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준구하고 성식이가 어제 놀러간다고 나갔는데 오늘 아침까지 집에 안 돌아왔대요.”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동준이가 말했다. 선생님도 전화 받고 알고 있다고 하자 모두들 웅성웅성했다. 얼마 전에 대구에서 다섯 친구가 산으로 놀러간다고 나간 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일을 신문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었다.
“평소에 여준구하고 임성식이가 잘 가는 곳을 아는 사람, 누가 있나? 잘들 생각해서 찾아보기로 하자.”
선생님은 교실에서 나가셨다가 한참 후에 다시 오셨다.
“누구 생각나는 게 없나? 지금 교장, 교감 선생님과 함께 의논했는데 오늘 선생님은 동준이와 영훈이를 데리고 준구와 성식이가 갔을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선생님, 걔네 둘은 항상 같이 다녀요. 한번은 둘이서 북한산에 갔다 왔다고 하는 걸 들었어요.”
성식이와 친한 동준이가 말했다.
선생님은 일단 준구네 집과 성식이네 집에 연락을 취한 다음 부모님들과 만나서 상의하기로 했다. 영훈은 선생님과 동준이와 함께 성식이네 집으로 갔다. 성식의 집에는 벌써 준구 부모님이 와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준구의 어머니나 성식이네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울고 계셨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두 분 다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찾으러 갈 만한 곳을 의논하고 계시는 중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오전 11시 경이었다.
두 친구는 북한산에 등산을 갔다 하산하는 길에 배가 고파서 준구가 밤나무에 올라가 나무를 혼들다가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준구는 일어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성식이가 준구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배는 고프고 힘이 빠져 쓰러질 뻔하면서 어두울 때에야 겨우 어떤 외딴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준구는 다친 곳이 너무 아파서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식이가 먼저 시내로 나와 가까운 파출소로 가서 연락을 취한 것이다.
이 연락을 받은 부모님과 선생님, 영훈이와 동준이는 모두 일어나 급히 그 파출소로 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지난 주간에는 두 학생의 실종 사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났었는데, 오늘은 성경에서 잃은 자를 찾는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첫째 이야기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이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백 마리가 있었는데 이동하는 중에 한 마리가 없어졌단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목자는 잃은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선생님, 양도 이름이 있나요?”
“그럼, 아주 좋은 목자는 양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서 불렀단다. 가령 ‘삐삐’라고 하든지 ‘쫑’이라고 하든지 말이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보면,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다.
한편 잃어진 양은 산 계곡에서 열심히 풀을 먹다가 그만 무리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주위에 동무 양들이 보이지 않자 양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양은 “매에 매에” 하고 울면서 동무 양들과 목자를 찾아 헤매었다. 만일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밤중에 멀리서 양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늑대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먹힐지도 몰랐다. 양은 목자를 찾아서 “매에 매에”하고, 목자는 양을 찾아서 “삐삐 ”하고 찾는 것 이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잃어진 양은 세상의 죄 가운데 빠져서 사나운 사탄의 밥이 되려고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목자가 잃어진 양을 찾을 때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태워 춤을 추면서 돌아가는데 이것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이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혼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은전을 찾는 여자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누가복음 15:8-10)
“옛날에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자가 있었단다.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여자는 걱정이 되어서 밤에 불을 켜들고 집을 쓸며 열심히 찾는 것이다. 그 여자는 성령을 의미하고 은전은 죄인을 의미한다. 사람은 은전 하나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성령이 교회안에 계시면서 집을 쓸며 찾는다는 것은 교회가 성령이 일할 수 있는 깨끗한 곳이 되면 죄인을 찾게 된다는 뜻이란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깨끗해지는 것을 말한다.”
“선생님, 교회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창수가 물었다.
“예를 들어 교인끼리 서로 다투고 욕심부리는 것 같은 것이지. 교회에서 신자끼리 싸우거나 서로 잘난 척하고 높아 지기를 좋아하면 성령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일 하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고 한 것은 한 사람이 회개하면 옆에 있는 신자들이 같이 기뻐한 다는뜻이다.”
아들 찾는 아버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누가복음 15:11 —14)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이미 믿는 사람이고 둘째 아들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는 재산을 다 탕진한 후 어느 집의 돼지치기가 되었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날 밤, 그는 돼지우리 옆에 앉아서 둥근달을 쳐다보며 고향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저 달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자인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배불리 먹고 살 텐데.’하고 그는 일꾼들을 오히려 부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주인은 음식을 배부르게 주지 않고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밖에 주지 않았다. ‘나는 부잣집 아들이지만 우리집에서 일하는 일꾼보다 훨씬 못한 형편이구나’라고 생각할수록 그는 서러워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가면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고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시겠지만 용서를 빌고 때리면 맞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일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한편 아버지는 둘째 이들이 재산을 다 팔아서 멀리 떠날 때에 부디 잘 살기를 바랐고 아들이 떠나는 것을 마음으로 슬퍼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빠지는 것을 슬퍼하시는 것처럼 아들이 떠난 다음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대해서 늘 궁금했고 매일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종 무소식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슬퍼하셨다. 행여 병이나 나지 않았는지, 강도를 만나서 혹 어떻게 되지 않았는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대문 밖에 나가 멀리서 혹시 아들이 오고 있지나 않은지 내다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죄인을 위해서 슬퍼 하시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사람이 찾아왔다.
