었을 때 성령이 와서 인쳐버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그 때 성령이 와서 증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한일서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물과 피, 성령으로 증거하신 그 증거 안에 영생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자동으로 영생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들 안에 영생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증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로 증거 하시는 증거를 받는 사람은 영생까지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놓고 이런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이 있습니다. 200만 원 빚을 졌는데 빚장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서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돈을 꾸었으면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인데 갚을 돈은 없고 큰일났습니다. 빚에 시달리다 그만 죽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빚장이가 무덤에까지 가서 돈 달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일입니다. 죽음으로 빚을 갚아 버린 셈입니다.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빚장이는 '아이구 200만 원 날아갔구나' 하고 깨끗이 단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돈 200만 원 가지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느날 옛날부터 아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빚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가 듣고 있다가 "그래. 그러면 그 빚장이 오거든 나한테 데려오게. 내가 빚을 갚아 주겠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말을 믿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또 빚장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빚을 갚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비록 그 친구가 집에 같이 있지 않지만 그 친구가 한 약속이 그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약속이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는 말씀 이 마음에 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아들이 있는 자’ 이며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그 말씀이 없는 사람은 아들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요한복음 12:48-50)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며 영생이 있습니다.
사랑의 통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단순히 나를 죄에서 구원만 해주신 주님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면 나를 보호하사 내가 살아 가는 동안에도 지켜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의해 온갖 죄로 물든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간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부족함이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어떤 문제라든지 시험이라든지 시련과 고난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해 나가는 중에 여 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구원받은 사람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 마음이 불편한 것도 일종의 위기입니다. 그것이 나를 넘어지게 하는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두면 항상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틀림없이 그러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음미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싶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고 복잡한 일이 있을 때에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고난 속에서 생겨납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러한 것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한 단계 뛰어오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며, 믿음이 있으면 충분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