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성경 읽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부터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19-26)
율법을 완성시킨 하나님
이제 막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활이 성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은 갓난아기로 태어난 것이며 그 다음에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라야 하는 데 어떻게 하면 자라는지 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 시간은 주로 그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집회에 참여하셨을 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 부분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열심으로 기도하라고 하면서 새벽기도 같은 것을 강조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런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는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 어떤 사람이 기도를 참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알면 이해가 됩니다. 기도는 함부로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츰 그런 문제들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로마서 3장을 읽었는데 이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을 기초로 해서 율법에서 어떻게 풀려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율법 지키는 생활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은혜 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에서 잘 믿는다고 하는 교파일수록 율법을 강하게 지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스스로 가장 잘 믿는다고 말하는 고려파 같은 데서는 안식일을 굉장히 엄격하게 지킵니다. 안식일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안식일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날 한번 상세하게 성경공부를 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율법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로마서 3장 19절부터 20절을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바로 심판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심판하실 때에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를 심판하시는 겁니다. 여기 이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이 뭘 말하고 있는가? 율법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생활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무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그것은 은혜의 생활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 아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습니다.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 아래 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심판 아래 있으면 지옥을 갑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심판을 안받는다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는 자는 심판을 안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은 지옥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3장 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을 아무리 정확하게 지키고 아무리 충실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려고 하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의로워져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지겠습니까?
율법의 마침
로마서 10장 2절에서 4절까지를 읽어봅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회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2-4)
자, 여기에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 곧 사람의 의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열심이 있는 사람을 보고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식한 열심이란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인지 잘 알고 열심히 해야 되겠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식한 열심입니다.
3절에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한 일하고,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자기가 어떻게 하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 자기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자기가 무슨 기도를 많이 하는 것 또 자기가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 자기가 열심히 하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아가지고 하나님께, '아, 너는 의롭다. 그만큼 하면 너는 참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이 마쳤다. 율법이 끝난 겁니다. 율법이 끝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게 무슨 말인지 압니까? 율법이 지금도 그대로 있으면 '어휴, 나는 죄인이구나' 가 되어 버립니다. 율법을 쳐다보면 '어휴, 두려워, 나는 죄인이구나' 그렇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끝내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지금도 살아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디까지나 죄인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신약 시대는 율법이라는 것이 끝난 시대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18절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누가복음 16:16-18)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 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 라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까지 율법이 있는 것이고 그 후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 율법을 완성시켜서 끝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침입한다. 그러니까 이제 오늘,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곧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완성시킬 수 없는 율법을, 우리 대신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시키신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다 지키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아십니까? 물론 우리 죄를 도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마침이 되었다, 율법이 끝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을 안 지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완성시키셨고 따라서 우리 죄를 예수님의 피로 도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음, 즉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율법 시대에 살면 안됩니다. 율법과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살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소멸되어 버리고 복음이 복음으로 들려오질 않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중적인 생활입니다. 예수를 아무리 믿어도 한편에 율법이 있으니 구원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으면 구원이 안됩니다. 율법은 왜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짐을 벗겨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무슨 짐을 말하는 겁니까? 죄 짐, 물론 죄 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짐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 짐은 곧 율법을 지키는 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지켜도 율법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도록 되어 있는데 지켜야 한다니까 굉장히 무거운 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짊어지고 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정한 거리 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꼼짝없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율법 지키려고 수고하고 애쓰며, 아무리 지켜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너희를 평안하게 쉬게 하리라.' 그것은 그 율법의 짐을 벗겨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벗겨줍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짐도 벗겨주고, 무거운 율법의 짐도 벗겨주고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고 너희는 쉬어라, 너희는 쉬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예수믿는 사람들은 쉬지 못합니다.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믿어가지고 천당을 갈 수 있을까, 내가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됐을까? 일일이 자기 생활을 돌아보면 항상 부족합니다. 늘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피곤한 생활이 되겠습니까? 한없이 피곤한 생활, 그것이 무거운 짐을 진 생활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했는데 어떻게 쉽니까? 예수께서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이제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옳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자, 여러분!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잘 지켜서 천당 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로마서 3장 23절과 21절을 읽고 생각하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천당 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율법을 열심히 열심히 지키고, 십계명대로 살고, 안식일을 지키고 그렇게 열심히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서 천당가도록 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3절을 보십시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이 언제 율법을 주셨습니까? 지금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아래 왔을 때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아담 때부터 벌써 죄는 생겼습니다. 그래도 그 때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죄인지 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으니까 그게 죄인지 뭔지 모르는 겁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상숭배 해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또 첫째 계명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인데 다른 신을 섬겨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또 어떤 동상 앞에 가서 절을 해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그걸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죄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알아야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여보쇼, 예수님이 당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소" 하면 그 사람은 "원 별 꼴 다 보겠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날 위해서 죽었어." 하면서 아마 욕을 하겠지요.