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교회의 잘못을 비유로 설명해 주는 여러 가지 실례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베드로전서 2:4-5)라는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돌 대신 벽 돌을 사용해서 쌓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했던 곳은 바벨탑을 쌓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벨탑을 쌓는 그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훗날 그의 후손을 통하여 지어질 성전을 내다보시고 미리 준비케 하기 위하여 그를 불러낸 것입니다. 성전이 지어질 곳은 바벨론이 아니라 가나안 땅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 바벨론과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의 세상과 완성된 영원한 교회, 즉 영원한 성전인 새 예루살렘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이것은 완성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은 교회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나 같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은 멸망받을 세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요한계시록 18 :2-3)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바벨론은 음녀의 상징으로서, 만국이 바벨론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을 받아 멸망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을 '음녀', '땅의 음녀들',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고 했으며, 음행의 포도주로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을 취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7:1-5)여성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이 바벨론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타락을 의미하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바벨론에서 팔고 있는 상품 중에는 사람의 영혼도 있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8:13)사람의 영혼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할 십자가의 진리가 왜곡된 채 어떤 이권이나 교권 운동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세상이 포도주에 취했다는 말은 적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사회구원운동에 십자가의 진리가 악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참남편을 버리고 타락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다른 인격체, 곧 이 세상을 지배할 한 인물을 섬기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인물은 붉은 빛 짐승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요한계시록 17:3)
그런데 이 바벨론은 바로 창세기 11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바벨 탑의 주인 되는 인물은 구스 계통에서 출생한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후 차츰 옮겨간 곳은 유브라데 강 유역에 있는 '시날' 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후에 바벨론이 되었는데, 현재는 이라크 땅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세상에 흩어짐을 면키 위하여 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계는 그때처럼 하나로 뭉치는 운동을 펴나가고 있는데, 마침내는 '세계 정부' 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을 때 돌 대신 돌의 모조품인 벽돌로 쌓아 올렸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을 머릿돌로 한 산 돌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인간 두뇌의 산물인 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생명들로 형성되는 무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벽돌은 산 돌, 즉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을 모방한 대용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거듭나는 체험 없이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활발하게 활동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직에도 등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의 수완과 지혜, 지식, 조직 등으로 성령을 대신한 것입니다. 산 사람끼리는 손을 잡으면 연결되지만 죽은 사람을 서로 연결하려면 밧줄로 묶어야 됩니다. 산 돌과 산 돌의 연결은 생명에 의한 연결입니다. 역청을 섞어 벽돌을 쌓은 것은 죽은 것이며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탑을 쌓으면서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창세기 11:4)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은 간 곳 없고 오직 사람의 영광만을 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것인지는 스스로 양심 속에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반드시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희생시켜 낮추는 일에 있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벽돌로 쌓은 그 탑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탑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지으실 곳으로 떠나게 하셨는데,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이 바로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성전을 지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그 선민의 역사를 통해 현실 속에 잠깐씩 나타나기도 했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은 아브라함의 계통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육신과 성령의 전인 교회와 영원한 새 예루살렘인 천국의 완성이 그것이니, 천국은 이 세상에서 거듭나서 산 돌이 된 사람들의 연합체인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이 사실을 참으로 믿고 그 성전 안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장막을 지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바벨론의 역사
그러나 반면, 인간 역사의 다른 한편에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마귀가 하나님의 일에 끈질기게 도전하면서 자기의 거처를 지으려고 일을 꾸며온 것도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사야 14:12-14)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중 계명성(루시퍼)이라는 천사장이 타락한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땅에 떨어져 사단이 되었고, 그 군졸들은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보좌를 높이 정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며, 집회의 산 위에 앉아서 경배받으면서 사는 것으로 자신의 처소를 군중 속에서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처소를 이루어 가시는 인류 역사의 과정에 끈질기게 도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귀신의 처소인 바벨론을 건설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그 바벨론도 무너져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요한계시록 18:2)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8:10)
최후에 무너지고 심판받는 곳은 귀신의 처소와 더러운 영과 더러운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새는 마귀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이는 교회라는 나무가 자라면 마귀가 그곳을 자기의 처소로 삼고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으시고 목적을 달성해 가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진리를 전하던 교회들도 오래지 않아 변질되고 부패했으며 그때마다 귀신의 처소가 되곤 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참된 성전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전은 다른 것으로, 그 성전, 그 교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사실입니다.
