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 : 3)
믿음이란
요한일서 5장은 이제까지 내용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를 완벽하게 다 이야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뜻이 매우 깊기 때문에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중심으로 하는 말씀인데, 1장에서 5장까지 내려오면서 제일 많이 언급된 말씀이 사랑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사는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5장에 와서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 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했는가 하면 5절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이 요한일서는 믿음과 의로움,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셋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곧 믿음의 본질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장 8절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면서 결국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한일서 5:11)
신앙생활
요한일서 5장 13절부터는 결론 부분으로서 여러 가지 확실한 것에 대해 말씀을 하고 끝마칩니다. 즉 영생이 확실한 것, 기도를 하면 그 기도에 응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 또 우리가 하나님께로 났으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하나님은 참으로 영생이신 것이 확실하다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요한일서를 우리가 왜 읽어야 하며 요한일서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려면 확실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는 생활도 확실하고 또 열매 맺는 생활도 확실하고 기도하는 생활도 확실한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일서의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
구원을 받았으면 영생을 얻은 것이 확실한 것이지 또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받고 눈물겹도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평온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다 보면 심지어는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할까, 혹시 들림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생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몽롱하고 희미한 마음으로 생활하기 쉽습니다.
어느 상황에 가면 심지어 내가 구원이라는 것을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힘이 없어집니다. 구원을 받고 한때 그렇게 힘있게 간증을 하고 대담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져버리고 맥빠진 상태 속으로 들어갑니다. 천국 가는 문제야 걱정 없지만 마음에 힘이 전혀 없는 그 상태는 뭔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순종의 생활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구원받을 때에 간증을 너무 힘있게 하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도 훨씬 더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증을 힘있게 한 만큼 신앙 생활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그 간증을 뒷받침하지 못하므로 담대함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구원받은 사람이 간증하는 것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고 옛 추억의 한 토막을 떠올릴 뿐 현재의 생활은 형편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후에는 담력과 확신을 잃어버리고 언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기억만 남아 있게 됩니다.구원받았을 때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은 희미해져버리고 힘없는 상태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것은 불순종의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미 거기에 대해 예언을 해놓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명기 28:58-67)
이것은 물론 애굽에서 구출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은 곧 교회에 해당하는 말씀이고 또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 · ·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에는 구원을 받았어도 그 마음이 항상 불안한 상태에 있고 눈은 쇠하고 정신도 산란하다고 했습니다.눈이 쇠한다는 것은 주님 보는 눈이 어두워져서 성경을 보아도 깨달아지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실행하는 생활
누가복음 4장 19절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볼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그 은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만지게도 하고 듣게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역사를 꾸미고 사실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마냥 추상적이고 다른 이방의 우상 종교처럼 관념에 불과 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종교와 다른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모든 종교는 그 이론이 사실적이 아니고 추상적인 개념뿐입니다. 사랑을 논하되 사랑의 사실이 없고 모든 원리를 논하되 그 원리가 하나의 원리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 역사 속에 하나의 생명체로 나타나서 사랑을 실천하시고 사람의 죄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시는 실체입니다. 그 실체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성령이 오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울을 보고 가서 자기 얼굴 모양이 어떠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거울에 비취는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 다듬어 나가듯 신앙 생활은 어떤 말씀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눈이 어둡다는 것은 신앙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사실을 보면서 사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
그 다음,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한때는 구원받고 좋아했는데 그 다음에는 몽롱한 상태에 빠져 정신이 희미해져 버립니다.도대체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을 합니다."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면 이렇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그 생명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너희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요한일서를 썼다고 했습니다.그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확실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
이 요한일서 5장 13절을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전도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별세하셨습니다만 전에 홍대위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중국의 남경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워치만 니에게 배우기도 한 분으로서,해방 후에 한국에 나와서 서울의 성동 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육이오 동란 이후에는 대구 삼덕 교회에서 시무하셨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능변가는 아니었지만 중생을 강조했습니다. 그분은 이 요한일서 5장 13절을 읽다가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중국에 있을 때에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하기에 자기도 거기에 참여했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에서 온 여자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하는데 설교를 마치고 문간 앞에 서서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거듭났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난 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홍대위 목사가 ‘나한테 거듭났느냐고 하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자기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자기 앞에 와서 손을 내밀고 “거듭났습니까.”하자 얼떨결에 “예,거듭났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상당히 고민을 하던 중,이 성경을 읽다가 자기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평안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모든 사람이 이미 영생을 가졌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여 집회할 때마다 "여러분 다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거듭났습니다."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른이 착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국에 와서 몇십 년 동안 설교를 하고 다녀도 구원받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있을 때 그분에게 방송 시간을 가끔 드렸습니다.