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죄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여보쇼,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시오.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신 죄 때문에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면 그 사람은 "예? 그래요?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바짝 달라붙지 않겠습니까. 죄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준 것이지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거나 그 율법을 지켜가지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도 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목사 생활을 하면서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저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제가 경상북도 한 시골 교회에서 시무할 때입니다. 그때가 6.25 동란 직후였는데 기독교세계봉사회에서 구급물자를 많이 보냈 습니다. 제가 한 군(郡)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어느날 공문을 받고 경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서울에 있는 심 장로라고 하는 기독교세계봉사회 총무가 우리에게 숙박비를 전부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다 지불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하룻밤을 거기에서 보낸 뒤였습니다. 하룻밤 자고 이제 해가 거의 져 갈 때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차비하고 이틀 숙박비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틀 숙박비를 적어서 청구를 했더니 이틀 숙박비가 나왔습니다. 숙박비가 나와서 여관에 하룻밤 더 자야 할 판이었는데 우연히 제가 살고 있는 마을로 가는 트럭을 한 대 만나 손쉽게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하루 여관비가 남았습니다. 하루 여관비가 남았는데 마음 속에 송사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여관비가 남았으니까 그 여관비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우수한 아동들을 모집해서 학원을 하나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우수한 아동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공부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남은 돈을 가지고 학용품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 줄까 하다가 그것도 상부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상부에다 편지를 했습니다. 내게 여관비 하루치가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요?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것이고, 내가 학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학용품을 사주라고 하면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중앙에 있는 심 장로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해서 그런 편지를 보내서 남을 괴롭히느냐. 자기는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은 물자를 취급하는데 그런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안되는데 괜히 그런 편지를 보내서 남을 괴롭히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용품을 사서 다 나눠줬습니다.
저는 그렇게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철저히 살았습니다. 남의 것을 조금이라도 넘본 적이 없고 아주 철저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철저히 살면 살수록 자꾸 죄의식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해보려고 애를 쓰고 썼던 것입니다. 그래도 항상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 율법을 지켜가지고 구원을 받거나 하늘나라에 가거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라고 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저는 이 성경 구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율법을 지키는 것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찾아봅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의롭다고 하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내가 행위로 의로운 생활을 해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행위로 거룩한 생활을 해서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아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 주셨고 의로움이 되어 주셨고 거룩함이 되어 주셨고 구속함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룩함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잖습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 우리가 행해야 할 율법을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쉴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그 율법은 예수님이 짊어지고 다 이루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걸 완전히 이루신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고 짐을 잔뜩 짊어집니다. "이거 보라고,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라고 했잖아." 이 완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는 말을 자기가 완전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겁니다. 이렇듯 성경을 잘못 읽으면 큰 혼란에 빠집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들이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완전케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완전케 하시기 때문에 로마서에서도 말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이 율법을 마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 이루셨잖습니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율법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 것을 주님이 완성시키셨기 때문에 이제 없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갑시다.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앞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사람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입니다. 21절에는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함을 받는 의가 아니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율법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놓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읽다가 그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못 지켜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이끄심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율법이 없어졌으니까 이제부터는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죄를 막 지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답변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했지만 성령이 오시면 내가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를 함부로 짓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
자, 보십시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과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과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인도받는 생활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 신앙생 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율법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 성령이 계시니까 그 성령을 따라 살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가령 비유를 들어 말하면, 자동차가 한 대 있는데 이제 휘발유가 떨어져서 시동을 걸 수 없다고 합시다. 자동차를 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휘발유가 없어 시동이 안걸리면 그 자동차를 어떻게 끌고 갑니까? 저기로 옮겨야 하는데 어떻게 끌고 갈까요?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당기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이 율법 생활입니다. 율법 지키는 생활은 속에 생명이 없는데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힘이 듭니다. 율법은 사람을 자꾸 끌고 가려고 하고 사람은 안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율법 지키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 성령이 계시면 끌고 밀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만 있으면 바로 시동을 걸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럼 끌고 밀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힘은 자동차 자체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생활은 성령이 우리 안에 와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율법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율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면 참자유를 얻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전혀 안짓는 건 아니지만 자유롭게 살면서도 율법을 이루어버리는 그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로 돌아갑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읽었듯이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의' (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써보면 양 양(羊) 밑에 나 아(我)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은 무얼 말하 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밑에 있으면 의로운 것입니다. 양 밑에 나, 그것이 의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앙이로다"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행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그렇게 되어 있잖습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래서 내 행위가 과거에는 흉악한 죄를 지었고 어떤 때는 간음도 했고 어떤 때는 싸움질도 했고 도둑질도 했고 또 아무리 그런 큰 죄가 있어도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아래에서 다 해결되어 버리는 겁니다. 믿어버리면 양 밑에 있는 내가 됩니다. 의인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보실 때 너는 의롭다고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제 여러분들을 의롭다고 하신 걸 여러분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이제 죄인이 아니고 너는 의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 다음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보십시오. '값 없이' 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죄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선한 일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율법도 못 지켰습니다. 그런데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보지 마십시오. 지금도 나를 보면 죄가 있어요. 저는 구원받은 지 32년 째 되지만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지금도 죄가 있어요. 나를 보면 의롭게 되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우린 공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겁니다. 값을 전혀 치르지 않고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을 찾으십시오.
