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곧 종교를 말합니다. 율법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뜻은 복음에 대한 것이며 복음의 그림자이나, 율법의 외면적이며 보이는 면은 바로 종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제사 제도, 성전 건축 제도, 십계명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전체를 바로 말하면 율법 곧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 선을 행하기에 전혀 무능한 약자인데 율법의 온갖 일을 명령하셨으니, 그것은 무거운 멍에이며 인생에게 심히 괴로운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인생들이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곧 종교입니다.
그러면 인생들이 행할 수 없는 무거운 종교의 멍에를 왜 메워 주셨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종교와 복음을 구별해 놓은 것을 찾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 종교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사도행전 26:5)
이는, 바울이 복음을 깨달아 구원받기 전에 율법의 정통 보수파인 바리새인이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종교의 때에는 참된. 주인이 없었고, 생명이 없었으며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종교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참 생명의 때가 누구에게든지 한 번은 꼭 와야 합니다.
종교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죽이고 괴롭혀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이와 같이 율법 곧 종교는 인생들을 죄인이라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왜 하나님께서 능히 실천할 수 없는 법을 인생들에게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생들의 자연성과 자신을 꺾어버리는 일을 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가르쳐 주어서 괴롭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고 하셨으니, 여러분 이 말씀에 주의해 보십시오. 율법을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있다고 했습니까? 물론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당장 알게 되는 것은 "나는 행할 수 없는 죄인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종교를 주신 목적은 "나는 죄인이다" , "멸망받을 자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괴롭게 하는 것이며, 구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주를 찾는 데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7:6-13)
율법, 곧 종교의 법이 없으면 내가 죄가 있어도 죄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폭로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며, 선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들이 도달해야 할 하나님 표준의 선입니다. 인간은 죄인인 것을 스스로 알지만 하나님 표준의 선을 보기 전에는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큰소리치며, 제 스스로 살 수 있는 줄 알고 교만한 자가 되며, 스스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인 종교, 곧 율법을 보자 즉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심판 아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되어 마음이 죽고 자신이 무너지며 떨 수밖에 없어 자신 이외의 다른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폭군과 같은 무서운 율법, 곧 종교에서 어떻게 하면 살 길을 찾을까 하고 살 길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율법, 즉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이며 평안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 해방받아야 참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 율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한 길이 있으니 그 율법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율법이라는 군주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 있는 동안엔 나는 할 수 없이 군주를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율법을 좇아 살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마침내 나에게 죽음을 선언합니다. 곧 종교는 냉정하게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으면 그 율법이라는 종교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이며 율법의 종교 시대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 시대가 자신의 종교 시대인 것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합니까? 율법이라는 군주 앞에서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지나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된 줄 알고 위선자가 되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이 율법적으로 살려면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종교가라도, 율법을 잘 지키며 산다는 기독교인이라도 그대로 율법 안에서 살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위선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또는 양심대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완전한 의인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지옥 가는 죄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마치고 10년 동안 목사로 있으면서, 스스로를 중생했으며 구원받은 자로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설교하는 말과 행동은 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설교는 했으나 나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좇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으로 많이 시달렸으며 신앙생활의 맹점과 보람 없음과 공백을 깨달았을 때 저의 생애가 저주스러웠고 세상에서 최대의 위선자임을 알았습니다 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호소도 했습니다. 죄 많은 나, 위선자,
전형적인 위선자는 바로 나, 소위 목사라고 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었으며 나의 의는 곧 죽음임을 알았습니다. 종교는 나를 죽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죽어야만 새로이 삽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세밀히 율법대로 살아 본 자만 죽을 수 있고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음을 깨달은 자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솔직해지면 죄인임을 알 수 있고 죄인임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저주스러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양심에서 출발합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양심의 율법이 있다 했습니다. 양심의 증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종교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2-15)
인간들의 양심 속에서 깨닫는 이상적 생활율이 도덕이며 예의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생활율인 도덕이나 예의나 윤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죽이는 것이며 멍에입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들을 자유가 없도록 구속하는 것이며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의 법을 따라 가르친 도덕과 윤리의 법은 양심의 법에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죄를 가진 불효자에게 효도의 완전한 도리는 참으로 실행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 아닐까요? 하물며 거룩하신 그 분께는 어떻겠습니까?
