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회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마태복음 6장 5절부터 읽겠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회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회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5-15)


오늘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보통 주기도문이라고 말하지요.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보면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을 겁니다. 보통 일반 교회에서는 집회를 하고 난 다음에 목사가 있으면 축복기도를 하고 없으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외우고 폐회하는 일반적인 습관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 와서 보면 축복기도도 하지 않고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 조금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나타낼 이름은 오직 하나님

주기도문은 외우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성경 다른 곳에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했다는 얘기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가 그런 형식적인 것을 교회에서 행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집회를 마칠 때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데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마치 염불하듯 외우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기도의 원리를 간추려서 가장 중심되는 내용을 쓴 것이고, 기도라고 하지만 기도라기보다는 우리 신앙생활의 내용,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려면 이러 이러한 마음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신앙생활의 내용을 하나님께 아뢰는 그런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사사로운, 예를 들면 자녀를 위한다든지, 건강을 위한다든지, 사업을 위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없고 오히려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기본 골격을 담고 있습니다. 외워서 이대로 기도를 하라는 뜻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용하면 종교생활의 형태를 갖추는 그런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있습니다. 전도서에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 우리의 입으로나 우리의 행위로나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가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그런 게 많아요. 교회 안에서 직분을 얻는다, 장로가 된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이름을 얻고 영광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장로교에 오래 있어보았기 때문에 압니다만 장로 취임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또 교단의 총회장이나 어떤 직분을 맡게 되면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지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집회할 때에 뒤에 크고 거창한 의자를 놓고 거기에 특별한 사람을 앉힌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사람이 영광을 받고 사람이 높아지게 될까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되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사람이 대신 영광을 받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구원받기 전에 교회의 목사로 있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직접 자기를 대접하라든지 자기를 공경하라고 하지 못하기 때문에 품앗이를 합니다. A라는 목사는 B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가서 목사를 섬기라, 목사를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교를 해주고 또 B목사는 A목사의 교회에 가서 목사 를 섬기는 것이 축복받는 길이라고 열심으로 말해 줍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국내에만도 작은 교회까지 다 합치면 약 80곳에 교회가 있고 미주 지역과 독일, 영국, 브라질, 캐나다, 일본 같은 곳에 많은 교회가 산재해 있지만 목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받을 섬김을 목사가 다 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텐데, 목사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식으로 인식을 하며 자꾸 그렇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게 오늘날 교회가 부패되어 가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누구든지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교황의 말은 한 마디도 틀린 것이 없고 교황은 절대권을 가지고 죄를 사해주는 속죄권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절대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전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엇비슷한 얘기가 있기는 하지만 절대 그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나타내야 됩니다. 