가인의 성, 에녹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마귀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의 계획을 실천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을 타락시켜 자기의 세력하에 두고 그 후손되는 인간들을 통해서 경배받으려는 계획을 세웠으니, 곧 인간이 죄를 짓고 죽이며 서로 미워하도록 만들어놓고는 기뻐하고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저주를 받고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놋 땅에 세운 에녹이라는 성이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4:16-17)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살기에 편하고 아름다운 에덴을 잃고 쫓겨 나갔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은 하나님의 무서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세기 4:10-12)
땅은 피를 흘려 범죄한 영혼이 편히 살 수 없는 저주받은 곳이 되었습니다. 아우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계속 소리쳐 호소한다고 하셨고, 땅은 아우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받은 장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참으로 무서운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가인에게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15)
그 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 없는 곳을 택하여 자기의 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우의 핏소리가 계속 들려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에덴의 동편 놋(유리한다는 뜻)이라는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에덴을 잃은 인생은 안식처를 잃은 인생이요 유리하는 인생입니다. 또한 피 흘린 인생이요, 양심 속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아우의 핏소리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 핏소리는 따라오기 때문에 이 땅 위의 어느 곳에도 안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피가 흘려진 곳이며 무덤입니다. 아담과 그에 속한 자는 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아우이며 아벨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형인 인생은 아우인 예수를 죽여 피를 흘렸습니다. 이 땅은 지금도 그 핏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곳입니다.
가인이 그 핏소리를 피해 도망쳐서 쌓은 성은 귀신이 거하는 첫 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안식을 잃은 인생, 유리하는 인생이 하나님 없는 곳에서 자기의 살 터전을 구축했으니, 그곳은 마귀가 거하는 곳이며 마귀가 기뻐하며 경배받는 성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4장 하반부는 가인의 후손이 에녹 성에서 번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유축 농업과 악기, 인생들이 즐기는 예술, 전쟁에 쓰이는 날카로운 기계 개발 등 각종 분야가 신속히 발달했습니다.
가인은 아우의 핏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피하여 안식할 땅을 찾았으나 아마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양심 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핏소리가 고함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잊어보려는 노력으로 여러 가지 연구 끝에 악기를 만들어 마음을 달래고 흥을 돋워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 흘린 땅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현대의 바벨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생들에게는 양심에 평안이 없고 가는 곳마다 허전함과 고독과 갈등만이 가득 차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 저렇게 하면 즐거운 것이다⋯' 하고. 그리하여 고도로 문명을 발달시켜 놓고 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현대의 물질과 기계 문명 속에서 인생의 마음을 속여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은 마귀의 처소가 되어갑니다. 가인이 쌓아 올린 첫 성 에녹같이 아우의 피가 흘려진 땅에서 온갖 쾌락을 즐기며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 세계가 아닙니까?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으며 참된 삶의 터전도 아닌 이 땅에서 평화, 평화를 외치면서 속이는 것은 마귀의 소리이니 결국은 마귀의 처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바로 노아의 홍수가 나기 전에 발달했던 문명의 주인들이었습니다. 또 네피림이라는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이 사람의 딸들(가인의 후손)을 취하여 그 사이에서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노아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에 번창했고, 아벨 대신 태어난 셋의 후예들은 노아의 가정을 제외한 모두가 그 영향을 받고 살다가 전부 멸망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입니다. 이는 곧 현대 문명을 낳은 이 세상이 장차 멸망될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멸망했으나 마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후손은 그곳에 바벨 탑을 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역사를 계획하셨으나 바벨론 왕은 바벨탑을 복원하여 웅장한 도성을 건설하고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이방의 시대가 시작되어, 마귀의 역사는 페르샤, 헬라, 로마 시대로 이어지며 계속되다가 마침내 로마와 유대인의 연합 세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일단 마귀가 성공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마귀보다 지혜로우셔서 오히려 그것을 마귀를 멸망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곧 아담 앞에서 마귀에게 예언하신 대로 뱀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으나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최후의 결전만이 남아 있으며, 그 운명의 시간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최후로 로마의 후예인 적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에 거짓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3년 반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바벨론(적그리스도 왕국)은 일시에 멸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 마귀가 자기의 처소를 어떻게 구축해 오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귀는 눈부신 현대 문명과 각종 사물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켜 버림으로써 인생들이 정신을 잃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자기의 집을 지어 왔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꾀로써 하나님의 일을 변질시키고 파괴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전당 속에 들어앉아 경배받아 오고 있는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마귀에게 속을 만큼 그렇게 약하고 어리석은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마귀의 활동을 이용하여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단순히 그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2000년 간의 이방 교회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말세에 되어질 예언의 말씀이며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최후에 대한 일이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이방교회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후 최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환난 중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먼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이방 교회의 표상으로 등장시켜 각 시대의 교회상을 예언하셨고, 교회가 휴거된 후 이 세상에 펼쳐질 환난의 양상과 그 환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돌이킬 것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25-26)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는 때가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완악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가 이방 교회가 완성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숫자를 결정하시고 그 수가 충만히 채워지는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의 기간인 것입니다.
