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은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영혼이 구원받는 그런 것이 복음인데 신앙생활도 복음이라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생활은 율법으로 합니다. 지난 주 이 시간에도 율법에서 해방된 문제를 공부했습니다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율법에서의 해방이라는 것이 무얼 말하는지 아직은 잘 모를 것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구약의 율법이고 하나는 마음의 율법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서는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 마음의 율법에서 해방을 받으면 그 때에는 진정으로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과 복음으로 산다는 문제는 아주 다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신앙생활이 제대로 잘 안되고 그래서 잘 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율법으로 들어가는 생활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면 율법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마음이 율법에서 다시 한 번 풀려버리면 그때부터 복음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서 사는,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때 가야 그게 진정한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이런 문제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할 수 없고 어렵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공부는 아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문제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
히브리서 5장 11절부터 읽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1-14)
여기에 젖 먹는 사람과 단단한 식물, 즉 떡이나 밥을 먹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마치 젖을 먹는 때의 아기처럼 여문 밥이나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이제 갓 구원 받았거나 혹은 구원받은 지 오래 되어도 젖밖에 못먹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에 대해서 제가 지금 얘기를 해도 현재 여러분들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 구절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옛날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 제사장이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왜 이 말을 여기에 하면서 그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이 멜기세덱은 지금 부활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곧 구원받은 지 오래 되어 선생 노릇을 해야 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 단단한 식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단단한 식물은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게 잘 안됩니다. 말은 알아듣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단단 한 식물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네 몸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그런 말씀들이 이해는 되지만 실제로는 안되는 겁니다. 그 안되는 것을 하라고 하니까 그게 단단한 식물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하고 실제로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 하고는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복음으로 받았지만 생활도 복음으로 해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당장에는 잘 안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그 다음 생활도 복음으로 살아가야 되는데 대부분 구원을 받은 지가 오래 되어도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아직은 젖을 먹는 상태니까 성경의 가르침의 초보, 가장 기초적인 초보에 대한 얘기만을 당분간은 배워야 됩니다. 그게 젖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너무 시시하고 다 아는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다는 것과 잘 소화시킨다는 말은 다릅니다.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내가 깨달아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기독교의 폐단은 성경을 실제로는 마음에 깨달은 바가 없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실천도 못하면서 말만 가지고 사랑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또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아마 교회에 다니다가 이번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러 있을 텐데,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론적인 복음입니다. 그 이론적인 복음을 듣고 다 알지만 구원이 내 영혼 안에 오지는 않았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내가 체험할 때에 비로소 그 복음이 내 것이 되고 그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즉, 살아가는 것도 복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욕심으로 해보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하게 하시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지 않고 성령으로 하는 것, 그것이 복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습니다. 내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즉 내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예수님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은 다음에는 그 믿음에서 또다른 믿음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믿음의 생활로 나아가야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다음에 또 믿음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멈춰 버립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중지해 버립니다. 그 다음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다 되었다 하는 식으로 멈추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다음 믿음이 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이 오지 않고 쉬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에서 출발해서 또 그 다음의 믿음으로 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으로 가지 않고 중단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중 90퍼센트가 그렇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믿음의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한 10분의 1 정도밖에 안돼요. 우리가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면 10분의 9는 믿음의 생활을 끝내버리고 10 분의 1 정도만 믿음의 생활이 무언지 알아가면서 계속 믿음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구원받고 나서 구원받은 모임에서 발을 끊어버리면 신앙생활은 끝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교제에서 선을 알고
빌레몬서 1장 6절입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라는 게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서로 교제할 수 있습니까? 그 교제는 절대로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구원 안받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바로 성령의 교제입니다.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은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하나님께 이야기해도 소용 없어요. 기도는 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못받은 죽은 사람이 기도해 보았자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구원받은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셨다면 다니던 교회에 가서 누구에게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말을 한번 해 보십시오. 당장에 말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져요. 그 사람이 받았다고 하면 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성경의 어떤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느냐구요. 그러면 아마 교회 나오기 시작한 날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부터 틀리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는 날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은 틀린 겁니다. 제일 초보적인 교제에서부터 끊어집니다. 교제가 안됩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믿음 아래 들어섰습니다. 믿음 안에 들어서서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받은 사람이 똑같은 생명을 받은 사람하고 대화할 때에 '아, 그렇구나. 너는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하면서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대화로 교제를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의 교제라는 것은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기초적인 대화가 안되면 교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도 교제를 하기는 잘 해요. 노래 불러가면서 또 재미있는 대화 해가면서. 그것도 교제잖아요. 그러나 그런 교제는 육신의 교제이고 믿음의 교제는 그런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믿음의 교제는 다릅니다.