완전히 구별된 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 할 때 이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의 인간이나 우상이나 이 세상의 세력이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구별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왜 구별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하나님처럼 성결하고 하나님처럼 권위가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구별된 분입니다. 구약성경의 십계명에서 나를 비겨서 금이나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물질은 다 불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을 가지고 만들든지 은을 가지고 만들든지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고 어떤 형상들과 완전히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상이든지 형상하고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든지 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걸 귀중하게 여긴다든지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형체가 없으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인 지금은 성령으로 계시지, 다른 어떤 형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마리아 상을 만든다든지 하는 것도 물질이잖아요. 물질과 완전히 별개로 구별되어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고 성령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은 뭔가 자기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만들어놓고 섬기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통상적인 심리입니다. 마리아 상도 만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달 식으로 만들고 종각 위에 십자가도 세우는 등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형체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겨도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절대로 금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3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나를 비겨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라는 뜻인데 금이나 은을 가지고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 형체를 만들면 안된다고 하 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도 하나님이라고 해서 만든 것인데 그게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은 이 세상 무엇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구별된 분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을 못돌린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을 돈과 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 속에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높이거나 하나님보다 더 영광스럽게 여긴다거나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이 말씀을 우리 신앙생활에 대원칙으로 삼고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생활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귀의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10절, "나라이 임하옵시며" 나라가 임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우선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야 되고 그 다음에 교회를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장 22절부터 읽겠습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 '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2-28)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못살게 굴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어서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욕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사탄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사탄을 쫓아내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사탄은 이 세상에 사탄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데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사탄을 통해서 사탄을 쫓아낸 것이 아니고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라를 세우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귀신이 왕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왕노릇하고 마귀가 지배하는 마귀의 나라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귀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을 마귀로부터 빼앗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 여러분 속에 있는 그 영혼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귀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가 여러분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성령이 왔습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뜻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귀신을 쫓아 내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어떤 가정에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그 가정의 식구들이 하나씩 하나씩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면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거예요. 개인이 구원을 받으면 개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계시다가 인간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뜻은 이 세상이 온통 마귀의 세상이고 나라인데 이 마귀의 나라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비록 마귀의 세상인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말씀은 마귀의 세상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달라는 그런 뜻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뜻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전부 마귀의 나라입니다. 요즘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마귀의 짓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잡았거든요. 그런 큰 사건도 역시, 인간들의 실수도 있긴 하지만, 전부가 사탄의 장난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이마에 666의 표를 주는 것, 그것도 마귀의 일입니다. 이 세상이 차츰차츰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공부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악해져 가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고 있어요. 가정마다 비디오가 있고 부모들이 음란비디오를 보니까 그걸 아이들이 훔쳐봅니다. 또 각종 록그룹이 부르는 가슴을 찌르는 최신 유행가를 귀에 꼽고 듣습니다. 그게 마귀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을 전부 그런 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혼을 완전히 사로잡아서 악의 세계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젊은 아이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도 전부 그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음악을 계속 듣고 있으면 생각이 흐트러지고 혼돈이 됩니다. 그냥 조용하게 명상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가슴을 쿡 찌르는 감정을 발산해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그냥은 못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할 때에도 그런 노래를 귀에 꼽고 들어야 공부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이건 엄청난 세속적인 폭풍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을 그런 엄청난 폭풍이 불도록 만들어서 젊은 사람들을 전부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공부해라, 공부해라 아무리 얘기해도 그걸 바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큰일입니다. 

방송국에서는 청소년들의 문제나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면서도 반면 최신 유행이나 오락을 한층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광고 선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선전, 저런 선전, 환경을 오염시키는 그런 선전물이 굉장히 많으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좋은 말을 합니다. 완전히 혼돈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차츰차츰 농도가 짙은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첫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또 식구들이 구원을 받으면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식구들의 가정에도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은 잘 안듣고 세속적인 소리에는 귀를 잘 기울입니다. 세상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내 가정에도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주변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는 세상, 성령이 인도하는 세상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질적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천년 왕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겁니다.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 마음에, 우리 생활 주변에, 우리 가정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혼자만 구원받았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정에 확장이 안되었습니다. 가정 식구들이 구원을 다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정에 임하는데 이것은 실질적이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의식 속에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악이라는 것이 반드시 귀신처럼 흉칙하고 도깨비처럼 그렇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얌전한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달콤한 맛을 주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완전히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소원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서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마귀가 아담을 타락시키고 이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만들 것을 이미 다 아셨습니다. 그걸 아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에 대처하셔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뜻이 계셨어요. 예수님을 보내실 것도, 성령을 보내실 것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시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그 다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또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 복음이 전파되어 세상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일어나고 나중에 구원받은 숫자가 차면 교회가 어떻게 되며 주님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성립이 되어 있어요. 