요한복음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나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0:7-8)
모든 종교는 인간들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죄인들의 양심의 평안을 약탈하는 '절도며 강도' 입니다. 괴로움을 주고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한복음 10:10)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멍에 아래서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으며, 평안을 약탈당하셨습니까? 마음이 죽고 괴로움을 당하셨습니까? 진정으로 바랍니다. 이제 거기에서 해방을 받으십시오. 그 무거운 종교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곧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 : 28-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불쌍하게도 율법의 무거운 종교 아래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율법을 쳐다볼 때마다 "나는 죄인이구나" 하면서 마음에는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이 하나님을 벌벌 떨면서 섬겨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란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려고 하면 항상 고백해도 해결 못본 죄 문제가 먼저 앞을 가로막지나 않습니까? "매일 새벽마다 하염 없는 눈물을 흘리며 통회 자백을 했으니, 이제는 죄가 용서되었겠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 없는 헛수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않겠다고 십일조를 드렸으나 어느 정도의 안도감뿐, 참된 평안이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에 마음에 없이 부득이 사랑을 하지만 진정한 평안이 내게 없다면 이것은 곧 종교의 무거운 멍에입니다.
'기독교 종교' 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더욱 가혹하게 속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 만큼 죄 때문에 울면서 괴로워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잘 믿어야 천당 간다는 구실 아래 새벽마다 예배당에 가서 울어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처럼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더욱 큰 괴로움을 가지고 "나 같은 것은" 하면서 체념에 가까운 탄식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종래는 "아이구, 나는 할 수 없다" 하면서 그만 단념하는 이들도 전도하다가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에 얽매인 현상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임과 속박 아래 있는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엄한 율법 밑에서 여러분을 놓아 주시려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종교의 멍에 아래 헤매는 자들을 부르고 계시는 주님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곧 종교를 말합니다. 율법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뜻은 복음에 대한 것이며 복음의 그림자이나, 율법의 외면적이며 보이는 면은 바로 종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제사 제도, 성전 건축 제도, 십계명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전체를 바로 말하면 율법 곧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 선을 행하기에 전혀 무능한 약자인데 율법의 온갖 일을 명령하셨으니, 그것은 무거운 멍에이며 인생에게 심히 괴로운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인생들이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곧 종교입니다.
그러면 인생들이 행할 수 없는 무거운 종교의 멍에를 왜 메워 주셨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종교와 복음을 구별해 놓은 것을 찾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 종교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사도행전 26:5)
이는, 바울이 복음을 깨달아 구원받기 전에 율법의 정통 보수파인 바리새인이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종교의 때에는 참된. 주인이 없었고, 생명이 없었으며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종교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참 생명의 때가 누구에게든지 한 번은 꼭 와야 합니다.