일곱 절기
레위기 23장에 보면 일곱 절기가 나오는데 그 중 넷째 절기가 오순절이며, 다섯째는 나팔절, 여섯째는 속죄절, 마지막 일곱째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오순절은 성령이 내리신 절기로서 나팔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기간이며, 나팔절은 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모으는 절기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민족이 서서히 회복되고는 있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세계적인 대사건이 있은 후에 자기네 나라로 대거 복귀하게 될 터인데 그것이 곧 나팔절이 될 것이며, 그 나팔절에 교회가 들림받음으로써 오순절의 절기는 끝이 날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 속에는 이러한 휴거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절기는 속죄절인데,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죄에 대하여 환난 중에 속죄받는 일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14만 4천 명이 인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7장)
초막절은 주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이 성립된 이후, 완전한 평화가 깃들게 되었을 때 행하는 절기로서, 곧 광야의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기간과 유대인의 기간은 구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에 그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해 참여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로마서 3:29)
그래서 지금은 이방의 때요,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시대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할 수 있는 기간이며 성령의 기간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그러나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찾는 자, 마음이 가난하고 목마른 자라야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도 이 세상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성령이 떠나시는 날이 옵니다. 그때 세상은 양심의 빛이 없어져 캄캄하게 되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통치하게 됩니다. 성령이 떠나실 때에는 교회도 함께 떠납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령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복음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참성전의 그림자였던 법궤를 모시기 위한 성전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주님의 육체가 성전이었으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이 계시는 교회가 성전입니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 각 시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3-8)
이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재림이 임박했다고 해서 마음이 동요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전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경배를 받으며 포악한 통치를 하게 된 후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저를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위의 말씀은 이미 옛날부터 불법의 비밀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1서 4:3)
불법의 비밀은 곧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영과 적그리스도 자체는 다릅니다. 적그리스도는 개별적인 인격체로서, 그가 이 세상에 나타나면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성령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막는 자', 즉 성령이 세상에 계시기 때문에 불법의 비밀, 곧 적그리스도의 영은 활동하고 있으나 적 그리스도 자체는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나타나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는 동안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성령이 옮겨가시면 바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이것이 교회의 휴거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 중에는 여기에 참례할 것이 약속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들은 역사 속에 시대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교회를 예언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입니다.
일곱 교회의 시대
일곱 교회가 있었던 터키 지방은 회교국으로서 현재는 교회가 별로 없는 곳입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인데,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로서, 주후 100년 경까지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둘째는 서머나 교회로 심한 환난 속에서도 잘 견디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교회입니다. 로마 황제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박해 시대에 있었던 교회로서 추후 306년경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돌이키기 전까지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금도 로마 교외에 가면 옛날에 로마 성을 쌓기 위하여 흙을 파내어 간 땅굴이 있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그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이라고 부르는 그곳을 생활의 거처로, 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장지로 삼아 200여 년간이나 대를 이어 숨어 살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사자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는데, 그 수는 엄청났습니다.
셋째는 버가모 교회인데, 버가모란 말은 '결혼' 이란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결혼해서 세속화되는 시대입니다. 마귀는 로마의 세력을 이용해서 복음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로마의 세력에 의해서 분봉왕이 된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고, 로마가 파송한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으며, 로마의 황제들은 네로를 선두로 철저히 기독교 복음 말살 정책을 썼으나 그 명맥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연극을 해서 기독교 안에 들어온 다음 복음을 송두리째 변질시키고 완전히 기독교를 우상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소위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이었습니다. 황제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 모든 신하와 귀족들이 앞을 다투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들에게도 강제로 세례를 주니 로마는 갑자기 기독교 세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계획으로서 복음의 본질이 빠져버린 외형적인 팽창이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세속화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심한 박해와 핍박이 가해질수록 더욱 강하게 생명이 나타나며, 무사하고 안이한 중에서는 쉽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류 사회나 권력층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부터 차츰 기독교의 횡포가 시작되었고, 승려급들이 특권을 향유하기에 이르자 참된 복음의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넷째는 두아디라인데, 그 뜻은 '제사' 입니다. 중세기 암흑 시대인 추후 1500년 경까지의 교회로 천주교의 전성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버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교직의 신성이 주장되고 교황이 황제의 위에 군림하여 교황의 권한으로 황제를 임명하고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재물이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되며 종교인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온 세 교회는 그 자취가 오늘까지 남아 있지 않으나 넷째의 두아디라 교회부터는 그 교회의 모습이 주님 오실 때까지 남아 있게 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요한계시록 2:22-23)
여기서 말하는 '큰 환난' 은 앞으로 오는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대를 가리키는데, 교회는 환난 전에 이미 들림받아 버리고, 이것은 그 후에 되어질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다 들림받고 없는 환난 가운데 던져진다고 했으니, 이는 곧 '구원을 알지 못한다' 는 뜻이 됩니다.