집을 지으려면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가 되어야 합니다. 집의 설계는 바로 집을 지으려는 의지, 뜻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하룻밤 자고 나면 수십 개씩 생기는 그런 교회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서울에 모르긴 하지만 약 5,0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무슨 교회가 그렇게 많은지. 분쟁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 교회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등지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로마이고 고린도는 그리스의 남쪽에 붙어 있는 반도에 있습니다. 에베소는 에게해 건너 터키의 셀죽이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갈라디아는 현재 터키의 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터키는 수도가 앙카라인데 그곳이 옛날 갈라디아 교회가 있던 곳입니다. 빌립보는 현재 그리스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마케도냐 지역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리스와는 다른 별개의 나라였습니다. 이 마케도냐 지역에 빌립보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 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교회, 시리아에 있었던 안디옥 교회처럼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지역마다 교회가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한 5,000개가 넘는 교회가 있는데 어느 것이 서울 교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그런 게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이 전해져 몇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처음에는 가정에서 모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을 보세요.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교회가 더 큽니까, 개인의 집이 더 큽니까? 보통 교회가 크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집 안에 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천막장사하는 사람들인데 그 집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집에 있는 교회' 라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몇 사람이 구원받으면 그 구원받은 사람의 집에서 모였어요. 집에서 모여도 교회인 것입니다. 

빌레몬서 1장 2절을 보세요.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빌레몬의 집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부자여서 집이 좀 넓으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 , 모이는 자체가 교제이고 그것 자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건물을 교회라고 하면 그건 무지한 소리입니다. 교회는 물질이 아니고 인격체입니다. 주님의 몸인 인격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뜻은 마귀의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처럼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우선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은 우리 육체를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옛 피조물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피조물은 우리의 육신인데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새 생명을 받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새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옛날 식대로 살아가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분명히 가야 할 길이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선한 일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한 일과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상에서의 도덕적인 선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도덕적인 선은 가인의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은 일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비해 놓은 일이 뭐냐 하면 진정한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겁니다. 진정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이니까. 



믿음의 교제에 선이 있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진정한 교회에 대해서 참으로 알고 나면 신앙생활이 굉장히 쉬워집니다.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니까 거기에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1장 6절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여러분은 평소에 무슨 교제를 합니까? 믿음의 교제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가지면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 선이 뭐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우리를 성장시켜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도록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귀가 득실거리는 세상, 마귀가 완전히 왕노릇하고 마귀의 힘이 굉장히 강한 이런 세상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시편 133편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1-3)


교회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집에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말은 앞의 빌레몬서 말씀대로 믿음의 교제를 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과 교제를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했을 때에 2,800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은 유무상통했습니다. 어떤 물건이 있으면 네 것 내 것 없이 다 같이 썼습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같이 나누어 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같이 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한 집에 다 같이 사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못삽니다. 그것은 의미상으로 교회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생활 때문에 다른 교회와는 다른 신앙상태로써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는데 이것이 교회입니다. "머리에 있는"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 은 곧 성령입니다.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아론은 제사장입니다. "그 옷깃까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헐몬 산은 이스라엘 땅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헐몬 산은 3,000미터쯤 되는데 그 지역은 비가 많이 오고 눈이 많이 내립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헐몬산의 물이 전 이스라엘 지역을 적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헐몬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이 어디에 내립니까?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거기가 복이 내리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미신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축복해 주십시오, 복을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축복의 원리는 그렇지 않은데 떼를 써서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고 해서 축복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들이 심방을 가서 주로 남편과 아내를 양쪽에 앉혀놓고 또 손을 그들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이여 이 가정에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데 그런다고 복이 내리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복이 내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신앙생활이 미신화되고 기복신앙에 빠집니다. 기복신앙이라하면 복을 받기 위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거기에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생의 복입니다. 영생의 복이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왜? 교회가 구원을 받는 복음을 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있어서 아무리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거듭났다, 죄사함 받았다, 구원받았다하는 역사가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교회인 것입니다. 