가령 여러분이 집사나 장로나 권사나 그런 직분을 맡은 분이라고 합시다. 교회에 가면 권사님, 집사님 하고 부르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실제로 집사, 권사, 장로의 자격이 있느냐하면 자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 집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고 그 다음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집사가 됐습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느냐 내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지도 않은 채로 집사가 되었다면 그게 무슨 집사입니까?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있는 장로는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고 성령이 충만한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직함을 서로 불러주면서 하는 것이 교제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제는 반드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거리낌없이, 가리움이 없이 말씀 안에서 함께 하는 겁니다.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됩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선, 그것이 뭐예요? 뭘 말하는 겁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는 그 교제 속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는 걸 말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란 사람에게 편지를 했는데 이 빌레몬이란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부자인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에요. 빌레몬서 1장 1절부터 읽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빌레몬서 1:1-2)
여기 보세요. 교회가 집에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처음 들어 보셨겠지요. '네 집에 있는 교회', 빌레몬의 집에 교회가 있었어요. 빌레몬의 집에 교회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빌레몬은 그 지역에서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집도 컸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그 집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커다란 예배당을 지어서 모이는 게 아니고 집에서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제가 구원을 받고 나서 우리집에서 모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장로교회를 떠났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따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우리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라는 말은 원어로 말하면 에클레시아인데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을 교회라고 하면 그건 망발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뽑아낸 무리란 뜻입니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복수로 모이는 곳입니다. 한 사람은 교회가 안됩니다. 한 사람은 교회가 되지 않고 구원받은 여러 사람이 모일 때 교회가 되는데 집에서 모이면 집이 교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이란 사람의 집에 사람들이 교제를 하려고 모인 겁니다. 서로 성경공부도 하고 간증도 하고 교회에서 누굴 도와주는 얘기도 하고 그런 것을 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들의 그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거기에 선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거기에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계신 거예요. 그렇지만 교제를 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선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선을 알아야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은 도덕입니다. 세상 도덕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도덕생활이 아닙니다. 또 신앙생활은 절대로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참 답답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중 90퍼센트가 종교생활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에 빠지면 신앙 생활을 못합니다. 참신앙생활은 종교생활에 빠지지 않고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복음의 생활을 하는 것인데 복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빠져버리면 신앙생활이 끝나버립니다.