다섯째는 사데 교회입니다. 사데는 '남은 자' 란 뜻입니다. 온통 암흑 시대이며 교회가 마귀의 소굴이 되다시피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생명을 이어 오셨습니다. '사데' 는 그 암흑 속에 복음의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여기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데 시대는 종교 개혁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떻게 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잊혀진 채 제도적이고 외부적인 조건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단행한 루터나 칼빈, 낙스, 기타 여러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 거듭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게 되면 눈이 열리고 성경이 알아지면서 참과 거짓이 구별됩니다. 루터는 자기의 교구 내에서 속죄권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어 걸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높은 탑 속에서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용감히 싸울 때 그에게는 파문의 위험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지어 부르면서 그의 안에 약동하고 있는 생명의 힘에 의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사데 교회도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1-3)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의 교회의 특색은 그것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고 부탁하셨고 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고린도전서 13:8)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중심의 투쟁으로 분열되어 성령의 역사는 중지되고 교파만 앞세우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현재의 교파들은 사데 교회의 성격이 남은, 사데 교회의 한 지류(支流)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도적같이 맞을 위험이 있습니다. 주님을 도적같이 맞는다는 것은 들림받지 못하는, 즉 대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4-5)
여기에. 보면,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책망하셨으나 사데 교회 전체가 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옷을 더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가 얼마쯤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이 빌라델비아 교회로 연결이 됩니다.
여섯째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는 '문이 열렸다' 는 뜻으로서,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힘차게 복음이 전해진 시대입니다.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려 단시일 내에 세계적으로 크게 역사한 시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에 시작된 부흥 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죠지 뮬러, 모라비안 교도, 청교도 운동, 미국에서는 디엘 무디, 찰스 피니, 프레이나드, 독일에서는 진젠돌프 백작 등 수많은 복음의 역군들이 활약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듭나는 확실한 경험을 하고 나서 전도자로 출발했습니다. 아프리카나 인도, 기타의 미개 지역 전도도 그때를 계기로 전개되어서 범세계적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요한계시록 3:10)
이것은 앞으로 오는 대환난을 당하지 않고 그 전에 들림받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통치하는 기간은 환난의 때, 시험의 때입니다. 그때는 이마나 손에 666의 부호를 인쳐서 그것에 의해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666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모두 컴퓨터에 등록시켜 컴퓨터로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통제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표가 없으면 물건 하나도 살 수 없고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는 시대입니다. 거짓된 평화를 앞세우고 나타나는 적그리스도는 세상을 크게 괴롭게 하는 마귀의 사자입니다. 이때 특히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 크게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곧 '야곱의 환난의 때' 인 것입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해도 죽음이 피하기 때문에 죽을 수조차 없는 저주의 시대입니다.(요한계시록 9:6)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속해 있는 신자, 곧 거듭난 사람들은 그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휴거됩니다. 육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 곧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은 완전한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므로 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요한계시록 3:10)
이 말씀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했고 현재도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대로 교회가 성립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시련을 겪지 않은 때는 없었으며 참된 복음, 곧 구원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신앙을 지켜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 신앙을 지킨 교회에게는 주님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일곱째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최후의 교회로서 바로 현대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색은 칭찬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빌라델비아의 생명은 그 열기가 식어 버린 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시대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졌으나, 라오디게아 시대에는 그 복음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교회의 중심이 복음에서 물질로 바뀌었습니다. 주께서 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요한계시록 3:17)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며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과연 오늘날은 교회의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많은 교인, 많은 재산, 웅장한 예배당 등 물질적인 풍요를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생명이 없습니다. '벌거벗었다' 고 하셨는데, 이는 '구원의 옷' 과 '의의 겉옷' (이사야 61:10)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양심에 의의 옷을 입지 않아서 부끄러움이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가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주님 오실 때에 구원의 옷을 입고 있어야 부끄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었다' 고도 하셨는데 이것 역시 영혼에 빛이 없는, 구원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놀라운 생명의 시대인 빌라델비아 시대를 이은 라오디게아 시대는 언제 잃었는지 말씀을 잃고 사데 교회처럼 교파의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에도 지극히 미약하지만 빌라델비아처럼 생명이 있어서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외의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책망만 받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부요한 물질에 대한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교회의 변질은 분명한 사실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감추어짐으로써 교회가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내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체험해야만 말씀대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교회의 잘못을 비유로 설명해 주는 여러 가지 실례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베드로전서 2:4-5)라는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돌 대신 벽 돌을 사용해서 쌓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했던 곳은 바벨탑을 쌓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벨탑을 쌓는 그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훗날 그의 후손을 통하여 지어질 성전을 내다보시고 미리 준비케 하기 위하여 그를 불러낸 것입니다. 