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적 예배와 복음적 예배 -
예배에도 종교적인 예배와 복음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이 역시 하늘과 땅의 차이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어떤 자가 예배할 수 있는가입니다.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예배에 대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5:1)
이 말씀에서,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한 것은 곧 예배를 뜻합니다. 예배는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는 광야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절기를 지킬 수 없으니,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스라엘 백성은 종노릇할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할 백성들이었는데, 애굽에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종노릇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의 신분, 즉 바로의 노예로서는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해방받은 자, 즉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아직도 죄의 종노릇하는 자이기 때문에 예배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로의 학정에서 놓임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순서를 알아야겠습니다. 애굽 종살이 중에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고, 광야로 나온 후에야 예배할 수 있는 것처럼, 죄에서 구원받은 자라야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형식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오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자가 예배의 자리에 있어도 참된 예배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등에 내려지는 바로의 채찍과, 억울함과, 고생과, 파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참뜻을 모르고, 예배당에 나오기만 하면 예배가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처음 나온 사람보고도 "예배 드리자" 하고, 또 "예배 보러 가자" 고 하면서 끌고 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합시다. 바로의 채찍 밑에서 무슨 감사가 있어서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위선적인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예배 드릴 자격을 얻었습니까? 혹 구원받기 위해 예배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구원받은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오해를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것을 우리가 아느냐" 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도 이런 분이 계시다면 묻겠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모르면서도 예배 드릴 수 있습니까? 구원의 체험 없이 어떻게 참된 감사가 있겠습니까? 감사가 없이 드리는 예배는 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의 종살이에서는 예배가 없었고, 예배 드릴 장소도 없었습니다. 바로를 떠나야, 곧 사탄과 인연을 끊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며,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광야에 가서 예배하게 해달라고 바로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강퍅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을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출애굽기 8:25)
사탄은 사람을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이 땅에서, 즉 애굽 땅에 그대로 있으면서 예배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소리입니까? 사탄은 이상한 유혹의 방법을 사용하여 광야가 아닌 애굽에서 종교적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으면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바로의 학정 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애굽의 신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구원을 모르면서 예배 드리는 것은 이 세상 신의 밑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가 예배 드린다면 형식을 갖춘 예배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세상 신, 사탄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장려합니다 형식으로 예배 의식을 갖추어 그것으로 만족케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도록 하여, 계속 애굽에 머물러 두고 자기의 노예로 삼고자 하는 사탄의 음흉한 흉계입니다 바로는 절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나, 애굽을 떠나는 것은 허락치 않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8-9)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 중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중생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솟아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구원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와, 감사와, 찬송은 입술뿐이며, 애굽에 머물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애굽에 있으면서 어디서나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하나님만 섬기면 된다고 속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종교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예배가 나와 있는데, 하나는 형 가인의 예배요, 다른 하나는 아우 아벨의 예배입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과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4:3-5)
예배자 여러분이여! 당신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벨의 제사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받지 아니하시는 가인의 제사입니까?
이 두 종류의 제사의 차이는, 하나는 대신 죽은 생명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피 흘린 제사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행위의 결실로 드리는 곡물의 제사, 곧 피 흘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드리는 생명의 제사, 곧 중생한 자의 예배이며, 하나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 곧 신을 섬기는 소질에서 드리는 인간 자연성의 제사, 곧 행위의 예배입니다. 외면적인 형식과 의식은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죄사함 받은 진정한 감사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정성과 헌신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갖추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구원의 체험 없이 드리는 제사는 모두가 가인의 제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애굽에 머물면서 예배하라고 했던 그 사탄은 오늘도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으니, 그것은 중생의 경험 없이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 종교의 예배에서는 쉽사리 위선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이 교인의 권고로 예배당에 나가게 되고, 또 예배당에 나가다 보니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차차로 천당에 간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계속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제반 의식에 익숙하게 되었고, 기도하는 것도 배우고 찬송 부르는 것도 따라서 배웠습니다 성경도 구입해서 가지게 되었고, 6개월 후에는 의젓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외형적으로는 갖출 것을 다 갖추었고 사상적으로도 기독교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인가 자신의 심령 속에 피로써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득한 과정을 애굽에서 탈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에 대한 심각한 고통도,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망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슬며시 기독교인이 됐다고 말한다면 이는 참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의 학정과 채찍에서 해방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배는 애굽의 예배이며, 죄의 종으로 있으면서의 예배이기 때문에 실지로는 죄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의 혼돈된 생활입니다. 예배당에 오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노예로서의 혼돈된 생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 위선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제반 의식에 빠짐없이 참석은 하지만 참된 기쁨과 감사에서가 아니라, 본능과 습성에 따라서 괴로우면서도 천당 갈 욕심에서 부득이 참석하게 되고, 예수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연한 관념뿐, '내가 이렇게 믿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히브리서 11:4)
여러분이 어떤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히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며, 당신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신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증거를 받은 사실이 없으면, 이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증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본능에서 드리는 종교적 제사이며 애굽의 제사이지 참된 예배는 아닙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인지 아닌지' 를 빨리 깨닫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관념도 습관도 의식도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구원의 경험으로 내주 (內住)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것입니다.