제일 어려운 문제가 옛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옷을 입긴 입었지만 그 다음에 의의 겉옷도 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옷이 입어지지 않는 이유는 내 옛습관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저는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장로교인으로 저의 외조부님이 장로교인이었고 저의 부친도 장로교 장로였고 저의 어머니도 물론 장로교인이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 제일 어려웠던 문제는 교파의 테두리를 벗어 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교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거기에 저는 참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성동교회에서 시무하던 홍대위 목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구원을 받았고 나중에 피난 때에 남쪽으로 내려가 대구 삼덕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다가 중국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 한국에 와서 종로에 있는 성동교회라고 하는 아주 큰 보수주의 교회 목사로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었고 신학교에 와서 부흥회도 인도했고 또 제가 이전에 시무하던 교회에도 초청해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구원을 못받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그분이 중생에 대해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히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흥회를 해도 거듭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아무리 부흥회를 해도 거듭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거듭난 후에 장로교를 탈퇴하고 저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 기 시작했는데 주위에는 매일같이 구원받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때 가끔 홍 목사님을 만나서 우리 주변에서 되어지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탄복을 하면서 자기는 중국에서 구원을 받고 한국에 왔는데 수천 수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는 사람을 못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니까 참으로 놀라운지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은 아무리 전해도 구원받는 역사가 안일어난다고 했습니 다. 그분이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 분이 교파에 잡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파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자유의 복음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마음껏 자유롭게 외칠 수 있어야 됩니다. 교파에 매여 있으면 그렇게 못 외칩니다. 교파의 여러 가지 법에 걸려서, 또 교파에 순종하느라 할 말을 다 못하고 할 일도 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장로교 안에 있으면 침례를 못받습니다 장로교에 여러 가지 법이 있는데 그 법을 거스리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고 제재를 받는데 그런 곳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성령이 역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죽을 각오를 하고 교파를 떠났고, 그 이후 계속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가정에 모여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구원받는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방송국에 10년간 근무 했었는데 제가 방송국에 들어간 이후부터 조용하던 방송국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면서 구원받는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핍박을 받아서 우리는 그 방송국에서 물러났습니다. 우리가 물러나자마자 그곳에서의 구원받는 역사가 끝이 나 버렸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외치고 자유롭게 부르짖고 자유롭게 전하고 자유롭게 교제를 가지고 할 수 있어야 역사하시는 겁니다. 무엇인가에 매어 있으면 안됩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이 선은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교제를 가질 때에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그 뜻을 절대로 모릅니다.
바울은 믿음의 교제가 있는 그 안에 하나님의 뜻 즉, 선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교제 밖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과 믿음의 교제를 가져야 그 뜻을 알고 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는 것입니다. 미친다는 말은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 미칩니까? 어디까지 도달합니까?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그리스도께 도달하도록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도달을 해야 할 곳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서 주님께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혼자 개인적으로는 주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개인적으로는 주님께 도달을 못합니다. 우리 즉, 교회가 주님께 도달하는 겁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데, 주님은 머리이시고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신입니다. 즉 지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인데 이 지체들이 연결해서 교제를 가지면 이 지체가 주님께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인 교회가 주님께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혼자는 안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있으면 성장이 없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결국 신앙생활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완성된 교회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고 하니까 우리 육신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에 나오는 피조물이라는 말은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새 피조물이라는 것은 새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어머니 모태에서 창조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때에 새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합니다.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피조물입니다. 우리 몸이 어머니 모태에서 생겨날 때의 피조물, 그때 만들어진 것이 아닌 우리 안에 새생명이 들어와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의미와 주님이 보시는 의미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았으니 이제 지옥을 안가게 되었다.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구나.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감사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른 목적을 하나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가 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도덕가가 되어버립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선한 일, 눈에 보이는 선한 일을 다 하려고 덤벼드는 그런 도덕주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이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일이 뭡니까? 하나님이 창조 전에 예비해 놓은 일입니다. 이건 조금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 님이 사람을 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짝으로 창조하신 겁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천국, 즉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만드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영원한 천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절부터 읽어 봅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21:9)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가 완성 되면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아직은 신부가 아니지만 교회가 완성 되면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중에 '신부를 보여주겠다,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여주겠다' 라고 했습 니다. 10절부터 보세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 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21:10-15)
천국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영원한 천국, 즉 예루살렘 성을 설명하는데 이 성은 금으로 꾸미고,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을 요한에게 보여주면서 주님의 신부라고 말을 했습니다. 금과 보석은 모두 우리 신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중 어떤 사람은 보석 노릇 하고 어떤 사람은 금 노릇 하고 어떤 사람은 은 노릇 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가 완전히 완성되면 그게 신부이고 또 천국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님과 교회 사이에 또 교회 신자들 사이에 완전한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 선한 일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과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뜻이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 못받은 사람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하고 구원받은 사람하고는 서로 사랑할 수가 없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구원 못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을 때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안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제가 안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으로 말할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제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아, 불쌍하다. 구원을 받아야 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뿐이지 서로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나도 알고 저 사람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처음부터는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진정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 입니다. 그것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 루느니라"