깨닫는 믿음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복음을 깨닫고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내 죄를 다 도말해 주셨다, 예수님이 피 흘려 내 죄를 다 사해 주셨다 하는 것이 마음에 믿어졌습니다. 그것이 믿어지기 전에는 착하게 살아야지,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지, 뭘 어떻게 해야지 하면서 노력하게 되는데 그것이 율법 아래 매여 있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살려고 해도 안되잖습니까. 착하게 살아야지 해도 착하게 살아지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해도 또 미워하게 되고 내가 이러면 안되겠는데 라고 해도 자꾸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마음이 율법 아래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율법 아래 매여 있기 때문에 남 미운 생각 들면 안되는 줄 뻔히 알지만 또 미워하게 되고, 화를 내면 안되는 줄 알면서 또 화를 내게 되고, 욕심 부리면 안되는 줄 알면서 또 욕심 부리게 됩니다. 그게 전부 율법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직 무언가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무엇이 믿어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피흘려 내 죄를 다 도말해 주셨다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내 죄를 이미 2,000년 전에 영원히 속죄해 놓으셨다는 그게 안믿어지는 겁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에 있는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자기 죄가 이미 2,000년 전에 영원히 속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특히 말씀드린 것은 지옥 갈 죄는 완전히 없어져 있다는 것, 지옥 갈 죄는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어져 있다는 것, 지옥 갈 죄는 영원히 없어져 있다는 것을 특히 강조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지옥 갈 죄 그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눈처럼 깨끗하게 희어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해서는 지옥가는 심판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을 심판이 있습니다. 그건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옥가야 할 죄는 철저하게 없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아직 듣지도 못했고 믿어지지 않았을 때에 자기가 노력을 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가 애를 쓰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는 그 율법 아래 매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했는데 계시될 믿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기 전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 그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서도 내 죄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도말되었다는 것이 마음 속에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면 눈물 흘려 웁니다. 계시될 믿음이 와야 됩니다. 계시의 믿음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 계시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하다가 무슨 계시를 받는 걸 말하느냐? 천만에요. 그게 아닙니다. 깨닫는 믿음! 씨가 옥토에 떨어졌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말합니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가령 , 여러분 중에 혹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말씀을 대하고 '아, 세상 죄를 지고 가셨으면 내 죄도 지고 가셨구나' 라고 그것이 믿어질 때 그걸 깨닫는 겁니다.
가령 마태복음 26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잔을 나눠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 많은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거다, 그 피는 바로 죄를 사했다고 인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 그렇구나 내 죄가 사해졌구나' 라고 깨닫는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탕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탕자이지만,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없애버렸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를 용서하고 또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어서 용서하시는 게 아니고 돌아오기 오래 전부터 용서해 놓고 기다린 하나님.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많이 깨닫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회개했다고, 눈물 흘리며 울었다고 용서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2,000년 전에 내 죄를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런 것이 계시의 믿음입니다. 계시의 믿음이라는 말은 깨닫는 믿음인데 믿으려고 해서가 아니고 믿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구, 이젠 됐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마음에 안심을 하는 그 믿음이 계시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음, 믿음 하는데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머리에서 믿는 믿음과 마음에서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그 믿음과 예수님이 진정으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내 구주가 되신다 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 다른 겁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그 믿음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을 찾아봅시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2:23-24)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믿음은 참으로 마음 속에서, 영 속에서 믿는 믿음이 아니고 머리 속에서 믿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두 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믿지만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식으로, 머리로, 뇌로 믿는 믿음이 아닌, 양심 속에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에서 믿는 믿음이라야 되지 혼에서 믿는 믿음 가지고는 안됩니다. 성경을 찾아서 실례를 한 번 들어봅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구약성경 열왕기상 3장 16절입니다.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 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 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열왕기상 3:16-28)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를 주신 후에 마침 그 지혜를 시험해 보는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창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아기를 낳고 3일 뒤에 다른 창녀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느날 한 여자가 밤에 뒹굴며 자다가 그만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는 여자의 아기를 자기 옆에 갖다 놓고 죽은 아기는 건너편 방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 시비가 생겼습니다. 산 아기는 제 것이고 죽은 아기는 상대방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가만히 들어보니 까 이건 도저히 판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그 두 사람만 아는데 그 아기를 분별하는 것도 두 사람만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지혜를 냈습니다. 칼을 가져오라고 하고 산 아기를 반 잘라 나눠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산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아기를 제발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라고 했고 죽은 아기의 어머니는 잘 됐다고 했습니다. 참 공평하며 네 것도 못되고 내 것도 못되고 잘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판결이 났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윗 왕이 마귀를 승리하는 주님의 그림자라면 솔로몬 왕은 재림하시는 영광의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자기도 믿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온 대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 나는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나는 귀신 쫓아냈습니다. 나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권능을 행했습니다 하면서 전부 자기가 잘 믿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 앞에 나타나서 자기도 믿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이제 두 가지 믿음이 구별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자, 솔로몬의 판결 장면으로 돌아갑시다. 아까 그 두 창녀, 두 여자의 말은 똑같았습니다. 둘 다 산 아기는 내 것이고 죽은 아이 는 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가지고는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참사랑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아기를 반으로 나눠주라고 했을 때 한 여자는 자기 아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주여 주여, 죽이지 마십시오. 저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은 똑같지만 하나는 마음에 사랑이 있었고, 하나는 마음에 사랑이 없었습니 다. 그 차이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도 예수를 믿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다고 합니다. 성경 가지고 설교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미국 수양회 때에 제가 "여러분 중에 귀신 쫓아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라고 하니까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도사인데 나중에 복음을 풀고 나니까 자기도 구원받았다고 하더니 그만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어요. 그런 식으로 귀신 쫓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 이적도 행하고 안수도 행했다고 합니다. 요즘 안수로 병고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을 입으로 자랑하고 자기도 믿었다고, 주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느끼는 것이 없으면, 참으로 주님 감사합니다하는 그런 사랑이 없으면 그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겁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5:5) 그 사랑은 결국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아, 참으로 감사하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은 사람됨을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야!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구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옳은 사람 됐구나 하는 사랑에 대한 강한 체험입니다.