성전이 지어질 곳은 바벨론이 아니라 가나안 땅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 바벨론과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의 세상과 완성된 영원한 교회, 즉 영원한 성전인 새 예루살렘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이것은 완성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은 교회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나 같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은 멸망받을 세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요한계시록 18 :2-3)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바벨론은 음녀의 상징으로서, 만국이 바벨론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을 받아 멸망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을 '음녀', '땅의 음녀들',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고 했으며, 음행의 포도주로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을 취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7:1-5)여성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이 바벨론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타락을 의미하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바벨론에서 팔고 있는 상품 중에는 사람의 영혼도 있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8:13)사람의 영혼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할 십자가의 진리가 왜곡된 채 어떤 이권이나 교권 운동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세상이 포도주에 취했다는 말은 적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사회구원운동에 십자가의 진리가 악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참남편을 버리고 타락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다른 인격체, 곧 이 세상을 지배할 한 인물을 섬기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인물은 붉은 빛 짐승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요한계시록 17:3)
그런데 이 바벨론은 바로 창세기 11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바벨 탑의 주인 되는 인물은 구스 계통에서 출생한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후 차츰 옮겨간 곳은 유브라데 강 유역에 있는 '시날' 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후에 바벨론이 되었는데, 현재는 이라크 땅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세상에 흩어짐을 면키 위하여 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계는 그때처럼 하나로 뭉치는 운동을 펴나가고 있는데, 마침내는 '세계 정부' 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을 때 돌 대신 돌의 모조품인 벽돌로 쌓아 올렸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을 머릿돌로 한 산 돌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인간 두뇌의 산물인 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생명들로 형성되는 무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벽돌은 산 돌, 즉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을 모방한 대용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거듭나는 체험 없이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활발하게 활동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직에도 등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의 수완과 지혜, 지식, 조직 등으로 성령을 대신한 것입니다. 산 사람끼리는 손을 잡으면 연결되지만 죽은 사람을 서로 연결하려면 밧줄로 묶어야 됩니다. 산 돌과 산 돌의 연결은 생명에 의한 연결입니다. 역청을 섞어 벽돌을 쌓은 것은 죽은 것이며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탑을 쌓으면서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창세기 11:4)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은 간 곳 없고 오직 사람의 영광만을 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것인지는 스스로 양심 속에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반드시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희생시켜 낮추는 일에 있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벽돌로 쌓은 그 탑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탑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지으실 곳으로 떠나게 하셨는데,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이 바로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성전을 지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그 선민의 역사를 통해 현실 속에 잠깐씩 나타나기도 했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은 아브라함의 계통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육신과 성령의 전인 교회와 영원한 새 예루살렘인 천국의 완성이 그것이니, 천국은 이 세상에서 거듭나서 산 돌이 된 사람들의 연합체인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이 사실을 참으로 믿고 그 성전 안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장막을 지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바벨론의 역사
그러나 반면, 인간 역사의 다른 한편에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마귀가 하나님의 일에 끈질기게 도전하면서 자기의 거처를 지으려고 일을 꾸며온 것도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사야 14:12-14)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중 계명성(루시퍼)이라는 천사장이 타락한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땅에 떨어져 사단이 되었고, 그 군졸들은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보좌를 높이 정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며, 집회의 산 위에 앉아서 경배받으면서 사는 것으로 자신의 처소를 군중 속에서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처소를 이루어 가시는 인류 역사의 과정에 끈질기게 도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귀신의 처소인 바벨론을 건설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그 바벨론도 무너져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요한계시록 18:2)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8:10)
최후에 무너지고 심판받는 곳은 귀신의 처소와 더러운 영과 더러운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새는 마귀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이는 교회라는 나무가 자라면 마귀가 그곳을 자기의 처소로 삼고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으시고 목적을 달성해 가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진리를 전하던 교회들도 오래지 않아 변질되고 부패했으며 그때마다 귀신의 처소가 되곤 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참된 성전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전은 다른 것으로, 그 성전, 그 교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사실입니다.