어느날 그분을 만나 우리의 전도 활동 속에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말씀드렸더니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한국에 나와서 복음을 전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도대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니 참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느날 홍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상당히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여집사 한 분이 우리 모임에 참석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교회에 안 나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웬만한 다른 목사들은 그런 사건이 생기면 우리를 원수시하는데 그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 자신은 거듭난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분 주변에 교제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바로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교제 안에서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서 1:6)
우리 안에 있는 선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바로 선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면서 그 선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제 속에서 그 선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빛 가운데 행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6-7)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빛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 그 마음 속에 확신이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분명히 빛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또 그 빛이 가리워집니다. 왜 어두움이 찾아옵니까?
어두움이 찾아오면 예수님의 피에 대한 감사함이 사라집니다.그러나 나중에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다시 살아나면서 괴롭고 복잡했던 마음이 다시 깨끗하게 씻어지고 그 피의 은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 1장 7 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서신을 보냈는데 자기가 이웃 사람에게 원망과 시비를 품고 있었답니다.그런데 그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중에 마음에 있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렸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마음이 밝고 평화로움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이 말씀대로 구원받은 사람 피차간에 쌓였던 문제가 입으로 토설함으로 말미암아, 그 토설하는 순간에 없어져 다시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며 믿음의 차원이 달라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없다면 성경은 거짓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긴 받았는데, 나중에 또 죄를 짓고 세상 생활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졌으면서도 "내가 영생을 확신한다"고 한다면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 이라는 말을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듣는다고 영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생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말 속에는 영광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영생은 죽음과 반대의 의미를 갖는 모든 것이 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분명히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생을 불순종하여 마음에 어두움이 있을 때 내가 영생을 누리며 사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의심이 나고 괴로운데 무슨 영생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히 영생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여 영생이란 '죽지 않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반대인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통 속에 즐거워한다"는 것처럼 힘있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은 빛 가운데 행할 때에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자백하고 서로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힘있고 영광스러운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3-6)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란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단번에 받은 그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그 후에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고 말씀을 지켜가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 영생 얻었다고 큰소리치면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으로는 “나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은 비참하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말씀을 지켜갈 때에 계속적으로 그 생명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그리하여 그 은혜가 계속 내 마음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경험하면서 살 아갈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도 사도 요한이 쓴 말씀으로 요한복음과 아주 비슷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계속해서 마음에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사망인지 생명인지 모를 만큼 희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했는데 실제적으로 죽음의 생활이 내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그 삶은 완전히 죽음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하고 우리가 즐거워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구원받은 사람, 즉 형제간에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운동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동작, 살아 있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살아 있다는 의식은 곧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사랑의 의식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움직이고, 잠을 자더라도 숨을 쉬면서 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계속 느끼면서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함으로 ··· "하는 그 동작입니다. 그 동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마음이 서로 단절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단절되어 있으면 생명의 흐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고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얼마 전. 멀리 있는 어떤 분이 편지를 보냈는데 "설교를 듣다가 말과 행위가 다른 것 같아서 듣기 싫어졌습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설교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면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느냐는 뜻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네 목숨이 떠나가리라"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즉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굉장히 미워했습니까? 또 사도행전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때 바울은 과연 바나바를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그 다툼은 서로 미워하는 다툼이 아닙니다. 바울은 전에 전도 여행을 떠날 때 고생스럽다고 돌아간 마가를 데리고 가다가 중간에 또 그런 말썽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이므로 인정상 같이 데리고 가자고 하여 심히 다투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인간적으로 가까운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완강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가고 바나바는 자기 생질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바나바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인정에 치우친 사람이라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나바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와 다투었기 때문에 바나바를 미워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로새서 4:10)
나중에 그 마가라는 사람이 잘못한 것을 충분히 뉘우쳤기 때문에 바울은 마가를 극진히 생각했습니다. “이 마가가 너희에게 가거든 그를 영접하라” 라고 했습니다. 본래 바울의 마음 속에는 마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가 밉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감정이 생겨서 누구를 책망한다면 안되지요. 그러나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공과 사를 완전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양심에 거리낌없이 그 사람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당할 때 화가 나는 것은 육신의 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에베소서4:26)하셨으니 기분이 나빠도 곧 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은 아담의 자손에 불과한 흙뭉치이며 죄 가운데 난 인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24-25)하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거기에 구제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했듯이 아무리 거룩해도 육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만 육신은 매 순간마다 이 겨가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의 진리가 내 안에 살아 있고 내가 그 진리를 믿고 있으면 그 진리가 나로 하여금 어떤 순간에 형제나 자매를 위해 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3-14)
하나님의 큰 사랑
