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종교적 기독교

인간은 결국 종교라는 폭군에게 노예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심히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일반적 개념에서는 종교라고 인정하며 종교의 일종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으나, 사실 내용을 깨닫게 되면 종교에서 해방을 주는 것이며, 종교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일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며, 깨닫고 생명을 얻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참된 자유의 비밀입니다. 만일 기독교인으로서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여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가혹한 폭군으로 죄인 위에 군림할 것입니다. 기독교 내부의 핵심인 새 생명에 접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가장 엄한 종교가 되며, 또 되고 있으며,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있어 행하는 신앙 생활은 자신이 아니요, 오직 자기 안에 거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이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며, 자신이 하려고 하니 괴로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죄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려고 하니, 그 결과는 선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온 민족이 오랫동안 여러 종류의 종교적 배경 밑에서 사상과 습성이 굳어져 왔습니다. 

한 예로서, 열심히 불교를 신봉하던 어떤 사람이 기독교가 전래되니까 쉽게 천당에 간다는 매력적인 말에 끌려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신봉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예배당에 출석하게 되는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큰 문제점은, 기독교를 불교식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내가 인정하지만 나의 공도 필요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열심히 닦아야 기독교적인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중생이란 계단을 거쳐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보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것은 하나의 관념적인 상상에 불과하며, 열심히 기도하며 새벽마다 눈물로 통회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물질과 정신력, 그리고 육체의 힘까지 모두 소모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구원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소간 심령에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이것은 간판을 바꾸어 놓은 불교식 기독교입니다. 또는 500년 동안이나 이 민족의 사상과 습성과 모든 생활 의식까지 지배해온 유교가 있어서 철두철미한 도덕적 관념과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자부하는 골수에 사무친 예의 관념에 사로잡혀 살다가,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끌고 들어온 새 문명에 접하자 점차적으로 기독교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겼으나, 묵은 관념과 전통적인 습성의 생활관이 쉽사리 바꾸어지지를 않고, 결국 믿기는 예수를 믿으나 생활은 유교의 도덕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유교적 기독교가 되고, 기독교는 한낱 도덕적, 윤리적 기독교로 옷을 갈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참 생명이 있었으나, 점차로 피전도지구의 기존 사상인 도덕 및 의식관념과 타협하게 되어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순수한 것이어서, 티가 섞이면 결코 성령이 역사할 수 없으며,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중생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보다는 차라리 도덕 관념이 앞을 서서, 도덕적 방면으로 달음질하는 유교식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것은 정신적, 내면적인 문제이지만, 외면적, 의식적인 면에서 보면 입에서 나오는 말뿐 그 외에는 거의 유교식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 윤리관은 전체가 유교식이지 복음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 실정입니다. 

또한 한국 민족의 정신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무속적 (座俗的) 민간 신앙이 있습니다. 지금도 서울 중심가에서 병 낫기를 원하는 굿을 한다든가,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든가, 무당이나 점장이 앞에서 운명감정, 사업감정, 성명감정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마음이 쏠려 있던 사람들이 그대로 기독교에 들어오면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간다는 막연한 관념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예배당에 다녀도 참 생명의 변화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지루한 종교적 요구에 갈등을 느끼다가, 성경에 있는 신비적 체험의 기사나 환상과 음성을 듣는 기사를 보면 이것을 오해하고, 자기도 이런 것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속에 들어가서 수십 일 동안 금식을 하는 중에, 정신적 변태, 아니면 이것을 이용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걸려 이상한 체험을 받고는 소란을 떠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군중들이 와글와글 몰려 다니면서 '불을 받는다' , '환상을 본다' , '입신을 한다 ', '방언을 한다' 고 하면서 산으로, 천막으로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허풍선이가 되어 집회에만 찾아 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가졌던 무속적 소질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신령적 영웅들은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도 속고 있는 것을 모르고 진실인 줄 알고서 그 군중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신비적 형태를 나타내므로, 많은 인심뿐 아니라 물질까지 모아들여 거부가 된 자도 없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들이 나타날 것에 대하여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2:8-10)


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중생의 문을 진정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생명의 만족과 참 평안이 있고, 성경을 통하여 매일매일 양식을 먹으므로 배고파하지 않으며 이상한 것을 찾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들의 체험이며, 또한 필자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데 어디 가서 다른 것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많은 신령한 은사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나타난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기존 사상과 정신에 뿌리박아 변질된 기독교 외에도 신 문명이 가져다 준 신 사조에 의하여 소위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적 기독교가 있습니다. 

이 세력은 일찌기 주후 백 년경부터 기독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와 기독교의 생명을 훔쳐 간 도적이며, 점차적으로 기독교를 일종의 철학으로 변질시킨 헬라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머리로는 신의 존재와 신조를 이해하나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신앙이 깃들이는 곳은 심령입니다. 곧 마음입니다. 철학적인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신앙이 마음에서 옮겨 머리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미리 알고 엄히 경계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계시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지식에 주는 양식이 아니라 죄와 생명의 공허감에서 헤매는 마음에 주는 양식입니다.  

기독교 전체의 진리를 머리로는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생명과는 상관없습니다. 철학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는 기독교의 사상가는 될지언정 새 생명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없습니다. 주후 백 년경부터 기독교가 헬라 철학과 타협하자 기독교는 마음에서 머리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주의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웅변술을 타고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며 인기를 모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웅변술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설득력이나 사색적인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갈급한 심령에게 계시되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마음에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헬라주의는 기독교와 입을 맞춘 후, 성경을 웅변으로 연설하여 사람의 심리를 사로잡기 시작했으니, 계시 (啓示)는 중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을 얻는 역사는 성령으로만 되는 것인데, 사람의 웅변적 기술에 의존하니 그 때부터 기독교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계시로만 사람의 심령에 알려지고 깨달아지는 것이지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말했으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17:22)


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며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은 오직 성령으로만 심령에 깨달아지는 것임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철학화한다는 것은 크게 위험한 일이며, 기존 종교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현 기독교는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민족사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동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나 민족사상 운동의 수단으로 기독교가 전락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근세 한국 역사에 나타났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심하게 말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한국 어느 지역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한국 민족이 특수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처럼 속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짓 인도자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주님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복음보다는 민족에 관심이 더 깊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어떠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것이다' 라고 하여, 동문서답격이지만 가장. 진실된 답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을 특수한 존재로 보시지 않으시고 중생한 자들을 보시는 것뿐입니다. 내가 유대인이 아님을 감사하는 이유는, 이방인의 시대에 살면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전부는 아니지만, 종교적 기독교를 형성하여 참된 복음과는 상관없는 현상이 일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종교의 시대가 있었고, 복음의 시대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종교를 명령한 사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복음, 이 두 사실은 분명히 구별된 것이니 곧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표면적 뜻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과 맺는 행위의 약속입니다 거기에도 내면적이며 영적으로 복음의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으나, 외부적인 뜻은 종교를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 기독교가 많은 형태의 종교와 유사한 점을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것은 각 개인의 기존 사상에 따라서 만들어진 개인적인 것이거니와, 그것보다 한층위험한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 곧 하나님에게로부터 받은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러우나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며,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