가인의 성, 에녹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마귀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의 계획을 실천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을 타락시켜 자기의 세력하에 두고 그 후손되는 인간들을 통해서 경배받으려는 계획을 세웠으니, 곧 인간이 죄를 짓고 죽이며 서로 미워하도록 만들어놓고는 기뻐하고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저주를 받고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놋 땅에 세운 에녹이라는 성이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4:16-17)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살기에 편하고 아름다운 에덴을 잃고 쫓겨 나갔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은 하나님의 무서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세기 4:10-12)
땅은 피를 흘려 범죄한 영혼이 편히 살 수 없는 저주받은 곳이 되었습니다. 아우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계속 소리쳐 호소한다고 하셨고, 땅은 아우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받은 장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참으로 무서운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가인에게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15)
그 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 없는 곳을 택하여 자기의 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우의 핏소리가 계속 들려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에덴의 동편 놋(유리한다는 뜻)이라는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에덴을 잃은 인생은 안식처를 잃은 인생이요 유리하는 인생입니다. 또한 피 흘린 인생이요, 양심 속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아우의 핏소리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 핏소리는 따라오기 때문에 이 땅 위의 어느 곳에도 안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피가 흘려진 곳이며 무덤입니다. 아담과 그에 속한 자는 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아우이며 아벨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형인 인생은 아우인 예수를 죽여 피를 흘렸습니다. 이 땅은 지금도 그 핏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곳입니다.
가인이 그 핏소리를 피해 도망쳐서 쌓은 성은 귀신이 거하는 첫 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안식을 잃은 인생, 유리하는 인생이 하나님 없는 곳에서 자기의 살 터전을 구축했으니, 그곳은 마귀가 거하는 곳이며 마귀가 기뻐하며 경배받는 성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4장 하반부는 가인의 후손이 에녹 성에서 번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유축 농업과 악기, 인생들이 즐기는 예술, 전쟁에 쓰이는 날카로운 기계 개발 등 각종 분야가 신속히 발달했습니다.
가인은 아우의 핏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피하여 안식할 땅을 찾았으나 아마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양심 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핏소리가 고함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잊어보려는 노력으로 여러 가지 연구 끝에 악기를 만들어 마음을 달래고 흥을 돋워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 흘린 땅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현대의 바벨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생들에게는 양심에 평안이 없고 가는 곳마다 허전함과 고독과 갈등만이 가득 차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 저렇게 하면 즐거운 것이다⋯' 하고. 그리하여 고도로 문명을 발달시켜 놓고 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현대의 물질과 기계 문명 속에서 인생의 마음을 속여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은 마귀의 처소가 되어갑니다. 가인이 쌓아 올린 첫 성 에녹같이 아우의 피가 흘려진 땅에서 온갖 쾌락을 즐기며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 세계가 아닙니까?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으며 참된 삶의 터전도 아닌 이 땅에서 평화, 평화를 외치면서 속이는 것은 마귀의 소리이니 결국은 마귀의 처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바로 노아의 홍수가 나기 전에 발달했던 문명의 주인들이었습니다. 또 네피림이라는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이 사람의 딸들(가인의 후손)을 취하여 그 사이에서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노아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에 번창했고, 아벨 대신 태어난 셋의 후예들은 노아의 가정을 제외한 모두가 그 영향을 받고 살다가 전부 멸망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입니다. 이는 곧 현대 문명을 낳은 이 세상이 장차 멸망될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멸망했으나 마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후손은 그곳에 바벨 탑을 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역사를 계획하셨으나 바벨론 왕은 바벨탑을 복원하여 웅장한 도성을 건설하고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이방의 시대가 시작되어, 마귀의 역사는 페르샤, 헬라, 로마 시대로 이어지며 계속되다가 마침내 로마와 유대인의 연합 세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일단 마귀가 성공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마귀보다 지혜로우셔서 오히려 그것을 마귀를 멸망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곧 아담 앞에서 마귀에게 예언하신 대로 뱀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으나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최후의 결전만이 남아 있으며, 그 운명의 시간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최후로 로마의 후예인 적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에 거짓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3년 반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바벨론(적그리스도 왕국)은 일시에 멸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 마귀가 자기의 처소를 어떻게 구축해 오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귀는 눈부신 현대 문명과 각종 사물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켜 버림으로써 인생들이 정신을 잃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자기의 집을 지어 왔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꾀로써 하나님의 일을 변질시키고 파괴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전당 속에 들어앉아 경배받아 오고 있는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마귀에게 속을 만큼 그렇게 약하고 어리석은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마귀의 활동을 이용하여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단순히 그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2000년 간의 이방 교회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말세에 되어질 예언의 말씀이며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최후에 대한 일이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이방교회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후 최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환난 중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먼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이방 교회의 표상으로 등장시켜 각 시대의 교회상을 예언하셨고, 교회가 휴거된 후 이 세상에 펼쳐질 환난의 양상과 그 환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돌이킬 것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25-26)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는 때가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완악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가 이방 교회가 완성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숫자를 결정하시고 그 수가 충만히 채워지는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의 기간인 것입니다.