저는 어느날 창세기 5장에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내용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림받는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들림받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들림받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됩니다. 에녹은 하나님 과 동행을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을 합니까? 어떻게 내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지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데 그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 성경 읽다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들림받을 때에 같이 들림을 못받고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롯의 처처럼 뒤쳐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들림받는 데 거리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구원 안받은 사람과의 사랑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교제를 가지는 것이고 그래야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중요한 것이 성도들과 서로 교제를 가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끼리 연락을 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 또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형편이 여의치 않다면 다니던 교회에 그냥 다녀도 괜찮아요.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과 연락을 끊으면 안됩니다. 한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에 같이 참여하고 또 서로 연락도 하고 함께 하면서 다녀도 좋습니다. 다니는 곳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믿음의 교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느냐 못하느냐를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일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이방에 있는 환경이나 교회의식에 얽매어서 믿음의 교제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은 즉, 인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교회를 이루어서 그것이 완성되면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이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구원을 안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그것은 천국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사 문제가 있습니다. 방언하는 문제, 병 고치는 문제 그런 것도 성경대로 전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바로 모르면 안수하고 병 고치고 방언한다고 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가고 기웃거리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진정한 방언, 참으로 병 고치는 역사가 뭔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도 성경 안에서 다 해결이 되어버립니다. 그걸 해결 못하면 그런 미혹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못 알고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전부 정리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것만 해도 굉장히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가면서, 또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그 큰 축복이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은 눈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꾸준히 믿음으로 나아가서 진정한 신앙생활이 뭔지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 에 갈 수 있는 성령의 인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어지럽고 죄많은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물들어서 이 놀라운 은총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을 못받고,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모르고 있었는데 진정으로 우리에게 이 거룩한 은혜를 알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지, 어떻게 생활의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선이, 선한 뜻이 계시는 것을 저희가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의 약속대로 믿음의 교제를 가지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그 때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더욱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를 길러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말씀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영혼이 구원받는 그런 것이 복음인데 신앙생활도 복음이라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생활은 율법으로 합니다. 지난 주 이 시간에도 율법에서 해방된 문제를 공부했습니다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율법에서의 해방이라는 것이 무얼 말하는지 아직은 잘 모를 것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구약의 율법이고 하나는 마음의 율법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서는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 마음의 율법에서 해방을 받으면 그 때에는 진정으로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과 복음으로 산다는 문제는 아주 다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신앙생활이 제대로 잘 안되고 그래서 잘 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율법으로 들어가는 생활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면 율법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마음이 율법에서 다시 한 번 풀려버리면 그때부터 복음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서 사는,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때 가야 그게 진정한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이런 문제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할 수 없고 어렵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공부는 아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문제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
히브리서 5장 11절부터 읽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1-14)
여기에 젖 먹는 사람과 단단한 식물, 즉 떡이나 밥을 먹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마치 젖을 먹는 때의 아기처럼 여문 밥이나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이제 갓 구원 받았거나 혹은 구원받은 지 오래 되어도 젖밖에 못먹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에 대해서 제가 지금 얘기를 해도 현재 여러분들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 구절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옛날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 제사장이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왜 이 말을 여기에 하면서 그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이 멜기세덱은 지금 부활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곧 구원받은 지 오래 되어 선생 노릇을 해야 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 단단한 식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단단한 식물은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게 잘 안됩니다. 말은 알아듣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단단 한 식물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네 몸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그런 말씀들이 이해는 되지만 실제로는 안되는 겁니다. 그 안되는 것을 하라고 하니까 그게 단단한 식물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하고 실제로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 하고는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복음으로 받았지만 생활도 복음으로 해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당장에는 잘 안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그 다음 생활도 복음으로 살아가야 되는데 대부분 구원을 받은 지가 오래 되어도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아직은 젖을 먹는 상태니까 성경의 가르침의 초보, 가장 기초적인 초보에 대한 얘기만을 당분간은 배워야 됩니다. 그게 젖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너무 시시하고 다 아는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다는 것과 잘 소화시킨다는 말은 다릅니다.