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회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1-2)
어떤 사람이 구원은 받았는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고민을 한다는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생활 속에서 거듭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구원이 아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을 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안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요한1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구원을 확실히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면 전에 미워하던 사람들도 밉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에 다른 구원받은 사람이 반갑고 마음 속에 거리낌이 없이 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전에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외국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와서 살고 있다가 나중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때에 그 사람은 청년이었는데 구원받았다고 하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진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까 그 미워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풀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나는 사랑이 안간다'는 태도를 갖기보다는 확실하게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깨달은 사실을 마음에 명심하고 그 깨달은 데로 돌아가야 됩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심, 저런 의심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자기가 구원받을 때에 어떤 무엇을 깨달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만일 깨달은 것이 없이 그냥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분명히 죄사함,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어떤 성경 말씀을 깨달았거나, 또 설교를 듣던 중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런 깨달은 사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로 돌아가야 됩니다.
의심이 날 때는 자기가 깨달은 그 사실 즉,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감정을 추적하거나 혹은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이렇게 자꾸 생각을 하면 그런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구원받았을 때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깨달은 사실, 그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 말씀을 잊어버리면 계속적으로 의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만일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했으면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 아닐 수가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2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 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1-4)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왔을 때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현재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신앙생활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혀 모르고 이스라엘의 유대 종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세 가지가 있는데 십계명도 율법이고 또 제사제도 즉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것도 율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이고 그 다음 민법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어떤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다스리고 또 어떤 일을 했으면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총괄하는 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있어 행정부는 법을 가지고 다스리고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다음 사법부는 법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원칙을 주신 것이고 또 제사법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민법은 백성을 다스릴 때에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런 문제를 다루는데 이 세 가지 법을 합쳐서 율법이라 말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율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과 율법 지키는 생활은 정반대되는 생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런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기성교회에서는 율법과 복음을 섞어서 전하고, 따라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어려운 상태에 있고 신앙생활도 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다고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이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히브리서의 1장과 2장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잘 설명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은 천사보다 나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나은 예수님이 3장 4장에 나와 있습니다. 5장부터는 구약의 제사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사장보다 나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2장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이 히브리서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특히 히브리서 9장을 읽어보면 구원을 받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0장의 내용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이든 또 다른 서신이든간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들이 읽음으로써 역시 영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과 통하는 기도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는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기도를 많이 함으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또 믿음은 찬송을 많이 부른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식이 잘못되어 현재 교회에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기 위해 철야기도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도록 강조를 많이 해서 사람들이 기도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입니 다. 기도를 많이 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같이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수양회를 마치면 한 차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교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안식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거듭거듭 얘기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현재 기독교는 기도라고 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는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강조해서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꼭 그런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철야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금식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없는 게 아니냐고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기도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전도서 5장 2절을 찾아보세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사람들이 기도할 때 앉자마자 머리를 숙입니다. 머리 숙이자마자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이 나는 대로 막 지껄여 댑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너무 쉽고 가볍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여기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육신을 가지고 땅에 사는 인간이 자기 멋대로 육신의 생각대로 지껄여댄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주시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많은 말을 하면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도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성경 마태복음 6장 5절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자, 여러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웅변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듣는데, 누가 자기를 보고 '야, 기도 참 잘한다'하는 소리를 듣기 위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웅변적으로 하는 기도, 그런 기도는 하나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 6절을 보세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요즘처럼 아파트 생활을 하고 골방이 없는 사람들은 그럼 기도 못하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를 사람이 보는 데에서, 보이게 하지 말고 혼자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골방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볼 때에 눈을 감고 입을 열어서 중얼중얼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주님과 통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진짜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 7절 보세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형식적인 기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종교가 안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기도가 슬그머니 기독교로 들어와 버렸고 따라서 기독교에서도 이방 종교처럼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가 잘못된 겁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뭡니까? 대상자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고 제사드리고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뒷마당에 가서 찬물 한그릇 떠놓고 기도 하고 그렇잖습니까? 상대방이 인격적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다만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푸념식으로 나타내는 것 뿐이지 상대자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가령 절에 가서 불상 앞에 목탁을 치고 염불하는 기도가 있는데 그 불상은 인격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내가 기도를 해도 듣지도 않고 나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못됩니다. 