자기와 가깝고 자기 편이 되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강조되어 온 것 중 하나가 지역적인 감정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지역, 내 성격 등으로 나타나는 자기’라는 것을 철저히 죽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온 것은 모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소한 충돌이 있더라도 이 성경 안에서 폭넓게 사랑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는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6-19)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길이,높이깊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랑의 넓이도,길이도높이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넓혀가는 의미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내 지역의 사람들만으로는 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지역적인 것에 관계됨이 없이 전체가 하나의 교회로서 주님의 생명을 같이 호흡하며 그 사랑을 같이 느끼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므로 좀 더 폭을 넓혀서 멀리,나아가서는 미주 지역이나 유럽에 있는 지역까지 모두 이 복음의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충돌이나 갈등이 생긴다고 서로 미워하고 어그러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소한 문제에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자기 가까이에서 인정적으로 아주 따뜻하게 느끼는 그러한 것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은 성도들의 폭넓은 교제 속에서 은근히 우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 느끼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따뜻함을 느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폭넓은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실현되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그 전체적인 조화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와 개인적으로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 신자들에게서 헌금을 모아가지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흉년든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집착되는 육신의 정과 하나님의 사랑을 혼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제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감사와 기쁨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육신이 꺾어질 때에, 한 푼이라도 물질을 내놓을 때에 육신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못 견디겠다. 자,돈을 내놓자”라는 식으로만은 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를 돕기 위해서 돈을 내는 일이 내 마음에 좀 아까운 생각이 있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꺾고 실행하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지는 않았으나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와 같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자신을 승화시키는, 자신을 완전히 죽음으로 깎아 바치는 그 속에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감상적으로 느끼는 그 사랑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3-14)라고 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우리 모임(교회)을 너무 심하게 비방하므로 형제 몇 사람이 이를 따지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도착했으나 문도 열어주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를 찾아온 형제들을 주거 침입으로 몰아 경찰에 고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은 결국 여러 날 동안을 경찰에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은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어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법에 묶여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성도의 교제를 통한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옥사장이 구원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 사람으로 인해 그의 집도 구원받을 가능성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이러한 일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비록 그 형제들에게 약간의 실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통해 되어진 결과,즉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태어난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이러한 복잡한 속에서도 누가 누구를 원수처럼 미워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그 사람들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마귀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곤란을 당하고 많은 영혼 들이 힘을 잃고 괴로움을 당할 것을 막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세상 삶에서 목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삶의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일서입니다.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내시고, 그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고 확실한 것이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확실한 것을 알고 기꺼이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영생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생의 확증이 왔지만 또한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내 생명을 기꺼이 내어 바칠 수 있는 대상이 확실한 가운데 그 목표를 따라 사는 삶이 영생의 터전 위에 살, 고 있다는 확증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구원받을 때 받은 영생뿐 아니라 현재 살 아가는 삶에서 확실한 영생의 터전 위에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위해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쓴 것은 ··· "이라 한 그 의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참으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아는 생활이 곧 영생을 계속 누리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생명, 그 복된 생명, 그것을 참으로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일서 5:13-14)
영생이라는 것은 길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니 그는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했습니다. 마귀도 지옥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마귀가 영생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영생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영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생명, 하나님의 사랑이 약동하는 생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하면서 빛 가운데 사는 생명, 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쓰는 이유는 이것을 읽고 너희들이 이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영생이 있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영생한다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삶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영생을 얻고 그 안에 산다는 확증, 내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그 앞의 13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이 '구한다' 는 말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중언부언하며 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했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 마음이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그것이 내 마음 전체의 소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그 영생의 바탕 위에 서 있다면 내가 현재 살아가는 것, 생각하는 것, 마음을 기울이는 것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한 치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제가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계신 그 영생의 바탕 위에 우리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 계획 속에 이 교회가 이끌려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제 믿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막고 있는 것이 사람의 육신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에베소서 3:1-3, 8-12)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이룩하시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예정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일은 사람들이 모여 중구난방으로 이것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각 사람은 자유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회도 하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짓 교회를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중세기 암흑 시대에 교회가 형식화될 것이 이미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영생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활동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생이 역사하는 그 속에 내가 참예해 있다면 내 마음 속에 구하는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도들이 서로 섬기면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가로막히지 않고 나타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임의대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돈 벌이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에서 그 담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 일이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담대히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 속에 담대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리의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자기 욕심대로 구하면서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미신적으로 자기 욕심나는 것을 구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이 말씀은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 요한일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대로 살면, 그것은 빛 가운데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생의 확신이 있는 삶입니다. 자기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영생의 기틀 위에 서 있으며 자신이 그 생명 안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삶이요 복스러운 삶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는 확신 속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아 가고 있는 그 삶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에 근거한 믿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삶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완전히 이루어 주십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이는 모임 안에 살아도 모임 안에 사는데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모임이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해 봤자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 속에 자기가 서서 자신있게 살지 못하면 그 삶은 완전히 허망합니다.
