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죄 해결을 위한 종교적인 방법

종교와 복음은 분리되었으며, 종교에서 해방하는 것이 복음인 것을 이제 아셨을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자들이 하나님 표준의 선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모든 행위는 자기를 괴롭힐 뿐, 그 지고 (至高) 하신 하나님의 표준에 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종교에서 죄를 취급하는 길과 복음에서 죄를 취급하는 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인인 것을 깨달은 인간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는데, 곧 종교의 방법으로 죄에 대한 수치를 가리워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7-10)


이 말씀에 보면 그들은 범죄한 후 양심에 부끄러움이 생기고, 육신에 부끄러움이 생겨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낯을 피하여 숨어야 했습니다 여기 문제는 하나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라고 대답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둘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과 수치를 가리울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어떠한 수단과 행위로도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리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심히 헛된 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자기들의 손으로 처음에는 싱싱한 나뭇잎을 따서 치마를 엮었으나 그것이 몇시간이나 가겠습니까? 얼마가지 않아서 그것은 부서지고 찢어져서 곧 그들은 나체로 보이게 되고, 또 다시 해 입었지만, 곧 말라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벗었나이다" 라고 고백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모든 종교와 율법의 그림자이며 비유가 됩니다. 현대의 종교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스스로 의로와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죄를 해결하고 수치를 가려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는 것이나 죄의 수치를 가리우는 것은 종교의 방법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출발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무거운 종교의 멍에 아래로 빠져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종교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어떠한 노력과 정성도 죄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0-23)


이 모든 죄와 악한 것이 속에서 나온다하셨으니 속에 틀림없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죄를 생산해 내는 악한 모체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악한 것이 나올 때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이것을 가리우려고 인간들이 연구하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짜낸 것이 각양의 종교입니다 혹은 윤리 도덕의 방법으로 속에서 나오는 죄들을 막아 보기도 합니다. 고행 (苦行), 난사 (難事) 로써 죄를 없이 해보려고도 하며, 또는 죄의 개념을 다른 견해로 따돌려 놓고 안심하려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죄란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환경이 죄를 낳는 것이며, 환경만 좋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된다"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 환경이 죄를 범케 하는 것이며 죄란 인간의 생각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근본적으로는 죄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제정치 체제 하에서 죄이던 것이 민주정치 체제 하에서는 죄가 안 되는 것이 많으니, 그것은 죄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관념뿐이며 죄는 없는 것이다 해서 죄를 부인함으로써 안도감을 가져 보려고 하는 사상까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으로는 자식을 불태우면서 또는 악한 짐승에게 희생물로 제공하면서, 또는 자신의 몸을 칼로 상하게 하면서 죄를 없이 한다는 무지한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종교의 어떤 행위로도 죄는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죄를 범하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위선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윤리나 도덕의 교훈을 따라 죄를 막으시려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행위로 나타난 죄는 범치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마태복음 5:21-22)


라고 하셨습니다 살인과 노하는 것을 동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동일한 죄의 모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수양이나 교양 등으로 사회악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의 운명을 좀먹는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깡패나 창녀는 어느 의미에서는 솔직합니다. 자신의 죄성을 천하에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잖은 신사인 척, 신성한 인격의 소유자인 척 하는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느 의미에서는 위선자입니다. 

중심에는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종교의 행위로 죄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외부로 나타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것뿐이지, 죄 자체를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필자는 10여 년 전 어떤 잡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후 크게 찔림을 받았던 것을 생각합니다 "창기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 살기 위해서 윤리와 도덕을 팔고 있으니, 그 차이가 무엇이 다르냐" 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목사로서 성경대로 바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양심의 심한 괴로움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글을 읽다가 내 마음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이 창기보다 더 더러운 위선자임을 알았습니다. 거룩한 척하며 존경은 받으나 저 자신이 참으로 위선자임을 알았을 때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리나 도덕이 나쁜 것이 아니며 악한 것이 아니나, 죄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한 사상과 관념을 달리해서 죄를 해결하시려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타락된 인간들 속에서 아무리 해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체념하려는 데서 나온 탄식은 아닙니까? 아니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에 대한 해석과 개념을 달리하고 자신에게 합리화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별 수 없는 죄인이며 범죄자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의 개념을 달리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근본적인 죄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로마서 1:28-29)


모든 불의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마음 속에서 나온 행동은 모두 죄입니다. 죄에 대한 개념을 운운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극악한 죄의 소리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가장 큰소리치는 기독교 종교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이란 종교의 교훈을 가지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합니다. 분명히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어떤 인간들이 고안해 낸 종교 사상보다, 주의보다, 도리보다는 분명히 선하며, 절대적이며, 엄한 명령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 직접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철저히 선하고 절대자만큼 거룩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이 말씀은 율법이 선의 최고의 기준임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 가장 엄하며, 가장 괴로움을 주는 명령이 곧 율법입니다. 사람으로서 이 명령을 지켜가며 살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독교 종교는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 더 괴로움을 주며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기독교 종교의 지도자는 가장 큰 위엄과 세력과 권위로써 신도들에게 군림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억압하기 쉬운 도구는 없습니다. 

물론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사람이 이용할 때는 타인을 자기에게 쉽사리 굴복시킬 수 있으며, 자신은 모든 사람 위에 신성시되고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소위 성직자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기독교 종교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고 하여 그들의 죄의 고백을 듣고 맡아 처리하는 자로 자처하지만, 고백한 사람은 고백을 들은 사람 앞에 약자가 되어 버릴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고해성사를 함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으니 이것 역시 그릇된 종교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부흥회의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곤봉으로 이용하여 많은 심령들을 억압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죄를 위해서 며칠이든지 철야로 기도하고 새벽마다 통회 자복하라고 강요하며 조목조목의 죄를 고백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나, 이것 역시 자신의 죄를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는,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를 해입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괴로와하던 심령이 실컷 울고 난 다음 증인을 내세워 죄를 고했으니 "이제는 됐겠지" 하고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갖기는 하나, "너희 죄가 사해졌다" 는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막연하게 지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필자 자신도 과거에 그렇게 가르쳤고 실천해 보았으나, 참 만족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는 없습니다. 인간이 증인이 된다고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며 또 그러한 일을 원치도 않으십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증인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고, 피흘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 하면서도 무화과나무 잎으로 죄를 가리우고자 하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섞여 들고 있으며, 종교로써 해결하려는 일들이 기독교 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을 그르치고 하나님의 계획을 짓밟으려는 자, 곧 사탄의 방법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로써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죄인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의 노력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자기의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울고 애걸을 해도 자신의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종래에는 자신의 노력이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23)


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죄를 범한 죄인은 심판받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종교적 수단은 헛수고인 줄 아십시오. 종교적인 노력으로는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