그런 신에게 빌고 하는 습관이 슬그머니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서 기독교인들도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미신이 되어버렸고 기도가 종교가 되어버렸고, 종교적인 기도로 되어버렸고 하나님 앞에서는 참기도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밤새도록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알고 또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알고 또 다른 사람 잠자는데 자지 않고 새벽마다 일어나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 들으시는 줄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또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로 압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금식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병이 있어서 밥을 못 먹을 정도가 되어 금식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금식령을 내려가지고 모든 사람이 같이 한날 한시에 우리가 같이 금식합시다 하고 금식하면 그것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는 겁니다. 단체적인 금식은 틀린 겁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 보세요. 때가 이르면 귀신의 가르침을 쫓고 양심이 화인맞아서 외식한다고 했습니다. 외식은 형식을 꾸민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인데 예를 들면 신부나 수녀와 같이 혼인을 금합니다. 그건 외식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을 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혼을 해서 가정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혼인을 안했습니다. 자기가 원했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혼인을 안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혼인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제도화하면 안됩니다. 제도를 만들면 안됩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입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하다든지 속되게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귀신의 속삭임입니다. 간음을 범한다든지 정상적인 성생활이 아닌 그런 것이 나쁜 것이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당연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너무 일이 많았기 때문에 결혼 생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식물을 폐하라는 말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저도 과거에 더러 금식 해봤어요. 그러나 일률적으로 금식 날짜를 정해서 금식하는 것은 안됩니다. 또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4절과 5절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게바가 누구입니까?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여기 바울이 뭐라고 말하느냐면 보세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권이 없겠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도과 베드로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교황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직계 후손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고 현재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62대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제1대 교황 베드로는 부인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성경하고는 안맞잖아요. 혼인을 금하는 것은 성경하고는 안맞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
마태복음 6장 7절로 돌아갑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중언 부언하는 것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 했던 말 내일 자꾸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오랫동안 기도하려니까 자꾸 했던 말 또 하고 그러는 겁니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이나 신 앞에 말을 많이 하고 오래오래 하면 듣는 줄 압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 다음 8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하고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속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긴 설명이 필요없이 간단하게 제목만 제출하면 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무슨 용건이 하나 있으면 '엄마' 하고 한마디만 하면 돼요. 어린아이는 엄마하고 한마디만 해도 엄마가 왜 그래? 쉬 마려? 뭐? 하고 조사를 해서 다 해줍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우리 주님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애입니다. 실제 어린애보다도 더 유치한 어린애입니다. 자, 이제 서너살 먹은 어린애가 엄마한테 와서 뭘 요구한다고 합시다. "엄마, 나 먹을 걸 주십시오. 내가 이제 배가 고파서 죽겠는데⋯" 하고 설명을 많이 늘어놓으면 엄마는 이 애가 좀 어떻게 됐구나 하고 돌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엄마, 나 배고파요." 한마디면 되지 않습니까? 진정한 기도는 그런 겁니다.
첫째,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예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대화 속에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기도를 마치 하나님 앞에 연설하는 것처럼 하는데 하나님이 왜 연설을 들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를 가지고 전쟁을 해요. 기도로 남을 때려 치기도 하고 기도로 설교도 합니다. 그것은 전부 기도가 아닙니다. 잘못된 거예요. 잘 못된 겁니다.
왜 새벽마다 기도해야 됩니까? 저는 가끔 새벽에 기도해요. 새벽이 되면 잠이 잘 안옵니다. 저는 초저녁 잠이 많아요. 그래서 10시 쯤 자면 한 세시나 네 시쯤에 깨기도 하고 다섯시에 깨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경 읽고 성경 읽다가 기도할 일이 있으면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기도회를 하면 안됩니다. 다같이 모여가지고 기도회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이게 한국 교회의 큰 병폐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새벽에 일찍 깨서 혼자 성경 읽고 또 성경 읽다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하나님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간단하게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모여서 같이 하는 기도회라는 것은 소용없어요. 이게 참 큰 문제입니다.
영어에 '콰이엇트 타임' (quiet time)이라는 말이 있어요. '콰이엇트 타임' 이라는 것은 조용한 시간, 여러 사람 말고 나 혼자 주님과 대화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인데 조용한 시간은 새벽이 제일 좋습니다. 혹시 그런 시간을 못가진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시간을 정해놓고 조용한 시간을 혼자 가지는 게 좋습니다.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 혼자 조용히 성경 읽고 조용히 주님과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 없이 매일 새벽기도회에만 다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온 세계 어디를 다녀도 새벽기도회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미국에는 없습니다. 유럽에도 없어요. 한국에만 있어요. 새벽기도회라는 걸 만들어 놓고 교인이 100명 중에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이 한 23명 되면 그 23명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예수 잘 못믿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데 그 아들 딸이 희희낙락하며 재미있게 의논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걸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매일 징징 울고 걱정이 있으면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새벽마다 울고 새벽마다 얼굴 찡그려서 아이구 하나님 아버지 하면 하나님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요. 내가 기분좋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감사하면서 살면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틀림없이 여러분들 부모님도 그렇고 여러분 자신도 자기 자식들이 평화롭고 기분좋고 재미있게 살면 마음이 흐뭇하고 참 좋지요. 여러분 자식이 새벽마다 잠자는데 머리맡에 쭈그리고 와서 울면 굉장히 심란하겠지요. 그런데 기독교가 다른 종교처럼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기독교는 본래 그런 종교가 아니었어요. 매일 얼굴에다 내천(川) 자 그려가지고 아이구, 주여 아이구, 주여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기도의 짐을 지지 마세요. 기도를 무거운 짐으로 지지 마십시오. 기도해야 될 텐데 하는 짐을 지면 안돼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히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과 나 사이,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이기 때문에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돼요. 주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 게 뭐냐 하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먼저 하지 말고 성경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먼저 읽고 마음에 감동이 오고 내 마음에 감동이 오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때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 읽는 것이고 성경을 읽고 내 마음에 감동이 되고 또 내가 주님께 요구할 것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요구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이 기도입니다. 그냥 기도한다고 하고 성경 읽는 것은 팽개쳐 놓고 눈만 딱 감으면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하옵나이다 하고 중얼중얼 하다가 아멘 하는 것은 단순히 일방통행이에요. 그건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 교회에서는 기도를 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읽을 때에 기도가 안되면 성경 읽는 게 되겠어요? 성경 읽으면서 주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이 기도가 되고 그리고 나서 내가 또 할 말을 주님께 하는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무거운 짐으로 지지 말고 쉽게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너무 힘들게, 기도해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 될 텐데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생활에서 얻는 구원
히브리서 2장 1절로 돌아갑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들은 것을 삼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들은 것 중에 여러분 마음 속에 깨달은 것이 있잖아요. 삼간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게 얼마나 귀한 건지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찾아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육신은 흙으로 만든 겁니다. 질그릇이란 말은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질그릇 하면 금그릇이라든지 은그릇이라든지 그런 것 하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값이 없고 천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천한 것입니다. 이것은 죽으면 흙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 보배가 뭡니까? 그 보배는 하나님의 말씀, 그 보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거든요.