“어르신네, 참 안됐습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제가 시내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들었는데 댁의 아들이 재산을 다 없애고 거지같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아직 살아 있답니까?”
“살아는 있으나 거지처럼 옷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 어떤 부자집에 가서 돼지를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으나 더욱 아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재산이야 어찌됐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어느날 밖에 나가서 멀리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아주 힘 없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둘째 아들이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났지만 아버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얘야, 왜 이제야 오느냐?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아느냐?"
아들은 어리둥절 했다. 야단맞지 않을까 몹시 걱정했었는데 아버지가 의외로 반가이 맞아주시니 몸둘 바를 몰랐다.
구원의 옷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는 종들에게 일렀다.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제일 좋은 옷이란 것은 무슨 옷일까?”
“구원의 옷이지요.”
영훈이가 대답했다.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
창세기 3장 말씀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벗은 몸인 것을 발견한 때로부터 사람에게는 무섭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영혼의 옷을 벗었다는 뜻이다. 영혼의 옷을 벗었다는 것은 양심의 부끄러움과 무서움과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주렁주렁 엮어서 입었다. 그래도 부끄럽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양심의 옷이 벗겨진 것이지 육신의 옷이 벗겨진 것이 아니었다. 무화과나뭇잎이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을 잡아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뜻이다. 가죽옷은 짐승이 피를 홀 리고 죽어야 생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이 곧 구원의 옷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다. 가락지는 죄를 용서했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아주 멋있는 신을 신겼다. 그것은 복음이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으라고 해서 잔치를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이제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춤을 추시는 것이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의 옷을 입으면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하던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었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 죄를 용서하고 좋은 것으로만 주시려고 하시는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빌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셨는가 아니면 돌아오기 전부터 사랑하시고 용서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벌써 죄를 용서하셨다. 벌써 이천 년 전에 그것을 보여주셨다. 믿는 사람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지 다 이미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 하신 하나님이시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2)
이 말씀은 우리의 죄가 어떻게 없어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짓고 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름같이 안개같이 죄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죄를 하나님이 없애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없어졌다는 뜻이다.
【익힘문제】
1. 목자와 양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여자는 누구이며 집 안에서 은전 찾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3.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 용서하셨습니까? 돌아와서 용서를 빌었을 때 입니까? 아니면 그 이전입니까? 그리고 탕자의 비유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선생님, 준구하고 성식이가 어제 놀러간다고 나갔는데 오늘 아침까지 집에 안 돌아왔대요.”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동준이가 말했다. 선생님도 전화 받고 알고 있다고 하자 모두들 웅성웅성했다. 얼마 전에 대구에서 다섯 친구가 산으로 놀러간다고 나간 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일을 신문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었다.
“평소에 여준구하고 임성식이가 잘 가는 곳을 아는 사람, 누가 있나? 잘들 생각해서 찾아보기로 하자.”
선생님은 교실에서 나가셨다가 한참 후에 다시 오셨다.
“누구 생각나는 게 없나? 지금 교장, 교감 선생님과 함께 의논했는데 오늘 선생님은 동준이와 영훈이를 데리고 준구와 성식이가 갔을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선생님, 걔네 둘은 항상 같이 다녀요. 한번은 둘이서 북한산에 갔다 왔다고 하는 걸 들었어요.”
성식이와 친한 동준이가 말했다.
선생님은 일단 준구네 집과 성식이네 집에 연락을 취한 다음 부모님들과 만나서 상의하기로 했다. 영훈은 선생님과 동준이와 함께 성식이네 집으로 갔다. 성식의 집에는 벌써 준구 부모님이 와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준구의 어머니나 성식이네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울고 계셨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두 분 다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찾으러 갈 만한 곳을 의논하고 계시는 중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오전 11시 경이었다.
두 친구는 북한산에 등산을 갔다 하산하는 길에 배가 고파서 준구가 밤나무에 올라가 나무를 혼들다가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준구는 일어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성식이가 준구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배는 고프고 힘이 빠져 쓰러질 뻔하면서 어두울 때에야 겨우 어떤 외딴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준구는 다친 곳이 너무 아파서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식이가 먼저 시내로 나와 가까운 파출소로 가서 연락을 취한 것이다.
이 연락을 받은 부모님과 선생님, 영훈이와 동준이는 모두 일어나 급히 그 파출소로 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지난 주간에는 두 학생의 실종 사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났었는데, 오늘은 성경에서 잃은 자를 찾는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첫째 이야기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이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백 마리가 있었는데 이동하는 중에 한 마리가 없어졌단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목자는 잃은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선생님, 양도 이름이 있나요?”
“그럼, 아주 좋은 목자는 양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서 불렀단다. 가령 ‘삐삐’라고 하든지 ‘쫑’이라고 하든지 말이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보면,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다.