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내가 깨달아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기독교의 폐단은 성경을 실제로는 마음에 깨달은 바가 없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실천도 못하면서 말만 가지고 사랑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또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아마 교회에 다니다가 이번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러 있을 텐데,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론적인 복음입니다. 그 이론적인 복음을 듣고 다 알지만 구원이 내 영혼 안에 오지는 않았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내가 체험할 때에 비로소 그 복음이 내 것이 되고 그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즉, 살아가는 것도 복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욕심으로 해보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하게 하시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지 않고 성령으로 하는 것, 그것이 복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습니다. 내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즉 내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예수님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은 다음에는 그 믿음에서 또다른 믿음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믿음의 생활로 나아가야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다음에 또 믿음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멈춰 버립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중지해 버립니다. 그 다음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다 되었다 하는 식으로 멈추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다음 믿음이 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이 오지 않고 쉬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에서 출발해서 또 그 다음의 믿음으로 가야 되는데 그 다음 믿음으로 가지 않고 중단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중 90퍼센트가 그렇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믿음의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한 10분의 1 정도밖에 안돼요. 우리가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면 10분의 9는 믿음의 생활을 끝내버리고 10 분의 1 정도만 믿음의 생활이 무언지 알아가면서 계속 믿음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구원받고 나서 구원받은 모임에서 발을 끊어버리면 신앙생활은 끝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교제에서 선을 알고
빌레몬서 1장 6절입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라는 게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서로 교제할 수 있습니까? 그 교제는 절대로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구원 안받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바로 성령의 교제입니다.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은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하나님께 이야기해도 소용 없어요. 기도는 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못받은 죽은 사람이 기도해 보았자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구원받은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셨다면 다니던 교회에 가서 누구에게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말을 한번 해 보십시오. 당장에 말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져요. 그 사람이 받았다고 하면 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성경의 어떤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느냐구요. 그러면 아마 교회 나오기 시작한 날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부터 틀리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는 날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은 틀린 겁니다. 제일 초보적인 교제에서부터 끊어집니다. 교제가 안됩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믿음 아래 들어섰습니다. 믿음 안에 들어서서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받은 사람이 똑같은 생명을 받은 사람하고 대화할 때에 '아, 그렇구나. 너는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하면서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대화로 교제를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의 교제라는 것은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기초적인 대화가 안되면 교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도 교제를 하기는 잘 해요. 노래 불러가면서 또 재미있는 대화 해가면서. 그것도 교제잖아요. 그러나 그런 교제는 육신의 교제이고 믿음의 교제는 그런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믿음의 교제는 다릅니다.
가령 여러분이 집사나 장로나 권사나 그런 직분을 맡은 분이라고 합시다. 교회에 가면 권사님, 집사님 하고 부르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실제로 집사, 권사, 장로의 자격이 있느냐하면 자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 집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고 그 다음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집사가 됐습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느냐 내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지도 않은 채로 집사가 되었다면 그게 무슨 집사입니까?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있는 장로는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고 성령이 충만한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직함을 서로 불러주면서 하는 것이 교제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제는 반드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거리낌없이, 가리움이 없이 말씀 안에서 함께 하는 겁니다.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됩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선, 그것이 뭐예요? 뭘 말하는 겁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는 그 교제 속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는 걸 말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란 사람에게 편지를 했는데 이 빌레몬이란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부자인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에요. 빌레몬서 1장 1절부터 읽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빌레몬서 1:1-2)
여기 보세요. 교회가 집에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처음 들어 보셨겠지요. '네 집에 있는 교회', 빌레몬의 집에 교회가 있었어요. 빌레몬의 집에 교회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빌레몬은 그 지역에서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집도 컸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그 집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커다란 예배당을 지어서 모이는 게 아니고 집에서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제가 구원을 받고 나서 우리집에서 모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장로교회를 떠났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따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우리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라는 말은 원어로 말하면 에클레시아인데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을 교회라고 하면 그건 망발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뽑아낸 무리란 뜻입니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복수로 모이는 곳입니다. 한 사람은 교회가 안됩니다. 한 사람은 교회가 되지 않고 구원받은 여러 사람이 모일 때 교회가 되는데 집에서 모이면 집이 교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이란 사람의 집에 사람들이 교제를 하려고 모인 겁니다. 서로 성경공부도 하고 간증도 하고 교회에서 누굴 도와주는 얘기도 하고 그런 것을 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들의 그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거기에 선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거기에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계신 거예요. 그렇지만 교제를 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선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선을 알아야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은 도덕입니다. 세상 도덕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도덕생활이 아닙니다. 또 신앙생활은 절대로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참 답답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중 90퍼센트가 종교생활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에 빠지면 신앙 생활을 못합니다. 참신앙생활은 종교생활에 빠지지 않고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복음의 생활을 하는 것인데 복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빠져버리면 신앙생활이 끝나버립니다.