종교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죽이고 괴롭혀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이와 같이 율법 곧 종교는 인생들을 죄인이라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왜 하나님께서 능히 실천할 수 없는 법을 인생들에게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생들의 자연성과 자신을 꺾어버리는 일을 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가르쳐 주어서 괴롭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고 하셨으니, 여러분 이 말씀에 주의해 보십시오. 율법을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있다고 했습니까? 물론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당장 알게 되는 것은 "나는 행할 수 없는 죄인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종교를 주신 목적은 "나는 죄인이다" , "멸망받을 자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괴롭게 하는 것이며, 구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주를 찾는 데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7:6-13)
율법, 곧 종교의 법이 없으면 내가 죄가 있어도 죄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폭로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며, 선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들이 도달해야 할 하나님 표준의 선입니다. 인간은 죄인인 것을 스스로 알지만 하나님 표준의 선을 보기 전에는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큰소리치며, 제 스스로 살 수 있는 줄 알고 교만한 자가 되며, 스스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인 종교, 곧 율법을 보자 즉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심판 아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되어 마음이 죽고 자신이 무너지며 떨 수밖에 없어 자신 이외의 다른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폭군과 같은 무서운 율법, 곧 종교에서 어떻게 하면 살 길을 찾을까 하고 살 길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율법, 즉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이며 평안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 해방받아야 참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 율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한 길이 있으니 그 율법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율법이라는 군주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 있는 동안엔 나는 할 수 없이 군주를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율법을 좇아 살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마침내 나에게 죽음을 선언합니다. 곧 종교는 냉정하게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으면 그 율법이라는 종교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이며 율법의 종교 시대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 시대가 자신의 종교 시대인 것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합니까? 율법이라는 군주 앞에서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지나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된 줄 알고 위선자가 되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이 율법적으로 살려면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종교가라도, 율법을 잘 지키며 산다는 기독교인이라도 그대로 율법 안에서 살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위선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또는 양심대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완전한 의인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지옥 가는 죄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마치고 10년 동안 목사로 있으면서, 스스로를 중생했으며 구원받은 자로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설교하는 말과 행동은 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설교는 했으나 나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좇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으로 많이 시달렸으며 신앙생활의 맹점과 보람 없음과 공백을 깨달았을 때 저의 생애가 저주스러웠고 세상에서 최대의 위선자임을 알았습니다 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호소도 했습니다. 죄 많은 나, 위선자,
전형적인 위선자는 바로 나, 소위 목사라고 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었으며 나의 의는 곧 죽음임을 알았습니다. 종교는 나를 죽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죽어야만 새로이 삽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세밀히 율법대로 살아 본 자만 죽을 수 있고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음을 깨달은 자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솔직해지면 죄인임을 알 수 있고 죄인임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저주스러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양심에서 출발합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양심의 율법이 있다 했습니다. 양심의 증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종교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2-15)
인간들의 양심 속에서 깨닫는 이상적 생활율이 도덕이며 예의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생활율인 도덕이나 예의나 윤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죽이는 것이며 멍에입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들을 자유가 없도록 구속하는 것이며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의 법을 따라 가르친 도덕과 윤리의 법은 양심의 법에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죄를 가진 불효자에게 효도의 완전한 도리는 참으로 실행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 아닐까요? 하물며 거룩하신 그 분께는 어떻겠습니까?
요한복음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나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0:7-8)
모든 종교는 인간들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죄인들의 양심의 평안을 약탈하는 '절도며 강도' 입니다. 괴로움을 주고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한복음 10:10)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멍에 아래서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으며, 평안을 약탈당하셨습니까? 마음이 죽고 괴로움을 당하셨습니까? 진정으로 바랍니다. 이제 거기에서 해방을 받으십시오. 그 무거운 종교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곧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 : 28-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불쌍하게도 율법의 무거운 종교 아래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율법을 쳐다볼 때마다 "나는 죄인이구나" 하면서 마음에는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이 하나님을 벌벌 떨면서 섬겨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란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려고 하면 항상 고백해도 해결 못본 죄 문제가 먼저 앞을 가로막지나 않습니까? "매일 새벽마다 하염 없는 눈물을 흘리며 통회 자백을 했으니, 이제는 죄가 용서되었겠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 없는 헛수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않겠다고 십일조를 드렸으나 어느 정도의 안도감뿐, 참된 평안이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에 마음에 없이 부득이 사랑을 하지만 진정한 평안이 내게 없다면 이것은 곧 종교의 무거운 멍에입니다.
'기독교 종교' 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더욱 가혹하게 속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 만큼 죄 때문에 울면서 괴로워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잘 믿어야 천당 간다는 구실 아래 새벽마다 예배당에 가서 울어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처럼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더욱 큰 괴로움을 가지고 "나 같은 것은" 하면서 체념에 가까운 탄식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종래는 "아이구, 나는 할 수 없다" 하면서 그만 단념하는 이들도 전도하다가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에 얽매인 현상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임과 속박 아래 있는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엄한 율법 밑에서 여러분을 놓아 주시려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종교의 멍에 아래 헤매는 자들을 부르고 계시는 주님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