믿기는 믿어도 머리로만 믿으면 감사가 없고 영으로, 양심 속에 믿어지면 감사함이 있는 겁니다. 그게 계시의 믿음입니다. 성경책과 찬송가를 가지고 교회에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붙들고 물어보면 안믿는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의 믿음이냐,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함으로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그냥 지식적으로만 아는 믿음이냐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오래가면 그 사랑이 식어집니다. 마음에서 그 사랑이 식어지고 그러면 또 율법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건 나중에 여러분들이 알게 될 문제입니 다. 우선은 구원을 받고 주님이 참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이 감사하고 '나 같은 이 흉악한 죄인이 천당에 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지' 하는 그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이냐 생명이 없는 믿음이냐는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이니까요.
새 계명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3장 21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죄를 계몽시키는 몽학선생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너는 죄인이다, 너는 이렇게 죄를 지었지 않느냐, 너는 우상 숭배했다, 너는 살인을 했다, 너는 부모에게 불순종했다 하면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게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이 죄인에게 너는 죄인이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해서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는 율법은 물러나 버립니다. 그래서 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죄인이 죄를 지은 뒤 율법의 가르침을 듣고 죄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이 믿어졌을 때에 그 죄가 그만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그런 말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몽학선생이 무엇입니까? 몽학선생은 율법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즉 구원을 받은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 다. 몽학선생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되어 있잖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율법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율법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율법도 지키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 설교를 잘 합니다. 1시간 설교하면 50분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신 사실을 전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래도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라고 10분간 율법 설교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복음은 싹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자신이 예수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십계명을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18절, 19절입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자, 여기 보세요.
'전엣 계명' 은 십계명입니다. '전엣 계명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계명은 사람을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계명이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자꾸 깨트리고 계명에게 자꾸 반항해 버립니다. 계명이 약하다는 것이 이런 말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게 복음의 중심입니다. 즉 우리가 이제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또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더라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함부로 짓거나 막 살게 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아직도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경 속에는 율법이 있고 복음이 있습니다. 율법은 종교입니다. 율법은 종교이고 복음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절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정중히 하는 그런 종교 생활이 아니에요. 종교는 사람을 억압합니다. 종교는 사람을 압박합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그렇게 명령하는 거잖습니까? 사람들은 율법의 참뜻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무거운 종교에서,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종교에서 해방을 받아야 참 해방입니다. 어떻게 종교에서 해방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이루어 주셨고, 죄도 없애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애쓰고 노력해야 할 일이 없어져 버렸고 다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사실이 여기 나타나 있는 겁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그대로 지금 우리가 쉬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율법대로 살면 하늘나라에 가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줄 알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애쓰고 노력하고 괴로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알고보니 주님이 내 대신 율법을 지켜주셨고 완성시켜 주셨고 율법을 끝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을 받았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주님이 지키신 것이 내가 지킨 것이며 주님의 의로움이 내 것이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복된 소식인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정 복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저희들은 지금 갓 구원을 받아 아직도 성경에 있는 많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셨으니 차츰차츰 성경에 대해서 눈이 열릴 수 있게 하시고 마음 가운데 이 믿음이 성장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 읽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부터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19-26)
율법을 완성시킨 하나님
이제 막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활이 성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은 갓난아기로 태어난 것이며 그 다음에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라야 하는 데 어떻게 하면 자라는지 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 시간은 주로 그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집회에 참여하셨을 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 부분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열심으로 기도하라고 하면서 새벽기도 같은 것을 강조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런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는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 어떤 사람이 기도를 참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알면 이해가 됩니다. 기도는 함부로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츰 그런 문제들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로마서 3장을 읽었는데 이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을 기초로 해서 율법에서 어떻게 풀려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율법 지키는 생활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은혜 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에서 잘 믿는다고 하는 교파일수록 율법을 강하게 지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스스로 가장 잘 믿는다고 말하는 고려파 같은 데서는 안식일을 굉장히 엄격하게 지킵니다. 안식일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안식일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날 한번 상세하게 성경공부를 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율법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로마서 3장 19절부터 20절을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바로 심판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심판하실 때에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를 심판하시는 겁니다. 여기 이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이 뭘 말하고 있는가? 율법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생활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무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그것은 은혜의 생활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 아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습니다.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 아래 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심판 아래 있으면 지옥을 갑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심판을 안받는다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는 자는 심판을 안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은 지옥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3장 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을 아무리 정확하게 지키고 아무리 충실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려고 하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의로워져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지겠습니까?