제일 어려운 문제가 옛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옷을 입긴 입었지만 그 다음에 의의 겉옷도 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옷이 입어지지 않는 이유는 내 옛습관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저는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장로교인으로 저의 외조부님이 장로교인이었고 저의 부친도 장로교 장로였고 저의 어머니도 물론 장로교인이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 제일 어려웠던 문제는 교파의 테두리를 벗어 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교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거기에 저는 참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성동교회에서 시무하던 홍대위 목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구원을 받았고 나중에 피난 때에 남쪽으로 내려가 대구 삼덕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다가 중국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 한국에 와서 종로에 있는 성동교회라고 하는 아주 큰 보수주의 교회 목사로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었고 신학교에 와서 부흥회도 인도했고 또 제가 이전에 시무하던 교회에도 초청해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구원을 못받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그분이 중생에 대해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히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흥회를 해도 거듭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아무리 부흥회를 해도 거듭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거듭난 후에 장로교를 탈퇴하고 저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 기 시작했는데 주위에는 매일같이 구원받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때 가끔 홍 목사님을 만나서 우리 주변에서 되어지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탄복을 하면서 자기는 중국에서 구원을 받고 한국에 왔는데 수천 수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는 사람을 못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니까 참으로 놀라운지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은 아무리 전해도 구원받는 역사가 안일어난다고 했습니 다. 그분이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 분이 교파에 잡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파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자유의 복음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마음껏 자유롭게 외칠 수 있어야 됩니다. 교파에 매여 있으면 그렇게 못 외칩니다. 교파의 여러 가지 법에 걸려서, 또 교파에 순종하느라 할 말을 다 못하고 할 일도 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장로교 안에 있으면 침례를 못받습니다 장로교에 여러 가지 법이 있는데 그 법을 거스리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고 제재를 받는데 그런 곳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성령이 역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죽을 각오를 하고 교파를 떠났고, 그 이후 계속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가정에 모여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구원받는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방송국에 10년간 근무 했었는데 제가 방송국에 들어간 이후부터 조용하던 방송국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면서 구원받는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핍박을 받아서 우리는 그 방송국에서 물러났습니다. 우리가 물러나자마자 그곳에서의 구원받는 역사가 끝이 나 버렸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외치고 자유롭게 부르짖고 자유롭게 전하고 자유롭게 교제를 가지고 할 수 있어야 역사하시는 겁니다. 무엇인가에 매어 있으면 안됩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이 선은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교제를 가질 때에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그 뜻을 절대로 모릅니다.