요즘 저는 미국에서 전화를 많이 받습니다. 제가 삼각지에서 설교한 것을 영어로 완전히 번역하고 더빙한 비디오 테이프를 듣고 텍사스에 있는 어느 미국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전화를 며칠 전에 받았습니다. 또 미국의 어떤 지역에 남자분은 공학박사이고 여자분은 의사인 한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의 딸이 한국에 와서 구원을 받았고 근간에는 그 부모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구원이 계속 퍼져가야 합니다. 아무리 설교해도 구원받는 일이 생겨나지 않으면 교회는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구원받는 역사가 계속 일어나는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덮어놓고 주기도문 외운다고 해서 되는가요? 아무리 잘 외워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뭘 가져 왔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읽어봅시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6:13-15)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따로 자기 뜻을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뜻을 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15절에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합니까?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는데 그걸 알리려고 성령이 오신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으로 인도를 받아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떼쓰고 기도하고 오, 주여 해도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났고 둘째, 성령의 기름부음으로써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성령이 인도해 가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성령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뜻.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성령이 자기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 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은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뜻, 예수님의 뜻을 알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안계시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음식보다 귀한 생명의 양식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시을 주옵시고" 여러분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 없지요. 매일같이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일용할 양시을 주옵시고라는 이 기도가 만일 우리의 육신의 양식을 말한다면 지금은 이 기도가 필요없게 됩니다. 지금은 돈 몇 푼만 있으면 슈퍼에 가서 먹을 것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 쌀을 두고 삽니다. 물론 아주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매일 노동해서 쌀을 사다먹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겠고 이런 말씀들이 아프리카나 인도, 또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는 육신적인 양식으로 이해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고 영혼의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니" (욥기 23:10-12)


저는 이 성경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금옥같이 귀한 것입니다. 욥은 아주 고통스러운 시험을 받은 사람이지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했습니다. 마귀가 욥을 하나님께 고발해서 갑자기 10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다 죽어버렸고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다 잃었고 문둥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 욥처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욥은 그런 시련을 겪었는데 말하기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련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이후 시험이 온다든지 어려움이 온다든지 핍박이 올 때 무서워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반드시 시련이 오고 핍박이 옵니다. 

저는 구원받은 다음에 장로교 목사였는데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침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거든요. 예수님이 받은 침례 나도 받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방울 톡톡 튀기는 약시 세례는 침례와 근본적으로 뜻이 다릅니다. 침례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어 장례지냈다는 뜻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뜻이거든요. 굉장히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장로교 목사는 그걸 하면 안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침례를 받고 교단에서 짤렸습니다. 육신이 잘 먹고 살 것을 생각했다면 저는 그런 걸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도 부흥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부흥사적인 소질은 없었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 많은 분들이 와서 설교를 요청하여 많은 집회에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침례를 받고 재판을 받았는데 이 소문이 나자 설교 약속이 모두 끊겨져 버리고 장로교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굉장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어떤 때는 밥을 굶었습니다. 6남매가 전부 다 학교를 다녔는데 어떤 때는 쌀이 없어서 굶겨서 학교를 보냈어요. 그것이 단련이에요. 그 무시무시한 단련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그런 단련을 안받고 제 육신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장로교 안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부유하게 살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살면 뭘 해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밖에 못살잖아요. 그 한 번 사는 삶이 정말 진리를 따라서, 주님을 따라서 바로 살 수 있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나중에 주님 앞에 서면 전부 그것들이 드러날 텐데요. 

욥은 단련받은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만 금은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강하고 순수해집니다. 굉장히 강한 불에 금을 단련하면 순도가 강해지고 불순물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단련받으면 주님 앞에 굉장히 귀한 삶이 됩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과연 그랬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환난을 꾹 참고 견디며 이겼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때마다 먹는 그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고 했는데 이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주기도문 속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은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아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매일 성경을 한 장, 아니면 몇 절이라도 읽는 것이 좋습니다. 편리한 시간, 조용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좋습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겠습니다. 