여러분, 저는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 교회, 이 모임이 잘 되는 일이라면 나는 죽어도 좋다, 내 생명을 바쳐도 좋다 하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통해 일하고 계신 것을 확신합니다.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고 판단을 하면 얼마나 예리하게 판단을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사로운 자기의 판단에 의해서 자기 생각대로 이것저것 다 판단해 놓고 그속에 자기의 웅덩이를 파고 들어앉아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생이 역사해 가는 그 속에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밥 먹는 것도. 길을 걷는 것도, 사람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전체가 그것을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응답을 받고 살아가는. 확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한일서 5:16-17)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구절입니다.모든 불의가 죄인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누가 실수해서 거짓말했다면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도 사망에 이르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자기가 약해서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해치고 형제를 해치기 위해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망에 이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가 밭을 팔아서 “우리, 반은 감추고 반만 가지고 가서 이것이 모두라고 말하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계획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성도들의 교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가는 초대교회 속에 완전히 먹물을 뿌리는 계획 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하는 그 교회의 유무상통을 깨어버리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 자체를 파괴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속이고 어두움을 끌어들여 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주님 앞에서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을 계획적으로 파괴시키는 것, 계획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적인 것은 사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졌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죄성을 가졌습니다. 살아가노라면 자기의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수는 언제든지 자백이라는 방법으로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하는 것,하나님의 일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것, 계획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계획적으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는 뜻입니까? 우리와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폄론하거나 악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묵묵히 참고 견디어 나갈 때 하나님의 정확한 판단이 나타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확실한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그 응답이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면서 구하는 사람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확실히 응답받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한일서 5:18)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원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했습니다.죄 짓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경우, 거기에도 해결책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것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자체가 그렇다는 뜻입니다.우선 현재 육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으나 영의 위치를 생각하면 악 한 자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암시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범치 않는다고 했으니 이 문제는 영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다음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한일서 5:19)
두 영역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고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서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란 이 세상에 있는 선, 도덕. 윤리, 종교, 과학, 형식적인 기독교, 그림, 돈과 모든 물질, 명예. 쾌락, 학문, 정치, 군사 등 전체를 의미합니다. 양심적인 죄는 물론이며 죄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한복음 12:31)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는 아담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나도 세상과 함께 장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서 하나님이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십자가 저편에 있는 세상은 이편 부활의 영역에 올 수 없고, 또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는 경계하나 선하게 보이는 세상은 경계하지 않고 방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칫 세상으로 끌려가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자신이 속해 있다는 확신을 다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한일서 5:20)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각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서 무엇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거짓이 조금도 없으신 참된 분이시고 영생이십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한일서 5:21)
우상의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위협을 합니다. 우상을 향해서 절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은 온통 우상의 세력이 꽉 들어찬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끌리는 그 전부가 하나님 앞에 우상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만든 질서 속에 사람을 잡아 가두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의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서 끊임없이 조여 들어오는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로새서 3:1-4)
여기에서 "너희는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함께 짝하여 연락하고 교통하던 세상에 대하여 너희는 죽었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리심을 받았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생각을 좀 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았다는, 주님과 함께 부활해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그 확신을 가지면 온 세상이 우상의 세력으로 꽉 차 있음을 압니다. “세상 것은 나와 관계 없어”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배가 바다 속에 있지만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뜰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위에 떠서 사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베드로전서 3:21)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 세상 모든 것과 접촉하고 살지만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게 주지 않고 세상 것과 바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20)
이러한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 속에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의 말씀을 우리 모임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말씀이 현 실적으로 우리 모임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 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나라 (요한일서 4장 16-20절)
믿음이란