율법의 마침
로마서 10장 2절에서 4절까지를 읽어봅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회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2-4)
자, 여기에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 곧 사람의 의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열심이 있는 사람을 보고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식한 열심이란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인지 잘 알고 열심히 해야 되겠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식한 열심입니다.
3절에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한 일하고,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자기가 어떻게 하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 자기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자기가 무슨 기도를 많이 하는 것 또 자기가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 자기가 열심히 하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아가지고 하나님께, '아, 너는 의롭다. 그만큼 하면 너는 참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이 마쳤다. 율법이 끝난 겁니다. 율법이 끝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게 무슨 말인지 압니까? 율법이 지금도 그대로 있으면 '어휴, 나는 죄인이구나' 가 되어 버립니다. 율법을 쳐다보면 '어휴, 두려워, 나는 죄인이구나' 그렇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끝내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지금도 살아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디까지나 죄인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신약 시대는 율법이라는 것이 끝난 시대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18절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누가복음 16:16-18)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 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 라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까지 율법이 있는 것이고 그 후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 율법을 완성시켜서 끝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침입한다. 그러니까 이제 오늘,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곧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완성시킬 수 없는 율법을, 우리 대신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시키신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다 지키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아십니까? 물론 우리 죄를 도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마침이 되었다, 율법이 끝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을 안 지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완성시키셨고 따라서 우리 죄를 예수님의 피로 도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음, 즉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율법 시대에 살면 안됩니다. 율법과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살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소멸되어 버리고 복음이 복음으로 들려오질 않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중적인 생활입니다. 예수를 아무리 믿어도 한편에 율법이 있으니 구원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으면 구원이 안됩니다. 율법은 왜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짐을 벗겨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무슨 짐을 말하는 겁니까? 죄 짐, 물론 죄 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짐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 짐은 곧 율법을 지키는 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지켜도 율법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도록 되어 있는데 지켜야 한다니까 굉장히 무거운 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짊어지고 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정한 거리 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꼼짝없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율법 지키려고 수고하고 애쓰며, 아무리 지켜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너희를 평안하게 쉬게 하리라.' 그것은 그 율법의 짐을 벗겨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벗겨줍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짐도 벗겨주고, 무거운 율법의 짐도 벗겨주고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고 너희는 쉬어라, 너희는 쉬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예수믿는 사람들은 쉬지 못합니다.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믿어가지고 천당을 갈 수 있을까, 내가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됐을까? 일일이 자기 생활을 돌아보면 항상 부족합니다. 늘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피곤한 생활이 되겠습니까? 한없이 피곤한 생활, 그것이 무거운 짐을 진 생활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했는데 어떻게 쉽니까? 예수께서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이제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옳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자, 여러분!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잘 지켜서 천당 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로마서 3장 23절과 21절을 읽고 생각하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천당 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율법을 열심히 열심히 지키고, 십계명대로 살고, 안식일을 지키고 그렇게 열심히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서 천당가도록 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3절을 보십시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이 언제 율법을 주셨습니까? 지금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아래 왔을 때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아담 때부터 벌써 죄는 생겼습니다. 그래도 그 때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죄인지 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으니까 그게 죄인지 뭔지 모르는 겁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상숭배 해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또 첫째 계명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인데 다른 신을 섬겨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또 어떤 동상 앞에 가서 절을 해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그걸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죄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알아야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여보쇼, 예수님이 당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소" 하면 그 사람은 "원 별 꼴 다 보겠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날 위해서 죽었어." 하면서 아마 욕을 하겠지요.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죄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여보쇼,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시오.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신 죄 때문에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면 그 사람은 "예? 그래요?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바짝 달라붙지 않겠습니까. 죄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준 것이지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거나 그 율법을 지켜가지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도 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목사 생활을 하면서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저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제가 경상북도 한 시골 교회에서 시무할 때입니다. 그때가 6.25 동란 직후였는데 기독교세계봉사회에서 구급물자를 많이 보냈 습니다. 제가 한 군(郡)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어느날 공문을 받고 경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서울에 있는 심 장로라고 하는 기독교세계봉사회 총무가 우리에게 숙박비를 전부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다 지불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하룻밤을 거기에서 보낸 뒤였습니다. 하룻밤 자고 이제 해가 거의 져 갈 때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차비하고 이틀 숙박비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틀 숙박비를 적어서 청구를 했더니 이틀 숙박비가 나왔습니다. 숙박비가 나와서 여관에 하룻밤 더 자야 할 판이었는데 우연히 제가 살고 있는 마을로 가는 트럭을 한 대 만나 손쉽게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하루 여관비가 남았습니다. 하루 여관비가 남았는데 마음 속에 송사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여관비가 남았으니까 그 여관비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우수한 아동들을 모집해서 학원을 하나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우수한 아동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공부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남은 돈을 가지고 학용품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 줄까 하다가 그것도 상부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상부에다 편지를 했습니다. 내게 여관비 하루치가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요?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것이고, 내가 학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학용품을 사주라고 하면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중앙에 있는 심 장로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해서 그런 편지를 보내서 남을 괴롭히느냐. 자기는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은 물자를 취급하는데 그런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안되는데 괜히 그런 편지를 보내서 남을 괴롭히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용품을 사서 다 나눠줬습니다.