구원받은 후 어렵게 살 때입니다. 그때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아침까지 읽다 보면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이 옵니다. 그리고 배달하는 아이가 던진 신문이 내가 성경 읽는 옆에 가서 톡 떨어져요. 그 시간부터는 성경을 읽어도 성경말씀이 한 마디도 안들어와요. 그 신문을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마음이 신문에 가 있으니까 성경을 읽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에 싸움이 생깁니다. '신문이 떨어졌을 때에 신문 읽고 싶은 생각에 성경을 읽어도 건성으로 읽고 한 마디도 마음에 안들어 온다, 이거 내가 이래서 신앙생활을 옳게 하겠느냐' 하는 싸움이 있었어요. 며칠간 싸웠습니다. 싸우고 또 싸우고 어떻게 할까 하다가 하루는 결심을 했어요. 신문 배달하는 학생에게 내일부터는 신문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점심 먹을 때 잠깐 말고는 하루 종일 마음이 성경에 막 끌려들어갔습니다. 새벽부터 밤 열 한시까지 잠시도 눈을 성경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결단을 내릴 때에는 분명히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게 있습니다. 그날 나는 성경에서 어떤 기초를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말한 대로 일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결심을 하시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이라도 성경 몇 절을 읽고 자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집회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 얘기 듣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내가 혼자서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기도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는 출애굽기 16장에 만나가 내리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과도 뜻이 통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 음 6:9-15)


저는 구원을 받은 후에 침례를 받고 장로교에서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옛날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은 것과 같은 그런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았는데 그 종교재판 석상에서 제가 피고로서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나서 어떤 사람이 저에게 질문하기를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주기도문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양심의 가책이 없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때 구원받은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확실히 잘 몰랐습니다. 그때도 물론 목사였지만 신학교를 졸업하고 머리에 안수만 받아 목사였지 성경의 참뜻을 잘 모를 때였습니다. 구원을 갓 받고 났을 때라 이런 말씀의 내용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는데 그러면 내게 죄 지은 사람을 사해 주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는가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은 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그 기도를 했을 때에 내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준다라고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할 수 있으면 하십시오. 얼마든지 하라고 하니까 그만 더 질문하지 않고 조용해져버렸습니다. 나를 재판하기 위해서 거기에 모인 사람이 4,500명 정도 되었는데 그런 질문을 한 생각이 나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죄사함을 받는 것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받는 죄사함, 영혼이 구원받는 죄사함이 있고 그 다음에는 영혼이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없이 죄사함 받는 것이 있습니다. 죄사함이 두 가지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은 이미 영혼이 구원받는 죄사함은 영원히 다 받았습니다. 요즘 그걸 상당히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영혼이 구원받는 죄사함은 단번에 영원히 받아버리는 겁니다. 다시 받거나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완전하게 받는 것이고 다시 물릴 수도 없는 그런 죄사함입니다.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깨끗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옥갈 죄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확실히 받았으면 지옥갈 죄는 절대로 없습니다. 완전히 깨끗하게 용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가 있는데 그 죄 사함을 또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왜 사함받아야 할까요? 만일 그 죄를 사함받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해서 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에 대한 심판은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이 아니고 지옥과는 관계가 없지만 나중에 주님께서 오셨을 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지은 죄를 사함받지 못했으면 그 죄의 심판을 받습니다. 전에 얘기했으니까 다 아시겠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구원받은 이후에 선을 행했으면 상을 받고 악을 행했으면 거기에 대한 심판을 또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게 드러나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그 심판에 대한 것은 성경에 이런 경우 저런 경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가령 롯의 처를 생각해 보면 롯의 처가 소금기둥이 된 것은 육신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4장을 보면 구원받았지만 나중에 슬피 울고 이를 가는 사람도 생깁니다. 지옥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가 구원받은 이후에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든지 선하게 살 수 있고 칭찬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기회를 다 놓쳐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데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어떤 심판을 받을 때에 슬피 울고 이를 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깰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안받았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가 잠을 잔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믿음의 잠을 잔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잠을 자는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깨어 있지 못하다면 깨어 있지 못한 데 따르는 어떤 심판이 또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죄사함을 받는 문제,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사함을 받는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이 말씀은 예를 들어, 여기 장 목사님이 있는데 장 목사님과 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로 다투는 문제가 생겼는데 마음에 앙심을 품는다든지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성령께서 역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 가운데서 두루 행하는 역사를 합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안좋고 마음이 서로 막혀 있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서로의 마음으로 전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막혀 있으니까 성령이 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서로가 다툴 수도 있습니다. 다투는 것보다는 다퉈 놓고 그걸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악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실수를 한다든지 혹 이런 죄를 짓고 혹 저런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전혀 안한다고 하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지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1서 1:8, 10)