요한일서 5장은 이제까지 내용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를 완벽하게 다 이야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뜻이 매우 깊기 때문에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중심으로 하는 말씀인데, 1장에서 5장까지 내려오면서 제일 많이 언급된 말씀이 사랑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사는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5장에 와서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 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했는가 하면 5절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이 요한일서는 믿음과 의로움,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셋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곧 믿음의 본질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장 8절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면서 결국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한일서 5:11)
신앙생활
요한일서 5장 13절부터는 결론 부분으로서 여러 가지 확실한 것에 대해 말씀을 하고 끝마칩니다. 즉 영생이 확실한 것, 기도를 하면 그 기도에 응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 또 우리가 하나님께로 났으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하나님은 참으로 영생이신 것이 확실하다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요한일서를 우리가 왜 읽어야 하며 요한일서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려면 확실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는 생활도 확실하고 또 열매 맺는 생활도 확실하고 기도하는 생활도 확실한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일서의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
구원을 받았으면 영생을 얻은 것이 확실한 것이지 또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받고 눈물겹도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평온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다 보면 심지어는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할까, 혹시 들림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생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몽롱하고 희미한 마음으로 생활하기 쉽습니다.
어느 상황에 가면 심지어 내가 구원이라는 것을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힘이 없어집니다. 구원을 받고 한때 그렇게 힘있게 간증을 하고 대담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져버리고 맥빠진 상태 속으로 들어갑니다. 천국 가는 문제야 걱정 없지만 마음에 힘이 전혀 없는 그 상태는 뭔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순종의 생활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구원받을 때에 간증을 너무 힘있게 하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도 훨씬 더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증을 힘있게 한 만큼 신앙 생활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그 간증을 뒷받침하지 못하므로 담대함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구원받은 사람이 간증하는 것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고 옛 추억의 한 토막을 떠올릴 뿐 현재의 생활은 형편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후에는 담력과 확신을 잃어버리고 언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기억만 남아 있게 됩니다.구원받았을 때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은 희미해져버리고 힘없는 상태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것은 불순종의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미 거기에 대해 예언을 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애굽에서 구출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은 곧 교회에 해당하는 말씀이고 또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 · ·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에는 구원을 받았어도 그 마음이 항상 불안한 상태에 있고 눈은 쇠하고 정신도 산란하다고 했습니다.눈이 쇠한다는 것은 주님 보는 눈이 어두워져서 성경을 보아도 깨달아지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실행하는 생활
누가복음 4장 19절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볼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그 은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만지게도 하고 듣게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역사를 꾸미고 사실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마냥 추상적이고 다른 이방의 우상 종교처럼 관념에 불과 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종교와 다른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모든 종교는 그 이론이 사실적이 아니고 추상적인 개념뿐입니다. 사랑을 논하되 사랑의 사실이 없고 모든 원리를 논하되 그 원리가 하나의 원리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 역사 속에 하나의 생명체로 나타나서 사랑을 실천하시고 사람의 죄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시는 실체입니다. 그 실체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성령이 오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울을 보고 가서 자기 얼굴 모양이 어떠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거울에 비취는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 다듬어 나가듯 신앙 생활은 어떤 말씀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눈이 어둡다는 것은 신앙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사실을 보면서 사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
그 다음,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한때는 구원받고 좋아했는데 그 다음에는 몽롱한 상태에 빠져 정신이 희미해져 버립니다.도대체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을 합니다."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면 이렇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그 생명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너희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요한일서를 썼다고 했습니다.그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확실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이 요한일서 5장 13절을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전도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별세하셨습니다만 전에 홍대위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중국의 남경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워치만 니에게 배우기도 한 분으로서,해방 후에 한국에 나와서 서울의 성동 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육이오 동란 이후에는 대구 삼덕 교회에서 시무하셨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능변가는 아니었지만 중생을 강조했습니다. 그분은 이 요한일서 5장 13절을 읽다가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중국에 있을 때에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하기에 자기도 거기에 참여했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에서 온 여자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하는데 설교를 마치고 문간 앞에 서서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거듭났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난 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홍대위 목사가 ‘나한테 거듭났느냐고 하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자기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자기 앞에 와서 손을 내밀고 “거듭났습니까.”하자 얼떨결에 “예,거듭났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상당히 고민을 하던 중,이 성경을 읽다가 자기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평안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모든 사람이 이미 영생을 가졌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여 집회할 때마다 "여러분 다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거듭났습니다."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른이 착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국에 와서 몇십 년 동안 설교를 하고 다녀도 구원받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있을 때 그분에게 방송 시간을 가끔 드렸습니다.