일곱 절기
레위기 23장에 보면 일곱 절기가 나오는데 그 중 넷째 절기가 오순절이며, 다섯째는 나팔절, 여섯째는 속죄절, 마지막 일곱째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오순절은 성령이 내리신 절기로서 나팔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기간이며, 나팔절은 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모으는 절기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민족이 서서히 회복되고는 있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세계적인 대사건이 있은 후에 자기네 나라로 대거 복귀하게 될 터인데 그것이 곧 나팔절이 될 것이며, 그 나팔절에 교회가 들림받음으로써 오순절의 절기는 끝이 날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 속에는 이러한 휴거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절기는 속죄절인데,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죄에 대하여 환난 중에 속죄받는 일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14만 4천 명이 인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7장)
초막절은 주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이 성립된 이후, 완전한 평화가 깃들게 되었을 때 행하는 절기로서, 곧 광야의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기간과 유대인의 기간은 구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에 그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해 참여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로마서 3:29)
그래서 지금은 이방의 때요,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시대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할 수 있는 기간이며 성령의 기간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그러나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찾는 자, 마음이 가난하고 목마른 자라야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도 이 세상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성령이 떠나시는 날이 옵니다. 그때 세상은 양심의 빛이 없어져 캄캄하게 되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통치하게 됩니다. 성령이 떠나실 때에는 교회도 함께 떠납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령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복음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참성전의 그림자였던 법궤를 모시기 위한 성전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주님의 육체가 성전이었으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이 계시는 교회가 성전입니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 각 시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3-8)
이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재림이 임박했다고 해서 마음이 동요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전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경배를 받으며 포악한 통치를 하게 된 후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저를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위의 말씀은 이미 옛날부터 불법의 비밀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1서 4:3)
불법의 비밀은 곧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영과 적그리스도 자체는 다릅니다. 적그리스도는 개별적인 인격체로서, 그가 이 세상에 나타나면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성령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막는 자', 즉 성령이 세상에 계시기 때문에 불법의 비밀, 곧 적그리스도의 영은 활동하고 있으나 적 그리스도 자체는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나타나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는 동안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성령이 옮겨가시면 바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이것이 교회의 휴거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 중에는 여기에 참례할 것이 약속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들은 역사 속에 시대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교회를 예언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입니다.
일곱 교회의 시대
일곱 교회가 있었던 터키 지방은 회교국으로서 현재는 교회가 별로 없는 곳입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인데,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로서, 주후 100년 경까지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둘째는 서머나 교회로 심한 환난 속에서도 잘 견디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교회입니다. 로마 황제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박해 시대에 있었던 교회로서 추후 306년경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돌이키기 전까지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금도 로마 교외에 가면 옛날에 로마 성을 쌓기 위하여 흙을 파내어 간 땅굴이 있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그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이라고 부르는 그곳을 생활의 거처로, 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장지로 삼아 200여 년간이나 대를 이어 숨어 살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사자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는데, 그 수는 엄청났습니다.
셋째는 버가모 교회인데, 버가모란 말은 '결혼' 이란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결혼해서 세속화되는 시대입니다. 마귀는 로마의 세력을 이용해서 복음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로마의 세력에 의해서 분봉왕이 된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고, 로마가 파송한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으며, 로마의 황제들은 네로를 선두로 철저히 기독교 복음 말살 정책을 썼으나 그 명맥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연극을 해서 기독교 안에 들어온 다음 복음을 송두리째 변질시키고 완전히 기독교를 우상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소위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이었습니다. 황제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 모든 신하와 귀족들이 앞을 다투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들에게도 강제로 세례를 주니 로마는 갑자기 기독교 세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계획으로서 복음의 본질이 빠져버린 외형적인 팽창이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세속화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심한 박해와 핍박이 가해질수록 더욱 강하게 생명이 나타나며, 무사하고 안이한 중에서는 쉽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류 사회나 권력층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부터 차츰 기독교의 횡포가 시작되었고, 승려급들이 특권을 향유하기에 이르자 참된 복음의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넷째는 두아디라인데, 그 뜻은 '제사' 입니다. 중세기 암흑 시대인 추후 1500년 경까지의 교회로 천주교의 전성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버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교직의 신성이 주장되고 교황이 황제의 위에 군림하여 교황의 권한으로 황제를 임명하고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재물이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되며 종교인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온 세 교회는 그 자취가 오늘까지 남아 있지 않으나 넷째의 두아디라 교회부터는 그 교회의 모습이 주님 오실 때까지 남아 있게 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요한계시록 2:22-23)
여기서 말하는 '큰 환난' 은 앞으로 오는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대를 가리키는데, 교회는 환난 전에 이미 들림받아 버리고, 이것은 그 후에 되어질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다 들림받고 없는 환난 가운데 던져진다고 했으니, 이는 곧 '구원을 알지 못한다' 는 뜻이 됩니다.