바울은 믿음의 교제가 있는 그 안에 하나님의 뜻 즉, 선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교제 밖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과 믿음의 교제를 가져야 그 뜻을 알고 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는 것입니다. 미친다는 말은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 미칩니까? 어디까지 도달합니까?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그리스도께 도달하도록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도달을 해야 할 곳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서 주님께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혼자 개인적으로는 주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개인적으로는 주님께 도달을 못합니다. 우리 즉, 교회가 주님께 도달하는 겁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데, 주님은 머리이시고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신입니다. 즉 지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인데 이 지체들이 연결해서 교제를 가지면 이 지체가 주님께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인 교회가 주님께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혼자는 안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있으면 성장이 없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결국 신앙생활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완성된 교회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고 하니까 우리 육신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에 나오는 피조물이라는 말은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새 피조물이라는 것은 새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어머니 모태에서 창조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때에 새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합니다.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피조물입니다. 우리 몸이 어머니 모태에서 생겨날 때의 피조물, 그때 만들어진 것이 아닌 우리 안에 새생명이 들어와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의미와 주님이 보시는 의미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았으니 이제 지옥을 안가게 되었다.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구나.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감사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른 목적을 하나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가 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도덕가가 되어버립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선한 일, 눈에 보이는 선한 일을 다 하려고 덤벼드는 그런 도덕주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이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일이 뭡니까? 하나님이 창조 전에 예비해 놓은 일입니다. 이건 조금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 님이 사람을 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짝으로 창조하신 겁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천국, 즉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만드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영원한 천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절부터 읽어 봅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21:9)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가 완성 되면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아직은 신부가 아니지만 교회가 완성 되면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중에 '신부를 보여주겠다,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여주겠다' 라고 했습 니다. 10절부터 보세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 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21:10-15)
천국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영원한 천국, 즉 예루살렘 성을 설명하는데 이 성은 금으로 꾸미고,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을 요한에게 보여주면서 주님의 신부라고 말을 했습니다. 금과 보석은 모두 우리 신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중 어떤 사람은 보석 노릇 하고 어떤 사람은 금 노릇 하고 어떤 사람은 은 노릇 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가 완전히 완성되면 그게 신부이고 또 천국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님과 교회 사이에 또 교회 신자들 사이에 완전한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 선한 일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과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뜻이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 못받은 사람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하고 구원받은 사람하고는 서로 사랑할 수가 없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구원 못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을 때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안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제가 안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으로 말할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제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아, 불쌍하다. 구원을 받아야 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뿐이지 서로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나도 알고 저 사람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처음부터는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진정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 입니다. 그것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 루느니라"
저는 어느날 창세기 5장에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내용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림받는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들림받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들림받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됩니다. 에녹은 하나님 과 동행을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을 합니까? 어떻게 내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지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데 그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 성경 읽다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들림받을 때에 같이 들림을 못받고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롯의 처처럼 뒤쳐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들림받는 데 거리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구원 안받은 사람과의 사랑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교제를 가지는 것이고 그래야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중요한 것이 성도들과 서로 교제를 가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끼리 연락을 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 또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형편이 여의치 않다면 다니던 교회에 그냥 다녀도 괜찮아요.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과 연락을 끊으면 안됩니다. 한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에 같이 참여하고 또 서로 연락도 하고 함께 하면서 다녀도 좋습니다. 다니는 곳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믿음의 교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느냐 못하느냐를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일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이방에 있는 환경이나 교회의식에 얽매어서 믿음의 교제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은 즉, 인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교회를 이루어서 그것이 완성되면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이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구원을 안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그것은 천국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사 문제가 있습니다. 방언하는 문제, 병 고치는 문제 그런 것도 성경대로 전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바로 모르면 안수하고 병 고치고 방언한다고 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가고 기웃거리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진정한 방언, 참으로 병 고치는 역사가 뭔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도 성경 안에서 다 해결이 되어버립니다. 그걸 해결 못하면 그런 미혹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못 알고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전부 정리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것만 해도 굉장히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가면서, 또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그 큰 축복이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은 눈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꾸준히 믿음으로 나아가서 진정한 신앙생활이 뭔지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 에 갈 수 있는 성령의 인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어지럽고 죄많은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물들어서 이 놀라운 은총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을 못받고,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모르고 있었는데 진정으로 우리에게 이 거룩한 은혜를 알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지, 어떻게 생활의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선이, 선한 뜻이 계시는 것을 저희가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의 약속대로 믿음의 교제를 가지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그 때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더욱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를 길러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말씀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