어느날 그분을 만나 우리의 전도 활동 속에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말씀드렸더니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한국에 나와서 복음을 전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도대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니 참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느날 홍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상당히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여집사 한 분이 우리 모임에 참석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교회에 안 나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웬만한 다른 목사들은 그런 사건이 생기면 우리를 원수시하는데 그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 자신은 거듭난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분 주변에 교제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바로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교제 안에서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서 1:6)
우리 안에 있는 선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바로 선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면서 그 선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제 속에서 그 선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빛 가운데 행하면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빛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 그 마음 속에 확신이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분명히 빛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또 그 빛이 가리워집니다. 왜 어두움이 찾아옵니까?
어두움이 찾아오면 예수님의 피에 대한 감사함이 사라집니다.그러나 나중에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다시 살아나면서 괴롭고 복잡했던 마음이 다시 깨끗하게 씻어지고 그 피의 은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 1장 7 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서신을 보냈는데 자기가 이웃 사람에게 원망과 시비를 품고 있었답니다.그런데 그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중에 마음에 있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렸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마음이 밝고 평화로움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이 말씀대로 구원받은 사람 피차간에 쌓였던 문제가 입으로 토설함으로 말미암아, 그 토설하는 순간에 없어져 다시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며 믿음의 차원이 달라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없다면 성경은 거짓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긴 받았는데, 나중에 또 죄를 짓고 세상 생활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졌으면서도 "내가 영생을 확신한다"고 한다면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 이라는 말을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듣는다고 영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생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말 속에는 영광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영생은 죽음과 반대의 의미를 갖는 모든 것이 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분명히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생을 불순종하여 마음에 어두움이 있을 때 내가 영생을 누리며 사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의심이 나고 괴로운데 무슨 영생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히 영생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여 영생이란 '죽지 않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반대인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통 속에 즐거워한다"는 것처럼 힘있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은 빛 가운데 행할 때에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자백하고 서로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힘있고 영광스러운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란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단번에 받은 그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그 후에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고 말씀을 지켜가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 영생 얻었다고 큰소리치면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으로는 “나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은 비참하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말씀을 지켜갈 때에 계속적으로 그 생명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그리하여 그 은혜가 계속 내 마음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경험하면서 살 아갈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도 사도 요한이 쓴 말씀으로 요한복음과 아주 비슷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계속해서 마음에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사망인지 생명인지 모를 만큼 희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했는데 실제적으로 죽음의 생활이 내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그 삶은 완전히 죽음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하고 우리가 즐거워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구원받은 사람, 즉 형제간에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운동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동작, 살아 있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살아 있다는 의식은 곧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사랑의 의식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움직이고, 잠을 자더라도 숨을 쉬면서 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계속 느끼면서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함으로 ··· "하는 그 동작입니다. 그 동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마음이 서로 단절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단절되어 있으면 생명의 흐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고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얼마 전. 멀리 있는 어떤 분이 편지를 보냈는데 "설교를 듣다가 말과 행위가 다른 것 같아서 듣기 싫어졌습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설교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면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느냐는 뜻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네 목숨이 떠나가리라"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즉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굉장히 미워했습니까? 또 사도행전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때 바울은 과연 바나바를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그 다툼은 서로 미워하는 다툼이 아닙니다. 바울은 전에 전도 여행을 떠날 때 고생스럽다고 돌아간 마가를 데리고 가다가 중간에 또 그런 말썽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이므로 인정상 같이 데리고 가자고 하여 심히 다투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인간적으로 가까운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완강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가고 바나바는 자기 생질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바나바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인정에 치우친 사람이라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나바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와 다투었기 때문에 바나바를 미워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로새서 4:10)
나중에 그 마가라는 사람이 잘못한 것을 충분히 뉘우쳤기 때문에 바울은 마가를 극진히 생각했습니다. “이 마가가 너희에게 가거든 그를 영접하라” 라고 했습니다. 본래 바울의 마음 속에는 마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가 밉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감정이 생겨서 누구를 책망한다면 안되지요. 그러나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공과 사를 완전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양심에 거리낌없이 그 사람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당할 때 화가 나는 것은 육신의 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에베소서4:26)하셨으니 기분이 나빠도 곧 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은 아담의 자손에 불과한 흙뭉치이며 죄 가운데 난 인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24-25)하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거기에 구제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했듯이 아무리 거룩해도 육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만 육신은 매 순간마다 이 겨가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의 진리가 내 안에 살아 있고 내가 그 진리를 믿고 있으면 그 진리가 나로 하여금 어떤 순간에 형제나 자매를 위해 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자기와 가깝고 자기 편이 되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강조되어 온 것 중 하나가 지역적인 감정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지역, 내 성격 등으로 나타나는 자기’라는 것을 철저히 죽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온 것은 모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소한 충돌이 있더라도 이 성경 안에서 폭넓게 사랑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는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6-19)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길이,높이깊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랑의 넓이도,길이도높이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넓혀가는 의미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내 지역의 사람들만으로는 