여기에 8절에는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되어있고 10절에는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죄는 구원 안받은 사람이 짓는 죄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라고 하는 말은 구원받은 우리가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죄가 없다고 하든지 또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아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를 안짓는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실수하고 죄 짓는 것,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죄 짓는 문제보다는 그 죄를 짓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큰 악이 됩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만 큰 문제로 알고 그 다음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은 다음 그 죄를 처리하는 문제, 그 죄를 해결하는 문제가 훨씬 더 큰 문제인데 죄를 짓는 것만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지은 다음에는 그것을 무시해 버려요. 그렇게 되면 마음에 힘이 빠져버립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리고 그 죄를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솟아나는 생명력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죄를 처리를 잘 하면 생명력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큰 활기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이 왜 좋으냐 하면 죄를 지었어도 그 죄를 해결했을 때에는 훨씬 더 활기차게,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가,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이 굉장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차츰차츰 무서워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무서워지면 멀어지게 됩니다. 

멀어지기 전에 그 문제를 처리하면, 이 말씀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이 다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죄를 짓기 전보다 오히려 더 활기 있게 주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령 서로 원망한다든지 혹은 다른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한편에서 형제, 내가 이렇게 했는데 잘못했다고 말해도 다른 편이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안하신다는 그 말씀은 결국은 악을 행한 인간, 내가 용서해 주지 않는 그 마음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큰 용서를 받았는데 형제의 작은 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큰 악을 범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령의 일을 방해해놓고 성령이 행하시는 일을 가로막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영원한 죄사함을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죄사함받는 것과는 상관 없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악에 대한 심판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두루 행하고 있습니다. 두루 행하시는데 악이 있으면 내게 와서는 막히고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서로서로 용서하는 것, 아무리 잘못을 범했다고 해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교제는 헛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짓는 것보다는 그 지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는 실수를 해서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은 죄를 어떻게 해결하는 지가 하나님 앞에서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요한1서 1장 9절을 다시 봅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사하시며' 라는 말씀은 지옥갈 죄를 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지은 죄가 사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죄를 안지었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지금은 제가 설명을 이렇게 합니다만 옛날에는 깊은 내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올바른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도 시험받으셨듯이 주로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2-18)


여기에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라고 했습니다. 시험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받기가 쉽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귀가 내 육신의 생각을 통해서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속삭입니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거기에 아주 잘 나타납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마귀가 하나님 앞에 욥을 송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마귀가 욥을 송사하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그러면 네 마음대로 욥을 한 번 쳐보라고 했고 그래서 욥의 자식도 죽고 육신도 문둥병처럼 되어 어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나중에 세 친구가 와서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공격할 때 욥은 나는 사실 죄를 지은 것이 뭔지 잘 모른다. 나는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욥은 하나님께 어떤 때는 불평하고 원망도 하곤 했습니다. 세 친구도 왜 욥이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욥이 그런 지경에까 지 이른 것은 마귀가 하나님 앞에 욥을 송사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식들을 죽인 것도 마귀의 짓이고 욥이 문둥이처럼 된 것도 마귀가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욥의 세 친구도, 욥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벌을 준다고 자꾸 공격을 했습니다. 