그 보배가 주님의 생명 곧 성령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굉장히 귀한 보배를 이 질그릇 속에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비록 질그릇이지만 보배 그릇입니다. 이 천한 육신 속에 있는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질그릇이지만 보배 그릇입니다. 보배 그릇. 얼마나 귀한 보배입니까? 그러니까 간수를 잘 해야 됩니다. 간수를 못하면 도둑이 와서 훔쳐 갑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한다. 우리가 굉장히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들은 것을 고이 간수를 안하고 그냥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풍조에 따라 잘못 살다 보면 그것을 그냥 세월 속에 흘러 떠내려 보내고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 없어진다 그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 자체는 한 번 받았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을 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자, 여기 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준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 구원은 없어진다거나 뺏긴다거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가 또 마귀의 아들이 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구원은 한 번 받으면 안심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 말씀이 내 생활에 나타나야 됩니다.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면 안돼요.
빌립보서 2장 12절 찾아보세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도 전에 한 번 읽었는데,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이루는게 뭡니까?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을 또 어떻게 이루느냐고 여러분은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은 내 영혼 속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 구원 못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받았는데 육신은 구원을 못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아직 구원을 못받았습니다. 그렇잖아요?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죄짓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아까 어떤 형제가 남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안간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구원이 생활 속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영혼 구원이 내 생활에서도 나타나야 됩니다. 그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에게 유혹이 옵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이라든지 또다른 유혹이 올 때에도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한 어떤 성경 말씀이 생각나면서 그런 유혹을 물리쳤다고 합시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럼 나의 구원 받은 영혼이 내 생활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침례같은 건 안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안받는 사람은 침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도 여러가지 성경 말씀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직은 그 말씀들을 따르기가 힘듭니다. 아직 여러분들은 어린 아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다 컸는데 왜 어린 아이이냐. 영혼의 상태가, 믿음의 상태가 아직 어린 아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복종을 잘 못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똥도 싸고 오줌도 싸고 고집도 부리고 앙탈도 부리고 어린 아이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렇듯 어린 아이는 아직 복종이 잘 안됩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나중에 차츰차츰 복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람
어린 아이는 젖먹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젖먹는 과정입니다. 젖을 먹는다는 것은 비단 성경공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마음에 아쉽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여러분들이 단순히 이 성경공부에만 참여하지 말고, 나이 많은 분들은 갈렙회에도 가입하고 젊은 분들은 청년회에도 가입하고 대학생회에도 가입해서 같이 활동하는 데 실제로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음에는 마음에 안들고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고 저런 건 왜 저럴까, 마음에 안맞는 것이 많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차츰차츰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젖을 먹으면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성경공부는 실제로 생활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말씀이 조금씩 생활에 나타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인데 성경공부만 하고 배운 것이 생활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자라서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게 되면 과거에 미워하던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게 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급한 것을 참게 되고, 남을 비판하고 남의 흉을 많이 보던 사람이 차츰 입을 다물게 되면서 그런 걸 하지 않게 되고 차츰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그 구원이 실제 생활에서 또 내 마음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상고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듣고 읽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내게 어떤 말씀을 하셨으면 그 말씀을 명심 해야 합니다. 명심해서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고 있다가 때가 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에 우리 마음에 더 큰 축복이 오고 더 큰 즐거움이 옵니다.