저는 그렇게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철저히 살았습니다. 남의 것을 조금이라도 넘본 적이 없고 아주 철저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철저히 살면 살수록 자꾸 죄의식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해보려고 애를 쓰고 썼던 것입니다. 그래도 항상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 율법을 지켜가지고 구원을 받거나 하늘나라에 가거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라고 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저는 이 성경 구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율법을 지키는 것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찾아봅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의롭다고 하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내가 행위로 의로운 생활을 해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행위로 거룩한 생활을 해서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아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 주셨고 의로움이 되어 주셨고 거룩함이 되어 주셨고 구속함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룩함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잖습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 우리가 행해야 할 율법을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쉴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그 율법은 예수님이 짊어지고 다 이루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걸 완전히 이루신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고 짐을 잔뜩 짊어집니다. "이거 보라고,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라고 했잖아." 이 완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는 말을 자기가 완전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겁니다. 이렇듯 성경을 잘못 읽으면 큰 혼란에 빠집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들이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완전케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완전케 하시기 때문에 로마서에서도 말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이 율법을 마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 이루셨잖습니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율법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 것을 주님이 완성시키셨기 때문에 이제 없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갑시다.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앞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사람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입니다. 21절에는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함을 받는 의가 아니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율법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놓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읽다가 그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못 지켜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이끄심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율법이 없어졌으니까 이제부터는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죄를 막 지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답변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했지만 성령이 오시면 내가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를 함부로 짓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
자, 보십시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과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과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인도받는 생활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 신앙생 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율법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 성령이 계시니까 그 성령을 따라 살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가령 비유를 들어 말하면, 자동차가 한 대 있는데 이제 휘발유가 떨어져서 시동을 걸 수 없다고 합시다. 자동차를 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휘발유가 없어 시동이 안걸리면 그 자동차를 어떻게 끌고 갑니까? 저기로 옮겨야 하는데 어떻게 끌고 갈까요?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당기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이 율법 생활입니다. 율법 지키는 생활은 속에 생명이 없는데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힘이 듭니다. 율법은 사람을 자꾸 끌고 가려고 하고 사람은 안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율법 지키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 성령이 계시면 끌고 밀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만 있으면 바로 시동을 걸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럼 끌고 밀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힘은 자동차 자체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생활은 성령이 우리 안에 와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율법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율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면 참자유를 얻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전혀 안짓는 건 아니지만 자유롭게 살면서도 율법을 이루어버리는 그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로 돌아갑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읽었듯이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의' (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써보면 양 양(羊) 밑에 나 아(我)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은 무얼 말하 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밑에 있으면 의로운 것입니다. 양 밑에 나, 그것이 의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앙이로다"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행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그렇게 되어 있잖습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래서 내 행위가 과거에는 흉악한 죄를 지었고 어떤 때는 간음도 했고 어떤 때는 싸움질도 했고 도둑질도 했고 또 아무리 그런 큰 죄가 있어도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아래에서 다 해결되어 버리는 겁니다. 믿어버리면 양 밑에 있는 내가 됩니다. 의인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보실 때 너는 의롭다고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제 여러분들을 의롭다고 하신 걸 여러분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이제 죄인이 아니고 너는 의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 다음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보십시오. '값 없이' 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죄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선한 일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율법도 못 지켰습니다. 그런데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보지 마십시오. 지금도 나를 보면 죄가 있어요. 저는 구원받은 지 32년 째 되지만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지금도 죄가 있어요. 나를 보면 의롭게 되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우린 공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겁니다. 값을 전혀 치르지 않고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을 찾으십시오.