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지역적인 것에 관계됨이 없이 전체가 하나의 교회로서 주님의 생명을 같이 호흡하며 그 사랑을 같이 느끼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므로 좀 더 폭을 넓혀서 멀리,나아가서는 미주 지역이나 유럽에 있는 지역까지 모두 이 복음의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충돌이나 갈등이 생긴다고 서로 미워하고 어그러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소한 문제에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자기 가까이에서 인정적으로 아주 따뜻하게 느끼는 그러한 것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은 성도들의 폭넓은 교제 속에서 은근히 우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 느끼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따뜻함을 느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폭넓은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실현되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그 전체적인 조화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와 개인적으로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 신자들에게서 헌금을 모아가지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흉년든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집착되는 육신의 정과 하나님의 사랑을 혼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제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감사와 기쁨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육신이 꺾어질 때에, 한 푼이라도 물질을 내놓을 때에 육신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못 견디겠다. 자,돈을 내놓자”라는 식으로만은 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를 돕기 위해서 돈을 내는 일이 내 마음에 좀 아까운 생각이 있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꺾고 실행하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지는 않았으나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와 같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자신을 승화시키는, 자신을 완전히 죽음으로 깎아 바치는 그 속에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감상적으로 느끼는 그 사랑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3:13-14)라고 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우리 모임(교회)을 너무 심하게 비방하므로 형제 몇 사람이 이를 따지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도착했으나 문도 열어주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를 찾아온 형제들을 주거 침입으로 몰아 경찰에 고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은 결국 여러 날 동안을 경찰에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은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어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법에 묶여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성도의 교제를 통한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옥사장이 구원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 사람으로 인해 그의 집도 구원받을 가능성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이러한 일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비록 그 형제들에게 약간의 실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통해 되어진 결과,즉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태어난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이러한 복잡한 속에서도 누가 누구를 원수처럼 미워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그 사람들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마귀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곤란을 당하고 많은 영혼 들이 힘을 잃고 괴로움을 당할 것을 막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세상 삶에서 목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삶의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일서입니다.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내시고, 그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고 확실한 것이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확실한 것을 알고 기꺼이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영생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생의 확증이 왔지만 또한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내 생명을 기꺼이 내어 바칠 수 있는 대상이 확실한 가운데 그 목표를 따라 사는 삶이 영생의 터전 위에 살, 고 있다는 확증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구원받을 때 받은 영생뿐 아니라 현재 살 아가는 삶에서 확실한 영생의 터전 위에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위해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쓴 것은 ··· "이라 한 그 의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참으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아는 생활이 곧 영생을 계속 누리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생명, 그 복된 생명, 그것을 참으로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일서 5:13-14)
영생이라는 것은 길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니 그는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했습니다. 마귀도 지옥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마귀가 영생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영생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영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생명, 하나님의 사랑이 약동하는 생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하면서 빛 가운데 사는 생명, 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쓰는 이유는 이것을 읽고 너희들이 이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영생이 있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영생한다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삶
영생을 얻고 그 안에 산다는 확증, 내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그 앞의 13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이 '구한다' 는 말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중언부언하며 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했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 마음이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그것이 내 마음 전체의 소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그 영생의 바탕 위에 서 있다면 내가 현재 살아가는 것, 생각하는 것, 마음을 기울이는 것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한 치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제가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계신 그 영생의 바탕 위에 우리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 계획 속에 이 교회가 이끌려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제 믿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막고 있는 것이 사람의 육신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이룩하시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예정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일은 사람들이 모여 중구난방으로 이것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각 사람은 자유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회도 하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짓 교회를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중세기 암흑 시대에 교회가 형식화될 것이 이미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영생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활동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생이 역사하는 그 속에 내가 참예해 있다면 내 마음 속에 구하는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도들이 서로 섬기면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가로막히지 않고 나타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임의대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돈 벌이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에서 그 담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 일이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담대히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 속에 담대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리의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자기 욕심대로 구하면서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미신적으로 자기 욕심나는 것을 구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이 말씀은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 요한일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대로 살면, 그것은 빛 가운데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생의 확신이 있는 삶입니다. 자기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영생의 기틀 위에 서 있으며 자신이 그 생명 안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삶이요 복스러운 삶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는 확신 속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아 가고 있는 그 삶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에 근거한 믿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삶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완전히 이루어 주십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이는 모임 안에 살아도 모임 안에 사는데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모임이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해 봤자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 속에 자기가 서서 자신있게 살지 못하면 그 삶은 완전히 허망합니다.