한편 잃어진 양은 산 계곡에서 열심히 풀을 먹다가 그만 무리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주위에 동무 양들이 보이지 않자 양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양은 “매에 매에” 하고 울면서 동무 양들과 목자를 찾아 헤매었다. 만일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밤중에 멀리서 양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늑대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먹힐지도 몰랐다. 양은 목자를 찾아서 “매에 매에”하고, 목자는 양을 찾아서 “삐삐 ”하고 찾는 것 이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잃어진 양은 세상의 죄 가운데 빠져서 사나운 사탄의 밥이 되려고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목자가 잃어진 양을 찾을 때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태워 춤을 추면서 돌아가는데 이것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이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혼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은전을 찾는 여자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누가복음 15:8-10)
“옛날에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자가 있었단다.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여자는 걱정이 되어서 밤에 불을 켜들고 집을 쓸며 열심히 찾는 것이다. 그 여자는 성령을 의미하고 은전은 죄인을 의미한다. 사람은 은전 하나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성령이 교회안에 계시면서 집을 쓸며 찾는다는 것은 교회가 성령이 일할 수 있는 깨끗한 곳이 되면 죄인을 찾게 된다는 뜻이란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깨끗해지는 것을 말한다.”
“선생님, 교회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창수가 물었다.
“예를 들어 교인끼리 서로 다투고 욕심부리는 것 같은 것이지. 교회에서 신자끼리 싸우거나 서로 잘난 척하고 높아 지기를 좋아하면 성령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일 하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고 한 것은 한 사람이 회개하면 옆에 있는 신자들이 같이 기뻐한 다는뜻이다.”
아들 찾는 아버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누가복음 15:11 —14)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이미 믿는 사람이고 둘째 아들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는 재산을 다 탕진한 후 어느 집의 돼지치기가 되었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날 밤, 그는 돼지우리 옆에 앉아서 둥근달을 쳐다보며 고향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저 달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자인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배불리 먹고 살 텐데.’하고 그는 일꾼들을 오히려 부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주인은 음식을 배부르게 주지 않고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밖에 주지 않았다. ‘나는 부잣집 아들이지만 우리집에서 일하는 일꾼보다 훨씬 못한 형편이구나’라고 생각할수록 그는 서러워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가면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고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시겠지만 용서를 빌고 때리면 맞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일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한편 아버지는 둘째 이들이 재산을 다 팔아서 멀리 떠날 때에 부디 잘 살기를 바랐고 아들이 떠나는 것을 마음으로 슬퍼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빠지는 것을 슬퍼하시는 것처럼 아들이 떠난 다음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대해서 늘 궁금했고 매일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종 무소식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슬퍼하셨다. 행여 병이나 나지 않았는지, 강도를 만나서 혹 어떻게 되지 않았는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대문 밖에 나가 멀리서 혹시 아들이 오고 있지나 않은지 내다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죄인을 위해서 슬퍼 하시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사람이 찾아왔다.
“어르신네, 참 안됐습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제가 시내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들었는데 댁의 아들이 재산을 다 없애고 거지같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아직 살아 있답니까?”
“살아는 있으나 거지처럼 옷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 어떤 부자집에 가서 돼지를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으나 더욱 아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재산이야 어찌됐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어느날 밖에 나가서 멀리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아주 힘 없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둘째 아들이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났지만 아버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얘야, 왜 이제야 오느냐?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아느냐?"
아들은 어리둥절 했다. 야단맞지 않을까 몹시 걱정했었는데 아버지가 의외로 반가이 맞아주시니 몸둘 바를 몰랐다.
구원의 옷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는 종들에게 일렀다.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제일 좋은 옷이란 것은 무슨 옷일까?”
“구원의 옷이지요.”
영훈이가 대답했다.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
창세기 3장 말씀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벗은 몸인 것을 발견한 때로부터 사람에게는 무섭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영혼의 옷을 벗었다는 뜻이다. 영혼의 옷을 벗었다는 것은 양심의 부끄러움과 무서움과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주렁주렁 엮어서 입었다. 그래도 부끄럽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양심의 옷이 벗겨진 것이지 육신의 옷이 벗겨진 것이 아니었다. 무화과나뭇잎이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을 잡아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뜻이다. 가죽옷은 짐승이 피를 홀 리고 죽어야 생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이 곧 구원의 옷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다. 가락지는 죄를 용서했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아주 멋있는 신을 신겼다. 그것은 복음이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으라고 해서 잔치를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이제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춤을 추시는 것이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의 옷을 입으면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하던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었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 죄를 용서하고 좋은 것으로만 주시려고 하시는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빌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셨는가 아니면 돌아오기 전부터 사랑하시고 용서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벌써 죄를 용서하셨다. 벌써 이천 년 전에 그것을 보여주셨다. 믿는 사람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지 다 이미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 하신 하나님이시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2)
이 말씀은 우리의 죄가 어떻게 없어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짓고 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름같이 안개같이 죄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죄를 하나님이 없애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없어졌다는 뜻이다.
【익힘문제】
1. 목자와 양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여자는 누구이며 집 안에서 은전 찾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3.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 용서하셨습니까? 돌아와서 용서를 빌었을 때 입니까? 아니면 그 이전입니까? 그리고 탕자의 비유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