욥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육신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너를 버린다,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하신다 하면서 화살을 쏘는데 타켓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게 큰 시험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는 이 말을 다른 말씀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은 악으로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하나님도 선한 뜻으로 시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시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으로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시고 또 시험을 받지도 않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그 말씀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당할 때, 여러 가지로 핍박을 받고 여러 가지 고난을 받을 때에 고난받는 그 자체가 시련이 아니고 그 고난 때문에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의심한다든지 하나님을 원망한다든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이 시험이고 그런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고난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없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가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고난을 받는다든지 어려움을 당한다든지 하는 그 자체는 시험이 아닙니다. 시험이란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시고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주 배가 고프고 먹고 싶어하는 그 자체는 고난 즉 괴로움이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와서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그것이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인데 마귀가 시키는 그 말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마귀가 유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아담 부부가 시험을 받았듯이 그런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은 반드시 마귀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이 안 오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관주에 보면 이 구절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해 달라는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부터 9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전서 5:7-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마귀는 삼킬 자를 찾으려고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는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을 삼키려고 두루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악 곧 죄에 빠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물론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하거나 너무 소심해질 필요는 없습니다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그 날부터 우리를 헤치려고, 우리를 악에 빠트리려고 우리 주변을 맴도는 사탄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사탄이 공격해 들어오는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수도 있고 또 이성적인 문제로 우리를 넘어뜨리는 수도 있고 또 구원받은 형제자매들간에 서로가 어떤 문제 때문에 화를 내고 다투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제일 흔한 것이 물질 문제입니다. 우리를 악에 빠뜨리려고 하는 수단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물질입니다. 마귀는 물질로 우리를 넘어뜨리고 물질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세상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너무 집착하면 십중팔구는 신앙 생활을 못합니다. 그게 악에 빠져들어가는 겁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이성 문제입니다. 모임 안에도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았지만 이성적인 문제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 역시 악에 유혹되고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 육신에는 정욕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 때문에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세계, 일반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개별적인 접촉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은 구원받은 사람들간에 교제라는 이름 아래 형제 자매들이 만나는 기회가 상당히 많습니다. 많은 만큼 무장을 해야 하고 주의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시 이성적으로 실패하고 잘못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것이 악에 빠지는 겁니다. 

마귀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이용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첫째는 물질 문제이고 그 다음엔 이성 문제이고 그 다음은 인간관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피차간에 서로 다투거나 언쟁을 한다든지 하면 마음이 상하고 비뚤어지고 돌아서기도 하고 해서 마음이 잘 풀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이 세가지 문제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돈 문제, 이성 문제, 인간관계. 이 세 가지에 대해 우리가 무장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쉽게 악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쓸 수 있는데 돈이 우리 마음을 약화시키는 수가 많습니다. 작은 돈은 모르지만 큰 돈, 만일 아무것도 안가진 사람에게 10억이라는 돈이 갑자기 생겼다면 그 사람은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잘 겁니다. 왜냐하면 그 돈을 가지고 공중누각을 짓는 거예요. 밤새도록 그 10억이라는 돈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할 지 궁리하다보면 잠도 안옵니다. 

돈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더욱더 주님을 섬기도록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떠나도록 하겠습니까? 아마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주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돈 자체에 생명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돈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 식구들도 돈 문제로 실수하고 돈 문제로 형제자매 사이에 문제도 생기는 실례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문제로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의 마음을 주님 앞에 항상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마음으로 생활을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의 생활 문제에 적용이 되는 것이지 염불하는 식으로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로 우리 마음을 무장시키고 언제나 우리 마음에 그런 소원을 갖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입니다. 그런 소원, 그런 마음을 가지고, 물질 문제가 나타나더라도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든지 이성적인 문제가 접근하더라도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든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구원받기 전에는 주기도문을 참 많이 외웠습니다. 집회 하고 난 다음에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폐회합시다하면 모두 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가만히 보면 주님이 가르치셨지만 성경 어느 곳에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실제로 했다는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했다는 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 마음의 기도이고 우리 생활에서 언제나 그 기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 기도와 같아야 된다는 그것을 가르쳐준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차츰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교회의 교인들은 우리 교회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기도도 별로 안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해서 조금도 모순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않고 몰랐을 때에는 이 기도를 그저 뜻없이 외웠는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자매들간에 서로 용서하고 막힘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또한 주님의 기도가 우리 마음 속에 있어서 이 마음으로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모든 말씀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