다섯째는 사데 교회입니다. 사데는 '남은 자' 란 뜻입니다. 온통 암흑 시대이며 교회가 마귀의 소굴이 되다시피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생명을 이어 오셨습니다. '사데' 는 그 암흑 속에 복음의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여기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데 시대는 종교 개혁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떻게 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잊혀진 채 제도적이고 외부적인 조건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단행한 루터나 칼빈, 낙스, 기타 여러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 거듭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게 되면 눈이 열리고 성경이 알아지면서 참과 거짓이 구별됩니다. 루터는 자기의 교구 내에서 속죄권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어 걸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높은 탑 속에서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용감히 싸울 때 그에게는 파문의 위험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지어 부르면서 그의 안에 약동하고 있는 생명의 힘에 의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사데 교회도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1-3)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의 교회의 특색은 그것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고 부탁하셨고 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고린도전서 13:8)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중심의 투쟁으로 분열되어 성령의 역사는 중지되고 교파만 앞세우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현재의 교파들은 사데 교회의 성격이 남은, 사데 교회의 한 지류(支流)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도적같이 맞을 위험이 있습니다. 주님을 도적같이 맞는다는 것은 들림받지 못하는, 즉 대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4-5)
여기에. 보면,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책망하셨으나 사데 교회 전체가 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옷을 더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가 얼마쯤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이 빌라델비아 교회로 연결이 됩니다.
여섯째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는 '문이 열렸다' 는 뜻으로서,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힘차게 복음이 전해진 시대입니다.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려 단시일 내에 세계적으로 크게 역사한 시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에 시작된 부흥 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죠지 뮬러, 모라비안 교도, 청교도 운동, 미국에서는 디엘 무디, 찰스 피니, 프레이나드, 독일에서는 진젠돌프 백작 등 수많은 복음의 역군들이 활약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듭나는 확실한 경험을 하고 나서 전도자로 출발했습니다. 아프리카나 인도, 기타의 미개 지역 전도도 그때를 계기로 전개되어서 범세계적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요한계시록 3:10)
이것은 앞으로 오는 대환난을 당하지 않고 그 전에 들림받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통치하는 기간은 환난의 때, 시험의 때입니다. 그때는 이마나 손에 666의 부호를 인쳐서 그것에 의해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666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모두 컴퓨터에 등록시켜 컴퓨터로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통제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표가 없으면 물건 하나도 살 수 없고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는 시대입니다. 거짓된 평화를 앞세우고 나타나는 적그리스도는 세상을 크게 괴롭게 하는 마귀의 사자입니다. 이때 특히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 크게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곧 '야곱의 환난의 때' 인 것입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해도 죽음이 피하기 때문에 죽을 수조차 없는 저주의 시대입니다.(요한계시록 9:6)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속해 있는 신자, 곧 거듭난 사람들은 그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휴거됩니다. 육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 곧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은 완전한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므로 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요한계시록 3:10)
이 말씀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했고 현재도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대로 교회가 성립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시련을 겪지 않은 때는 없었으며 참된 복음, 곧 구원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신앙을 지켜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 신앙을 지킨 교회에게는 주님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일곱째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최후의 교회로서 바로 현대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색은 칭찬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빌라델비아의 생명은 그 열기가 식어 버린 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시대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졌으나, 라오디게아 시대에는 그 복음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교회의 중심이 복음에서 물질로 바뀌었습니다. 주께서 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요한계시록 3:17)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며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과연 오늘날은 교회의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많은 교인, 많은 재산, 웅장한 예배당 등 물질적인 풍요를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생명이 없습니다. '벌거벗었다' 고 하셨는데, 이는 '구원의 옷' 과 '의의 겉옷' (이사야 61:10)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양심에 의의 옷을 입지 않아서 부끄러움이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가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주님 오실 때에 구원의 옷을 입고 있어야 부끄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었다' 고도 하셨는데 이것 역시 영혼에 빛이 없는, 구원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놀라운 생명의 시대인 빌라델비아 시대를 이은 라오디게아 시대는 언제 잃었는지 말씀을 잃고 사데 교회처럼 교파의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에도 지극히 미약하지만 빌라델비아처럼 생명이 있어서 시험의 때를 면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외의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책망만 받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부요한 물질에 대한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교회의 변질은 분명한 사실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감추어짐으로써 교회가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내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체험해야만 말씀대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