깨닫는 믿음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복음을 깨닫고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내 죄를 다 도말해 주셨다, 예수님이 피 흘려 내 죄를 다 사해 주셨다 하는 것이 마음에 믿어졌습니다. 그것이 믿어지기 전에는 착하게 살아야지,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지, 뭘 어떻게 해야지 하면서 노력하게 되는데 그것이 율법 아래 매여 있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살려고 해도 안되잖습니까. 착하게 살아야지 해도 착하게 살아지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해도 또 미워하게 되고 내가 이러면 안되겠는데 라고 해도 자꾸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마음이 율법 아래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율법 아래 매여 있기 때문에 남 미운 생각 들면 안되는 줄 뻔히 알지만 또 미워하게 되고, 화를 내면 안되는 줄 알면서 또 화를 내게 되고, 욕심 부리면 안되는 줄 알면서 또 욕심 부리게 됩니다. 그게 전부 율법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직 무언가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무엇이 믿어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피흘려 내 죄를 다 도말해 주셨다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내 죄를 이미 2,000년 전에 영원히 속죄해 놓으셨다는 그게 안믿어지는 겁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에 있는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자기 죄가 이미 2,000년 전에 영원히 속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특히 말씀드린 것은 지옥 갈 죄는 완전히 없어져 있다는 것, 지옥 갈 죄는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어져 있다는 것, 지옥 갈 죄는 영원히 없어져 있다는 것을 특히 강조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지옥 갈 죄 그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눈처럼 깨끗하게 희어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해서는 지옥가는 심판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을 심판이 있습니다. 그건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옥가야 할 죄는 철저하게 없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아직 듣지도 못했고 믿어지지 않았을 때에 자기가 노력을 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가 애를 쓰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는 그 율법 아래 매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했는데 계시될 믿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기 전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 그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서도 내 죄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도말되었다는 것이 마음 속에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면 눈물 흘려 웁니다. 계시될 믿음이 와야 됩니다. 계시의 믿음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 계시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하다가 무슨 계시를 받는 걸 말하느냐? 천만에요. 그게 아닙니다. 깨닫는 믿음! 씨가 옥토에 떨어졌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말합니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가령 , 여러분 중에 혹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말씀을 대하고 '아, 세상 죄를 지고 가셨으면 내 죄도 지고 가셨구나' 라고 그것이 믿어질 때 그걸 깨닫는 겁니다.
가령 마태복음 26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잔을 나눠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 많은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거다, 그 피는 바로 죄를 사했다고 인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 그렇구나 내 죄가 사해졌구나' 라고 깨닫는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탕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탕자이지만,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없애버렸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를 용서하고 또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어서 용서하시는 게 아니고 돌아오기 오래 전부터 용서해 놓고 기다린 하나님.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많이 깨닫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회개했다고, 눈물 흘리며 울었다고 용서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2,000년 전에 내 죄를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런 것이 계시의 믿음입니다. 계시의 믿음이라는 말은 깨닫는 믿음인데 믿으려고 해서가 아니고 믿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구, 이젠 됐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마음에 안심을 하는 그 믿음이 계시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음, 믿음 하는데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머리에서 믿는 믿음과 마음에서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그 믿음과 예수님이 진정으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내 구주가 되신다 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 다른 겁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그 믿음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을 찾아봅시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2:23-24)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믿음은 참으로 마음 속에서, 영 속에서 믿는 믿음이 아니고 머리 속에서 믿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두 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믿지만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식으로, 머리로, 뇌로 믿는 믿음이 아닌, 양심 속에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에서 믿는 믿음이라야 되지 혼에서 믿는 믿음 가지고는 안됩니다. 성경을 찾아서 실례를 한 번 들어봅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구약성경 열왕기상 3장 16절입니다.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 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 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열왕기상 3:16-28)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를 주신 후에 마침 그 지혜를 시험해 보는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창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아기를 낳고 3일 뒤에 다른 창녀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느날 한 여자가 밤에 뒹굴며 자다가 그만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는 여자의 아기를 자기 옆에 갖다 놓고 죽은 아기는 건너편 방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 시비가 생겼습니다. 산 아기는 제 것이고 죽은 아기는 상대방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가만히 들어보니 까 이건 도저히 판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그 두 사람만 아는데 그 아기를 분별하는 것도 두 사람만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지혜를 냈습니다. 칼을 가져오라고 하고 산 아기를 반 잘라 나눠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산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아기를 제발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라고 했고 죽은 아기의 어머니는 잘 됐다고 했습니다. 참 공평하며 네 것도 못되고 내 것도 못되고 잘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판결이 났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윗 왕이 마귀를 승리하는 주님의 그림자라면 솔로몬 왕은 재림하시는 영광의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자기도 믿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온 대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 나는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나는 귀신 쫓아냈습니다. 