히브리서 2장 2절로 돌아갑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이것은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찾으세요.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히브리서 2장 2절,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라는 말씀은 율법을 말합니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범했을 때에 많은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예수님)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어길 때에 벌을 주셨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우리에게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율법과 비교도 안됩니다. 천사를 통해서 주신 율법도 범하면 벌을 받았는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율법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 구원 속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이 구원 속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구원을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받을 때 뿐이고 조금 지나면 구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구원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굉장히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나중에 시일이 지나면 구원받은 것이 그만 마음 속에서 흐릿해지고 감사한 마음도 없고 구원은 받았다 하는 기억만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구원이 신앙생활 속에서 운동하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면 참 아쉽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저와 같을 순 없지만 제가 구원받았을 때에는 미쳤다고 할 만큼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불쌍하고, 돈 많고 부자로 지내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지옥 간다 싶은 생각에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세상 아무 것도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토요일날 구원을 받았는데 주일날 설교하고 그 다음 월요일날 성경 한 권만 가지고 역전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5. 16 혁명 때라 계엄령이 내렸을 때입니다. 사람들이 역에 모여 와글와글 한데 성경을 치켜들고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십시오.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구원을 받고 가슴이 너무나 벅차 감당을 못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을 못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겁니다. 그 다음엔 제가 살고 있는 집 옆 동리를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전도지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뿌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핸드 마이크를 빌려서 부흥회를 열고 있는 공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관상 보는 사람이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앞에 놓고 사람들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니까 화가 나서 그 옆에 앉아 예수 믿으라고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마이크로 막 외쳐댔어요.
그 이후 장로교에 시무하는 동안 여러 수백 명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일마다 눈물을 흘려가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기 싫어했습니다. 교우들이 저를 쫓아내면 보따리 짊어지고 따라다니면서라도 이걸 외칠 것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구원이 너무 귀하고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이것을 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람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잘 간수해야 됩니다. 구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저절로 간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받았으면 없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때부터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 또 육신으로 돌아가서 세상으로 사는 거예요.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구원을 간수하지 않고 산다는 말입니다. 처음엔 구원이 좋았는데 구원보다 더 큰게 생깁니다. 돈벌이하는 게 더 크고 세상 명예, 지위, 행복, 쾌락이 더 크게 보이고 그걸 얻으려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는 동안에 구원은 흘러 떠내려 가버립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주일날 모이는 숫자의 10배는 더 됩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고 살았는데 다 세상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세상 것이 더 좋아서 세상으로 다시 가버립니다. 세상으로 간다는 말은 참신앙 생활이 아닌 신앙생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고이 간직하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런 생활이 아니고 형식적인 생활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세상의 돈벌이나 세상 일에 더 몰두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이 자기의 생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에서 2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자라지 않습니다. 자란다는 말은 이미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체 이므로 자랍니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자라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자라야 됩니다. 자라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자라지 못하고 고아가 되어버리는 사람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됩니다.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굉장히 큰 겁니다. 이 큰 것을 고이 간수하고 우리 생활에서 이루어지도록 자라가야 되는 겁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아가 됩니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어야 합니다. 젖은 엄마의 젖가슴에서 나옵니다. 여자의 가슴에서는 언제 젖이 나와요? 아기를 낳아야 젖이 나옵니다. 아기를 낳으면 젖이 나와요. 아기를 안낳으면 젖이 안나와요.
자, 그러면 여러 분들이 젖을 먹어야 하는데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어머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곳으로 어머니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낳은 것이 아니고 교회가 복음을 전해서 여러분을 낳은 겁니다. 그러면 젖은 어디서 납니까? 구원이 일어나는 역사가 어린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어머니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는 많은데 구원받는 역사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 데에서는 젖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젖은 반드시 아기를 낳은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기를 안낳은 엄마의 가슴에서는 안나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교회들은 많지만 거기에 구원받는 역사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그걸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구원받는 역사가 있는 곳에서 젖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그곳에서 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 습니다. 여러분은 자라야 됩니다. 자라야 된다는 말은 생활이 구원을 받도록 자라야 된다는 뜻입니다. 생활이 구원을 받도록 자라지 않으면 롯의 처가 되고 나중에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가는 심판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심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았더라도 예수님 오실때 슬피 울고 이를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롯의 처처럼 되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세상에 속해서 자라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면 나중에 예수님 오실 때에 원통하게 되는 겁니다. 귀한 시간을 다 허비한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면 다 허비가 되어버립니다. 세월이 아무 의미없이 그만 허비가 되어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었을 때는 집이 불살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 원통해서 슬피 울고 이를 갈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하루하루 사는 삶이 귀한 겁니다. 하루를 신앙적으로 잘 살면 굉장히 긴 세월 동안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아무쪼록 이 큰 구원을 절대로 등한히 여기지 마십시오. 이걸 깊이 간수해서 생활에서 살려갈 수 있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 흉악한 죄악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고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질그릇 속에 이렇게 귀한 보배를 저희들이 받았습니다. 이것이 세월 속에서 흘러 떠 내려가지 않도록 저희들 마음 속에 깊이 간수를 해서 자라갈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생활에서 이 구원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머리 숙인 갓 구원받은 심령들이 고아처럼 되어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 추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구원은 받았는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고민을 한다는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생활 속에서 거듭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구원이 아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을 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안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요한1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구원을 확실히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면 전에 미워하던 사람들도 밉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에 다른 구원받은 사람이 반갑고 마음 속에 거리낌이 없이 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전에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외국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와서 살고 있다가 나중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때에 그 사람은 청년이었는데 구원받았다고 하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진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까 그 미워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풀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나는 사랑이 안간다'는 태도를 갖기보다는 확실하게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깨달은 사실을 마음에 명심하고 그 깨달은 데로 돌아가야 됩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심, 저런 의심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자기가 구원받을 때에 어떤 무엇을 깨달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만일 깨달은 것이 없이 그냥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분명히 죄사함,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어떤 성경 말씀을 깨달았거나, 또 설교를 듣던 중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런 깨달은 사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로 돌아가야 됩니다.