여러분, 저는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 교회, 이 모임이 잘 되는 일이라면 나는 죽어도 좋다, 내 생명을 바쳐도 좋다 하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통해 일하고 계신 것을 확신합니다.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고 판단을 하면 얼마나 예리하게 판단을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사로운 자기의 판단에 의해서 자기 생각대로 이것저것 다 판단해 놓고 그속에 자기의 웅덩이를 파고 들어앉아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생이 역사해 가는 그 속에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밥 먹는 것도. 길을 걷는 것도, 사람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전체가 그것을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응답을 받고 살아가는. 확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구절입니다.모든 불의가 죄인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누가 실수해서 거짓말했다면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도 사망에 이르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자기가 약해서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해치고 형제를 해치기 위해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망에 이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가 밭을 팔아서 “우리, 반은 감추고 반만 가지고 가서 이것이 모두라고 말하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계획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성도들의 교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가는 초대교회 속에 완전히 먹물을 뿌리는 계획 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하는 그 교회의 유무상통을 깨어버리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 자체를 파괴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속이고 어두움을 끌어들여 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주님 앞에서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을 계획적으로 파괴시키는 것, 계획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적인 것은 사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졌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죄성을 가졌습니다. 살아가노라면 자기의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수는 언제든지 자백이라는 방법으로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하는 것,하나님의 일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것, 계획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계획적으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는 뜻입니까? 우리와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폄론하거나 악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묵묵히 참고 견디어 나갈 때 하나님의 정확한 판단이 나타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확실한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그 응답이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면서 구하는 사람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확실히 응답받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원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했습니다.죄 짓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경우, 거기에도 해결책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것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자체가 그렇다는 뜻입니다.우선 현재 육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으나 영의 위치를 생각하면 악 한 자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암시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범치 않는다고 했으니 이 문제는 영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다음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한일서 5:19)
두 영역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고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서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란 이 세상에 있는 선, 도덕. 윤리, 종교, 과학, 형식적인 기독교, 그림, 돈과 모든 물질, 명예. 쾌락, 학문, 정치, 군사 등 전체를 의미합니다. 양심적인 죄는 물론이며 죄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한복음 12:31)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는 아담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나도 세상과 함께 장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서 하나님이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십자가 저편에 있는 세상은 이편 부활의 영역에 올 수 없고, 또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는 경계하나 선하게 보이는 세상은 경계하지 않고 방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칫 세상으로 끌려가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자신이 속해 있다는 확신을 다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한일서 5:20)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각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서 무엇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거짓이 조금도 없으신 참된 분이시고 영생이십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우상의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위협을 합니다. 우상을 향해서 절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은 온통 우상의 세력이 꽉 들어찬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끌리는 그 전부가 하나님 앞에 우상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만든 질서 속에 사람을 잡아 가두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의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서 끊임없이 조여 들어오는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로새서 3:1-4)
여기에서 "너희는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함께 짝하여 연락하고 교통하던 세상에 대하여 너희는 죽었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리심을 받았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생각을 좀 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았다는, 주님과 함께 부활해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그 확신을 가지면 온 세상이 우상의 세력으로 꽉 차 있음을 압니다. “세상 것은 나와 관계 없어”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배가 바다 속에 있지만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뜰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위에 떠서 사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베드로전서 3:21)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 세상 모든 것과 접촉하고 살지만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게 주지 않고 세상 것과 바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20)
이러한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 속에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의 말씀을 우리 모임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말씀이 현 실적으로 우리 모임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