나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권능을 행했습니다 하면서 전부 자기가 잘 믿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 앞에 나타나서 자기도 믿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이제 두 가지 믿음이 구별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자, 솔로몬의 판결 장면으로 돌아갑시다. 아까 그 두 창녀, 두 여자의 말은 똑같았습니다. 둘 다 산 아기는 내 것이고 죽은 아이 는 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가지고는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참사랑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아기를 반으로 나눠주라고 했을 때 한 여자는 자기 아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주여 주여, 죽이지 마십시오. 저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은 똑같지만 하나는 마음에 사랑이 있었고, 하나는 마음에 사랑이 없었습니 다. 그 차이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도 예수를 믿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다고 합니다. 성경 가지고 설교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미국 수양회 때에 제가 "여러분 중에 귀신 쫓아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라고 하니까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도사인데 나중에 복음을 풀고 나니까 자기도 구원받았다고 하더니 그만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어요. 그런 식으로 귀신 쫓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 이적도 행하고 안수도 행했다고 합니다. 요즘 안수로 병고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을 입으로 자랑하고 자기도 믿었다고, 주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느끼는 것이 없으면, 참으로 주님 감사합니다하는 그런 사랑이 없으면 그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겁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5:5) 그 사랑은 결국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아, 참으로 감사하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은 사람됨을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야!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구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옳은 사람 됐구나 하는 사랑에 대한 강한 체험입니다.
믿기는 믿어도 머리로만 믿으면 감사가 없고 영으로, 양심 속에 믿어지면 감사함이 있는 겁니다. 그게 계시의 믿음입니다. 성경책과 찬송가를 가지고 교회에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붙들고 물어보면 안믿는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의 믿음이냐,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함으로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그냥 지식적으로만 아는 믿음이냐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오래가면 그 사랑이 식어집니다. 마음에서 그 사랑이 식어지고 그러면 또 율법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건 나중에 여러분들이 알게 될 문제입니 다. 우선은 구원을 받고 주님이 참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이 감사하고 '나 같은 이 흉악한 죄인이 천당에 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지' 하는 그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이냐 생명이 없는 믿음이냐는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이니까요.
새 계명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3장 21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죄를 계몽시키는 몽학선생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너는 죄인이다, 너는 이렇게 죄를 지었지 않느냐, 너는 우상 숭배했다, 너는 살인을 했다, 너는 부모에게 불순종했다 하면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게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이 죄인에게 너는 죄인이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해서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는 율법은 물러나 버립니다. 그래서 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죄인이 죄를 지은 뒤 율법의 가르침을 듣고 죄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이 믿어졌을 때에 그 죄가 그만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그런 말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몽학선생이 무엇입니까? 몽학선생은 율법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즉 구원을 받은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 다. 몽학선생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되어 있잖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율법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율법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율법도 지키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 설교를 잘 합니다. 1시간 설교하면 50분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신 사실을 전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래도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라고 10분간 율법 설교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복음은 싹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자신이 예수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십계명을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18절, 19절입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자, 여기 보세요.
'전엣 계명' 은 십계명입니다. '전엣 계명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계명은 사람을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계명이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자꾸 깨트리고 계명에게 자꾸 반항해 버립니다. 계명이 약하다는 것이 이런 말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게 복음의 중심입니다. 즉 우리가 이제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또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더라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함부로 짓거나 막 살게 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아직도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경 속에는 율법이 있고 복음이 있습니다. 율법은 종교입니다. 율법은 종교이고 복음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절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정중히 하는 그런 종교 생활이 아니에요. 종교는 사람을 억압합니다. 종교는 사람을 압박합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그렇게 명령하는 거잖습니까? 사람들은 율법의 참뜻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무거운 종교에서,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종교에서 해방을 받아야 참 해방입니다. 어떻게 종교에서 해방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이루어 주셨고, 죄도 없애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애쓰고 노력해야 할 일이 없어져 버렸고 다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사실이 여기 나타나 있는 겁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그대로 지금 우리가 쉬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율법대로 살면 하늘나라에 가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줄 알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애쓰고 노력하고 괴로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알고보니 주님이 내 대신 율법을 지켜주셨고 완성시켜 주셨고 율법을 끝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을 받았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주님이 지키신 것이 내가 지킨 것이며 주님의 의로움이 내 것이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복된 소식인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정 복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저희들은 지금 갓 구원을 받아 아직도 성경에 있는 많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셨으니 차츰차츰 성경에 대해서 눈이 열릴 수 있게 하시고 마음 가운데 이 믿음이 성장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