의심이 날 때는 자기가 깨달은 그 사실 즉,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감정을 추적하거나 혹은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이렇게 자꾸 생각을 하면 그런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구원받았을 때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깨달은 사실, 그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 말씀을 잊어버리면 계속적으로 의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만일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했으면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 아닐 수가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2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 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1-4)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왔을 때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현재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신앙생활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혀 모르고 이스라엘의 유대 종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세 가지가 있는데 십계명도 율법이고 또 제사제도 즉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것도 율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이고 그 다음 민법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어떤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다스리고 또 어떤 일을 했으면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총괄하는 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있어 행정부는 법을 가지고 다스리고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다음 사법부는 법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원칙을 주신 것이고 또 제사법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민법은 백성을 다스릴 때에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런 문제를 다루는데 이 세 가지 법을 합쳐서 율법이라 말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율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과 율법 지키는 생활은 정반대되는 생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런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기성교회에서는 율법과 복음을 섞어서 전하고, 따라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어려운 상태에 있고 신앙생활도 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다고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이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히브리서의 1장과 2장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잘 설명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은 천사보다 나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나은 예수님이 3장 4장에 나와 있습니다. 5장부터는 구약의 제사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사장보다 나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2장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이 히브리서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특히 히브리서 9장을 읽어보면 구원을 받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0장의 내용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이든 또 다른 서신이든간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들이 읽음으로써 역시 영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과 통하는 기도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는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기도를 많이 함으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또 믿음은 찬송을 많이 부른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식이 잘못되어 현재 교회에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기 위해 철야기도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도록 강조를 많이 해서 사람들이 기도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입니 다. 기도를 많이 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같이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수양회를 마치면 한 차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교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안식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거듭거듭 얘기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현재 기독교는 기도라고 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는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강조해서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꼭 그런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철야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금식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없는 게 아니냐고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기도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전도서 5장 2절을 찾아보세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사람들이 기도할 때 앉자마자 머리를 숙입니다. 머리 숙이자마자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이 나는 대로 막 지껄여 댑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너무 쉽고 가볍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여기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육신을 가지고 땅에 사는 인간이 자기 멋대로 육신의 생각대로 지껄여댄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주시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많은 말을 하면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도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성경 마태복음 6장 5절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자, 여러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웅변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듣는데, 누가 자기를 보고 '야, 기도 참 잘한다'하는 소리를 듣기 위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웅변적으로 하는 기도, 그런 기도는 하나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 6절을 보세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요즘처럼 아파트 생활을 하고 골방이 없는 사람들은 그럼 기도 못하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를 사람이 보는 데에서, 보이게 하지 말고 혼자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골방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볼 때에 눈을 감고 입을 열어서 중얼중얼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주님과 통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진짜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 7절 보세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형식적인 기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종교가 안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기도가 슬그머니 기독교로 들어와 버렸고 따라서 기독교에서도 이방 종교처럼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가 잘못된 겁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뭡니까? 대상자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고 제사드리고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뒷마당에 가서 찬물 한그릇 떠놓고 기도 하고 그렇잖습니까? 상대방이 인격적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다만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푸념식으로 나타내는 것 뿐이지 상대자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가령 절에 가서 불상 앞에 목탁을 치고 염불하는 기도가 있는데 그 불상은 인격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내가 기도를 해도 듣지도 않고 나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못됩니다. 그런 신에게 빌고 하는 습관이 슬그머니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서 기독교인들도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미신이 되어버렸고 기도가 종교가 되어버렸고, 종교적인 기도로 되어버렸고 하나님 앞에서는 참기도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밤새도록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알고 또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알고 또 다른 사람 잠자는데 자지 않고 새벽마다 일어나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 들으시는 줄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또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로 압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금식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병이 있어서 밥을 못 먹을 정도가 되어 금식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금식령을 내려가지고 모든 사람이 같이 한날 한시에 우리가 같이 금식합시다 하고 금식하면 그것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는 겁니다. 단체적인 금식은 틀린 겁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 보세요. 