- 종교적 예배와 복음적 예배 -
예배에도 종교적인 예배와 복음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이 역시 하늘과 땅의 차이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어떤 자가 예배할 수 있는가입니다.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예배에 대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5:1)
이 말씀에서,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한 것은 곧 예배를 뜻합니다. 예배는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는 광야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절기를 지킬 수 없으니,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스라엘 백성은 종노릇할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할 백성들이었는데, 애굽에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종노릇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의 신분, 즉 바로의 노예로서는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해방받은 자, 즉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아직도 죄의 종노릇하는 자이기 때문에 예배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로의 학정에서 놓임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순서를 알아야겠습니다. 애굽 종살이 중에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고, 광야로 나온 후에야 예배할 수 있는 것처럼, 죄에서 구원받은 자라야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형식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오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자가 예배의 자리에 있어도 참된 예배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등에 내려지는 바로의 채찍과, 억울함과, 고생과, 파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참뜻을 모르고, 예배당에 나오기만 하면 예배가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처음 나온 사람보고도 "예배 드리자" 하고, 또 "예배 보러 가자" 고 하면서 끌고 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합시다. 바로의 채찍 밑에서 무슨 감사가 있어서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위선적인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예배 드릴 자격을 얻었습니까? 혹 구원받기 위해 예배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구원받은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오해를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것을 우리가 아느냐" 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도 이런 분이 계시다면 묻겠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모르면서도 예배 드릴 수 있습니까? 구원의 체험 없이 어떻게 참된 감사가 있겠습니까? 감사가 없이 드리는 예배는 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의 종살이에서는 예배가 없었고, 예배 드릴 장소도 없었습니다. 바로를 떠나야, 곧 사탄과 인연을 끊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며,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광야에 가서 예배하게 해달라고 바로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강퍅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을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출애굽기 8:25)
사탄은 사람을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이 땅에서, 즉 애굽 땅에 그대로 있으면서 예배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소리입니까? 사탄은 이상한 유혹의 방법을 사용하여 광야가 아닌 애굽에서 종교적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으면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바로의 학정 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애굽의 신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구원을 모르면서 예배 드리는 것은 이 세상 신의 밑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가 예배 드린다면 형식을 갖춘 예배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세상 신, 사탄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장려합니다 형식으로 예배 의식을 갖추어 그것으로 만족케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도록 하여, 계속 애굽에 머물러 두고 자기의 노예로 삼고자 하는 사탄의 음흉한 흉계입니다 바로는 절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나, 애굽을 떠나는 것은 허락치 않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8-9)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 중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중생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솟아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구원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와, 감사와, 찬송은 입술뿐이며, 애굽에 머물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애굽에 있으면서 어디서나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하나님만 섬기면 된다고 속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종교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예배가 나와 있는데, 하나는 형 가인의 예배요, 다른 하나는 아우 아벨의 예배입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과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4:3-5)
예배자 여러분이여! 당신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벨의 제사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받지 아니하시는 가인의 제사입니까?
이 두 종류의 제사의 차이는, 하나는 대신 죽은 생명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피 흘린 제사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행위의 결실로 드리는 곡물의 제사, 곧 피 흘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드리는 생명의 제사, 곧 중생한 자의 예배이며, 하나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 곧 신을 섬기는 소질에서 드리는 인간 자연성의 제사, 곧 행위의 예배입니다. 외면적인 형식과 의식은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죄사함 받은 진정한 감사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정성과 헌신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갖추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구원의 체험 없이 드리는 제사는 모두가 가인의 제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애굽에 머물면서 예배하라고 했던 그 사탄은 오늘도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으니, 그것은 중생의 경험 없이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 종교의 예배에서는 쉽사리 위선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이 교인의 권고로 예배당에 나가게 되고, 또 예배당에 나가다 보니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차차로 천당에 간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계속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제반 의식에 익숙하게 되었고, 기도하는 것도 배우고 찬송 부르는 것도 따라서 배웠습니다 성경도 구입해서 가지게 되었고, 6개월 후에는 의젓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외형적으로는 갖출 것을 다 갖추었고 사상적으로도 기독교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인가 자신의 심령 속에 피로써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득한 과정을 애굽에서 탈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에 대한 심각한 고통도,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망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슬며시 기독교인이 됐다고 말한다면 이는 참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의 학정과 채찍에서 해방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배는 애굽의 예배이며, 죄의 종으로 있으면서의 예배이기 때문에 실지로는 죄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의 혼돈된 생활입니다. 예배당에 오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노예로서의 혼돈된 생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 위선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제반 의식에 빠짐없이 참석은 하지만 참된 기쁨과 감사에서가 아니라, 본능과 습성에 따라서 괴로우면서도 천당 갈 욕심에서 부득이 참석하게 되고, 예수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연한 관념뿐, '내가 이렇게 믿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히브리서 11:4)
여러분이 어떤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히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며, 당신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신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증거를 받은 사실이 없으면, 이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증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본능에서 드리는 종교적 제사이며 애굽의 제사이지 참된 예배는 아닙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인지 아닌지' 를 빨리 깨닫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관념도 습관도 의식도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구원의 경험으로 내주 (內住)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