때가 이르면 귀신의 가르침을 쫓고 양심이 화인맞아서 외식한다고 했습니다. 외식은 형식을 꾸민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인데 예를 들면 신부나 수녀와 같이 혼인을 금합니다. 그건 외식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을 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혼을 해서 가정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혼인을 안했습니다. 자기가 원했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혼인을 안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혼인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제도화하면 안됩니다. 제도를 만들면 안됩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입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하다든지 속되게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귀신의 속삭임입니다. 간음을 범한다든지 정상적인 성생활이 아닌 그런 것이 나쁜 것이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당연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너무 일이 많았기 때문에 결혼 생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식물을 폐하라는 말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저도 과거에 더러 금식 해봤어요. 그러나 일률적으로 금식 날짜를 정해서 금식하는 것은 안됩니다. 또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4절과 5절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게바가 누구입니까?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여기 바울이 뭐라고 말하느냐면 보세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권이 없겠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도과 베드로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교황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직계 후손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고 현재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62대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제1대 교황 베드로는 부인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성경하고는 안맞잖아요. 혼인을 금하는 것은 성경하고는 안맞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
마태복음 6장 7절로 돌아갑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중언 부언하는 것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 했던 말 내일 자꾸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오랫동안 기도하려니까 자꾸 했던 말 또 하고 그러는 겁니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이나 신 앞에 말을 많이 하고 오래오래 하면 듣는 줄 압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 다음 8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하고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속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긴 설명이 필요없이 간단하게 제목만 제출하면 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무슨 용건이 하나 있으면 '엄마' 하고 한마디만 하면 돼요. 어린아이는 엄마하고 한마디만 해도 엄마가 왜 그래? 쉬 마려? 뭐? 하고 조사를 해서 다 해줍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우리 주님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애입니다. 실제 어린애보다도 더 유치한 어린애입니다. 자, 이제 서너살 먹은 어린애가 엄마한테 와서 뭘 요구한다고 합시다. "엄마, 나 먹을 걸 주십시오. 내가 이제 배가 고파서 죽겠는데⋯" 하고 설명을 많이 늘어놓으면 엄마는 이 애가 좀 어떻게 됐구나 하고 돌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엄마, 나 배고파요." 한마디면 되지 않습니까? 진정한 기도는 그런 겁니다.
첫째,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예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대화 속에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기도를 마치 하나님 앞에 연설하는 것처럼 하는데 하나님이 왜 연설을 들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를 가지고 전쟁을 해요. 기도로 남을 때려 치기도 하고 기도로 설교도 합니다. 그것은 전부 기도가 아닙니다. 잘못된 거예요. 잘 못된 겁니다.
왜 새벽마다 기도해야 됩니까? 저는 가끔 새벽에 기도해요. 새벽이 되면 잠이 잘 안옵니다. 저는 초저녁 잠이 많아요. 그래서 10시 쯤 자면 한 세시나 네 시쯤에 깨기도 하고 다섯시에 깨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경 읽고 성경 읽다가 기도할 일이 있으면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기도회를 하면 안됩니다. 다같이 모여가지고 기도회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이게 한국 교회의 큰 병폐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새벽에 일찍 깨서 혼자 성경 읽고 또 성경 읽다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하나님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간단하게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모여서 같이 하는 기도회라는 것은 소용없어요. 이게 참 큰 문제입니다.
영어에 '콰이엇트 타임' (quiet time)이라는 말이 있어요. '콰이엇트 타임' 이라는 것은 조용한 시간, 여러 사람 말고 나 혼자 주님과 대화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인데 조용한 시간은 새벽이 제일 좋습니다. 혹시 그런 시간을 못가진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시간을 정해놓고 조용한 시간을 혼자 가지는 게 좋습니다.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 혼자 조용히 성경 읽고 조용히 주님과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 없이 매일 새벽기도회에만 다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온 세계 어디를 다녀도 새벽기도회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미국에는 없습니다. 유럽에도 없어요. 한국에만 있어요. 새벽기도회라는 걸 만들어 놓고 교인이 100명 중에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이 한 23명 되면 그 23명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예수 잘 못믿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데 그 아들 딸이 희희낙락하며 재미있게 의논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걸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매일 징징 울고 걱정이 있으면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새벽마다 울고 새벽마다 얼굴 찡그려서 아이구 하나님 아버지 하면 하나님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요. 내가 기분좋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감사하면서 살면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틀림없이 여러분들 부모님도 그렇고 여러분 자신도 자기 자식들이 평화롭고 기분좋고 재미있게 살면 마음이 흐뭇하고 참 좋지요. 여러분 자식이 새벽마다 잠자는데 머리맡에 쭈그리고 와서 울면 굉장히 심란하겠지요. 그런데 기독교가 다른 종교처럼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기독교는 본래 그런 종교가 아니었어요. 매일 얼굴에다 내천(川) 자 그려가지고 아이구, 주여 아이구, 주여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기도의 짐을 지지 마세요. 기도를 무거운 짐으로 지지 마십시오. 기도해야 될 텐데 하는 짐을 지면 안돼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히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과 나 사이,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이기 때문에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돼요. 주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 게 뭐냐 하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먼저 하지 말고 성경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먼저 읽고 마음에 감동이 오고 내 마음에 감동이 오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때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 읽는 것이고 성경을 읽고 내 마음에 감동이 되고 또 내가 주님께 요구할 것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요구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이 기도입니다. 그냥 기도한다고 하고 성경 읽는 것은 팽개쳐 놓고 눈만 딱 감으면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하옵나이다 하고 중얼중얼 하다가 아멘 하는 것은 단순히 일방통행이에요. 그건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 교회에서는 기도를 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읽을 때에 기도가 안되면 성경 읽는 게 되겠어요? 성경 읽으면서 주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이 기도가 되고 그리고 나서 내가 또 할 말을 주님께 하는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무거운 짐으로 지지 말고 쉽게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너무 힘들게, 기도해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 될 텐데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생활에서 얻는 구원
히브리서 2장 1절로 돌아갑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들은 것을 삼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들은 것 중에 여러분 마음 속에 깨달은 것이 있잖아요. 삼간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게 얼마나 귀한 건지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찾아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육신은 흙으로 만든 겁니다. 질그릇이란 말은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질그릇 하면 금그릇이라든지 은그릇이라든지 그런 것 하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값이 없고 천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천한 것입니다. 이것은 죽으면 흙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 보배가 뭡니까? 그 보배는 하나님의 말씀, 그 보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거든요.
그 보배가 주님의 생명 곧 성령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굉장히 귀한 보배를 이 질그릇 속에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비록 질그릇이지만 보배 그릇입니다. 이 천한 육신 속에 있는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질그릇이지만 보배 그릇입니다. 보배 그릇. 얼마나 귀한 보배입니까? 그러니까 간수를 잘 해야 됩니다. 간수를 못하면 도둑이 와서 훔쳐 갑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한다. 우리가 굉장히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들은 것을 고이 간수를 안하고 그냥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풍조에 따라 잘못 살다 보면 그것을 그냥 세월 속에 흘러 떠내려 보내고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 없어진다 그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 자체는 한 번 받았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을 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자, 여기 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준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 구원은 없어진다거나 뺏긴다거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가 또 마귀의 아들이 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구원은 한 번 받으면 안심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 말씀이 내 생활에 나타나야 됩니다.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면 안돼요.
빌립보서 2장 12절 찾아보세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도 전에 한 번 읽었는데,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이루는게 뭡니까?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을 또 어떻게 이루느냐고 여러분은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은 내 영혼 속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 구원 못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받았는데 육신은 구원을 못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아직 구원을 못받았습니다. 그렇잖아요?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죄짓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아까 어떤 형제가 남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안간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구원이 생활 속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영혼 구원이 내 생활에서도 나타나야 됩니다. 그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에게 유혹이 옵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이라든지 또다른 유혹이 올 때에도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한 어떤 성경 말씀이 생각나면서 그런 유혹을 물리쳤다고 합시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럼 나의 구원 받은 영혼이 내 생활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침례같은 건 안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안받는 사람은 침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도 여러가지 성경 말씀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직은 그 말씀들을 따르기가 힘듭니다. 아직 여러분들은 어린 아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다 컸는데 왜 어린 아이이냐. 영혼의 상태가, 믿음의 상태가 아직 어린 아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복종을 잘 못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똥도 싸고 오줌도 싸고 고집도 부리고 앙탈도 부리고 어린 아이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렇듯 어린 아이는 아직 복종이 잘 안됩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나중에 차츰차츰 복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람
어린 아이는 젖먹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젖먹는 과정입니다. 젖을 먹는다는 것은 비단 성경공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마음에 아쉽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여러분들이 단순히 이 성경공부에만 참여하지 말고, 나이 많은 분들은 갈렙회에도 가입하고 젊은 분들은 청년회에도 가입하고 대학생회에도 가입해서 같이 활동하는 데 실제로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음에는 마음에 안들고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고 저런 건 왜 저럴까, 마음에 안맞는 것이 많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차츰차츰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젖을 먹으면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성경공부는 실제로 생활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말씀이 조금씩 생활에 나타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인데 성경공부만 하고 배운 것이 생활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자라서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게 되면 과거에 미워하던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게 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급한 것을 참게 되고, 남을 비판하고 남의 흉을 많이 보던 사람이 차츰 입을 다물게 되면서 그런 걸 하지 않게 되고 차츰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그 구원이 실제 생활에서 또 내 마음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상고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듣고 읽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내게 어떤 말씀을 하셨으면 그 말씀을 명심 해야 합니다. 명심해서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고 있다가 때가 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에 우리 마음에 더 큰 축복이 오고 더 큰 즐거움이 옵니다.
히브리서 2장 2절로 돌아갑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이것은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찾으세요.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히브리서 2장 2절,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라는 말씀은 율법을 말합니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범했을 때에 많은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예수님)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어길 때에 벌을 주셨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우리에게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율법과 비교도 안됩니다. 천사를 통해서 주신 율법도 범하면 벌을 받았는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율법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 구원 속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이 구원 속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구원을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받을 때 뿐이고 조금 지나면 구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구원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굉장히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나중에 시일이 지나면 구원받은 것이 그만 마음 속에서 흐릿해지고 감사한 마음도 없고 구원은 받았다 하는 기억만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구원이 신앙생활 속에서 운동하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면 참 아쉽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저와 같을 순 없지만 제가 구원받았을 때에는 미쳤다고 할 만큼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불쌍하고, 돈 많고 부자로 지내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지옥 간다 싶은 생각에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세상 아무 것도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토요일날 구원을 받았는데 주일날 설교하고 그 다음 월요일날 성경 한 권만 가지고 역전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5. 16 혁명 때라 계엄령이 내렸을 때입니다. 사람들이 역에 모여 와글와글 한데 성경을 치켜들고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십시오.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구원을 받고 가슴이 너무나 벅차 감당을 못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을 못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겁니다. 그 다음엔 제가 살고 있는 집 옆 동리를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전도지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뿌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핸드 마이크를 빌려서 부흥회를 열고 있는 공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관상 보는 사람이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앞에 놓고 사람들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니까 화가 나서 그 옆에 앉아 예수 믿으라고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마이크로 막 외쳐댔어요.
그 이후 장로교에 시무하는 동안 여러 수백 명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일마다 눈물을 흘려가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기 싫어했습니다. 교우들이 저를 쫓아내면 보따리 짊어지고 따라다니면서라도 이걸 외칠 것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구원이 너무 귀하고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이것을 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람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잘 간수해야 됩니다. 구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저절로 간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받았으면 없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때부터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 또 육신으로 돌아가서 세상으로 사는 거예요.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구원을 간수하지 않고 산다는 말입니다. 처음엔 구원이 좋았는데 구원보다 더 큰게 생깁니다. 돈벌이하는 게 더 크고 세상 명예, 지위, 행복, 쾌락이 더 크게 보이고 그걸 얻으려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는 동안에 구원은 흘러 떠내려 가버립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주일날 모이는 숫자의 10배는 더 됩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고 살았는데 다 세상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세상 것이 더 좋아서 세상으로 다시 가버립니다. 세상으로 간다는 말은 참신앙 생활이 아닌 신앙생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고이 간직하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런 생활이 아니고 형식적인 생활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세상의 돈벌이나 세상 일에 더 몰두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이 자기의 생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에서 2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자라지 않습니다. 자란다는 말은 이미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체 이므로 자랍니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자라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자라야 됩니다. 자라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자라지 못하고 고아가 되어버리는 사람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됩니다.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굉장히 큰 겁니다. 이 큰 것을 고이 간수하고 우리 생활에서 이루어지도록 자라가야 되는 겁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아가 됩니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어야 합니다. 젖은 엄마의 젖가슴에서 나옵니다. 여자의 가슴에서는 언제 젖이 나와요? 아기를 낳아야 젖이 나옵니다. 아기를 낳으면 젖이 나와요. 아기를 안낳으면 젖이 안나와요.
자, 그러면 여러 분들이 젖을 먹어야 하는데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어머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곳으로 어머니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낳은 것이 아니고 교회가 복음을 전해서 여러분을 낳은 겁니다. 그러면 젖은 어디서 납니까? 구원이 일어나는 역사가 어린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어머니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는 많은데 구원받는 역사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 데에서는 젖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젖은 반드시 아기를 낳은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기를 안낳은 엄마의 가슴에서는 안나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교회들은 많지만 거기에 구원받는 역사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그걸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구원받는 역사가 있는 곳에서 젖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그곳에서 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 습니다. 여러분은 자라야 됩니다. 자라야 된다는 말은 생활이 구원을 받도록 자라야 된다는 뜻입니다. 생활이 구원을 받도록 자라지 않으면 롯의 처가 되고 나중에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가는 심판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심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았더라도 예수님 오실때 슬피 울고 이를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롯의 처처럼 되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세상에 속해서 자라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면 나중에 예수님 오실 때에 원통하게 되는 겁니다. 귀한 시간을 다 허비한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면 다 허비가 되어버립니다. 세월이 아무 의미없이 그만 허비가 되어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었을 때는 집이 불살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 원통해서 슬피 울고 이를 갈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하루하루 사는 삶이 귀한 겁니다. 하루를 신앙적으로 잘 살면 굉장히 긴 세월 동안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아무쪼록 이 큰 구원을 절대로 등한히 여기지 마십시오. 이걸 깊이 간수해서 생활에서 살려갈 수 있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 흉악한 죄악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고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질그릇 속에 이렇게 귀한 보배를 저희들이 받았습니다. 이것이 세월 속에서 흘러 떠 내려가지 않도록 저희들 마음 속에 깊이 간수를 해서 자라갈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생활에서 이 구원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머리 숙인 갓 구원받은 심령들이 고아처럼 되어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 추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